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스팅스 전투 (Battle of Hastings)
1066년 10월 24일.

허스칼 vs. 노르만 기사
잉글랜드 남동부 헤이스팅스에서는 역사를 결정지을 대전투가 한창이었다.
바다 건너 이 섬나라를 정복하러 온 노르만 군대와 그들에게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앵글로색슨 군대의 대접전이었다. 방패의 벽을 세운 채 핸드액스와 창으로 무장한 앵글로색슨의 허스칼(Housecarl) 전사들은 중무장한 노르만 기사대의 돌격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맞섰다. 벌써 노르만 기사대의 돌격은 몇 번이나 무위로 돌아갔고, 늘어가는 사상자와 계속되는 실패에 기사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져가고 있었다.

독전하는 바이외의 주교 오도
"모두 정신 차려라! 기세를 잃어서는 안 된다!"
혈전 가운데서 노르만 병사들을 독려하는 소리는 바이외의 주교 오도 드 콩트빌(Odo de Conteville)의 목소리였다. 벌써 몇 시간째 지속되는 싸움과 계속되는 돌격의 실패 가운데에서도 노르만군이 버틸 수 있던 것은 일선을 누비는 그의 지휘력 덕분이었다. 대열이 무너지고 기사들이 혼란에 빠질 때마다 그는 목청을 쥐어짜며 부대를 수습했지만, 오도의 눈에도 이대로 길게 끌고갈 수는 없을 것이 자명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반전시켜야 한담?'
땀에 흠뻑 젖고 목이 쉴 것 같은 피로 속에서도 오도의 일념은 전황을 반전시킬 묘수를 찾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저편에서부터 보이는 거대한 깃발이었다. 붉은 깃발에는 흰색 용 한 마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붉은 깃발 위에 그려진 흰 용이 바람에 나부끼며 노르만 군의 중앙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잉글랜드 왕, 해롤드 고드윈슨의 깃발이었다. 유리한 전황을 굳히기 위해, 지친 노르만 군대에게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움직인 것이리라.
"로베르!"
오도는 급히 그의 동생 로베르(Robert de Conteville)의 이름을 불렀다. 그 역시 악전고투 가운데서 병사들을 수습하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바쁜 상황이었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저 깃발, 보이느냐? 본진이 위험할 것 같다."
"저런!"
지친 상황에서도 정신이 번쩍 든 듯 로베르는 놀람과 우려가 뒤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님, 어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대로다. 후방의 예비대를 끌고 해롤드를 막으러 갈 테니, 이쪽의 지휘는 네게 맡기마."
"알겠습니다."
곧바로 후방으로 말을 몰아 빠져나온 오도는 후열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과 궁수들을 긁어모아 중앙으로 향했다.
용 깃발을 세운 해롤드의 친위대는 방패벽을 세운 채 천천히, 그러나 굳건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오도는 절망감마저 들었다. 노르만 기사들이 그토록 돌파하려 해도 무너지지 않는 저 방패벽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이상, 해롤드의 승리는 굳건할 것이었다. 그들과 정면에서 맞붙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오도는 적의 측면에 위치한 능선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먼저 쏠 수 있는 모든 화살을 다 쏘고 최대한 적의 진영을 흐트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발사하라!"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오도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야트막한 능선 위에서 쏜 화살들은 하늘을 가르고 시원스럽게 허스칼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갑작스러운 사격에 몇몇 전사들이 쓰러졌지만, 이내 허스칼 전사들은 방패를 머리 위로 들고 화살비에 대응했다. 피해는 크지 않을 것이었다.
"제길, 더 쏴라! 계속 쏘라고!"
오도는 발악하듯 외쳤다. 큰 피해를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적의 전진을 방해하고 진영을 망쳐놓기 위한 발악이었다. 마침내 화살을 다 쏜 순간, 오도는 자신이 앞장서서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기사들이 그를 따르고 중앙의 본진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보병돌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 공격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오도 자신도 의문스러웠다. 이미 수차례 허스칼의 방패 벽은 노르만 정예 기사대의 돌진을 물리치지 않았던가?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방패 벽이 갑작스레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이전까지의 용맹은 어디로 갔는지 허스칼들은 동요와 공황에 빠져서 진영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행운에 오도가 어리둥절한 순간, 저편에서 아군의 외침이 들려왔다.

해롤드 왕이 전사하다
"적의 왕이 쓰러졌다! 우리의 승리다! 승리다!"
그 외침은 곧 노도와 같이 전장을 휩쓸며, 지친 노르만 군대에게 새 힘을, 앵글로색슨 군대에게는 파멸과 절망을 흩뿌렸다. 이어서 앵글로색슨 군대의 전열이 우르르 붕괴하기 시작했다. 전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그리고 무너져서 달아나는 허스칼의 뒤를, 승세를 탄 노르만 기사들이 뒤쫓으며 살육을 벌이기 시작했다.
전투 이후

윌리엄과 그의 동모제들. 좌측이 오도, 중앙이 윌리엄, 그리고 오른쪽이 로베르.
"치열한 전투였다. 그래도 너희 둘이 잘 해주었구나."
혈전의 시간이 지나간 노르만 군의 진영에서, 노르망디 공 윌리엄은 그의 두 이부동모제 오도와 로베르를 불러 치하했다. 이 형제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승자는 죽은 해롤드가 되었을 것이다. 로베르는 최악의 전황에서도 노르만 군대의 주축인 기사대를 끝까지 지탱하며 앵글로색슨 군의 공격을 버텨냈고, 오도는 전투의 쐐기를 박으러 전진하던 잉글랜드 왕 해롤드의 본대를 습격하여 그를 저지했을 뿐 아니라 전사시키는 큰 공로를 세웠다.
기세등등하던 잉글랜드 왕은 불운하게도 갑작스럽게 측면에서 날아온 화살비를 미처 다 막아내지 못했다. 대부분의 화살은 그의 용 문양 방패에 막혔지만, 화살 하나가 방패 너머 그의 눈 한쪽을 정확히 관통했다. 치명상을 입은 그는 곧이어 들어온 윌리엄과 오도의 협공에 무참히 살해되었다.
"특히 오도, 네 활약에 고맙다. 오늘의 승리는 네 활약이 컸어. 오늘의 일은 잊지 않을 것이야."
"과찬이십니다."
"너희에게 줄 상급은 이미 생각해 놓았다. 로베르는 노르망디에 있는 모르탱(Mortain) 성을 주겠다. 오도, 네게는 잉글랜드의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를 줄 것이야. 아직 확실히는 모르지만 켄트라는 지역은 이전부터 잉글랜드의 빵바구니라고 불릴 정도라더군. 그곳은 네 것이고, 켄트의 백작위 역시 네 것이다. 오늘의 승리에 네가 기여한 몫으로 받거라."
"과분한 은혜에 감사하옵니다."
말로는 짐짓 겸양을 떨었지만 오도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났다. 바이외의 일개 주교에서 켄트의 백작이라니! 놀라운 출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당연한 상급이잖은가!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승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승리가 없었다면, 그의 형 윌리엄은 잉글랜드 왕위를 향한 그의 야심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윌리엄이 왕이 된다면(그리고 오늘의 승리로 그것은 거의 확정되었다), 오도 자신 역시 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동년 12월 25일, 노르망디의 사생아 공작 윌리엄은 잉글랜드의 "정복왕" 윌리엄으로 즉위했다. 새로운 켄트의 백작위는 약속대로 오도 드 콩트빌에게 수여되었다. 일개 주교에서 백작으로 뛰어오른 벼락출세를 했지만, 이 유능하고 야심만만한 사내에게는 이제 첫 시작의 발걸음을 떼었을 뿐이었다. 헤이스팅스의 물리적인 싸움은 끝났다. 그리고 새롭게 세워진 노르만의 잉글랜드 왕국 안에서, 더 높은 곳을 향한 오도의 싸움이 그 막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오도 드 콩트빌, 켄트의 백작이자 바이외의 주교
- 첫 시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바이외의 오도(Odo of Bayeux)와 그의 친동생 모르탱의 로베르(Robert of Mortain)는 실존 인물이고 실제로 정복왕 윌리엄의 이부동모제(아버지가 다르나 어머니는 같은 동생)입니다. 둘 다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과 안정에 기여한 인물이었고 특히 오도는 왕국의 2인자 자리까지 오릅니다. 그러나 1076년과 1082년에 걸쳐 횡령과 이탈리아 원정을 멋대로 기획했다는 혐의로 인해 몰락하고(아마도 세력이 너무 강해진 오도를 윌리엄이 숙청했다고 여겨집니다), 1087년 윌리엄이 죽을 때 동생 로베르의 탄원으로 풀려날 때까지 감금됩니다. 이후 윌리엄의 아들들의 내전에서 윌리엄의 장남 로베르의 편을 들었다가 패하고, 십자군에 참가하는 여정 중에 사망합니다. 오도는 헤이스팅스 전투를 기록한 바이외 태피스트리(프롤로그 편 대부분의 사진들)를 만든 인물로 여겨집니다.
- 잉글랜드 왕 해롤드는 전투 와중에 실제로 전사했지만, 어떻게 전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는 그의 죽음이 모호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또한 오도가 그를 화살로 쏘아 죽인 것은 창작입니다.
- 모르탱의 로베르는 헤이스팅스 전투 이전부터 모르탱에 영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헤이스팅스 전투의 공으로 모르탱의 영지를 받았다는 것은 창작입니다.
첫댓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