♣복음말씀의 향기♣ No4657
7월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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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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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YC9Js-2gE
[작은형제회 양우석 마태오 마리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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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도들의 사도(Apostle to the Apostls), 위대한 여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초강대국의 흥망성쇠 과정을 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이집트, 로마...그 나라들의 급격한 쇠락은 아이러니하게도 최절정기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해서 약소국을 침공하면서 영토를 확장시킵니다.
확장된 식민지로부터 올라오는 공물과 약탈물로 희희낙락하며 호의호식합니다.
더 이상 땀 흘리며 농사짓고, 뼈빠지게 일하려 하지 않습니다.
분수에 넘치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보니 긴장감이 떨어지고 기강이 헤이해집니다.
장정들은 더 이상 피 튀기는 전선으로 가고 싶지 않다 보니, 이방인 용병들이 투입되며 군사력의 질이 점점 떨어집니다.
그렇게 하느님 무서운 줄 모르고 떵떵거리던 어느 날, 이를 갈며 준비해온 또 다른 강대국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고 침몰됩니다.
보십시오. 상식과 정직, 성실과 겸손의 덕이 사라지고, 자신의 근본과 정체성을 잊고 안하무인으로 살아갈 때, 그 결과는 필패요 폭망입니다.
지금 큰 소리 떵떵 치며 상식 밖의 행동으로 지구촌 전체를 힘들게 하는 몇몇 나라들의 미래 역시 반드시 그러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랜 세월 초강대국 사이에서 수시로 휘둘리며 고초를 겪으면서도 은근과 끈기로 꿋꿋이 버텨온 우리 민족, 분명 하느님의 선택과 총애를 받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인생을 묵상하면서 약자들을 총애하시고 존중하시는 하느님 섭리의 손길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 그녀의 인생은 산산조각 난 유리병이었습니다.
회복이나 치유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한두 녀석도 아니고 일곱 마귀에 들려 죽을 고생을 하고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매일 매 순간 일곱 친구는 번갈아 가며 마리아의 영혼과 육체를 들었다 놨다 하며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런 희망도 없이 인생의 끝자락을 향해가던 그녀가 기적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분 자비의 손길에 닿아 치유의 은총을 입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다른 치유받은 사람들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 그 크신 은혜를 항상 기억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였는지? 이런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은 얼마나 고마운 분이시라는 것을 평생토록, 매일 매 순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마리아 막달레나는 지니고 있던 전 재산을 털어 예수님과 사도단의 의식주 해결을 위한 의연금으로 내어놓았습니다.
빈털털이가 된 그녀는 이제 온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 일행의 구체적인 일상을 보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후 제자들은 앞다투어 줄행랑을 쳤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님 옆에 딱 붙어서서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이 마무리되는 현장을 끝까지 지켰고 시신까지 수습했습니다.
이토록 충실했던 마리아, 항상 기억하고 감사했던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도 크게 응답하셨는데,
열두 사도가 아니라 그녀를 최초의 부활 목격 증인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마리아를 일컬어 사도 중의 사도, 위대한 여사도라고 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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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위대한 스승은 제자의 일곱 마귀를 방치하지 않는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여인입니다.
그 이후에는 극기의 삶으로 이전의 타락했던 삶에 대해 속죄하며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6,9)라고 전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일곱 마귀’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만 있었던 것일까요?
복음서는 우리 모두를 위한 내용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우리 모두, 즉 교회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우리는 모두 일곱 마귀가 들린 생활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7일간의 창조가 이루어지기 7일 전의 인간의 동물적인 상태가 일곱 마귀가 들린 상태일 것입니다.
교회는 그래서 창조로 새로 태어나기 이전에 인간 안에 이 일곱 마귀가 있다고 가르쳐왔는데, 이를 ‘칠죄종’이라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일곱 가지 죄의 뿌리에서 다른 모든 죄악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① 교만, ② 탐욕, ③ 정욕, ④ 질투, ⑤ 과식 ⑥ 노여움, ⑦ 게으름”입니다.
사실 이 일곱 가지 죄의 원인은 ‘삼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구 중 마귀가 ‘교만, 질투, 노여움’이고, 육신이 ‘정욕, 과식, 게으름’이며, 세속이 ‘탐욕’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스승입니다.
만약 부모가 자녀의 일곱 마귀를 신경 쓰지 않고 무언가를 가르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진정한 스승이 아니라 자녀를 이용하는 모기가 됩니다.
그리고 모기의 최후는 끔찍할 수도 있습니다.
영국에서 이런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사별하고 설움을 느끼며 살던 어떤 영국 어머니는 외아들 ‘티모스 베이커’를 무시 받지 않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1등을 하라고 교육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하였고 영국 옥스퍼드는 물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도 합격 통지서를 보내왔습니다.
그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저녁 어머니는 아들과 그의 여자 친구 문제로 큰 싸움을 벌였습니다.
어머니는 공부를 마친 후 더 좋은 환경의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으니 당장 헤어지라고 했고,
화가 난 아들은 어머니를 야구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하였습니다.
기자회견 때 티모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어머니로부터 무조건 1등을 하도록 강요받고 살았다.
그리고 나의 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쟁취해야 한다고 배웠다.
나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의 꿈을 막는 자는 누구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의 꿈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장애물이 어머니일지라도 내 앞에서 치워버려야 했다.
그래서 내 꿈을 막는 어머니를 죽여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자녀에게 남을 이겨야 하고 당연히 1등을 해야 한다는 교만과 질투, 노여움의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던 스승의 최후입니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이 세계 최하위인 것은 어쩌면 자녀들의 일곱 마귀를 방치하며 교육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서편제’로 유명한 소리꾼 오정해는 김소희 명창의 제자입니다.
김소희 명창이 칠순이 넘어 수업료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가난한 중학생 오정해를 제자로 받아주었습니다.
오정해는 김소희 명창과 함께 기거하며 소리보다 먼저 인간이 되는 것을 배웠습니다.
추운 겨울에 얼음물에 청바지를 빨아 직접 짜서 널어야 했습니다.
대충 짜서 널었더니 스승은 그것을 다시 물속에 집어 던졌습니다.
손이 시리더라도 끝에서부터 꼭꼭 짜서 널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승은 음식이 쉬어도 버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쉰 음식을 먹으니 중학생 정해도 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혹독하게 교육한 이유는 나중에 소리를 하러 다닐 때 아무 음식을 먹더라도 탈이 나지 않는 몸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꼼꼼한 삶의 자세는 작은 것이라도 완벽하게 해내는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그 나이에 누구도 담지 못하는 ‘한’의 감정을 담게 되었습니다.
대회에 나갈 때 예쁜 한복과 부채가 필요했지만 가난해 돈이 없던 정해에게 스승은 자신의 저고리를 줄여 입혀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력으로는 당당히 1등을 하였습니다.
스승은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대학교수가 될 것을 권했고 비록 스승이 세상을 떠났지만, 오정해 씨는 대학 강단에서 자신이 배운 것을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스승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스승님은 모든 것을 저에게 주고 가셨습니다.
언제나 가슴에 묻고 ‘스승님이 웃고 계시겠지!’라는 마음으로 소리를 합니다.”
누군가의 일곱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또 누군가의 피가 필요합니다.
마치 망치와 정으로 큰 돌의 쓸모없는 부분들을 쪼아내는 노력과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스승은 제자의 원망과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피 흘림으로 일곱 마귀를 쫓아내고 그 안에 당신이 자리하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래서 참 ‘스승’으로서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십니다.
우리의 삶은 일곱 마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로 향하는 제자들의 삶입니다.
그리고 일곱 마귀, 즉 삼구를 없애는 시작은 ‘십일조’입니다.
이 봉헌은 자신의 처지를 알게 하여 겸손하게 하고 탐욕을 줄이며 검소하고 정결하게 살게 합니다.
일곱 마귀를 가두는 가장 좋은 방법이 십일조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참 스승이 되려면 자녀에게 이것부터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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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요한 20,1) 한 여인이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합니다. 구원에 대한 열망은 차가운 주검보다 더 빠르게 식어 버렸고, 이제 아무도 그 곁을 지키지 않습니다.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다른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음을 발견하고는, 누군가 그분을 모셔 갔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 곁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마리아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분께서 눈앞에 계신데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야!”(20,16) 그제야 마리아의 눈이 열립니다. 죽은 사람과 다름없이 살아가던 자신을 살아 있는 인격체로 대해 주신 오직 한 분,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고 삶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바로 그 ‘스승님’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제아무리 ‘신은 죽었다.’라고 하거나 ‘예수는 없다.’라고 외치며 주님을 무덤에 묻으려 해도, 그분께서는 틀림없이 살아 계십니다. 모두 그분을 외면하고 떠나갈지라도 오직 한 사람, 무덤으로 달려가 눈물 흘리며 그분께서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려는 그 ‘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생생한 사건이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만나는 그 ‘한 사람’이 되어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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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1-2.11-18: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1. 복음 해설과 교부들의 가르침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의 첫 증인으로, 아직 어두운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다. 그러나 빈 무덤을 보고도 부활을 즉시 깨닫지 못하고 시신 도난을 의심한다. 이는 인간의 이해가 하느님의 신비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함을 보여 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마리아가 무덤을 찾았으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진리가 외부에 드러났음에도 그녀의 마음이 아직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으로 눈이 열리자, 비로소 진리를 붙잡게 되었다.”(Serm. 229,2 의역)
또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름을 불러 주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의심을 몰아내고 믿음을 불러일으키셨다. 하느님이 먼저 부르지 않으시면, 인간은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다.”(Hom. in Ioannem, 108 의역) 주님의 인격적 부르심, “마리아야!”(16절)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은총의 순간이다. 이때 마리아는 “라뿌니!”(16절)라고 부르며 신앙 고백을 한다.
2. 교회의 가르침과 전례적 의미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에게 파견된 사도”라 부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6월, 성녀의 기념일을 축일로 격상시키며 이렇게 가르쳤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장 먼저 체험한 분으로서,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났고, 교회에 복음을 최초로 선포한 참된 사도적 인물이다.”
교리서도 부활의 증언을 강조한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로, 제자들이 실제로 만난 부활하신 분의 증언에 의해 확인된다.”(639항) “부활하신 주님께서 먼저 나타나신 이들 가운데 마리아 막달레나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640-641 요약) 즉, 막달레나는 단순히 개인적 체험자가 아니라 교회의 신앙을 전하는 최초의 선포자이다.
3.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
막달레나의 삶은 회심, 체험, 선포의 여정을 보여 준다. 죄에서 용서받고(루카 8,2)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십자가 아래 남아 있었고(요한 19,25),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였으며,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첫 사도가 되었다. 우리도 신앙 여정에서 이 길을 따라야 한다.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그 체험을 교회 공동체와 세상에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매일의 삶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듣는 귀를 열자. 신앙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체험과 증언임을 기억하자. 우리도 막달레나처럼, 고통과 눈물 속에서도 부활의 희망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자. 교회와 세상에서 “작은 사도”로 살아가며,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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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 찾는 사람을 님께서>
요한 20,1-2.11-18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님 찾는 사람을 님께서>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요한 20,1)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어둠을 헤치고
길을 나선
빛 찾는 사람을
빛께서
끝내
오롯이
품으시다
불신을 거슬러
길을 나선
믿음 찾는 사람을
믿음께서
끝내
오롯이
품으시다
절망을 뚫고
길을 나선
희망 찾는 사람을
희망께서
끝내
오롯이
품으시다
미움을 가르고
길을 나선
사랑 찾는 사람을
사랑께서
끝내
오롯이
품으시다
죽임을 뿌리치고
길을 나선
살림 찾는 사람을
살림께서
끝내
오롯이
품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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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람은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고, 가두려 해도 가둘 수 없습니다. 바람에는 무게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마음을 비우면 세상이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습니다. 예언자와 성인과 성녀들은 모두 그렇게 살았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자유로웠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 외에는 붙잡으려 하지 않았기에 자유로웠습니다. 세상의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세상의 비난에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욕심과 원망, 분노와 교만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마음이 무거워지면 작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고, 작은 손해에도 분노하며, 작은 실패에도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새 세상이라는 그물에 갇히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을 비운 사람은 잃을 것이 없기에 자유롭고, 하느님께 맡기는 사람은 두려워할 것이 없기에 평화롭습니다.
요즘 인공지능 시대를 이끌어 가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회장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예전에 그는 한국에 GPU 20만 장을 공급하겠다고 하였고, 이는 한국의 인공지능 발전에 큰 도움이 되는 선물처럼 여겨졌습니다. 한국의 기업 총수들과 깐부치킨에서 치맥을 나누며 친근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이번 방문에서도 인공지능의 미래를 열어 갈 새로운 기술과 사업 기회를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베라 루빈, RTX 스파크, 젯슨 토르와 같은 이름은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인공지능과 로봇, 반도체 산업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도구라고 합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기술도 하나의 선물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선물을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기술이 욕심과 경쟁과 교만의 도구가 되면 사람은 더 무거워지고, 세상은 더 촘촘한 그물이 됩니다. 그러나 기술이 사람을 살리고, 약한 이를 돕고, 공동선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의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듯이, 마음을 비운 사람은 기술과 재물과 성공에도 붙잡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도구를 사용하되, 세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오늘 미사의 감사송은 막달레나 성녀의 삶을 아름답게 전해줍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막달레나는 살아 계신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교회는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의 사도’라고 부릅니다. 사도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한 첫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막달레나가 예수님께 치유 받은 여인이었다고 전합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던 그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다고 합니다. 전승 안에서는 막달레나가 때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은 여인과 연결되어 묵상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녀가 어떤 과거를 가졌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뒤에 어떻게 변했느냐입니다.
막달레나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습니다. 상처에서 치유로 나왔습니다. 죄와 고통의 무게에서 사랑과 자유의 삶으로 나왔습니다. 어쩌면 막달레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나약하고, 부족하고, 쉽게 넘어집니다. 원망과 한을 품고 살 때도 있습니다. 마음이 무거워 세상이라는 그물에 걸려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갈망입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숨어 있을 때, 막달레나는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주님을 찾았습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두려움보다 강합니다. 사랑은 절망의 무덤 앞에서도 길을 찾습니다. 그래서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능력과 재능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감정만이 아니라 결심입니다. 사랑은 주님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서는 용기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바로 이 말씀의 증인입니다. 과거의 상처가 그녀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시선이 그녀를 가두지 못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이 그녀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듯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과거의 그물, 욕심의 그물, 두려움의 그물에 갇히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주님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욕심과 원망, 분노와 교만을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기술도, 재물도, 능력도, 성공도 하느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과 이웃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사도들에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전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으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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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사랑하는 이와 예기치 않은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다. 공허하여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하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이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흘려도 공허한 가슴은 채울 수가 없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한 7,53),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여인(루카 8,2),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요한12,3) 등 복음 속의 다양한 여인을 대변한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는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다. 마리아에게 있어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이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 무덤으로 달려갔다. 차마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물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 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고 질문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고, 치유받기 위해서 왔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 는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물음을 받을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눈에서 절망의 눈물을 거두어 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다.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이다. 제자들은 수난의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 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하고 불렀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우리와의 끈을 놓지 않으신다. 우리도 끝까지 놓치지 않길 희망한다. 혈연, 지연, 학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주님, 저희가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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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회사의 계약서에 이런 조항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랍스터를 주지 말 것.’
이 회사에서는 매일 랍스터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매일 나오면 더 좋지 않을까요? 그 비싼 고급 음식을 매일 준다고 이런 조항까지 굳이 넣는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현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17세기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인들은 매우 가난했는데, 이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이 랍스터였다고 합니다. 미국 동부 연안에 풍부하게 서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 흔하고 생김새도 이상하다면서 가장 맛없고 피해야 할 음식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 랍스터는 당시에 주로 밭에 비료로 썼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 천대받던 랍스터가 최고의 고급 요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 입맛이 바뀐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회적 이미지의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부유층의 소비가 늘어나면서 고급 식자재가 된 것이지요. 당시의 사람들이 이런 예측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은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변하지 않는 것은 주님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사랑’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성녀께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뵌 분이었습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요한 20,15)라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살아 움직이시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리아야!”(요한 20,16)라고 부르셨고, 곧바로 예수님을 알아뵙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이끌어 낸다.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에 그를 따라간다.”(요한 10,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각을 통해서는 주님을 알아챌 수 없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을 때 비로소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만큼 마리아 막달레나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따르는 양과 같은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는 판단만으로는 주님을 알아뵈지 못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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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2.11-18)>
1)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이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알린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우리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성녀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마리아 막달레나를 당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코린토 2서에 있는,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당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일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당시 교회 공동체에서도 그렇고, 당시 사회에서도 그렇고, 가장 약하고 힘없는 위치에, 즉 발언권이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일부러
선택하셨는데, 오늘날에도 그런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좋은 예가 ‘성모 발현 기적들’입니다.
성모님 발현의 목격자나 증인은 늘 ‘보잘것없는 사람들’, 또는 ‘어린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증언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은 교회 교도권의 몫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증언도 마리아 막달레나와 여자들의 증언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사도들이 그것을 확인하는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만일에 베드로 사도가 부활의 첫 증인이었다면, 그의 권위 때문에 신자들은 금방 그 증언을 받아들였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신앙으로 이어지기가 어렵습니다.
또 만일에 성모님이 첫 증인이었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점 때문에 편견을 가졌을 것이고, 속으로 반신반의 했을 것입니다.
2) ‘아리마태아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신 뒤에,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내고 ‘그분이 부활하셨다.’ 라고 선전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습니다(마태 27,62-64).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을 봉인하고 경비병들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마태 27,66).
반대로, 신자들 쪽에서는 박해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길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서 모독하거나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실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것입니다.
당시 사도들과 신자들은, 아직 부활 신앙은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시기를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 갔다고 단정적으로 생각한 것은, 이미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마리아 막달레나가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때에는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곧바로 알아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했고(루카 24,37),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긴 시간 동안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사도 9,5).
그는 예수님을 아예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자마자 마리아가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또 예수님의 음성을 바로 알아듣고 응답했다는 점, 그리고 부활 소식을 알리라는 지시에 바로 순종했다는 점입니다.
그 일들은 모두 마리아가 평소에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았음을 나타냅니다.
그 순종은 곧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요한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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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요한 20,15)
사랑하면 그 사람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자주 보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삶을 함께 불태우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일치되어 영원히 함께 존재하기를 갈망합니다.
영원히 함께 일치하는 사랑은 하나요 동시에 둘로 존재하게 합니다. 일치와 분리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참 사랑은 서로 친밀하게 의존하지만 독립적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처럼 철저히 의존적이지만 철저히 독립성을 부여하는 사랑이어야 영원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사랑이 실패하는 것은 하나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지나치게 독립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의존성과 독립성이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사랑마저 극단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눈물은 온전한 존재로 성숙하기 위한 은총의 징표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떠나보내며 상실감으로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만, 더욱 성숙한 사랑으로 통합되기 위한 은총의 순간입니다. 익숙한 의존적인 사랑에서 독립성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통합의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뒤 빈 무덤에서 오늘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잃어버린 자신을 찾습니다. 상실의 충격과 슬픔으로 허둥대며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만납니다. 의존적 사랑을 하였던 그분을 보내야만 했기에 쓰라림을 느끼지만, 공허한 빈 무덤 안에서 홀로 설 수 있는 희망의 음성을 다시 듣습니다.
공허한 우리 마음의 빈 무덤에서 들려오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는 음성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지나치게 의존적인 사랑을 하는 우리에게 독립적인 존재로 통합적인 사랑을 하도록 초대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주님 대신에 우리가 사랑을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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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마리아야?"(요한20,16)
<부르심과 응답!>
오늘 복음(요한20,1-2.11-18)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는 말씀'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으뜸 사도였던 베드로도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 받았던 요한도 아닌, 낮게 취급 받았던 여자, 그것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큰 은총을 받은 여인입니다.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8,2ㄴ)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후 그는 성모님과 함께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고, 마침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만나뵈옵는 영예를 누리게 됩니다.
"마리아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부르십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스승님!)" 하고 부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20,17)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8)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합니다.
"루카야!"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나를 부르십니다. 우리를 부르십니다.
미사(성체성사)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너를 통해서, 그리고 어떤 일이나 사건을 통해서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난 주님을 말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전합니다.
"제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 "예!" 라고 응답할 수 있도록,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3,10ㄴ)라고 응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깨어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신 많은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영육이 함께 건강하시고, 늘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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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예수님을 찾는 발걸음은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은 먼 곳에서 만나는
기적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만남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 세상에
희망을 전한
사랑의 증인이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부활의 문을 엽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십니다.
존재를 새롭게 하는
만남이 시작됩니다.
죽음의 무덤을 찾았던 그녀는
생명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찾는 사람은
결국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참된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절망의 자리도
은총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망의 무덤에서도
생명의 희망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삶을 통해 십자가 아래에서도
빈 무덤 앞에서도 떠나지 않는
한결같은 사랑을 배웁니다.
신앙은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삶입니다.
주님을 만나 삶이 변화되는
은총을 증언하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축일 되십시오.
우리의 삶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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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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