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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1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루카 6,20-26
행복의 관건은 ‘누구를 위해 가난해질 것이냐?’이다
오늘 복음은 루카의 행복 선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받아 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굶주리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다 행복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이 ‘봉헌’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봉헌될 때 내가 비워지고 그 자리에 주님의 ‘뜻’이 채워지며 그래서 나로부터 자유로워져 많은 이들을 자신 안으로 초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려면 행복과 쾌락을 구분해야 합니다. 쾌락은 가지는 것, 먹는 것, 세지는 것으로 얻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쁨은 적응됩니다.
이를 쾌락 적응이라 합니다.
UC 리버사이드 심리학과 교수 소냐 브로머스키는 복권에 당첨되든, 직장에서 승진하든, 결혼을 하든 몇 개월만 지나면 이전의 행복 수준으로 돌아온다고 많은 사례를 통해 주장합니다.
우리도 사실 살면서 그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큰 쾌락, 혹은 중독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까지 빠져버리는 예가 많습니다.
어떤 물고기가 물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물고기는 묻습니다.
“물이 뭐예요?”
물은 행복입니다.
행복은 행복 자체에 있으면 적응됩니다.
전혀 행복한 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물 밖으로 잠시 나가서 숨을 못 쉴 정도가 되어야 자신이 물속에 살고 있음을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건강의 행복을 아는 사람은 운동의 고통을 즐길 수 있고 라면을 맛있게 먹으려는 사람은 배고픔을 참을 줄도 압니다.
행복을 아는 사람은 고통도 즐길 줄 알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을 즐길 줄 모른다면 사실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치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난과 배고픔, 멸시받음이 무조건 행복으로 이끌어 주지는 못합니다.
일본의 카미카제 자살 특공대는 황제가 하사했다는 사케를 한 잔씩 하고 죽음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죽음입니다.
자기를 봉헌하지만, 결과는 자기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마치 성전이나 병원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처럼 사회 약자들,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위해 가난해지고 약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뜻은 인간이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모든 타인을 다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직 부모와 같은 창조자를 위한 가난과 자기 봉헌만이 두려움 없이 나를 내어줄 수 있게 합니다.
‘노숙인들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요셉 병원 선우경식 원장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이 암에 걸린 줄도 모르고 결혼도 안 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노숙인들의 무료 병원을 운영하였습니다.
73년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저명한 대학병원들로부터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한국에 돌아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병원을 세웠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져도 꿰매 신고, 차가 다 낡아서 사람들이 선물해 준다고 해도 의료품으로 달라고 하였습니다.
선우 원당은 봉사를 희생이 아니라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평소 “환자들은 내게 선물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귀한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항상 감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의 장례식 때 요셉 의원 현관접수를 맡고 있던 안수근 씨가 조사(弔辭)를 읽었습니다.
고아원 출신으로 신림동 다리 밑에서 살면서 술과 싸움을 일삼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선우 원장은 포기하지 않고 그를 재활시키고 일거리도 주었습니다.
안 씨는 “제 소원은 아버지, 어머니를 불러보는 것인데 살아 계실 때 원장님을 아버지라 불러보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젠 저 속 안 썩이며 열심히 살게요. 아버지~”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하느님의 뜻에 자기를 봉헌한 이들이었고
정말 가난하고 배고프고 멸시받았지만,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한 채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나환자(한센인)들의 신비로운 힘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참 행복은 사랑에서 옵니다.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 주기 위해 가난해져야 하고 더 먹이기 위해 배고파져야 하며 높이기 위해 낮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루카의 행복 선언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줄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을 마치 자기 것을 빼앗길 오두막처럼 여기다가 이제는 하느님이 사시는 성전처럼 여기게 됩니다.
이 자존감이 행복의 수준입니다.
이 행복을 아는 이들이라면 자발적으로 자선하고 단식하고 기도를 할 것입니다.
마치 마시멜로 실험처럼 그 뒤에 올 행복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봉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1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6,20-26
참된 행복은 결핍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도 있었습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지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7천원 짜리 순대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
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부족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감사하면서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강론>
(2024. 9. 11. 수)(루카 6,20-26)
<예수님께서는 ‘혁명’이 아니라 ‘회개’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0-26)”
1) “행복하여라!”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 기쁨, 평화, 안식 등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말이 ‘행복’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행복 선언 말씀’은, 여러 가지로 힘든 고난과 역경 속에 있으면서도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인데, 그렇다고 해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그냥 참고
살아라.” 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복 선언 말씀’은 일시적인 위안이나 주는 ‘진통제’가 아니라,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치료제’입니다.
가난과 굶주림과 미움과 박해는 ‘참 행복(구원)’의 원인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가 ‘참 행복(구원)’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그 ‘참 행복’은 죽은 다음에나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바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 또는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2) 바로 그 변화를 초대 교회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4-47ㄱ).”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2.34-35).”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가난한 사람도 없었고,
굶주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남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참 행복’을 지상에서 실현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모두가 참으로 회개하고, 진심으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한다면, 이 땅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의 공동체부터 변화하면, 언젠가는 온 세상이 변화될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어느 세월에...” 라고 말하면서
한숨을 쉴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내가 변하면 세상도 바뀐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신념을 가지고 있고, 신념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3) “불행하여라!” 라는 말씀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즉 “멸망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불행 선언 말씀’은 ‘저주’가 아닙니다.
멸망을 당하지 않으려면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권고입니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라는 말씀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바로 연상됩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5-26).”
저승에 있는 ‘큰 구렁’은, 단순하게 말하면 아무도 건너갈 수 없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장벽’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장벽은, 부자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그는 자기와 라자로 사이에 아무도 넘어갈 수 없는 장벽을 쌓아놓고 살았습니다.
그 장벽이 그대로 저승에서 그 부자를 가두어 놓는 감옥의 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누굴 원망하거나 탓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될 뿐입니다.
4)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 내세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불행 선언 말씀’을 들어도 무시하고 비웃기만 하거나, 아예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아니면, “그건 그때 일이고, 나는 지금 내 마음껏
즐겁게 살면 그만이다.” 라고 큰소리치기도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야고 4,14; 5,1).”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