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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7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요한 6,35-40
결국 성체 안에 끝까지 남는 자: 두려움 속으로 한 발을 내어 디딜 용기가 있는 자
오늘 복음도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오늘 내용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아드님께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할 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고 떠나갑니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결국 예수님을 떠나간 이들은 어째서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분이 나의 왕이 되십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어떻게 될까요? 부모의 종이 됩니다.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찾아온 이들은 아직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자신의 주인이요 왕으로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결심한 이들은 나를 포기하는 표를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한 것과 같습니다.
자기를 봉헌할 마음이 없는 이들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이끌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결국 아드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할 것인데, 아드님을 그렇게 이용당하게 두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로 살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로 살기를 원하는 이들만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도움의 은총이라 합니다.
몽고에서 선교하던 이용규 선교사에게 인도네시아에서 교육사업을 하라는 하느님의 뜻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일가족이 인도네시아에 정착하여 대학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대학을 시작하려고 할 때 아주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슬람국가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
이때 비자에 어려움이 생겨 갑작스럽게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언제 돌아오게 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좌절감이 몰려왔습니다.
아이들은 울면서 “아빠, 그러면 우리 몇 달 동안 학교 못 가는 거예요?” 라고 물었고, 선교사는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땅의 젊은 영혼들의 교육을 맡기겠다면서요.
그런데 저는 정작 제 아들과 딸의 교육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니?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생각해보니 그건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하느님께 다시 맡겨드립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비워진 선교사의 손에 새로운 그림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 대한 아픔을 주셨고, 그래서 대학을 세우기 전에 초중고등학교를 세우게 됐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그리스도교 학교로 정부 인가를 내주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기적적으로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고 첫 사례로 그리스도교 학교로 올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출처: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이용규 선교사, 유튜브 채널, ‘CGNTV SOON’]
이용규 선교사는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내려놓음』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려놓음’은 어떤 ‘완성형’이 아니고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의 핵심은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 가운데 나의 주도권을 이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가운데 상대방이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어떠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맡겨드리는 것.
그리고 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공급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걸어가는 삶. 이것이 바로 내려놓음의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될 이들은 이 내려놓음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빵을 주셨다는 말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걱정은 필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걱정을 채워줄 대상으로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내려놓으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나로 살아가는 것, 나의 주도권을 내려놓지 않는 삶이 아직 더 낫다고 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영화 ‘마인’(Mine)은 사막 임무에서 실패한 두 병사가 사막을 건너다 지뢰를 밟게 되며 벌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둘이 다 지뢰를 밟았고 주인공은 발을 떼지 않았지만 다른 군인은 발이 절단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무려 70시간을 추위와 더위, 동물의 공격과 모래 폭풍을 이겨내며 견딥니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느낀 그때 한 발짝을 옮깁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뢰가 아닌ㅈ하나의 깡통이었습니다.
동료의 고통을 보며 발을 뗄 수 없어 고생한 그 70시간은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버리지 못했던 그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같습니다.
그에게 끊임없이 한 발을 내디디라고 말했던 원주민은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알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두려움이 그 발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아를 밟고 움직일 용기가 없는 사람을 이끌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신념을 가진 이는 도와주십니다.
나를 내려놓을 수 없으면 다른 나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는 나다.”이십니다.
나로 살아가는 것에 지쳐 누군가에게 나의 주도권을 맡기고 싶다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내 일로 걱정하고 싶지 않아 모든 일을 주님 것으로 맡겨드리고 싶다면, 동방박사를 이끌었던
별을 아버지께서 당신에게도 다시 보여주실 것입니다.
자아를 떠나는 한 걸음의 용기만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참 자유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17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 6,35-40
그날에는 더 이상 참척(慘慽)의 슬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과거 어르신들께서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의 느낌이 든다고 해서
천붕(天崩)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것은 참척(慘慽)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슬픔과도 견줄 수 없는 슬픔, 참혹하고 깊은 슬픔을 일컫습니다.
부모는 산에 묻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참척의 고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상처가 아물지 않습니다.
오늘은 어여쁜 한 송이 꽃 같던 아이들이 차갑고도 깊은 바닷물 속으로 낙화한 지 십 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 적 이야기를 아직도 하냐?
언제까지 그 이야기 할거냐? 며 투덜거립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인간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입니다.
혈관 속에 따뜻한 피가 돌아다니는 인간으로서 그런 말을 어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남아있는 부모나 가족은 아직도 참척의 고통과 트라우마에 잠 못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천 번 헤아려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참혹한 고통 앞에서는 섣부른 위로의 말도 조심스럽습니다.
그저 침묵 속에,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 옆을 지켜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속 깊이 자리한 그 혹독한 고통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발산하며 애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기가 막히는 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아이를 앞세우는
큰 슬픔에 힘겨워하는 분들을 위해 오늘 주님께서는 한줄기 위로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이 세상 어딜 가도 그 슬픔 그 고통 위로가 안되니, 어떻게든 주님 안에, 그분 말씀 안에 위로를 받으시고, 극복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이 혹독한 시절이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 모두 반드시 따뜻한 주님의 품 안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슬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강론>
(2024. 4. 17. 수)(요한 6,35-40)
<생명의 빵>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6-40).”
1) 여기서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을 보았다면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빵의 기적’이 하느님의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5장에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라는 말씀이 있고(요한 5,36), 뒤의 10장에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0,37-38).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예수님을 증명합니다.
2)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 ‘부르심’은,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초대”입니다(요한 3,35-36).
“나에게 올 것이고”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을 믿는 신앙인들을 끝까지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뒤의 10장에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0,15).
예수님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분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가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 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에도 적용해서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3) 여기서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당신의 뜻’이 따로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당신의 뜻’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따라서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라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하느님께서 보내셨다.”인데, 당신의 신성과 권한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모든 사람’의 구원이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구원을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게 됩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인데, 유다는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반대쪽으로, 즉 멸망으로 가버렸습니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즉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정원 제한’이 없는 나라”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자격 제한’은 있습니다.>
40절의 말씀은, 39절의 말씀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충실한 신앙인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영원’은 글자 그대로 영원한 시간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단어를 동원해서 복잡하게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영원’의 반대말은 ‘찰나’, 또는 ‘허무’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뒤의 17장 3절에,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라는 예수님의 설명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서, 하느님,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고,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것은,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존재에서 영원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고,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뒤의 8장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