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신이치(이케다 선생님)는 통신교육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도정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초심을 관철하는 데 필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같은 뜻을 품은 벗과 교류하는 일은, 여러분에게 큰 격려와 힘이 될 것입니다.
서로 연계를 잘 취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기 바랍니다.
대학에서 배우는 의미 중 한가지는 인생의 벗을 얻는 일입니다.
서로 계발할 수 있는 벗은, 그 무엇보다 존귀한 재산입니다."
감연히 홀로 서서 고난이라는 벽에 정면으로 맞서겠다고 각오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성취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결심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게
하는 존재가 바로 벗이다.
마지막으로 신이치는 미래를 부탁하는 심정으로 힘주어 이렇게 말했다.
"통신교육부 제1기생 여러분은 통신교육부의 창립자입니다.
그 점을 부디 잊지 말기 바랍니다. 개척의 길은 험난하지만, 여러분이 열어
나아가는 향학의 발자취는, 소카대학교라는 이름과 더불어 영원히 현창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건투를 기원드립니다. 그리고 '건설의 길을 나아가는
통신교육부 학생의 미래에 영광있으라.'고 말씀드리며 인사를 마치겠습니다."
개설식에 모인 통신교육부 학생들 사이에서 일제히 결의에 찬 커다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400자 원고지로 8장에 이르는 장문의 메시지였다.
신이치는 이 원고를 몇번이고 거듭 수정하며 검토했다.
마음 같아서는 개설식에 참석해 통신교육부 학생 한사람 한사람을 끌어안고
축복하며 격려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하다못해
영원한 원점이 될 지침이라도 보내주고 싶었던 것이다.
참석자는 신이치의 깊은 진심과 한량없는 기대에, 감동으로 몸을 떨며 메시지
테이프를 들었다. 바로 이때 통신교육부 학생들 마음의 밭에는 맹세라는 씨앗이
심어졌다.
세계 최초의 통신교육은, 1840년 영국 아이작 피트먼이 발명한 속기강좌라고 한다.
이해에 시작한 우편제도를 이용한 강좌였다. 어학교육을 위한 통신교육은
1856년에 시작됐다. 독일 언어학자 구스타프 랑엔샤이트가 혼자서도 학습할 수 있는
어학용 통신교육 교재를 출판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통신교육은 멀리 떨어진 곳에 거주하기 때문에 통학하기 힘든 학생을
'교외(校外) 학생'으로 받아들이고 강의록을 보낸 일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도 1905년부터 약 3년간 통신교육에 종사했다.
당시 고등학교에서 배우고 싶어하는 여성을 받아들일 학교가 부족했다.
그래서 마키구치는 대일본고등여학교를 창립하고, 고등여학교 교육을 전수하는
통신교육에 힘썼다. '인생지리학'을 발간한 지 1년 반이 지난 서른세살 때였다.
그 당시는 여성에게 학문을 배우게 할 필요가 없다는 풍조가 만연했다.
그런 상황에서 마키구치는 '학문을 좋아하는 마음'을 억누르던 시대는 지났다고
잘라 말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여성교육의 발흥은 전적으로 세상의 진보에
수반하는 당연한 결과이고, 두말할 나위 없이 경축할만한 일이다.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며 남성과 함께 국가를 형성하는 여성을 위한 교육사상이
이와 같이 되기에 이르렀으니 오히려 그 시기가 늦었음을 애석하게 여겨야 한다."
여성을 그리고 민중을 현명하게 하는 일이, 사회를 번영시키는 근본적인 개혁이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대일본 고등여학회에서 '학문을 좋아하는 마음'을 지녔지만,
경제적인 사정 등으로 진학하지 못하는 여성에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며 연구를 거듭했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 가족에게는 입학금을 면제하고,
월사금을 반액으로 감면했다. 또 특별우대 전형을 마련해 소학교 교장이 추천하는
모범학생에게는, 입학금도 월사금도 무료로 했다.
대일본고등여학회 통신교육은 전성기에 이르자 수강생이 전국적으로 약2만을 헤아렸다.
그러나 형편이 힘든 사람들에게 교육 받을 환경을 제공하고 싶다는 마키구치의 교육방침을
관철하려면, 독지가 등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 결국 재정이 생각처럼 되지 않아
이윽고 경영은 난관에 봉착했으며, 마키구치는 사업에서 어쩔 수 없이 손을 떼야만 했다.
소카대학교에 통신교육부를 개설하는 일은, 이를테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교육을 실현하고자
했던, 마키구치의 비원(悲願)이 열매를 맺은 일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그런 선사의 고투를 알고
있던 야마모토 신이치는 '손제자인 내가 마키구치 선생님의 염원을 달성하자.'고 결심하고
있었다. 영원한 사제(師弟)의 길이 대사업을 성취하게 만든다.
마키구치의 제자 도다 조세이도 마찬가지로 통신교육에는 각별히 힘을 쏟았다.
도다는 월간학습잡지 '소학생 일본'을 1940년 1월에는 5학년을 대상으로, 4월에는 6학년을
대상으로 창간했다. 그 안에는 잘라서 보낼 수 있는 '지면고사문제'를 실었다.
답안지가 도착하면 채점을 매기며 틀린 답을 고치고, 문제를 바르게 푸는 법을 지도하며
비평을 덧붙여 돌려보냈다.
도다 조세이는 '소학생 일본'에 실은 '지면고사문제'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사람을
지면에 발표하고, 메달이나 기념품을 보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다음 세대를 짊어질
'보배'인 어린이들의 학습의욕을 조금이라도 높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발간 이듬해인 1941년 봄, 국민학교령에 따라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바뀜으로써
'소학생 일본'도 '소국민일본'으로 제목을 바꿨다. 이해 발간한 10월호에 따르면,
고사문제에 응모한 사람은 5,6학년생을 합해 1만 2천명이 넘었다.
그후 도다는 군부정부의 탄압으로 체포되었다.
1945년 7월 3일에 출옥해 사업을 재건하기 시작한 도다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배우고 싶어도 전쟁 때문에 배우지 못한 청소년을 위한 통신교육사업이었다.
중학생(옛 제도)을 대상으로 한 6개월 과정으로 수학과 물상(물리, 화학, 광물학 등을 포괄한
교과) 교재를 한달에 두번 보내고, 한달에 한번 시험문제 첨삭을 실시했다.
나중에는 영어도 첨삭했으며, 고등학교와 전문학교(옛 제도) 입시에 대비하기 위한 첨삭도
시작했다.
신청과 동시에 돈을 미리 지불하는 방식이었는데, 하루에 8백통이 넘는 신청서가 도착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혼란한 시기에 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종이 값을 비롯해 인쇄비가 계속 뛰어올라 통신교육사업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모든 사람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주고 싶다.
민중이 현명해지지 않으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없다.
그러려면 교육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생각이 바로 도다가 지닌 신념이었다. 그러니만큼 통신교육사업에서 손을 떼는 일은
분명히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도다는 야마모토 신이치에게 개인교수를 할 때도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일본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교육 환경을 구축해야만 한다."
신이치는 그 말을 유언이라고 생각하며 들었다.
소카대학교가 통신교육을 시작한 1976년에 통신교육을 실시하던 대학교는 호세이대학교와
게이오기주쿠대학교를 비롯해 사립대 11곳이었다. 소카대학교는 일본의 대학교 중에서
열두번째로 통신교육부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소카대학교 설립을 구상했을 때부터 통신교육부를 개설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민중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대학교를 건설하는 일이 신이치의 구상이었기
때문이다.
1969년 4월 2일에 소카대학교 기공식이 열렸는데, 신이치는 그로부터 한달 후인 5월 3일에
열린 본부총회에서 가급적이면 한시라도 빨리 통신교육부를 개설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통신교육이라면 연령과 직업 그리고 거주지 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면학에 힘쓸 수가 있습니다."
또 신이치는 자주 학회 고등부원들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며 격려했다.
"고등부원은 가급적이면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자기가 벌어서 야간대에 들어가면 됩니다. 또 통신교육이라도 좋습니다."
중요한 점은 학력이 아니다. 끝까지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이다.
배우려는 마음이 없으면 천하다.
신이치는 환경이 어떻든지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뜻을 품기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도 그런 뜻을 품은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는 통신교육부 설치를 염원했다.
그러나 대학교를 개교함과 동시에 통신교육부를 설치한다는 구상은 실현하지 못했다.
그런 예가 일찍이 없었다는 점에서 문부성(당시)이 인가를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문부성 담당관은 졸업생을 배출하고 나서라면 신청을 받겠다고 했다. 신이치는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의 심정으로 통신교육부를 개설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1971년에 소카대학교가 개교할 당시부터 사무국장은 나날이 업무를 보는 한편
통신교육부를 개설하기 위해 준비했다. 그리고 소카대학교 제1기생을 사회로 배출하는
1975년을 맞자 담당직원도 여러 명으로 늘리고, 드디어 통신교육부 개설을 향해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다른 대학교 통신교육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와 자료를 수집하는 일을 비롯해 학부 등을
구성하고 교육과정을 짜야하는 등 당면과제가 산더미 같았다.
모든 일이 새로운 시도였고, 암중모색을 거듭했다. 그러나 사무국장을 비롯해
담당직원들은 묵묵히 준비에 임했다. '이 통신교육에는 민중에게 개방된 소카대학교의
진면목이 있다.'고 생각하니 투지가 샘솟고, 고생에 따른 피로도 싹 가셨다.
"기뻐하라! 기뻐하라! 인생의 사업, 인생의 사명은 기쁨이다."라는 말은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잠언이다. 준비에 임하는 직원들은 틀림없이 그 말을
실감했을 것이다.
협의를 거듭해 경제학부와 법학부를 설치하기로 하는 등 전체적인 구상을 정리하고
문부성에 개설을 신청했다. 인가는 이듬해 1976년 2월 10일에 났다.
소카대학교 통신교육은 '학교교육법'을 바탕으로 실시하는 정규 대학교육이다.
고등학교 졸업 또는 그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사람이 입학할 수 있으며, 정규과정
(경제학부, 법학부)을 졸업하면 '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한편 학력과 상관없이 교양 삼아 대학과정을 공부하고 싶다는 사람 등이 배우는
특수과정(현재 과목이수 등)도 설치했다. 이 특수과정에서도 정규과정으로 진학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직원들은 개설 준비가 끝나가자 전국 각지에서 통신교육 설명회를 열고,
통신교육에 담긴 의의라든지 교육내용 그리고 특색 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1976년 2월부터 드디어 통신교육부 입학원서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어 1976년도 제1기생은 2천명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