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1. 큐티
마태복음 27:11 ~ 26
빌라도의 생쑈
관찰 :
1)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11절.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 유다가 목 매어 자살을 하고 죽는 상황에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어 재판을 받게 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목요일 늦은 밤부터 금요일 새벽 사이에 예수님을 심문하고 사형을 결정했습니다. 바로 가야바의 집에서 벌어진 일사천리의 사건입니다. 문제는 당대의 유대법으로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밤에 소집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합법을 가장하기 위해 동이 트자마자 특별 회의를 소집하여 이미 합의한 대로 예수님의 사형을 확정한 것입니다. 이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반드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이가 왔는데, 자신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로마법에 넘겨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하기를 기대한다는 이들이 도리어 로마법에 의해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를 물었습니다. 이 재판의 핵심 안건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빌미로 반역이라고 고발을 했고, 새벽일지라도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는 로마에 반역하는 행위를 재판해야 하는 명분으로 이 재판을 집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 “네 말이 옳도다”라고 하신 뒤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말하는 것이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기에 주님은 ‘네 말이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죄목 자체가 예수님을 증언한 아이러니가 된 것입니다. 진짜를 진짜기 때문에 고발했는데 진짜가 진짜이기 때문에 사형이 언도되는 상황입니다. 주님은 그렇기에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다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 12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 13절.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 14절.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 예수님을 고발하는 많은 소장에 대해 예수님이 침묵하시자 그것이 얼마나 말도되지 않은 지를 아는 빌라도가 도리어 답답해서 ‘크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 사람 예수를 위한답시고 다른 deal을 제안했습니다.
2) 빌라도의 제안
- 15절.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 빌라도가 머리를 짜서 예수님을 살려보고자 애쓴 흔적입니다. 그럴지라도 빌라도는 이 모든 불의한 재판정의 총 책임자로서 그가 누구를 내세우건, 손을 씻건 그럴 수 없는 것일 뿐입니다.
- 16절.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 17절.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 18절.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 19절.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 20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 “바라바냐 예수 그리스도냐?” 예수님을 고의적으로 바라바와 비유하여 예수님을 죄인 취급하고 있습니다. 바라바는 열심당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무력 항쟁 중에 살인을 했다는 죄목으로 붙잡힌 자였습니다. 이를 예수님과 거래하는데 사용하는 것, 그것도 무리들이 당연히 예수를 선택할 것이라는 생각속에서 꺼내어든 카드였습니다. 바라바는 강도요 백성들로부터 악인으로 인정되던 사람으로 추정되는 인물입니다. 이 인물과 비교하는 것을 통해 빌라도는 예수님을 모독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에 들게 하고자 했으나 ‘빌라도표’ 잔머리의 결과는 딴판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설마 바라바를 달라고 하겠어?’했던 생각이 망하게 된 것입니다.
- 21절.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들을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고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는 주장을 하도록 뒤에서 조정했습니다. 비열한 행위입니다.
3) 빌라도의 두 번째 제안 - 생쑈
- 22절.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겠나이다” => 이제 빌라도는 치사한 제안을 합니다. 자신의 책임을 피해가기에 급급하여 무리들에게 재판의 판결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굉장히 민주적인 듯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핵심은 자신의 책임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결코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당시 로마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 23절.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 무리들은 마치 짠 듯이 “십자가에 못 받혀야 하겠나이다”를 부르짖었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아는 빌라도는 새벽부터 눈이 벌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광폭해지는 무리들을 보면서 두려움에 빠진 듯한 모습입니다. 파병된 로마 병정의 수에 비해 예루살렘의 치안은 다루기가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빌라도의 생각에 만일 민란이 나면 목숨이 위태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향후의 정치적인 바탕에 흠이 잡히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래서 ‘생쑈’를 합니다.
- 24절.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 당시 재판 중에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는 행위는 그 일과 일체의 연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재판정에서 재판관이 그렇게 하는 것은 책임소재의 유무를 떠나 매우 치사하고 비열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행동으로 빌라도의 책임이 없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이 불의한 재판의 모든 구조에 대해서 판결을 내리고 형을 집행하게 한 자가 빌라도이기에 사도신경에서 여전히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그렇게 재판과 관련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 25절.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 26절.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 예수님을 무리들에게 놓아 주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결정을 내려서, 법적인 효과가 내려짐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 공식적인 일이 되도록 결정했습니다.
- 채찍질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 하였기에 채찍질 한 것입니다. 원래 십자가형은 반역한 이방 노예들에게 주는 형벌이었습니다. 때문에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부끄럽고, 가장 추악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죽기 직전까지 채찍질 형을 부과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로마를 전복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려한 죄로 채찍질과 십자가형을 부과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이 원하던 메시야의 모습이었습니다. 만일 자신들이 원하던 존재가 이렇듯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메시야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 메시야를 죽이고자 하는 주체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된 꼬이고 꼬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만 더 증거되는 형국이 된 것입니다.
4) 무리들의 선택
- 예수가 아닌 강도 바라바를 달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피하고자 하는 피의 댓가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선택했습니다. 이 주장이 얼마나 엄청나고 무서운 댓가를 치루게 되는지를 이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 결국 이러한 불의한 재판의 과정을 걸쳐서 예수님은 로마를 전복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려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형 중에서 가장 지독한 로마 전복죄를 적용했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채찍질 형이 더해지게 된 것입니다.
가르침 :
1) 빌라도도, 유대 지도자들도 모두 이 재판이 얼마나 비열하고 불의하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다 조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의한 의도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고, 참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시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2) 빌라도 앞에서의 이 재판을 누가 나중에 이리도 세세히 알려주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 이 때 재판에 참여했던 대제사장들 중에서 나중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자? 정확하게 누군지는 드러나지 않은 누군가가 이 재판에서의 일들을 체험한 자가 분명히 마태에게 혹은 당시의 다른 이에게 알려주었고, 그 것을 성령께서는 기록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처절한 은혜입니다.
3) 빌라도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재판정에서 재판관이 죄인의 죄 혹은 무죄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판결하는 것의 핏값을 무리들에게 전가했습니다. 그래서 전가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뭔가에 홀린 듯, 뭔가에 가려진 듯한 행동입니다. 무리들도 동일하게 그 결과가 어떠할지 알지 못하고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핏값을 전가할 것을 간구했습니다. 정말 어리석고 엉망진창인 역사상 가장 불의한 재판과 생쇼가 벌어진 것입니다.
적용 :
1) 불의한 일을 덮으려면 더 많은 악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함부로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에게 돌리라는 고백을 한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결정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조차도 몰랐던 이들입니다. 내가 리더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하고, 그러한 영향력을 발하고자 할 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일을 덮으려는 시도가 나 자신과 공동체와 다음세대에까지 얼마나 악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지를 알고 함부로 어떤 일을 호도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겠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나를 포기하는 것이 되는 길이고, 십자가를 통과하는 길이 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미얀마에서의 일에 대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 빌라도는 손을 씻고, 자신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리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책임이 면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내게 부여된 책임이 피해간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며, 남에게 떠민다고 떠밀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무엇보다 로마의 총독으로 한 생명의 살고 죽는 것을 책임지는 핏값을 계산하는 존재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빌라도의 모습과 모든 인류의 핏값을 자신의 의로운 목숨으로 대신하려는 예수님과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책임을 회피하려는 빌라도의 더러움이 너무 크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 큰 희생과 사랑을 다시금 묵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