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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일본, 진주만(Pearl Harbor, 1941) 기습
일본군 수뇌부는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켜버리면 미국은 일본을 상대할 수단이 없어지므로 결국 전쟁을 택하기보다는 일본의 팽창을 인정하고 일본과 협상을 택할 것이라 판단했다. "덩치만 큰 미국인들은 근성이 없기 때문에 조금만 위협해도 곧 순해질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이 진주만 공습의 배경이었던 셈이다.
여담으로 왜 일본군은 하와이를 점령 안 했나요? 라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는데, 하와이는 당시 미국이 있는 거 없는 거 다 때려박아 철벽요새로 만들었다. 2차대전 당시 일본 해군이 전병력을 들이 부어도 점령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며, 설령 점령하더라도 감당 불가능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미국과의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일본군 수뇌부는 공격 준비로 남방작전을 수립하여 동남아시아 지역의 유전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정하였다. 하지만 일본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남방작전 이전에 미국 태평양 함대를 먼저 공격해두지 않으면 남방작전 내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은 일본군 수뇌부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당시 일본해군의 기본적인 대미작전 개념은 점감(漸減)전법으로 개전 후 서진(西進)하는 미군 함대를 잠수함과 항공기로 위치를 파악하고 잠수함과 항공기로 이들에게 1차 손해를 준 후에 이어서 순양함과 구축함 전대를 동원하는 야간전투에서 2차 손해를 준 후 전함간 포격전으로 미군 함대를 최종적으로 격퇴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전안의 문제는 미군이 일본군의 예상대로 움직인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미해군도 일본 해군과 유사한 작전개념안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선전포고를 먼저 하고 실제 전투는 나중에 진행할 경우 미군도 일본군과 비슷하게 공세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군이 일본이 예상한 경로 그대로 진격하지 않고 남방작전을 하러 떠나는 일본군을 측면에서 때린다든지 하는 방향으로 진격할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일본 해군의 장성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어디까지나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전함이 해군의 주력이라는 사상을 지녔던 다른 제독들도 반대 의사를 표시하였다. 하지만 야마모토 제독이 강한 자신감을 보였고 무엇보다 승인을 해주지 않으면 연합함대 사령관을 사퇴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결국 수뇌부도 야마모토 제독의 의견을 수용하여 남방작전과 동시에 진주만 공습을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에 앞서 연구한 것은 바로 영국군이 실시한 이탈리아의 타란토 공습이었다. 그 결과 진주만과 타란토의 조건이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어뢰를 통한 공격이 가능하며 400기 정도의 항공기와 숙련된 조종사만 동원한다면 진주만 공습도 성공할 것이란 결론을 도출했다. 이에 따라 일본해군의 조종사들은 여름부터 철갑탄을 이용한 폭격과 뇌격훈련에 돌입하였다. 더불어 진주만의 지형을 그대로 옮긴 모형을 보여주면서 지형을 익히도록 하였으며 정확하게 미국의 전함과 항공모함을 식별할 수 있는 훈련도 병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 정보계통도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태평양 함대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하와이에는 첩보원이 상주하여 어디에 항공기지가 설치되어 있고 어느 군함이 어디에 정박하고 있는가에 대한 정보까지 모두 전달되었다. 게다가 태평양 함대의 모든 군함이 토요일에 입항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가장 최적의 공격시간이 일요일 새벽이란 보고서를 올릴 수 있었다. 이상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군 수뇌부는 1941년 11월 17일에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몇 가지 사정이 겹쳐서 결국 12월 7일이 최종적인 공격일로 확정되었다.
작전일이 확정되자 야마모토 제독은 제1항공함대를 주축으로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지휘하는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조직하였다. 무엇보다 작전이 노출되면 안 되었기 때문에 11월 22일까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쿠릴 열도 부근의 히도카푸 만으로 집결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항해 중에는 절대 무선교신을 해선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가 내려졌다. 게다가 승무원들에게는 어디로 가기 위해 모인다는 정보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더불어 집결지인 히도카푸는 미국 첩보원들이 전혀 파악하지 못한 조그만 항구였다.
11월 26일, 군함들이 한 척씩 빠져나가는 방식을 채택하여 진주만을 향해 닻을 올렸다. 더불어 항로 역시 민간상선이 전혀 다니지 않는 곳과 미국 정찰기가 비행하지 않는 곳 위주로 선정하여 항해했으며 선박이 배출하는 배기가스로 인해 발각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군함의 연료로 경유를 사용하는 철두철미함을 보였다.
미국은 비록 태평양 함대를 진주만으로 전진배치 시켰지만, 이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였을 뿐 전쟁을 하기 위한 카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협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일본과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태평양의 주요 거점을 요새화하고 필요한 군수물자들을 비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특히 필리핀에 주둔 중인 연합군과 일본 본토와 근접한 주요 섬들이 공격대상으로 예측되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 작업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운이 감도는 시기는 개전되기 직전에 가까웠던 터라 긴급히 작업을 시작했어도 공사기간 등의 문제로 개전 당시 제대로 된 준비가 된 지역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대서양에서 독일군의 유보트가 악명을 날리자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일부 전력을 차출하여 대서양 함대에 편입시켰다. 태평양 방면의 전력 강화도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어차피 현재 보유한 전력과 무기만 있어도 일본군 따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미국은 '근성이 없어서' 금방 협상 테이블로 나올 거라고 생각한 일본이나 '쬐끄만 뻐드렁니쟁이들이 뭐 대단하겠어?'라고 일본을 얕잡아 본 미국이나…. 어차피 전쟁은 잘 싸우는 쪽과 못 싸우는 쪽의 대결이 아니라 삽질하는 쪽과 더 많이 삽질하는 쪽의 대결이라는 말도 있으니.
특히 일본 해군의 목표인 진주만의 미군은 "어차피 걔네들 여기까지는 공격하러 못 와."라고 생각하면서 모두들 퍼져 있었다. 게다가 전쟁이 터지면 필리핀이나 태평양 섬에 있는 아군들이 좀 고생할 거고 거기서 지원 좀 해달라고 무전 때리면 그때 가서 일본군과 좀 놀아주다가 오는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협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일본에서 보낸 첩보원이나 하와이에 체류 중인 일본인들, 특히 당시 하와이 인구의 30%가 일본계였으므로 이들이 벌이는 사보타주가 문제였다. 이에 따라 몇 가지 조치를 강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병크.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러 매체에서 사골로 등장하는 항공기들을 특정 장소에 빽빽하게 배치하고 감시병을 둔 사례가 있다.
11월에 접어들면서 일본이 분주하게 움직이자 미국도 슬슬 붙을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주력이 서서히 인도네시아 방면으로 집결하자 미군은 일본군이 그들의 예상대로 남방으로 움직이고 있다면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소 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인도네시아 방면 지원을 위해 출정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소수 관계자가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주장하였지만 완전히 묵살되었다. 어쨌든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했기에 전방기지에 항공기와 병력, 물자를 배치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2월에 접어들면서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징후가 여러 차례 포착되었지만 태평양 함대에서는 인도네시아 방면 작전에 앞서 태평양 함대의 동향을 정찰하는 것 정도로 치부하였다. 그리고 12월 7일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12월 7일 새벽 일본 연합함대는 하와이에서 북서쪽 370km 해상에 도착하였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공격개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이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는 최신 정보를 받았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태평양 함대에 항공모함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렉싱턴, 새러토가가 소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요크타운은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깔짝대는 유보트 잡으러 대서양에 가 있었고 새러토가는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서 정비를 받고 있었으며 렉싱턴은 미드웨이 섬에 전투기 배달하러 간 상황이었고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 섬에 전투기 배달하고 전날인 12월 6일에 진주만에 입항예정이었는데 중간에 열대폭풍 때문에 우회하느라 입항이 하루 늦어졌다. 실로 천우신조. 2차대전 최고의 강운함(强運艦)답다.
나구모 제독은 미국이 공습을 눈치 채고 항공모함을 진주만이 아닌 다른 곳에 배치한 것 아니냐는 걱정을 했지만 미국 항공모함의 정보를 확인한 후에 움직일 정도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1차 공격대가 이륙하였다. 그리고 한 시간 후 2차 공격대가 준비를 마치고 이륙하였다.
사실 당시 미군 태평양 함대는 일본군의 이상 징후를 두 차례 감지했으나 이것을 진주만 공격의 전조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 첫번째 징후는 일본군 잠수함으로 공습직전 일본군은 갑표적을 파견하여 항공대의 공습작전에 호응하여 어뢰 몇 발 쏘고 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 척은 좌초했고 최소 2척이 공습이 시작되기 전 진주만에 접근하다가 초계(哨戒)중이던 구축함위든과 소해정 콘돌에 걸려서 꼬르륵. 하지만 사령부에서 그 보고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판단하는(미식별 표적은 가끔 있는 일이니까~~) 바람에 1차 기회를 날려먹었다. 당시 보고를 들은 사령관의 명령은 "그 풋내기 함장한테 다시 한 번 확인해 본 다음에 다시 보고하게."
당시엔 어느 나라건 자국 해군 기지에 접근하는 미확인 잠수함은 무경고 공격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외국 영해 내에서의 잠수 자체가 국제법 위반이라 진짜 공격을 받았어도 일본은 할 말이 없었다. 여기에 전장에 대한 예측이 안 되어 있을 뿐 개전 자체는 머지않았음은 확실했으므로 일본 잠수함의 접근을 발견했다 해도 그것이 진주만을 목표로 한 대규모 기습에 대한 경고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 두 번째 징후는 당시 진주만에 갓 설치한 육군의 방공용 레이더였다. 당시 전탐병들은 무수히 많은 점이 북서쪽에서 다가오는 장면이 포착된 것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보고를 하였지만 때마침 미 본토에서 B-17 폭격기 편대가 오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예정보다 빨리 날아오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는 무시되었다. 이때 남은 명대사가 통제실 당직 장교의 "별거 아냐, 신경 꺼(Well, Don't worry)." 얼핏 보면 미국이 안이하게 대처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당시의 담당자의 해당 상황에선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게 합당하다는 결론이 나와서 후일에도 문책을 받지는 않았다. 이런 결론이 나온 이유는 진주만 공습이 그만큼 의외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전략적으로든 전술적으로든 완벽한 기습이라는 평을 듣는 게 아니다.
덕분에 일본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진주만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예정된 계획에 따라 비행 방향을 크게 우회하여 섬의 남서쪽에서 진주만 방향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진주만 기습에 성공하였다는 그 유명한 암호명 "도라 도라 도라"를 사령부에 발송하였다. 해당 암호는 호랑이란 뜻도 있지만 사실은 돌격을 뜻하는 '토츠게키(突撃)'와 뇌격을 뜻하는 '라이게키(雷撃)'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당시 미국 수병들은 일본 전투기가 진입하고 있음에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는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도 묘사되었듯, 상당수 수병들이 일본 항공기의 기습을 하와이 주둔 육군 항공대가 훈련 비행을 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 폭격이 시작됐을 때도 어떤 수병은 "와!! 훈련 한 번 존내 맛깔나게 하네!!" 라고 감탄하다가 본격적으로 폭탄이 떨어지자 그제야 적의 공격을 인지하고 반격에 나섰다.
포드 섬 항공기지가 제일 먼저 폭탄에 얻어맞았으며 곧 포드 섬 인근에 정박 중인 전함—이것이 일명 전함 열(Battleship's row)—들이 폭탄과 어뢰를 얻어맞았다. 폭탄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어뢰의 경우 평상시의 군항(軍港)에는 주요 함선 주변에 어뢰 방지용 그물이 설치된 경우가 많은데 이때 진주만의 군함에는 어뢰 그물이 없었다. 어차피 진주만은 수심이 얕아서 어뢰를 쏴도 어뢰가 자세를 잡기 전에 진흙에 처박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달지 않았지만 일본은 이걸 알고 어뢰에 나무 날개를 달아서 어뢰가 중간에 흙에 처박히는 문제를 해결했다. 이때 해군 항공대 참모 램지 중령은 방송실로 뛰어 들어가 총원전투배치(General quarters) 신호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