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트럼프’, 포퓰리즘 좌파 밀어내다
경제난 속 극우 밀레이 대선 승리
트럼프 “아르헨을 다시 위대하게”
아르헨 새 극우 대통령 “美 달러 도입-장기 매매 허용” 극우 성향 경제학자인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이 19일(현지 시간) 당선 직후 연설에서 “아르헨티나의 번영을 되찾겠다”는 소감을 밝히고 있다. 그는 좌파 정권이 오래 집권하며 경제난이 가중된 현 상황을 타개하려면 중앙은행 및 자국 통화 폐지, 장기 매매 허용, 친(親)중국 노선 탈피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승리가 중남미를 넘어 내년 11월 미국 대선 등 주변국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AP 뉴시스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성향 경제학자 하비에르 밀레이 자유전진당 대표(53)가 19일(현지 시간)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투표에서 집권 좌파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140%대 고물가, 40%대 빈곤율 등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려 온 국민이 ‘최소 정부’를 내걸고 혜성처럼 등장한 괴짜 정치인에게 권력을 맡긴 것이다.
밀레이 당선인은 이날 개표율 99.3% 기준 55.7%를 얻어 현 경제장관인 세르히오 마사 ‘조국을 위한 연합’ 후보(44.3%)를 눌렀다. 현금 살포 등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 정책으로 일관한 집권 좌파를 국민이 외면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밀레이는 당선 연설에서 “아르헨티나의 재건이 시작됐다. 이제 급진적인 변화만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선 과정에서 중앙은행 및 페소화 폐지, 미 달러 도입, 정부 부처 축소, 장기 매매 허용 등 극단적인 자유주의 공약을 내세웠다.
이번 결과로 지난해 브라질, 콜롬비아 등 중남미 주요국에서 좌파 지도자가 잇따라 선출된 ‘핑크 타이드(Pink Tide·온건 좌파의 집권 물결)’ 부활에 제동이 걸렸다. 또 40개국에서 대선과 총선을 치러 ‘선거의 해’가 될 2024년 각국 선거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 당장 내년 11월 미국 대선에 도전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당신(밀레이 당선인)이 아르헨티나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이란 글을 올렸다. 자신의 집권 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차용해 승리 의지를 밝힌 것이다.
좌파정권 ‘고물가-빈곤’에 분노한 아르헨 민심, 극우 대통령 선택
‘아르헨의 트럼프’ 밀레이 대선 당선
유권자들 좌우파 무능 정치에 지쳐… ‘극우 괴짜’에 변화 요구 표 몰려
‘독재 부정’ 부통령 당선인은 부담… 내년 美대선 등에 영향 여부 촉각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왼쪽)이 19일(현지 시간) 대선 승리 확정 직후 선거 유세 내내 동행한 여동생 카리나와 어깨동무를 하고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미혼이며 여동생과 각별한 밀레이 당선인은 “집권 후 여동생이 대통령 배우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에노스아이레스=AP 뉴시스
빗질을 전혀 하지 않은 부스스한 장발, 전기톱 휘두르기 같은 독특한 유세, “아르헨티나 페소는 배설물” 같은 극단적 막말….
방송 토론 프로그램 패널 출신으로 의정활동 2년이 정치 경력의 전부인 ‘극우 괴짜’ 하비에르 밀레이(53)가 브라질에 이은 남미 2위 경제대국 아르헨티나를 4년간 이끌게 됐다. 현금 복지 등 좌파 대중영합주의(페론주의)의 본산인 아르헨티나 민심이 기존 정치 문법을 완전히 거부하는 ‘아웃사이더’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데 따른 것이다.
밀레이 당선인의 승리는 140%대의 살인적 고물가, 40%대 빈곤율 등 최악의 경제난에 따른 심판론이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집권 좌파뿐 아니라 우파 야당까지 기성 정치의 무능에 지친 유권자는 ‘광인(狂人)’으로 불릴 만큼 과격한 언행으로 일관하는 그가 아니면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표를 던졌다. 이 결과는 미국, 멕시코 등 내년 북미와 중남미 주요국에서 치러지는 대선 및 총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 ‘광인’ 대통령과 ‘마녀’ 부통령
밀레이 당선인은 1970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후손으로 태어났다. 벨그라노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따고 경제분석가로 활동했다. TV, 라디오 등에서 좌우파를 모두 비판하는 ‘모두 까기’식 해설로 인기를 끌었다.
정치 경력은 일천하다. 2019년 자유전진당에 입당했고 2021년 하원의원에 뽑혔다. 그런 그는 무상 의료·교육 중단, 정부 부처 축소, 총기 규제 완화, 장기 매매 허용 등 과격한 변화를 내세우며 팝스타 수준의 인기를 끌었다. 복지 정책을 모두 썰어 버리겠다며 전동 전기톱을 유세장에서 휘둘렀다. 또 전체 유권자의 약 3분의 1인 29세 미만 젊은층이 선호하는 소셜미디어 틱톡,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공약을 설파했다. 그의 틱톡 추총자는 약 140만 명. 결선에서 맞붙은 집권 좌파의 세르히오 마사 경제장관은 4만 명에 불과하다.
측근이라 할 만한 이도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숨진 반려견 코난을 자식처럼 여겨 이후 5만 달러(약 6500만 원)를 들여 복제견 4마리를 만들었다. 시장경제와 작은 정부를 옹호한 석학의 이름을 따 각각 ‘로버트, 루커스, 밀턴 (프리드먼), 머리 (로스바드)’로 부른다. 코미디언 파티마 플로레스(42)와 결혼하지 않은 채 공개 연애 중이다. 집권 후 선거 유세에 깊이 관여한 여동생 카리나(50)가 대통령 배우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비야루엘 부통령 당선인
집권 후 국방 분야를 맡기겠다고 한 빅토리아 비야루엘 부통령 당선인(48) 또한 논란의 대상이다. 부친과 삼촌 모두 군부 독재하에서 복무한 군인 집안 출신이다. “군사정권 시절 실종자 수가 과장됐다”는 등 독재를 부정하는 발언을 해 반대파로부터 ‘마녀’로 불린다.
● 당선 공신은 140%대 고물가 등 경제난
밀레이 당선인의 승리는 그만큼 아르헨티나 경제난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10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142.7% 올랐다. 올해 전체 물가상승률 또한 지난해보다 190%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자고 나면 물가가 오르고 화폐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미다. 국민 4700만 명 중 40%는 빈곤층이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부국(富國)이었지만 1940∼1950년대 좌파 지도자 후안 페론 전 대통령의 등장, 이후 ‘페론 계승자’를 자처하는 지도자들의 무상복지 등 현금 살포 정책이 일반화하며 경제가 망가졌다. 페론 계열 정당이 아닌 우파 정권이 집권을 하더라도 경제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과 정치 무관심이 깊어졌다.
결국 국민은 극단적인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내세운 그에게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한 지지자는 로이터통신에 “밀레이가 실행 가능한 유일한 선택지였다”라고 지지 이유를 밝혔다. 미 CNN 방송은 “밀레이의 승리는 극우 포퓰리즘이 부활할 수 있다는 잠재적 신호를 전 세계에 보내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효목 기자, 이기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