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회색 하늘을 바라보며 호경이는 처음으로 엄마를 떠올렸다.
무덥던 여름이 더운지도 모르게 지나가 버리고 길거리엔 낙엽이 뒹굴 거렸다.
계절이 지나면 마음이 바뀔거라고 여겼던 호경인 그렇지 못한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재유는 너무도 태연했고 점점 더 자신에게 의지해버리는 재유가 가엽기도 했다.
재유의 아버진 해외출장으로 한달 간 집을 비우게 됐다.
출장간지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는데 재유는 아버지의 출장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매일 밤 호경이의 방에 와서 호경이를 껴안고 잤다.
뭐, 종종 그런 날이 있었지만 왠지 이번엔 한달 내내 이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싫지 않다.
지금도 자신의 옆에서 너무나 편안하게 자는 재유를 보니 입맞추고 싶었다.
언제부터 이런 감정에 무뎌졌을까.
재유를 좋아하는 자신의 감정에 혼란스러우면서도 늘 행동이 생각보다 앞섰다.
입맞추고 싶으면 고민 없이 키스하게 되니까.
호경인 자고 있는 재유를 놔두고 침대에서 걸어 나왔다.
커튼을 걷으면 추울 것도 같았지만 그냥 걷어버렸다.
역시나 바깥은 회색 빛 이였다. 이제 곧 눈이 내릴 거다.
호경인 다시 커튼을 치고 이불속으로 들어왔다.
옆으로 누워있는 재유와 얼굴을 맞대고 호경인 재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재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어 혀로 재유의 입술을 자극했다.
재유가 살며시 웃는 것 같았다.
“재유야…”
호경이가 재유를 불렀다.
“으응…”
재유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안 일어 날거야?”
“몇 신데…? 오늘 일요일이잖아…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될까?”
재유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하고 있었다.
“오늘 정원청소나 할까?”
호경이가 재유의 귓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웨…ㄴ….저…ㅇ원청소….야…”
재유는 말만 들어도 귀찮다는 듯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꾸하고 있었다.
“낙엽이 너무 많아서 좀 쓸어야겠어.”
“난 싫어.”
재유가 살며시 눈을 떴다.
“게으름뱅이.”
호경이가 재유와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그래. 나 게으름뱅이 할래. 청소하는 건 싫으니까.”
재유는 자신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호경이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시도 때도 없이 너무 키스하는데…?”
호경이가 핀잔을 주듯 말하자 재유가 웃었다.
“나만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재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 이순간이 꿈이라도 좋을 만큼, 재유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호경인 정원으로 나왔다.
꽤 쌀쌀했지만 밖에 있을만했다. 빗자루를 들고 낙엽들을 쓸어 모았다.
여름에 그렇게 푸르던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 뒹굴자 호경인 괜시리 울적해졌다.
잠시후,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며 재유가 두꺼운 검정색 점퍼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습이었다.
“왜 나왔어?”
호경이가 웃으며 말했다.
“너 보고 싶어서.”
“푸핫~ 신재유…닭살스럽게.”
“진짠데.”
너무도 태연하게 말하는 재유 모습 때문에 호경인 더 웃음이 났다.
“아저씨는 잘 계시나? 전화도 한번 없으시네.”
호경이가 모아놓은 낙엽들을 정원 구석에 있던 자루에 차곡차곡 담았다.
“아버진 니가 이 집에 온 이후로 전화 하는 버릇을 없애셨어.
내가 혼자 있을 땐 늘 전화로 걱정을 하시는 분 이였거든.”
재유가 호경이를 칭찬하듯 말 한 거였는데 호경이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만큼 아저씨는 믿고 있다는 건데…
혹시라도 재유와의 이런 관계를 알면 무너질듯한 실망감에 좌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내와 딸을 잃었을 때 보다 더.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호경인 현실적인 생각을 잠시 접기로 했다.
우선은 한달 간 아저씨가 없으니까.
호경인 마치 재유와 밀월여행이라도 온 듯 비장한 각오로 재유를 바라보았다.
뭔가 여유로우면서 마음이 조급한 이 느낌은 언제부턴가 떨쳐지지가 않았다.
윤진인 집 근처 도서관에서 한참 공부를 하다가 펜을 놓았다.
호경이 생각에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친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문득문득 자신에게 무관심한 호경이가 못내 서운한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스무살이 지나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윤진인 웃어버렸다.
열 여덟, 열 아홉 그리고 스무살이라는 것이…
어떤 뚜렷한 경계가 있지도 않은 것인데.
마침 국어시간에 배운 분절성 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무지개 색이 일곱 빛깔이 아닌데 일곱 빛깔로 규정한 것처럼
우리들의 나이도 그렇게 규정한 것처럼
내 감정이 스무 살이 되는 동시에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토록 어리석게 혼자서 규정한 틀에 괴로워 하고 있는지.
윤진인 그제서야 호경이에 대한 감정을 부정하지 않았다.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이토록 보고 싶고 재유에게 질투하고 호경이에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
좋아하는 거였다.
윤진인 책상에 엎드렸다.
좋아하기 싫었다. 나한테 관심도 없는 너. 정말 사랑하기 싫었다.
윤진인 더 이상 공부를 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고 일어나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리고 도서관을 빠져 나왔다.
가방을 메고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로 들어와
길거리에 늘어진 쇼윈도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단발머리도 촌스러워 보이고
청바지에 평범한 검정색 더플코트를 입은 자신을 보니 초라하게 보였다.
윤진인 번화가를 걷다가 눈에 띈 샵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점원은 별 관심 없는 듯 윤진이를 한번 쓱 보고 제 할 일을 하는 듯 했다.
샵에는 윤진이보다 나이가 많은 대학생커플이 옷을 고르고 있었다.
윤진이도 이리저리 옷을 구경했다.
강렬한 레드와 검정색이 교차하여 깜찍해 보이는 미니모직스커트가 눈에 띄었다.
따뜻해 보이는 니트 목 폴라도 고르고 그 위에 어울리는 아이보리색 하프코트를 골랐다.
윤진인 점원의 도움을 받아 피팅룸에서 고른 옷들을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윤진이에게 관심 없던 점원이 눈을 떼지 못하는 듯 했다.
미니스커트 아래로 매끈한 각선미가 드러났다.
점원은 윤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윤진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주었다.
“학생, 너무 잘 어울려.”
점원이 웃었다.
“어울려요….?”
윤진이가 수줍은 듯 물었다.
“응. 너무 잘 어울려. 남자친구 있어?”
“네?”
“남자친구가 보면 좋아하겠다. 너무 예쁘다.”
옷을 팔려는 말투로 들릴 수도 있었으나 점원은 정말 윤진이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이거 다 주세요…”
윤진인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입었던 옷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기분이 좋았다.
“예쁘게 입어요. 학생.”
윤진인 계산을 하고 커다란 쇼핑백을 어깨에 맸다.
샵을 나와 길거리를 걷는데 윤진이의 눈엔 커플들의 모습만이 눈에 띄었다.
사랑은 이런걸까.
옷에 별 관심없던 나를 옷을 사게 하고
연인들에 별 관심없는 나를 연인들의 틈에 데려다 놓고
친구로만 생각하던 호경이가 온통 머릿속으로 가득해서 아무것도 할수 없는…
이렇게 사람을 변하게 하는게 사랑일까…
윤진인 코트안에 있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호경이에게 문자가 와있기를 기대 한다거나…
문자가 없다면 분명 시간확인을 한 후 집어 넣겠지만.
윤진인 핸드폰을 꺼냈다.
집에서조차 연락없는 무심한 핸드폰이 미워보였다.
친구도 아닌거야.
휴일을 지나치는데 뭐하고 보내는지 안부 문자메시지 안통도 없다니. 쳇~!
하지만 윤진인 본인도 그런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문자 보내기가 꺼려지는게 사실이지만
친구로서, 그래..친구로서 보낼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요일인데 뭐해? 공부 잘돼?]
몇 마디 끄적거리듯 문자를 적고 10분을 고민하다가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문자를 보낸 지 몇 분 되지 않아 답 문자가 도착했다.
호경 [집에 있었어. 넌?]
윤진 [나 밖이야. 쇼핑했어. 저녁은 먹었어?]
호경 [이제 먹어야지. 날씨 추운데 집에 빨리 들어가]
윤진 [응. 학교에서 봐]
호경 ……
마지막 답문은 없었다. 왠지 허무한듯한 문자 대화에 윤진인 맥이 풀렸다.
말을 해야 할까.
좋아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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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은작가입니다.
소설 재밌게 보셨나요?
오늘은 두편을 연달아 올렸습니다.
함박눈이 내렸어요.
날씨는 춥지만 왠지 눈을 보니 마음이 따뜻하네요 ^^
댓글 많이 달아주시구요.
주말도 즐겁게 보내세요^^
첫댓글 역시....좋아했던거야.
결말이 너무너무 궁금해요^^
아직 이야기가 남았지만 이번달 안에 완결을 할 생각이에요. 끝까지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