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신석정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나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소리도 차츰차츰 멀어 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 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 <조선일보>(1933) -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목가적, 관조적, 명상적, 호소적
◆ 표현
* 소박하고 직설적인 의문형
* 경어체의 사용으로 애착과 소망의 간절함 강조
* 긴 호흡의 명상적 리듬 구사
* 반복에 의한 의미 강조
* 빛과 소망의 심상 ↔ 어둠의 심상
* 아들이 어머니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의 표현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어머니 →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기보다는 호소의 시형이 지니는 자연스러운 대상
평화, 안식, 생명의 보금자리. 이상향(자연)의 이미지
* 촛불 → 어둠을 위해 남겨 두어야 할 희망의 심상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는 인위적인 것의 표상
* 촛불을 밝히는 것 → 낮(빛)의 세계와의 결별이자, 낙원 상실에 대한 공포
* 작은 명상 → 보조관념이 '새'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명상의 내용은 '자유'에
대한 것으로 추측.
* 어둠 → 부정적 이미지(시적 자아의 명상을 방해. 아름다운 전원을 부정.
부정적 현실)
* 어린 양 → 선과 평화의 이미지
* 녹색 침대 → 평화롭고 자유로운 전원. 생명의 보금자리
*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시적자아의 단호한 의지가 나타나며,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는 구절
(어둠에 대한 거부)
*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 → 의인화. 무위자연의 초탈하고 엄숙한 모습
(노장사상의 반영)
* 검은 치맛자락 → 어둠. 불안과 좌절을 실감케 하는 것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
* 까마귀, 바람 → 악과 고난 등 부정적 심상
* 어머니의 등에서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
→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며, 자연에 쉽게 동화될 수 있는 평화로운 인간의 모습
* 작은 별 → 어둠에 지배당하지 않는 소망의 지표
◆ 주제 ⇒ 이상적인 전원 세계의 동경, 이상향에의 동경
◆ 대립적인 심상
빛(긍정적)의 심상 → 어머니, 새새끼, 푸른 하늘, 어린 양, 늙은 산, 애기의 잠덧,
작은 별
어둠(부정적)의 심상 → 밤, 어둠, 검은 치맛자락, 까마귀, 바람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황혼 무렵 전원의 아름다운 정경
◆ 2연 : 전원에 대한 새로운 인식
◆ 3연 : 이상향에의 동경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신석정의 시 세계는 목가적 전원의 서정이 안식과 생명의 모체인 어머니와 결합되어 이상향을 동경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이 작품도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와 같이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통하여 이상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작품의 전체적 구조는 단순하지만, '불의'·'악'·'고난'의 현실을 상징하는 '밤'과 '진실'·'선'·'자유'·'평화'를 상징하는 '촛불'·'새새끼'·'어린 양'을 대립시켜 이상향에 대한 갈망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또한 저물녘의 황혼에 인위적인 것(촛불)이 가미됨으로써 아름다움이 훼손될 것을 두려워하는 시인의 여리고 순결한 감정이 '어머니,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의 반복을 통해 간절히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어머니'는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기보다는 호소의 시형이 자연스레 갖게 되는 정신적 위안자로서의 어머니이고, '촛불'은 어둠을 위한 광명이나 희생과 같은 긍정적, 적극적 개념이 아니라 인위적, 작위적인 유한한 광명이다. 각 연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연은 황혼녘의 아름다움, 둘째 연은 황혼녘의 물상(物象)에 대해 시적 자아가 갖는 새로운 인식, 셋째 연은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한 이상향에의 동경을 표현하고 있다. 생명의 요람이요, 구원(久遠)한 그리움의 정서를 환기시켜 주는 어머니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자기의 꿈을 들려 드리는 아들의 이야기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시인의 자연에 대한 무한한 경애심을 느낄 수 있다.
[작가소개]
신석정 : 시인
출생-사망 : 1907년 7월 7일, - 1974년 7월 6일
출생지 : 전북 부안
호 : 석정(夕汀), 석지영(石志永), 호성(胡星), 소적(蘇笛), 서촌(曙村)
데뷔 : 1924년
1968년 제5회 한국문학상경력1967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지부 지부장
1963~1972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
시 : '기우는 해'
수상 : 1973년 제5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부문
1972년 국민포장
1907년 7월 7일 전북 부안 태생. 보통학교 졸업 후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한국문학상, 문화포상, 한국예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74년 7월 6일 사망하였다. 1931년 김영랑‧박용철‧정지용‧이하윤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제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함으로써 등단하였다.
1939년 첫번째 시집인 『촛불』에서는 하늘, 어머니, 먼 나라로 표상되는 동경의 나라를 향한 희구를 어린이의 천진스러운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집에는 대표작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47년 두번째 시집인 『슬픈 목가』에서는 어머니라는 상징어에 기댄 유아적, 퇴영적 자아의 모습은 줄어들고, 성숙한 현실의 눈으로 돌아온다. 이상향에 대한 천진난만한 시인의 희구는 상실감으로 바뀌고, 내적 체험의 결여로 인한 공허감이 나타난다. 그후 『빙하』(1956), 『산의 서곡』(1967)에 이르면서 삶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역사 의식이 예각화되면서 주제 의식이 문학적 심미성에 선행하게 된다. 마지막 시집인 『대바람 소리』(1970)에서 다시 초기 서정시의 세계로 복귀하고 있다. 신석정은 노장의 철학과 도연명의 「귀거래사」, 「도화원기」의 영향을 받았고, 미국의 삼림시인인 소로우(H. D. Thoreau)를 좋아했으며, 한용운에게서 문학 수업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반속적(反俗的)이며 자연성을 고조한 동양적 낭만주의에 입각한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기림은 그를 “현대문명의 잡답(雜踏)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흠모하는 목가적 시인”이라 평가하였다.
신석정의 시는 암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체험의 가능성이 폐쇄된 시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문학적 단면을 보여준다. 비참한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로써 초월적이고 본원적인 실재에 대한 강한 희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희구는 전원적, 자연친화적 이상향에 대한 시적 열망으로 그려진다.
[출처]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신석정)|작성자 옥토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