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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싱턴한인교회 김영봉 목사님의 설교말씀입니다. ------------------------------------------------- "영혼의 갈증" 시편 43:1-5 1. 지난 주, 한국에서는 신해철이라는 46세의 가수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에 심장 정지로 인해 짧은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저는 그 가수의 이름을 들어 보기는 했지만, 한번도 그에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저의 Face Book에 연달아 올라왔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에 관한 기사를 몇 편 읽어 보았고, 또한 노래도 몇 곡 들어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아주 구도적인 뮤지션(musician with seeker's heart)이었더군요. 한 때 대중의 갈채를 받기도 했지만,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기 위해 대중의 인기를 포기했습니다. 직접 작사하고 작곡하고 연주하고 노래하는 '노래꾼'이었습니다. 제가 들어 본 몇 노래 가사는 매우 철학적이고 문학적이었습니다. 남녀간의 시시껍절한 사랑이 아니라 인생과 세상에 대한 고뇌와 소망을 노래했습니다. 노랫말에 담긴 내용만으로 저는 그가 분명히 믿음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사를 뒤져 보니 천주교회에서 영세를 받았고, 청소년기에는 사제가 되겠다는 서원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경직된 사고와 분위기 때문에 청년 시절에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니 외형으로 보자면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쓴 노래 가삿말을 읽어 보면 무언가 참된 것, 영원한 것, 진실한 것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인이 아니었는지 몰라도 그의 내면은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갑자기 대중의 관심을 끈 노래가 있습니다. '민물장어의 꿈'이라는 노래인데요. 생전에 "이 곡은 내 장례식장에서 울려 퍼질 노래이며 이 노래 가사는 내 묘비명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노랫말에는 그의 영적 갈망이 아주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가사가 조금 깁니다만, 주의 깊게 들어 보십시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Toward that narrow and narrow door 들어가는 길은 A way to enter is 나를 깎고 잘라서 By cutting and carving me out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Only by decreasing myself 이젠 버릴 것조차 Even things to abandon now 거의 남은 게 없는데 Nothing much left at all 문득 거울을 보니 Suddenly looking in a mirror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One thing is left, pride 두고 온 고향 보고픈 얼굴 Home I left behind and faces I miss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 Warm dinner and sound of laughter 고갤 흔들며 지워버리며 Shaking head and erasing 소리를 듣네 I hear a sound 나를 부르는 Calling me 쉬지 말고 가라 하는 Urging me to keep going 저 강물이 모여드는 곳 The place where the rivers merge 성난 파도 아래 깊이 Deep down under raging waves 한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If I can get there even only once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One day until my heart explodes 흐느껴 울고 웃다가 Sobbing and laughing 긴 여행을 끝내리 I would end long journey 미련 없이 With no regrets 익숙해 가는 거친 잠자리도 The rough sleep space that is getting familiar 또 다른 안식을 빚어 Molding another rest 그마저 두려울 뿐인데 Only being afraid of that as well 부끄러운 게으름 Laziness to be shamed of 자잘한 욕심들아 So many small greeds 얼마나 나일 먹어야 How much more should I age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To find the peace of mind 하루 또 하루 Day by day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Enduring ever increasing load of loneliness 그보다 힘든 Harder than that 그보다 슬픈 Sadder than that 의미도 없이 잊혀지긴 싫은 Resisting to be forgotten with no meaning 두려움 때문이지만 Because of that fear 저 강들이 모여 드는 곳 The place where the rivers merge 성난 파도 아래 깊이 Deep down under raging waves 한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If I can get there only even once 나 언젠가 One day 심장이 터질 때까지 Until my heart explodes 흐느껴 울고 웃으며 Sobbing and laughing 긴 여행을 끝내리 I would end long journey 미련 없이 with no regrets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는 No one tells me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To know who I really am 시간이 허락한다면 또 다른 노래의 가사도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 정도로 그의 노랫말에는 진지하고도 치열한 구도적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영원한 것과 참된 것에 대한 갈망이 늘 꿈틀대고 있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2. 그의 때 이른 죽음을 애도하며 저는 자문합니다. 과연 그는 그것을 찾았을까? 너무도 아깝게 생을 마감하고 떠난 그곳에서 그는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것을 보고 찾고 싶었던 것을 찾았을까? 그곳에서 심장이 터지도록 울고 또한 웃고 있을까? 부디, 그렇게 되었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경계선을 넘는 순간, 그곳에서 그가 목청이 찢어져라 온 몸을 흔들며 땀에 흥건히 젖어 외쳤던 바로 그것을 만났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저 자신과 교우 여러분에게 여쭙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갈망이 있습니까? 하룻 밤 잘 자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그런 갈망,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면 해소되는 그런 갈망,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나면 사라지는 그런 갈망,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달콤한 시간을 가지고 나면 잦아드는 그런 갈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해 보아도 해결되지 않는 깊고 깊은 갈망을 말합니다. 잘 먹고 잘 살고 하고 싶은 것 다 해 보는 것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을 말합니다. 고 신해철씨로 하여금 대중의 인기도, 세속적인 성공도, 물질적인 풍요도 모두 사양하고 자신의 음악을 통해 찾고 얻으려 했던 그 갈망을 말합니다. 그 갈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 갈망이 우리를 인간 되게 합니다. 이 갈망이 없다면 우리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 지어졌으나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이 깊은 갈망이 있습니다. 이 갈망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는 '인간의 향기'가 납니다. 땅의 것이 전부라고 알고 물질에만 빠져 사는 사람에게서는 '하늘의 색깔'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이기를 그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 예민하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덜 예민하게 느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성의 작은 조각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 갈망이 살아 있는 법입니다. 오늘 저는 렉셔너리에 따라 시편 43편을 읽었습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오늘 읽은 시편 43편과 그 앞에 있는 42편은 원래 하나였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번역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두 개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43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42편에서부터 읽어야 합니다. 시편 42편 1절에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그 깊은 갈망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1절) 산 속에서 뛰어 놀던 사슴이 목이 말라 시냇물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시냇물이 말라 버렸습니다. 사슴은 메마른 바닥에 코를 대고 물기를 찾아 올라갑니다. 시냇물 줄기를 따라 올라가면서 숨이 차도록 물을 찾아 보지만 허사입니다. 기진한 사슴은 거친 숨으로 헐떡이며 시냇물 바닥에 주저 앉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그토록 간절하다고 고백합니다. 성서학자들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살 때 이 시편을 지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때 지어진 것은 아닐지 몰라도, 바벨론에 포로로 살던 사람들에게 가장 와 닿는 기도였을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마음 놓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은 파리하게 야위었고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었습니다. 42장 2절이 그 갈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니, 내가 언제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 얼굴을 뵈올 수 있을까? 3.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채울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자신의 가장 깊은 곳, 가장 중요한 곳이 비어 있는데, 그것을 채울 길이 없었습니다. 고 신해철씨로 하여금 노래로 절규하게 했던 그 깊은 영혼의 갈증이 3천 년 전의 시인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시인의 불행한 환경을 두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3절) 조롱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말보다 더 괴로운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도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 처하면 혹은 그런 상황에서 오래 머물게 되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이 몸이 원수에게 짓눌려 슬픈 나날을 보내야만 합니까?"(9절)라고 절규하게 됩니다. 그렇게 소리 없는 말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있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그거 봐! 하나님 믿어 보았자 소용이 없잖아!"라고 조롱하면 믿음은 더욱 흔들리고 괴로움은 배가 됩니다. 살아 생전에 고 신해철씨를 괴롭게 했던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뭔가 있기는 있습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먹고 자고 싸는 것이 다가 아님이 확실해 보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절대자가 존재하는 것 같고, 그분을 찾으면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가 모두 풀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그것이 잡히질 않습니다. 풀리질 않습니다. 교회에 가면 그 하나님을 만날 줄 알았는데, 그가 보기에 교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노랫말들에 숨겨져 있는 질문은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어떻게 당신을 찾을 수 있습니까?"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인은 채워지지 않는 갈망으로 괴로워하면서 자신을 향해 이렇게 타이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5절) 이 구절은 42편에 두 번, 43편에 한 번, 모두 세 번 반복됩니다. 노래로 따지면 후렴(refrain)인 셈입니다. 후렴은 주제를 반복하여 강조하는 기법입니다. 이 후렴구에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내적인 갈증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자신에게 타이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떠남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그러니 하나님을 찾고 기다리자고. 그분에게 모든 해결책이 있다고.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면서 시인은 기도합니다. 주님의 빛과 주님의 진리를 나에게 보내 주시어, 나의 길잡이가 되게 하시고, 주님의 거룩한 산, 주님이 계시는 그 장막으로, 나를 데려가게 해주십시오. (3절) 시인은 하나님의 빛과 진리를 구합니다. 하나님을 찾게 되기를,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빛을 받으면 자신이 그 고통의 땅을 벗어나 하나님의 거룩한 산, 주님이 계시는 장막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깊은 갈망을 채우고 참된 안식과 만족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고 신해철씨의 노랫말을 사용하여 표현한다면,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며, "얼마나 나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싶었던 그 안식을 얻을 것이며,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던 고독의 무게"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오늘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4. 고 신해철씨에 대한 생각 그리고 시편 42편과 43편에 대한 묵상은 참된 예배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시인은 하나님과 막힘 없이 소통하는 참된 예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인간이 인간으로 회복되는 사건입니다. 그 때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우리의 내면은 만족을 얻고 안식을 얻습니다. 그것은 죽고 나서 완성되는 것이지만,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도 경험할 수 있는 하늘의 은총입니다. 저는 앞에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만 매이거나 매몰되지 않고 영원하고 참된 것을 찾아 자주 하늘을 보고 별을 보는 사람에게서 '인간의 향기'가 풍긴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다만 육신이요 물질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하늘의 빛깔'이 우리에게서 드러난다면, 그 갈망이 채워질 때는 얼마나 더 그렇게 될까요? 영적 갈망을 몸부림쳐 노래하는 것도 아름답지만, 그 갈망이 채워지는 기쁨을 노래하는 것은 더 아름다울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에게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면, 영원을 품어 안은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폴 데이빗 트립(Paul David Tripp)은 말합니다. 인간은 근본적인 본성에 있어서 예배하는 존재다. 예배는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 아니다. 예배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인간은 예배 하는 자와 예배 하지 않는 자로 나눌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예배한다. 다만, 무엇을 혹은 누구를 예배하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다. '예배'라는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에서 일어나야 할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참된 삶을 원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삶의 우선순위의 가장 앞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녀들에게 안식일에 대해 가르치는 말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켜라. 그것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Keep the Sabbath. Then it will keep you.) 저는 이 말을 예배에 적용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예배를 지켜라. 그것이 너를 지켜 줄 것이다."(Keep the worship. It will keep you.) 진실하게 믿음 생활을 해 오신 분들이라면 이 말에 진리가 담겨 있음을 알 것입니다. 예배가 소홀해지면 우리의 삶도 허술해집니다. 예배가 황폐해지면 우리의 영혼과 삶도 황폐해집니다. 예배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도 죽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배를 준비하고 돕는 이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하고 또한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오직 하나님만이 높여지고 성도들의 영혼이 깨어나며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이 일어나도록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 기도로 준비해야 하고, 몸과 마음과 영혼을 예배에 합당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 드리는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도록 돕고, 또한 하나님으로 그들의 영혼이 채워지도록 섬겨야 합니다.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도, 영접하고 안내하는 사람도, 사회를 보고 성경을 읽는 사람도,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하나같은 마음으로 예배를 섬겨야 합니다. 고 신해철씨에 대해 어떤 사람이 쓴 글을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그 사람과 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품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교회 안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길을 찾을 수 있었다면 그 자신에게나 교회에게나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도 깊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자신의 도덕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재단하기에는 민첩하지만, 방황하는 영혼들을 품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도덕적 모범생들은 교회 문화에 쉽게 적응하지만, 회의하고 방황하며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교회의 품이 너무 좁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예배가 진지한 구도자들이 찾아와 길을 찾기에는 너무나 가볍고 얕고 또한 세속적입니다. 설교는 선전이나 잔소리로 전락했고, 예배는 소란한 쇼가 되어 버렸으며, 성도의 사귐은 의미 없는 잡담으로 대치되었습니다. 모든 책임이 예배를 준비하고 인도하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구경하는 태도로 예배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만 들으면 된다는 생각도 잘못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배의 모든 순서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아니, 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부터 달라야 합니다. 예배를 향해 오는 발걸음에, 예물을 준비하는 마음과 손길에, 말씀을 듣는 태도에, 찬양을 올리고 기도를 올리는 자세에 마음과 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 사람이라면, 예배는 우선 순위 맨 앞자리에 두어야 하고, 또 그렇게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5.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교우들 앞에 다짐합니다. 매 주일,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이 예배 중에 일어나도록 더욱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무릎꿇고 피를 찍어 말씀을 준비하겠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원의 품격을 드러낼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이 다짐과 함께, 교우들께 호소합니다. 먼저, 예배를 돕는 모든 분들에게 청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으로 예배를 돕든, 그 일이 설교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의 예배를 통해 한 사람이 죽음으로 향하는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만을 통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배 중에 일어나는 아주 작은 사건을 통해서도 성령께서는 생명을 건지는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그 일에 여러분의 작은 헌신이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예배를 찾아 나오신 모든 교우들께 청합니다. 예배자로서 매 주일 정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저를 위해서 그러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진정한 예배를 통해 얻는 영적 만족과 위로와 안식과 평안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여러분의 삶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두시기 바랍니다. 매 주일, 예배 드리는 것을 철칙으로 삼으십시오. 예배의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온 마음으로 집중하십시오. 예배 중에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자신을 단속하십시오. 그것은 자신에게도 좋지 않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는 일입니다. 일을 핑게로 예배가 소홀해지지 않도록 자신을 챙기십시오. 예배를 소홀히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 사탄의 가장 즐겨 사용하는 속임수입니다. 예배가 우리 안에서 살아날 때, 우리도 예배 안에서 살아납니다. 우리의 환경이 어떻게 되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소유하고, 외적인 조건이 아무리 우리를 고단하게 해도 고갈되지 않는 생명수가 우리의 내면에서 솟아나옵니다. 예배입니다. 예배가 생명입니다. 예배를 붙드십시오. 예배가 여러분을 붙들어 줄 것입니다. 아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저희는 주님을 예배하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저희에게 주님의 빛과 진리를 비추어 주소서. 주님의 위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도록 저희의 영혼을 깨워 주소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아멘. // |
첫댓글 남다른 해석을 좋아합니다 흥미롭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지혜로운 목사님의 설교.. 잘 읽었습니다. 김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