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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dānavaggo ♦ 1. nidānasaṃyuttaṃ (SN 12.1)
♦ 4. kaḷārakhattiyavaggo ♦ 1. bhūtasuttaṃ (SN 12.31)
제 4장 깔라라캇띠야 품 Kaḷarakhattiya vagga
되어있는 것 경(S12:31) Bhūta-sutta
♦ 31.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tatra kho bhagavā āyasmantaṃ sāriputtaṃ āmantesi —
2. 거기서 세존께서는 사리뿟따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vuttamidaṃ, sāriputta, pārāyane ajitapañhe —
3. “사리뿟따여, 『숫따니빠따』「도피안 품」의 「아지따의 질문」218)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218) 이「아지따의 질문」(Ajita-pañha)은 『숫따니빠따』 제5장 「도피안 품」(Parāyana Vagga, Sn.190 이하)에 나타나는 16개의 질문 가운데서 제일 처음 질문이다.
♦ “ye ca saṅkhātadhammāse, ye ca sekkhā puthū idha.
♦ tesaṃ me nipako iriyaṃ, puṭṭho pabrūhi mārisā”ti.
'법을 헤아려 아는 자들과
여기 여러 단계의 유학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질문 드리옵니다.
존자시여, 슬기로운 분께서는 제게 설명하여 주소서.'219)
219) “'법을 헤아려 아는 자들(saṅkhāta-dhammāse)'이란 진리를 꿰뚫은 자들(paṭividdha-saccā)로 번뇌 다한(khīṇāsavā) [아라한]을 말한다. 여기서 헤아려 앎(saṅkhā)이란 통찰지(반야, paññā)를 말하며 [소유복합어, 有財釋, bahuvrīhi]이다.”(SAȚ.ii.62)
“'여기(idha)'란 이 교법에서(imasmiṃ sāsane)라는 뜻이며, '유학(sekhā)'은 일곱 [단계의] 유학들을 말한다. '여러 단계(puthū)'라고 한 것은 이러한 일곱 [단계의] 사람들을 두고 말한 것이다.”(SA.ii.60)
여기서 일곱 단계란 예류도부터 아라한도까지의 일곱 단계의 성자들을 말한다. 아라한과는 유학이 아닌 무학(asekkha)이다.
♦ “imassa nu kho, sāriputta, saṃkhittena bhāsitassa kathaṃ vitthārena attho daṭṭhabbo”ti?
evaṃ vutte, āyasmā sāriputto tuṇhī ahosi.
사리뿟따여, 이렇게 간략하게 설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그 뜻을 자세하게 봐야 하는가?”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사리뿟따 존자는 침묵하고 있었다.
dutiyampi kho bhagavā āyasmantaṃ sāriputtaṃ āmantesi ... pe ...
dutiyampi kho āyasmā sāriputto tuṇhī ahosi.
tatiyampi kho bhagavā āyasmantaṃ sāriputtaṃ āmantesi —
“vuttamidaṃ, sāriputta, pārāyane ajitapañhe —
♦ “ye ca saṅkhātadhammāse, ye ca sekkhā puthū idha.
♦ tesaṃ me nipako iriyaṃ, puṭṭho pabrūhi mārisā”ti.
♦ “imassa nu kho, sāriputta, saṃkhittena bhāsitassa kathaṃ vitthārena attho daṭṭhabbo”ti?
tatiyampi kho āyasmā sāriputto tuṇhī ahosi.
4. 두 번째로 … 세 번째로 세존께서는 사리뿟따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사리뿟따여, 『숫따니빠따』「도피안 품」의 「아지따의 질문」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법을 헤아려 아는 자들과
여기 여러 단계의 유학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질문 드리옵니다.
존자시여, 슬기로운 분께서는 제게 설명하여주소서.'
사리뿟따여, [48] 이렇게 간략하게 설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그 뜻을 자세하게 봐야 하는가?”
세 번째에도 사리뿟따 존자는 침묵하고 있었다. 220)
220) “사리뿟따 존자는 왜 세 번째까지 침묵하고 있었는가? 그는 질문 때문에 당혹한 것이 아니라 세존의 의향(ajjhāsaya)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는 무더기[蘊]나 요소[界]나 감각장소[處]나 조건[緣]의 형태(paccay-ākāra)를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스승의 의향을 파악하여 말씀드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께서는 이것을 아시고서 다음 문장에서 '사리뿟따여, 그대는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보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SA.ii.60)
♦ “bhūtamidanti, sāriputta, passasī”ti?
5. “사리뿟따여, 그대는 '이것은 되어있는 것(오온)221) 이라고 보는가?
사리뿟따여, 그대는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보는가?”
221) “'되어있는 것(bhūta)'이란 생긴 것(jāta), 존재하는 것(nibbatta)인데 이것은 다섯 가지 무더기(오온, khandha-pañcaka)의 이름이다. 이렇게 하여 스승께서는 '사리뿟따여, 오온을 통해서 이 질문에 대답을 하라.'고 장로에게 방법을 일러주신 것이다.”(SA.ii.61)
222) “바'른 통찰지로 본다(sammappaññāya passati).'는 것은 위빳사나에 의해서 도의 통찰지(magga-paññā)로 바르게 본다는 뜻이다.”(SA.ii.61)
bhūta : bhavati의 pp. bhava : 흔히 有(to be)로 번역하는 變成(to become, 됨.) S12:12 viññāṇāhār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paccayo, tasmiṃ bhūte sati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識食 · 能招未來有 · 令相續生 · 有有故 有六入處 · 六入處緣觸' * [今生에서의] ① 識食(viññāṇāhāro)은 未來(āyatiṃ) 再有(punabbhava)를 能招(abhinibbattiyā)하는 緣(paccayo)이다. 相續(tasmiṃ 막상) ② 有됨(bhūte = 名色 nāmarūpa)이 有(있으면, sati), ☞ 慾界(名色) ③ 六入處(saḷāyatanaṃ = 生 jāti)가 有(있고, hoti) ☞ 慾界를 의미한다. ③ 六入處(saḷāyatana)을 緣(paccayā)하여 ④ 觸(phasso)이 있다. *(5)蘊를 愛取 [食(viññāṇāhāro) = (5)取蘊] 하면 ② 有[됨 = (5)取蘊의 名色화] ☞ 욕계에 어울리는 5온. 그러나 색계에 어울리는 5온은 아님. 무색계(4온)는 아예 아님. |
bhūtamidanti, bhante,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i.
bhūtamid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bhūtass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ṭipanno hoti.
“세존이시여, [비구는]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봅니다.222)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
되어있는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습니다. 223)
223) “'도를 닦는다(paṭipanno hoti).'는 것은 계로부터 시작해서 아라한도에 이르기까지 염오 등을 위해서 도를 닦는다는 말이다.”(SA.ii.61)
tadāhārasambhav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i.
tadāhārasambhav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āhārasambhavass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ṭipanno hoti.
그것은 음식에서 생겨난 것224)이라고 바른 통찰지로 봅니다.
그것은 음식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
음식에서 생겨난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습니다.
224) [네 가지] 음식(āhāra)에 대해서는 본서 「음식 경」(S12:11)과 「몰리야팍구나 경」(S12:12)과 그곳의 주해들을 참조할 것. 오온은 음식에 조건 지워져서 생겨난 것이고 본경은 이러한 조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본서 제3권 「무더기 상윳따」(S22)에 포함되지 않고 여기 「인연 상윳따」 (S12)에 포함된 것이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음식에서 생겨난 것(tad-āhāra-sambhava)'이라는 것은 이 오온(khandha-pañcaka)은 음식을 반연하여 유지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방법(pariyāya)으로 유학의 도닦음(sekkha-paṭipadā)을 말하고 있다.”(SA.ii.61)
tadāhāranirodhā yaṃ bhūtaṃ taṃ nirodhadhamm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i.
tadāhāranirodhā yaṃ bhūtaṃ taṃ nirodhadhamm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nirodhadhammass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ṭipanno hoti.
evaṃ kho, bhante, sekkho hoti.
그 음식이 소멸할 때 되어있는 것도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봅니다.
그 음식이 소멸할 때 되어있는 것도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
소멸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해서 유학이 됩니다.”
♦ “kathañca, bhante, saṅkhātadhammo hoti?
bhūtamidanti, bhante,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i.
bhūtamid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bhūtassa nibbidā virāgā nirodhā anupādā vimutto hoti.
tadāhārasambhav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i.
tadāhārasambhav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āhārasambhavassa nibbidā virāgā nirodhā anupādā vimutto hoti.
tadāhāranirodhā yaṃ bhūtaṃ taṃ nirodhadhamm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i.
tadāhāranirodhā yaṃ bhūtaṃ taṃ nirodhadhamm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nirodhadhammassa nibbidā virāgā nirodhā anupādā vimutto hoti.
evaṃ kho, bhante, saṅkhātadhammo hoti.
6.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서 법을 헤아려 아는 자가 됩니까?
세존이시여,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봅니다.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
되어있는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여 취착 없이 해탈합니다.
그것은 음식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바른 통찰지로 봅니다.
그것은 음식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
음식에서 생겨난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여 취착 없이 해탈합니다. 225)
225) “'취착 없이 해탈한다(anupādā vimutta).'는 것은 네 가지 취착(upādāna)으로 어떤 법도 취하지 않고 해탈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아라한됨 즉 법을 헤아려 아는 자가 됨을 드러내고 있다. 네 가지 취착에 대해서는 본서 「분석 경」(S12:2) §7을 참조할 것.
그 음식이 소멸할 때 되어있는 것도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봅니다.
그 음식이 소멸할 때 되어있는 것도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
소멸하기 마련인 법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49] 소멸하여 취착 없이 해탈합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해서 법을 헤아려 아는 자(아라한)가 됩니다.”
...........
♦ “sace pana taṃ, sāriputta, evaṃ puccheyyuṃ —
‘kathaṃ vimokkhā pana tayā, āvuso sāriputta, aññā byākatā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ī’ti?
evaṃ puṭṭho tvaṃ, sāriputta, kinti byākareyyāsī”ti?
“sace maṃ, bhante, evaṃ puccheyyuṃ —
‘kathaṃ vimokkhā pana tayā, āvuso sāriputta, aññā byākatā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ī’ti.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ṃ —
12. “사리뿟따여,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도반 사리뿟따여, 어떻게 해탈하였기 때문에 그대는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꿰뚫어 안다.'라고 구경의 지혜를 드러냅니까?'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세존이시여, 만일 제게 묻기를 '도반 사리뿟따여, 어떻게 해탈했기 때문에
그대는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꿰뚫어 안다.'라고
구경의 지혜를 드러냅니까?'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ajjhattaṃ vimokkhā khvāhaṃ, āvuso, sabbupādānakkhayā
tathā sato viharāmi
yathā sataṃ viharantaṃ āsavā nānussavanti,
attānañca nāvajānāmī’ti.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n”ti.
도반들이여, [54] 나는 안으로해탈239)을 하였고 모든 취착이 다하였기 때문에240)
번뇌들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241) 그러한 마음챙김으로 머물며,
또한 나 자신을 경멸하지 않습니다.'242)라고 저는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239) “'안으로 해탈함(aijhattaṃ vimokkhā)'이란 안, [즉 자기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형성된 것들(ajjhatta-saṅkhārā)을 완전히 파악한 뒤 아라한과를 얻음에 의해서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 그것은 ① 안을 천착(abhinivesa)한 뒤 안으로부터 출현함(vuṭṭhāna) ② 안을 천착한 뒤 밖으로부터 출현함 ③ 밖을 천착한 뒤 밖으로부터 출현함 ④ 밖을 천착한 뒤 안으로부터 출현함이다.”(SA.ii.63~64)
주석서는 이 넷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청정도론』 XXI.85에 나타나는 도의 출현(magga-vuṭṭhāna)과 일치하므로 이 부분을 참조할 것
240) “네 가지 취착(upādāna)이 모두 다하였다는 말이다.”(SA.ii.64)
241) “'번뇌들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āsavā na anussavanti)'이란 여섯 가지 문(dvāra)을 통해서 여섯 가지 대상(ārammaṇa)들로 흐르는 성질(savana-dhamma)을 가진 감각적 욕망의 번뇌(kāmāsava) 등의 [네 가지] 번뇌들(감각적 욕망의 번뇌, 존재의 번뇌, 견해의 번뇌, 무명의 번뇌)이 흐르지 않는다, 증장하지 않는다(na anuppavaḍḍhanti)는 뜻이다.” (SA.ii.64)
242) '경멸하다'는 avajānāmi를 옮긴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모멸감(열등감, omāna)을 제거했음을 말하고 있다.”(SA.ii.64)
♦ “sādhu sādhu, sāriputta.
ayampi kho sāriputta, pariyāyo etasseva atthassa saṃkhittena veyyākaraṇāya —
ye āsavā samaṇena vuttā tesvāhaṃ na kaṅkhāmi, te me pahīnāti na vicikicchāmī”ti.
13. “장하고도 장하구나, 사리뿟따여. 그대가 말한 이 방법은 간략하게 설명하면
'사문에 의해서243) 설해진 번뇌들에 대해서 나는 의문을 가지지 않으며
나는 그러한 번뇌들을 제거하였음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라는 것이다.”
243) “'사문에 의해서(samaṇena)'란 부처님이라는 사문(buddha-samaṇa)에 의해서라는 뜻이다.” (SA.ii.64)
♦ “sā hi, bhikkhu, sāriputtassa dhammadhātu suppaṭividdhā,
yassā dhammadhātuyā suppaṭividdhattā
divasaṃ cepāhaṃ sāriputtaṃ etamatthaṃ puccheyyaṃ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16. “비구여, 사리뿟따는 법의 요소[法界]244)를 잘 꿰뚫었기 때문이다.
그는 법의 요소를 잘 꿰뚫었기 때문에 만일 내가 낮이 다가도록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사리뿟따에게 이러한 뜻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사리뿟따는 여러 가지 단어들과 여러 가지 방법들로 낮이 다가도록 나에게 그 뜻을 설명할 것이다.
244) “여기서 '법의 요소[法界, dhamma-dhātu]'란 것은 조건의 형태(paccay-ākāra)를 어떠한 애매모호함도 없이 드러내어 보여줄 수 있는(vivaṭabhāva-dassana-samattha) 제자가 완전하게 갖추어야 할 지혜(sāvaka-pāramī-ñāṇa)를 말한다. 마치 부처님들에게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법들에 대한 일체지지(一切知智, sabbaññuta-ññāṇa)가 분명하듯이, 장로에게도 제자가 완전하게 갖추어야 할 지혜가 있어서 그는 제자가 갖추어야 할 지혜의 영역에 속하는 법들을 모두 안다는 말이다.”(SA.ii.66~67)
dutiyaṃ.
♦ 3. ñāṇavatthusuttaṃ (SN 12.33) 지혜의 토대 경1(S12:33) Ñāṇavatthu-sutta
♦ 33. sāvatthiyaṃ ... pe ...
“catucattārīsaṃ vo, bhikkhave, ñāṇavatthūni desessāmi, taṃ suṇātha,
sādhukaṃ manasi karotha; bhāsissāmī”ti.
“evaṃ, bhante”ti kho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bhagavā etadavoca --
2.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44가지 지혜의 토대를 설하리라.
… <S12:1 §3> …
♦ “katamāni , bhikkhave, catucattārīsaṃ ñāṇavatthūni?
jarāmaraṇe ñāṇaṃ, jarāmaraṇasamudaye ñāṇaṃ, jarāmaraṇanirodhe ñāṇaṃ,
jarāmaraṇ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ñāṇaṃ;
3.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44가지 지혜의 토대인가?
늙음 · 죽음에 대한 [57] 지혜, 늙음 · 죽음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늙음 · 죽음의 소멸에 대한 지혜, 늙음 · 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이다.
♦ “ye kho keci atītamaddhānaṃ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jarāmaraṇaṃ abbhaññaṃsu,
jarāmaraṇasamudayaṃ abbhaññaṃsu, jarāmaraṇanirodhaṃ abbhaññaṃsu,
jarāmaraṇanirodhagāminiṃ paṭipadaṃ abbhaññaṃsu,
sabbe te evameva abbhaññaṃsu, seyyathāpāhaṃ etarahi.
과거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늙음 · 죽음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늙음 · 죽음의 일어남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늙음 · 죽음의 소멸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늙음·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최상의 지혜로 알았던 것은
모두 마치 지금의 내가 최상의 지혜로 아는 것과 같다. 248)
248) “마치 내가 지금 사성제(catu-sacca)를 통해서 아는 것처럼”(SA.ii.67)
최상의 지혜(abbhaññaṃsu, 아빈냐) : 自內證(본인이 직접 경험하여 안 것) |
♦ “yepi hi keci anāgatamaddhānaṃ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jarāmaraṇaṃ abhijānissanti,
jarāmaraṇasamudayaṃ abhijānissanti, jarāmaraṇanirodhaṃ abhijānissanti,
jarāmaraṇanirodhagāminiṃ paṭipadaṃ abhijānissanti, sabbe te evameva abhijānissanti,
seyyathāpāhaṃ etarahīti.
미래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늙음 · 죽음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늙음 · 죽음의 일어남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늙음 · 죽음의 소멸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늙음 · 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최상의 지혜로 알게 될 것은
모두 마치 지금의 내가 최상의 지혜로 아는 것과 같이 알게 될 것이다.”
idamassa anvaye ñāṇaṃ.
♦ “yato kho, bhikkhave, ariyasāvakassa imāni dve ñāṇāni parisuddhāni honti pariyodātāni —
dhamme ñāṇañca anvaye ñāṇañca.
6.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는 법에 대한 지혜와 수반하는 지혜249)라는
이러한 지극히 청정하고 지극히 깨끗한 두 가지 지혜가 있다.
249) “'수반하는 지혜(anvaye ñāṇa)'란 법에 대한 지혜에 수반되는(anugamane) 지혜인데 반조의 지혜(paccavekkhaṇa-ñāṇa)의 다른 이름이다. '법에 대한 지혜(dhamme ñāṇa)'란 도의 지혜(magga-ñāṇa)이다. 그리고 본경에서는 번뇌 다한 자(khīṇāsava)의 [이전의 경지인] 유학의 경지(sekkhabhūmi)를 설하신 것이다.”(SA.ii.67)
『청정도론』 XXII.19 이하에 의하면 반조의 지혜는 도와 과를 증득한 뒤에 “① 도를 반조하고 ② 과를 반조하고 ③ 버린 오염원들을 반조하고 ④ 남아있는 오염원들을 반조하고 ⑤ 열반을 반조하는 것”이다. 본경에서는 수반하는 지혜를 반조의 지혜로 보기보다는 법에 대한 지혜를 과거와 미래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반조의 지혜(paccavekkhaṇa-ñāṇa)는 『청정도론』 XXII.19 이하와 『아비담마 길라잡이』 9장 §34의 해설을 참조할 것.
ayaṃ vuccati, bhikkhave, ariyasāvako diṭṭhisampanno itipi, dassanasampanno itipi,
āgato imaṃ saddhammaṃ itipi, passati imaṃ saddhammaṃ itipi,
sekkhena ñāṇena samannāgato itipi, sekkhāya vijjāya samannāgato itipi,
dhammasotaṃ samāpanno itipi, ariyo nibbedhikapañño itipi, amatadvāraṃ āhacca tiṭṭhati itipīti.
이를 일러 성스러운 제자는 견해를 구족했다고도 하고, 봄[見]을 구족했다고도 하고,
정법에 도달했다고도 하고, 정법을 보았다고도 하고, 유학의 지혜를 구족했다고도 하고,
유학의 명지를 구족했다고도 하고, 법의 흐름을 얻었다고도 하고,
성스러운 꿰뚫는 통찰지를 [얻었다]고도 하고, 불사(不死)의 문에 도달하여 머문다고도 한다.”
.........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ñāṇaṃ; asati jātiyā natthi jarāmaraṇanti ñāṇaṃ;
atītampi addhānaṃ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ñāṇaṃ, asati jātiyā natthi jarāmaraṇanti ñāṇaṃ;
anāgatampi addhānaṃ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ñāṇaṃ, asati jātiyā natthi jarāmaraṇanti ñāṇaṃ;
yampissa taṃ dhammaṭṭhitiñāṇaṃ
tampi khayadhammaṃ vayadhammaṃ virāgadhammaṃ nirodhadhammanti ñāṇaṃ.
4.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는 지혜, 태어남이 없으면 늙음 · 죽음이 없다는 지혜,
과거에도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었다는 지혜,
과거에도 태어남이 없었으면 늙음 · 죽음이 없었다는 지혜,
미래에도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는 지혜,
[미래에도] 태어남이 없으면 늙음 · 죽음이 없다는 지혜,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250)도 역시 괴멸하기 마련인 법이고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고
탐욕이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는 지혜251)이다.”
250)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法住智, dhammatṭṭiti-ñāṇa]'란 조건[緣]에 대한 지혜(paccay-ākāre ñāṇa)이다. 조건이 바로 법들이 전개되고 유지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pavatti-ṭṭhiti-kāraṇattā) 법들의 조건[法住,dhamma-tṭṭiti]이라 불리고 이것에 대한 지혜가 바로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이다. 이것은 본문에 나타나는 여섯 가지 지혜를 말한다.”(SA.ii.68)
한편 본서 「조건 경」(S12:20)에서는 dhammatṭṭititatā가 나타났는데 '법으로 확립된 것'으로 옮겼고, 본경의 dhammatṭṭiti는 주석서를 참조해서 '법들의 조건'이라고 옮기고 있다. 이 둘은 동의어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후자는 본서 「수시마 경」(S12:70) §15에도 나타난다.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法住智]에 대해서는 『청정도론』VII.20; 22와 XIX.25~26을 참조할 것.
251)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도 역시 괴멸하기 마련인 법이고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고 탐욕이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라는 지혜'를 주석서는 “위빳사나에 대한 역(逆) 위빳사나(vipassanā-paṭivipassanā)”(SA.ii.68)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위빳사나의 지혜 역시 소멸되기 마련이라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청정도론』 XXI.10이하(특히 §§11~13)에서 (2) 무너짐을 관찰하는 지혜(bhaṅga-anupassanā-ñāṇa)의 주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참조할 것.
.........
‘katamaṃ jarāmaraṇaṃ, kassa ca panidaṃ jarāmaraṇan’ti iti vā,
bhikkhu, yo vadeyya, ‘aññaṃ jarāmaraṇaṃ aññassa ca panidaṃ jarāmaraṇan’ti, iti vā,
bhikkhu, yo vadeyya, ubhayametaṃ ekatthaṃ byañjanameva nānaṃ.
taṃ jīvaṃ taṃ sarīranti vā, bhikkhu, diṭṭhiyā sati brahmacariyavāso na hoti.
aññaṃ jīvaṃ aññaṃ sarīranti vā, bhikkhu, diṭṭhiyā sati brahmacariyavāso na hoti.
“비구여, '어떤 것이 늙음 · 죽음이며 누구에게 늙음 · 죽음이 있습니까?'라고 말하거나
'늙음 · 죽음과 늙고 죽는 자는 다르다.'라고 말하면 이 둘은 그 뜻은 같고 단지 문장이 다를 뿐이다. 비구여,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는 견해가 있으면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254)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으면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255)
254) “'청정범행을 닦음(brahmacariya-vāsa)'이란 성스러운 도를 닦음(ariya-magga-vāsa)이다. 그런데 '생명이 바로 몸이디(taṃ jīvaṃ taṃ sarīraṃ).'라는 견해는 생명이 끝나면 몸도 끝나고, 몸이 끝나면 생명도 끝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중생은 [죽고 나면] 단멸한다(ucchijjati)고 거머쥐기 때문에 단견[斷見, 단멸론, uccheda-diṭṭhi)이라 부른다. 그런데 형성된 것들[諸行, saṅkhārā]은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고 간주하는 것이 교법의 영역(sāsana-avacara)에서는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이다.그리고 성스러운 도는 윤회(vaṭṭa)를 소멸하고 윤회를 끝장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멸론을 가진 자에게는 도를 닦음(magga-bhāvanā)이 없이도 윤회가 소멸하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niratthakā) [모순에] 빠진다. 그래서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brahmacariya-vāso na hoti)'고 말씀하신 것이다.”(SA.ii.68~69)
255) “두 번째로 '생명과 몸은 다르다(aññaṃ jīvaṃ aññaṃ sarīraṃ).'는 견해는 몸이 여기서 끝나더라도 생명은 그렇지 않다. 생명은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자유롭게(yathā-sukhaṃ) 간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생명은 이 세상으로부터 저세상으로 간다고 거머쥐기 때문에 상견(常見, 상주론, sassata-diṭṭhi)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성스러운 도(ariya-magga)는 삼계윤회(tebhūmaka-vaṭṭa)를 벗어나기 위한(vivaṭṭenta)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하나의 형성된 것(eka-saṅkhāra)이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다고 한다면 이미 생겨난 윤회로부터 벗어남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magga-bhāvanā)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niratthakā) [모순에] 빠진다. 그래서 이런 견해를 가진 자도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SA.ii.69)
ete te, bhikkhu,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비구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라고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 7. natumhasuttaṃ (SN 12.37) 그대들 것이 아님 경(S12:37) Natumha-sutta
♦ 37. sāvatthiyaṃ viharati ... pe ...
“nāyaṃ, bhikkhave, kāyo tumhākaṃ napi aññesaṃ.
3. “비구들이여, 이 몸은 그대들의 것도 아니고 남들의 것도 아니다. 258)
258) “자아(atta)가 있을 때 자아에 속하는 것(attaniya)이 있다. 그러나 자아가없기 때문에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na tumhākaṃ).'라고 하셨다. '남들의 것도 아니다(napi aññesaṃ).'에서 남이란 남들의 자아(paresaṃ attā)이다. 그것이 있을 때 남들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남들의 것도 아니다.'라고 하셨다.”(SA.ii.70)
purāṇamidaṃ, bhikkhave, kammaṃ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 vedaniyaṃ daṭṭhabbaṃ”.
비구들이여, [65]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생긴 이 몸은 259)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260)
259) 원문은 purāṇam idaṃ kammaṃ(이 오래된 업)인데 주석서는 “오래된 업에 의해서 생긴(purāṇa-kamma-nibbatta) 이 몸(kāya)이니 조건이라는 일상적인 어법(paccaya-yohāra)을 통해서 말씀하셨다."(Ibid)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풀어서 옮겼다.
260) “'형성된 것(abhisaṅkhata)'이란 조건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paccayehi kata)이라고 보아야 한다.”(SA.ii.70)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옮긴 원어는 abhisañcetayita(의도)인데 주석서에서 “의도의 토대가 되고(cetanā-vatthuka) 의도의 뿌리가 되는 것(cetanā-mūlaka)이라고 보아야 한다.”(Ibid)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으로 옮긴 원어는 vedaniya(느껴진 것)인데 주석서에서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vedaniya-vatthu)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느낌의 토대와 대상(vatth-ārammaṇa)이 되어서 느낌에게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 SAȚ.ii.69]”(SA.ii.70)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tatra kho,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paṭiccasamuppādaññeva sādhukaṃ yoniso manasi karoti —
‘iti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다음과 같이
연기를 지혜롭게 잘 마음에 잡도리하여야 한다.[如理作意]”
4.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저것이 소멸한다.
........
♦ 8. cetanāsuttaṃ (SN 12.38) 의도 경1(S12:38) Cetanā-sutta
♦ 38. sāvatthinidānaṃ .
“yañca, bhikkhave, ceteti yañca pakappeti yañca anuseti,
ārammaṇametaṃ hoti viññāṇassa ṭhitiyā.
3. “비구들이여, 어떤 것을 의도하고 어떤 것을 계속해서 사유하고
어떤 것에 대해서 잠재성향을 가지면261) 그것은 알음알이가 머무는262) 조건이 된다.263)
261) “'여기서 '의도한다(ceteti).'는 것은 삼계의 모든 유익하고 해로운 의도(tebhūmaka-kusala-akusala-cetanā)를 포함한다. '계속해서 사유한다.(pakappeti).'는 것은 탐욕과 함께하는 8가지 마음(lobha-sahagata-citta)에 존재하는 갈애와 사견이 함께하는 사유(taṇhā-diṭṭhi-kappā)를 포함한다.(사견이 함께하는 견해와 연결된 4가지 마음에서만 일어난다. - SAȚ.ii.70) '잠재성향을 가진다(anuseti)'는 것은 함께 생긴 조건의 항목(sahajāta-koṭi)과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의 항목(upanissaya-koṭi)을 통해서 12가지 [해로운] 마음의 의도에 있는 잠재성향(anusaya)을 포함한다.” (SA.ii.70)
12가지 마음과 탐욕과 함께하는 8가지 마음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장 §3의 I.1 해로운 마음 12가지와 §4를 참조할 것.
262) “'알음알이가 머무는(viññāṇassa ṭhitiyā)'이란 업을 짓는 알음알이(kamma-viññāṇa)가 머무는 것이다.”(SA.ii.71)
263) 여기서 '조건'으로 옮긴 원어는 ārammaṇa(대상)이다. 그러나 주석서에서 “여기서 대상이란 조건(paccaya)을 말한다.”(SA.ii.71)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사실 의도나 사유나 잠재성향은 업을 짓는 대상이 아니라 조건이 된다. 그래서 주석서를 따라서 조건으로 옮겼다.
ārammaṇe sati patiṭṭhā viññāṇassa hoti.
tasmiṃ patiṭṭhite viññāṇe virūḷhe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hoti.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sati
āyatiṃ jāti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조건264)이 있을 때 알음알이가 확립된다.
알음알이가 확립되고 증장하면265)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정신 · 물질)266)이 있게 된다.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이 있게 되면
내생의 <*jāti>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267)
264) 여기서도 조건으로 옮긴 단어는 ārammaṇa(대상)인데 주석서에서는 조건으로 설명하고 있다.(SA.ii.71)
265) “'증장하면(virūḷha)'이라는 것은 업을 재촉하여(kammaṃ javāpetvā) 재생연결을 촉진하는 능력(paṭisandhi-ākaḍḍhana-samatthatā)을 통해서 태어남의 뿌리(nibbatta-mūla)가 되고 생겨나는 것(jāta)을 말한다.”(SA.ii.71)
266) '다시 태어남의 발생(punabbhava-abhinibbatti)'에 대해서는 본서 「몰리야팍구나 경」(S12:12) §4의 해당부분과 주해를 참조할 것.
267) 본경은 특이한 형태로 연기를 설하고 있다. 비슷한 표현이 본서 「탐욕 있음 경」(S12:64) §4 이하에도 나타난다. 본서 제3권 「속박 경」(S22:53)과 「씨앗 경」(S22:54)도 참조할 것. 『앙굿따라 니까야』「의도 경」(A3:77/i.223~224)에도 재생에 대한 비슷한 과정이 언급되고 있다.
본 문단에서 '의도하다'와 '사유하다'로 옮긴 ceteti와 pakappati는 12연기의 두 번째 각지인 의도적 행위[行, saṅkhāra]에 배대된다.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한 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앙굿따라 니까야』「꿰뚫음 경」(A6:63)§11/iii.415)는 말씀처럼 동사 ceteti에서 파생된 명사 째따나(cetanā)는 의도 혹은 의도적 행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잠재성향을 가지다(anuseti)'와 여기서 파생된 명사 잠재성향(anusaya)은 첫 번째와 여덟 번째인 무명과 갈애에 배대되는데, 무명은 무명의 잠재성향(avijjānusaya)과 배대되고 갈애는 욕망의 잠재성향(rāga-anusaya)에 배대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디 스님은 [업을 짓는] 알음알이를 12연기의 세 번째 각지인 알음알이에 배대시키고 있지만(758~759쪽) 역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의「의도 경」2(S12:39) §3에 해당하는 주석서(본서 「몰리야팍구나 경」 (S12:12) §4의 해당 주해도 참조할 것)에 의하면 그곳의 알음알이와 정신 · 물질 사이에는 [인과의] 연결고리(sandhi)가 있기 때문에 거기서 알음알이는 전생의 업을 짓는 알음알이이고 정신 · 물질은 금생의 출발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SA.ii.72) 「의도 경」2(S12:39)는 본경의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 대신에 12연기의 정신 · 물질을 배대해서 식-명색- … -생-노사의 10지 연기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경의 알음알이도 주석서에서 업을 짓는 알음알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 알음알이와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 즉 정신 · 물질 사이에는 하나의 [인과의] 연결고리(sandhi)가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본서 「몰리야팍구나 경」(S12:12) 4의 해당부분과 주해도 참조할 것.)
그리고 12연기의 세 번째로 나타나는 알음알이는 한 생의 최초의 알음알이 즉 재생연결식이라고 모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으며 아비담마적으로 보면 이 재생연결식은 업을 짓는 알음알이가 아니라 과보로 나타난 알음알이임이 당연하다. 그런데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에서는 본경의 알음알이를 업을 짓는 알음알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재생연결식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생에 다시 태어남을 일으키기 이전 생에서 업을 짓는 알음알이로 봐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런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존재와 늙음 · 죽음이 생기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훨씬 자연스럽다.
♦ 9. dutiyacetanāsuttaṃ (SN 12.39) 의도 경2(S12:39)
♦ 39. sāvatthiyaṃ viharati ... pe ...
“yañca, bhikkhave, ceteti yañca pakappeti yañca anuseti, ārammaṇametaṃ hoti viññāṇassa ṭhitiyā.
ārammaṇe sati patiṭṭhā viññāṇassa hoti.
tasmiṃ patiṭṭhite viññāṇe virūḷhe nāmarūpassa avakkanti hoti.
3. “비구들이여, 어떤 것을 의도하고 어떤 것을 계속해서 사유하고
어떤 것에 대해서 잠재성향을 가지면 그것은 알음알이가 머무는 조건이 된다.
조건이 있을 때 알음알이가 확립된다.
알음알이가 확립되고 증대하면 정신 · 물질이 출현한다.271)
271) '출현'으로 옮긴 원어는 명사 avakkanti이다. 『인시설론 주석서』 (PugA.184)에서는 “'출현한다'는 것은 드러남(okkanti), 생김(nibbatti), 나타남(pātubhāva)을 뜻한다.”로 설명하고 있다. 출현(avakkanti)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본서 「알음알이 경」(S12:59) §3의 주해를 참조할 것.(이곳의 설명에 의하면 avakkanti는 더 구체적으로 '[모태에] 듦'으로 옮길 수 있다.)
본서 「몰리야팍구나 경」(S12:12) §4에도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이 알음알이와 육입 사이에 나타났다. 그러므로 본경의 정신 · 물질과 「몰리야팍구나 경」의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은 같은 것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본경에서 알음알이와 정신 · 물질 사이에는 [인-과의] 연결고리(sandhi)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알음알이는 전생의 업을 짓는 알음알이이고 정신 · 물질은 금생의 출발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SA.ii.72)
한편 본경은 앞 경의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 대신에 12연기의 정신 · 물질을 배대해서 의도(행)-식-명색-육입… -생-노사의 11지 연기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과 '정신 · 물질의 출현'은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석서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본서 「몰리야팍구나 경」 (S12:12) §4의 해당부분과 주해를 참조할 것.)
♦ 10. tatiyacetanāsuttaṃ (SN 12.40) 의도 경3(S12:40)
♦ 40. sāvatthiyaṃ viharati ... pe ...
“yañca, bhikkhave, ceteti yañca pakappeti yañca anuseti ārammaṇametaṃ hoti viññāṇassa ṭhitiyā.
ārammaṇe sati patiṭṭhā viññāṇassa hoti.
tasmiṃ patiṭṭhite viññāṇe virūḷhe nati hoti.
natiyā sati āgatigati hoti. āgatigatiyā sati cutūpapāto hoti.
cutūpapāte sati āyatiṃ jāti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3. “비구들이여, [67] 어떤 것을 의도하고 어떤 것을 계속해서 사유하고
어떤 것에 대해서 잠재성향을 가지면 그것은 알음알이가 머무는 조건이 된다.
조건이 있을 때 알음알이가 확립된다.
알음알이가 확립되고 증대하면 [마음의] 경도(傾倒)273)이 있고,
[마음의 경도됨]이 있으면 [업의 표상 등이] 나타남에 의한 [알음알이의] 오고감이 있고, 274)
[업의 표상 등이] 나타남에 의한 [알음알이의] 오고감이 있으면 죽고다시 태어남이 있고,275)
죽고 다시 태어남이 있으면 내생의 태어남과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273) “'[마음의] 경도(傾倒)됨(nati)'이란 갈애(taṇhā)를 말한다. 이것은 사랑스런 모습(piya-rūpa)을 한 형색 등(여섯 가지 대상[六境]을 말한다. - SAȚ.ii.72)으로 기울기(namana) 때문에 경도됨이라 불린다.”(SA.ii.72)
“이것은 삼계의 존재에 대한 소망(patthanā)과 염원(paṇidhāna) 등을 말한다.”(SAȚ.ii.72)
274) “'오고감(āgati-gati)'이란 업(kamma)이나 업의 표상(kamma-nimitta)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에 의해서 재생연결(paṭisandhi)을 통해서 알음알이의 태어남(viññāṇassa gati)이 있다는 뜻이다.” (SA.ii.72)
업과 업의 표상과 태어날 곳의 표상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3장 『17의 해설을 참조할 것.
275) “'죽고 다시 태어남(cutūpapāta)'이란 이와 같이 알음알이가 와서(āgata) 재생연결을 통해서 감(gati)이 있을 때 여기서부터 떨어져 나감(cavana)이 ‘죽음(cuti)'이라 불리고, 저기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태어남(upapāta)'이라 불린다.”(SA.ii.72)
♦ “yato ca kho, bhikkhave, no ceva ceteti no ca pakappeti no ca anuseti,
ārammaṇametaṃ na hoti viññāṇassa ṭhitiyā.
ārammaṇe asati patiṭṭhā viññāṇassa na hoti.
tadappatiṭṭhite viññāṇe avirūḷhe nati na hoti.
natiyā asati āgatigati na hoti.
āgatigatiyā asati cutūpapāto na hoti.
cutūpapāte asati āyatiṃ jāti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5. “비구들이여, 어떤 것을 의도하지도 않고 어떤 것을 계속해서 사유하지도 않고
어떤 것에 대해서 잠재성향을 가지지도 않으면
그것은 [업을 짓는] 알음알이가 머무는 조건이 되지 않는다.
조건이 없을 때 [업을 짓는] 알음알이가 확립되지 않는다.
[업을 짓] 알음알이가 확립되지 않고 커지지 않으면 [마음의] 경도됨이 있지 않고,
[마음의] 경도됨이 있지 않으면 [업의 표상 등이] 나타남에 의한 [알음알이의] 오고감이 있지 않고,
[업의 표상 등이] 나타남에 의한 [알음알이의] 오고감이 있지 않으면
죽고 다시 태어남이 있지 않고,
죽고 다시 태어남이 있지 않으면 내생의 태어남과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276)
276) 부처님의 이 말씀은 본서 제4권 「찬나 경」(S35:87) §12에서 마하쭌다 존자가 세존의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찬나 존자에게 말해준 것과 비슷하다.
본경도 「의도 경」1(S12:38)처럼 행-식-재생-노사의 4지 연기를 설하고 있다.
dasamaṃ.
♦ kaḷārakhattiyavaggo catuttho. 제4장 깔라라캇띠야 품이 끝났다.
♦ tassuddānaṃ —
♦ bhūtamidaṃ kaḷārañca, duve ca ñāṇavatthūni.
♦ avijjāpaccayā ca dve, natumhā cetanā tayoti.
네 번째 품에 포함된 경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① 되어있는 것 ② 깔라라, 두 가지 ③~④ 지혜의 토대 [68],두 가지 ⑤~⑥ 무명을 조건함
⑦ 그대들 것이 아님, 세 가지 ⑧~⑩ 의도이다.
∴
첫댓글 ārammaṇe sati patiṭṭhā viññāṇassa hoti.
tasmiṃ patiṭṭhite viññāṇe virūḷhe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hoti.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sati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sati
...............āyatiṃ jāti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ārammaṇe sati patiṭṭhā viññāṇassa hoti.
tasmiṃ patiṭṭhite viññāṇe virūḷhe nāmarūpassa avakkanti hoti.
3. “비구들이여, 어떤 것을 의도하고 어떤 것을 계속해서 사유하고
어떤 것에 대해서 잠재성향을 가지면 그것은 알음알이가 머무는 조건이 된다.
조건이 있을 때 알음알이가 확립된다.
알음알이가 확립되고 증대하면 정신 · 물질이 출현한다.271)
(본문과는 좀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어떤 스님께서 법문하셨던 동영상 법문을 듣다가 '잠재성향을 가진다'에 대해 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잠재성향을 가진다'가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오늘 한 가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배운 것은 : 십이연기에서 '수 - 애 (- 취)' 로 넘어갈 때, 탐욕의 잠재성향이 생긴다는 것은 - 어떤 대상에 대해 느낌 다음에 갈애 등으로 일어나면 (그것이 잠재성향이 된다는 것은) 다음에 그(런 종류의 즐거움을 주는) 대상을 만나면 또 갈애가 일어난다는 뜻으로, 또는 어떤 대상에 대해 성냄이 일어나면 그것을 회피하려고 (감각적 욕망을 바라는) 갈애 등으로 일어나면 (그것이 잠재성향이 된다는 것은) 다음에 그(런 종류의 괴로움을 주는) 대상을 만나면 또 성냄이 일어나(고 그것을 회피하려고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갈애가 일어난다는 뜻으로 들었습니다. (주의: 혹시 제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빠띠삼비다막가 4장 법에 머무는 지혜 에서,
//Purimakammabhavasmiṃ moho avijjā, āyūhanā saṅkhārā,
5. 무명은 어리석음으로서 이전의 존재가 지은 업에 관련된다. 상카라는 이전의 존재가 지은 업의 쌓음이다.
nikanti taṇhā,갈애는 [쌓음에 의한[ 갈망이다.
upagamanaṃ upādānaṃ,취착은 [갈망에 의한] 다가감이다.
cetanā bhavo.존재는 [다가감에 수반된] 의도이다.
Ime pañca dhammā purimakammabhavasmiṃ idha paṭisandhiyā paccayā.
이들 다섯 법은 이전의 존재가 지은 업에 속하며, 이 세상에서의 생명의 맺음을 위한 조건이다.// 처럼
"cetanā bhavo.(욕계 색계 무색계에 대한) 존재는 의도이다." 라고 합니다.
(*대념처경D22 사성제에서,
'욕계 색계 무색계에 대한 존재'의 기술이...)
'잠재성향'도 같은 율장 "들숨날숨에 관한 논의"에서의 맨뒤 '해탈' 에서..
/삿된 계에 대한 고집(계금취)을…견해의 잠재적 성향과 의심의 잠재적 성향을 제거하고 끊는 것으로부터 해탈의 즐거움에 대한 지혜가 일어난다.
일래도(一來道)에 의해 거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얽매임…적의에 의한 얽매임, 거친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냄의 잠재적 성향, 적의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끊는 것으로부터 해탈의 즐거움에 대한 지혜가 일어난다.
불환도(不還道)에 의해 미세한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냄에 희한 얽매임… 적의에 의한 얽매임, 미세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잠재적 성향, 적의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끊는 것으로부터 해탈의 즐거움에 대한 지혜가 일어난다.
아라한도(阿羅漢道)에 의해 물질적 현상에 대한 탐냄, 물질적 현상을 지니지 않음에 대한 탐냄, 자만, 들뜸, 무명, 자만의 잠재적 성향, 있음에 대한 탐냄의 잠재적 성향, 무명의 잠재적 성향을 제거하고 끊는 것으로부터 해탈의 즐거움에 대한 지혜가 일어난다.
이와 같은 21가지 해탈의 즐거움에 대한 지혜이다.
16항목의 들숨과 날숨에 의한 삼매를 닦을 때, 이러한 200가지가 넘는 지혜가 일어난다.
들숨과 날숨에 관한 논의-끝/
봄봄님...^^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