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복의 통로자(창12장2)
성경본문 :창세기12:2
1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
출처: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한 사람, 자기가 원하는 모든 부와 명예와 권력과 수의 축복을 다 이루고 소유한 사람! 이런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까?
그보다 더 복된 사람이 있습니다.
나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도 복을 받게 하는 사람입니다.
나로부터 복이 시작되고 흘러갑니다.
내게서 축복이 시작해서 자녀대로 흘러가고 자자손손 복이 내려갑니다.
또 내가 가는 곳에 복이 따라 다닙니다.
그래서 나 때문에, 나로 인하여 친척+이웃이 복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복의 근원(복의 시작자), 축복의 통로자라고 합니다.
이 축복의 통로자의 삶은 너무나 아름답고 복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축복의 통로자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는 화의 통로자로 사는 사랍니다.
자기만 화를 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가도 화를 전달하고 다닙니다. 언제나 남에게 불평, 어두움, 화를 뿌리고 다닙니다. 그래서 나 때문에 남이 화를 당하고 어두움이 선물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복의 통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되어라는 뜻은. :
① "너는 복의 시작이 되어라" 는 말입니다.
내가 너를 "복" 자체로 부르니 이제부터 너는 복의 근원, 시작자로 살지라.
너부터 시작해서 복이 네 자손 만대까지 흘러가도록 축복의 조상이 되도록 하거라.
그래서 천하만민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해서 복을 받도록 하거라. ⇒
이는 구속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구원이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축복이 아브라함을 통해 열방 가운데 흘러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② 너는 복의 통로자가 되어라.
너는 언제나 너를 통해서 축복이 흘러가는 사람으로 살아가라.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네게서 축복이 흘러가게 하고 너 때문에 그 사람들이 축복을 받도록 하거라. 그래서 실제로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역 성경은 베라카를 복의 근원이라고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약속)이기도 하고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아브라함은 "복"자체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로부터 시작해서 자손들에게 축복이 전달됩니다. ⇒ 축복의 조상으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는 복덩어리 자체로 굴러 다니면서 그가 가는 곳마다 축복을 전달해줍니다 ⇒ 축복의 통로자가 되었습니다.
▶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 :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내림.
아브라함이 잘되기를 바라고 칭찬, 격려, 도와주고 잘해주는 자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예) 감두이댁 : 영수한테 잘해서 복받겠소. ⇒ 처음엔 기분나빴는데 조금 후에 깨달았음.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복있는 자가 되면 이렇게 좋습니다.
②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 : 하나님이 반드시 저주하십니다.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저주: 카랄 ⇒ 홀대하다. 흉보다. 모욕하다. 해하다. 저주하다.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저주 : 아랄⇒"파문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축복받을 자리나 능력으로부터 제거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홀대하거나 흉만보고 비방해도 복을 받지 못합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을 해하고 망치려는 자는 축복의 자리에서 쫓겨나 저주위에 저주를 받습니다.
예) 롯, 바로왕, 아비멜렉⇒아비멜렉은 비골장군과 함께 와서 언약을 맺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있는 자의 증거를 보입니다 ⇒ 많은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저 양반 건들어서 안되겠구나." ⇒ 복있는 자를 높이십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중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를 축복하는 사람은 복받고, 그를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 축복의 근원, 통로자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축복권, 저주권이라고합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장쾌한 삶입니까?
오늘 우리도 축복의 근원+통로자로 살아가면 이런 권세가 따릅니다. 오늘날도 얼마든 축복권과 저주권의 역사가 따릅니다. ⇒ 축원!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약속+명령이었습니다. 이러한 축복의 열매와 결과가 따르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바로 그 의무를 오늘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과 의무를 잘 받아들이고 지켜 행하였습니다. 그럴 때 놀라운 축복의 열매와 결과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가문의 축복의 근원(조상, 시작자), 모든 이웃의 축복의 통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축복의 조상과 통로자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속에 축복의 근원으로서, 축복의 통로자로서 엄청난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축복의 근원으로서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했고 어떠한 삶을 살았습니까?
1) 하나님의 부르심과 축복의 약속을 무조건 믿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 자체를 믿음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을 무조건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별, 모래처럼)을 이루시겠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는 말씀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복의 근원으로 부르시고 자기를 축복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한 자에게 저주한다는 말씀도 믿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나같은 것이 무엇인데 나를 통해 무슨 큰 민족은 민족이야! 나같은 것의 이름이 창대하신 뭘 창대해! 나한테 잘한다고 무슨 축복이 오고 나를 저주한다고 왜 저주를 받겠어? 요즘 세상에 뭐 그런게 있어? 난 사실 축복받는 것도 부담돼"
하지만 아브라함은 무조건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이런 꿈과 설레임과 부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2) 믿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에 순종했음.
즉 이 말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이 명령을 순종했습니다. ⇒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갑니다.
당시 고향산천을 떠나 낯선 땅으로 이사한다는 것 : 엄청난 모험입니다. 생계+삶+목숨이 보장되지 못했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볼 때 아브라함이 창12장에서 100% 순종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데려가지 말아야 할 친척 롯을 데려 갔으니까요. 그러나 나중에 창13장에서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을 봅니다 ⇒ 이것에 대한 영적 교훈: 오늘날 축복을 방해하는 우리의 육체의 정욕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축복의 근원+통로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부르심+명령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육체의 정욕+쓴 뿌리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야합니다.
사람은 주로 현실안주를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도대체 변화, 신앙의 업그레이드를 싫어합니다. 그냥 이대로가 좋습니다. 옛날 그럭저럭 믿었던 식이 좋습니다.
예) 신앙의 두 요소 : "Presence 와 Moving" ⇒ 광야교회 생활이 좋은 예입니다. ⇒ 프리센스 속에 있다가 하나님이 무빙하면 우리도 무빙해야 합니다. "가기 싫어요. 여기가 이대로가 좋아요." 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과감히 하나님의 무빙을 따랐습니다.
한마디로 개척자의 길을 간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3) 소명에 합당한 삶을 살았음.
다시 말하면 소명의 목적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말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언제나 아브라함은 자기의 소명을 발견+기억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는 언제나 소명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 바로 이 소명의 확신이 아브라함 인생의 정체성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축복의 근원, 조상, 통로자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 부르심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소명은 죽어도 흔들릴 수 없는 소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죽어도 흔들릴 수 없는 소명신앙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2) 아브라함은 소명의 비젼+목적(사명)을 위해 살았다는 말입니다.
"나는 왜 살아가는가? 무슨 목적으로 살아가는가?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축복의 조상이 되어 자손 만대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흘러가게 하고 세계만민과 열방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흘러가게 하는 축복의 통로자가 되는 사명을 위하여 나는 오늘도 산다."
소명의 정체성이 분명하니 자기의 사명, 인생의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그는 오직 이것을 위해 살아갔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연습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예행연습이 불가능한 인생입니다.
예) 새색시가 시집와서 김장 30번 담그면 지나가는 인생, 과원지기가 복숭아+사과 30번만 따먹으면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우리의 고백 : 오직 한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우리의 인생은 1회성입니다. 예행연습이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명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어도 흔들림이 없는 소명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 만일 인생이 몇 번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섯번 인생이라면
① 대통령 - 기독교 복음화에 모든 공을 다 들이겠습니다.
② 록펠러같은 재벌 - 교회좀 많이 짓고 싶습니다.
③ 목사 - 영혼구원+심령변화
④ 마음껏 낭만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
꽁지머리하고 세계 배낭여행. 지리산, 설악산, 호수, 바닷가에 다니며 살면서 실컷 자연을 즐기며 글좀 써보고 싶습니다.
⑤ 암흑가의 보스 - 한국에서 제일가는 의리파 보스 예) 김두한, 시라소니
그러나 단 한 번뿐인 인생! 1회성 인생! 하나님은 저를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구령을 하는 목사로,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성도들을 축복받게 하여 큰 일꾼으로 세우는 목사, 또 자손만대까지 복이 흘러가게 하는 축복의 근원으로 불러주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겠습니까? 어느 세월에 죄짓고 엔죠이 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 죽어도 흔들림 없는 소명신앙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의 근원+통로자로서 흔들림 없는 소명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은 자기의 사명(소명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만물은 모두다 독특한 목적을 위해 존재합니다. 자기의 살아가는 사명이 있습니다. 특별히 비인격적인 것도 목적과 의미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 강대상, 마이크, 의자, 음향 GOD⇔김영익, 나이트클럽 ⇔ 성은교회
그렇다면 축복의 근원+통로자로 부름받은 여러분은 무슨 사명이 있습니까? 무슨 목적으로 살아가십니까? 받은 직분, 은사,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위해, 그것에 충성하며 살아가십니까? 생명 걸고 내가 받은 직분+사명에 충성하며 사십니까?
적어도 우리는 밥 세끼를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비젼과 목적을 위해 살아가야합니다.
(4) 축복의 씨를 뿌렸습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아브라함의 삶 : 전부 제단 쌓은 삶입니다. 농사를 어떻게 짓고 장막을 몇평짓고 그런 것이 소개되지 않습니다. 가는 곳마다 제단+하나님께 제물 드리는 것을 제일 중요한 사건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 세겜⇒ 벧엘 ⇒ 헤브론 ⇒ 브엘세마 ⇒ 모리아
모리아산에서 하나밖에 없었던 독자 이삭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축복의 씨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예) 창22장의 약속 ⇒ 창26:4-5절의 말씀.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예) 남대천의 연어 : 새끼+알 까고 죽습니다. 죽으면서까지 알을 보호하다가 물에 둥둥떠서 죽습니다. 이것이 연어의 보람+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자손의 축복을 위해 거룩한 씨를 뿌릴 줄 아는 성도! 참으로 멋있는 자입니다. 축복의 조상+통로자로서 나는 아끼고 절약하며 자녀위해 축복의 씨를 뿌리는 성도!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예) 십일조, 감사+건축, 선교헌금. 몸으로 드리는 헌신, 충성, 전도, 성가대, 교사⇒눈물로 씨를 뿌리면 반드시 기쁨으로 다 거두게 하십니다.
누가 뭐라해도 오늘 저의 축복은 정권사님의 씨뿌림의 열매입니다. 저는 그걸 확신합니다. ⇒ 저도 부지런히 뿌리고 삽니다. 제 가문의 축복의 조상이 되기 위해. 그래서 오늘도 눈물로 씨뿌리며 사는 성도를 보면 은혜받습니다. 평신도라 할지라도 그에게 절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게 뭐 있어요?" 하며 그저 무사안일+현실안주에 빠져 사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가 아무리 명예+권력+성공 ⇒ 지식이 많은 사람이래도 참으로 불쌍한 자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축복의 씨를 뿌리는 지혜롭고 위대한 축복의 조상이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