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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9.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묵상글 ( 9/28. 21:25, 05:25, 05:45.)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반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 9/28. 21:25. )
2차 공유할 묵상글< 04시 ~ 05시반,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05:2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40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05:45 추가.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11/29) 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 * 위에 따르며 가능하면 1차 공유는 전일 22시반 전까지 2차 공유는 04시- 05시반까지, 안되면 07시쯤(이후) 할 계획입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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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었다.>(다니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복음<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47-51)
그때에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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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9.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5721
2026.09.28 21:17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47-51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연구하며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숨은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아무도 못 본 그 은밀한 갈망을 주님께서 보셨다는 사실에,
나타나엘은 온전히 승복하여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더 큰 일’을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야곱이 꿈에 본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창세 28장)의 성취입니다.
그 사다리를 타고 천사들이 오르내렸듯,
이제 예수님께서 친히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가 되십니다.
그분을 통하여 닫혔던 하늘이 다시 열리고,
하느님과 사람이 다시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이 이름을 전하는 세 대천사를 기립니다.
미카엘 ―‘누가 하느님 같으랴?’― 은 악을 물리치는 ‘수호자’이고,
가브리엘 ―‘하느님은 나의 힘’― 은 구원을 알린 ‘전령’이며,
라파엘 ―‘하느님께서 치유하신다’― 은 길동무가 된 ‘치유자’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지키시고, 말씀하시고, 치유하십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손과 발이자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성령의 은사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이웃을 지키고
치유할 때, 세상 속 ‘작은 천사들’이 됩니다.
성 대 바실리오를 비롯한 교부들이 가르쳤듯,
천사들은 실재하는 ‘보이지 않는 창조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사 때마다 “천사들과 대천사들과 함께”
끊임없는 하늘의 찬미(“거룩하시도다”)에 동참합니다.
영성 주간의 눈으로 보면
대천사 축일은 영성의 본질을 일깨웁니다.
영성이란 ‘하늘이 열림’을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실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하늘, 영적 싸움, 치유와 위로 ―
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고요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 영성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권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장).
대천사들은 우리의 눈을 ‘위(하늘)’로 들어 올려 줍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하늘’을 의식하며 사는가?
나는 고요·성시간 속에서 ‘열린 하늘’을 우러르는가?
나는 하느님의 ‘손과 발과 목소리(작은 천사)’가 되어 주는가?
나는 땅의 것에만 매이지 않고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가?
주님,
보이는 것 너머 열린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천사들과 함께 당신을 찬미하게 하시고,
저도 이웃에게 ‘작은 천사(수호·전령·치유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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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9.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57?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09.28. 16:19
작은 꽃의 아름다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데레사는 자신을 하느님의 정원에서 자라나는 작은 꽃으로 여겼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리지외의 데레사: 사랑의 길
작은 꽃의 아름다움!
2026년 9월 28일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제 앞에 자연의 책을 펼쳐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장미의 화려함과 백합의 순결함이 작은 제비꽃의 향기나 데이지의 소박한 단순함을 빼앗지 못합니다. 만일 모든 꽃이 장미가 되려 한다면, 자연은 봄의 아름다움을 잃고 들판은 더 이상 들꽃으로 단장되지 못할 것입니다. 영혼의 세계도 이와 같습니다.
- 리지외의 데레사, 영혼의 이야기
CAC의 팟캐스트 Turning to the Mystics(신비주의자들에게 시선을 돌리기)에서 제임스 핀리는 리지외의 데레사가 어떻게 평범함을, 곧 '작은 꽃'의 아름다움을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로 끌어안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데레사는 황홀경에 빠지는 신비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평범함 그 자체 안에 깃든 친밀함의 신적 차원으 깊이 들어, 그 평범함의 신적인 차원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았기에 오히려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하나 되심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것이 데레사 성녀가 우리 마음을 깊이 울리는 이유일 것입니다. [1]
데레사는 자신을 하느님의 정원에 자라나는 작은 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작은 꽃이라 불리곤 합니다. 그녀는 장미와 난초의 영광을 인정하면서도, 봄 들판에 가득한 수많은 들꽃들을 떠올리며, 하느님께서 그 작은 꽃 하나하나의 작음을 아시고 사랑으로 존재하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그 작은 꽃이 무엇인지, 그 섬세한 향기와 고유한 아름다움을 아시며, 그 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영원히 숨겨져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작은 꽃 안에 당신 자신을 온전히 현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산과 모래알을 비교해 본다면, 산은 너무나 거대하고 모래알은 아주 작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코 줄어들거나 제한될 수 없으시기에, 그 무한한 현존은 손에 쥔 작은 모래알 안에도 산만큼이나 충만히 깃들어 있습니다. 산도, 모래알도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에고의 의식 속에서는 이를 보지 못하지만, 묵상 기도의 상태에서는 사물의 단순함 속에 담긴 불가해한 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영혼이지만, 그 단순함의 품격은 신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데레사가 일종의 빛, 온화한 광채 속에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환시를 보는 황홀경의 신비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단순함 안에 깃든 신적 친밀함을 우리에게 은혜롭게 나누어 주며 우리를 우리 단순함의 은혜로움으로 초대합니다. 데레사는 그 단순함의 극치로 놀라운 성녀였고, 그 단순함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단순함의 극치와 그 신성(divinity)으로 이끌어 줄 뿐 아니라, 우리가 매일 어떻게 그 길을 따라 걸어가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어느 날 아침 기도 중에 저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새로운 날입니다.’ 그러자 제 마음 안에 응답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세상에 선물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저는 이것이 하느님의 음성임을 알았습니다. 또한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처럼, 저는 오직 작은 일들을 큰 사랑으로 행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John P.
Reference
[1] Adapted from James Finley and Kirsten Oates, “Dialogue 2: The Child Jesus,” Turning to the Mystics, season 13, ep. 5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26), podcast.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and PDF transcript.
[2] Adapted from James Finley, “Thérèse of Lisieux: Session 1,” Turning to the Mystics, season 13, ep. 2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26), podcast.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and PDF transcript.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작은 꽃들은 우리에게 작은 사랑의 행위가 지닌 아름다움을 일깨워 줍니다. 그것은 곧 성녀 데레사가 가르쳐 준 ‘작은 길’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는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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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9.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29 04:23
-벌을 통한 사랑, 복을 통한 사랑
마침 어제 독서가 욥기 시작이었습니다.
거기서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여 와 주님 앞에 섰다.
사탄도 그들과 함께 왔다.”
하느님 앞에 하느님의 아들들도 있고 사탄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앞에는 천사들만 있고
사탄은 없을 거라는 우리의 생각을 뒤엎습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 사탄은 없을 거라는 생각은 안일한 생각이고 짧은 생각입니다.
인간인 우리는 우리 앞에 사탕이 오는 것은 허락해도
사탄이 오는 것은 결코 허락할 수가 없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하느님 앞에는 천사도 사탄도 나올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기 때문이고 다 하느님의 전령들이요,
하느님께서 당신 도구로 파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 대한 당신 사랑을
천사를 통해서도 보이시지만 사탄을 통해서도 보이십니다.
그러니까 벌 형태의 사랑을 사탄을 통해 보이시는 것인데
우리는 벌을 사랑이 아니라 분노의 표출로만 생각하지만
사랑하기에 자식에게 벌주는 부모를 생각하면 꼭 그렇게
생각할 것은 아니고 하느님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복 형태의 사랑이 천사들을 통한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그 복이 공짜가 아닙니다.
온갖 쾌락을 누리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악에서 돌아오도록 주어지는 사랑의 시련이 벌이라면
복은 온갖 시련을 겪는 사람이 그 시련을 이겨내도록 주어지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에 따라 천사들이 달리 있는데 미카엘 대천사는
악과 싸우는 영적 전투에서 우리가 승리하게 해주는 대장군입니다.
라파엘 대천사는 토비트기에 잘 나와 있듯이
병과 싸우는 우리에게 치유의 약을 주는 천사이고,
가브리엘 대천사는 다니엘서와 루카 복음에 잘 나와 있듯이
중요한 순간에 알아듣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환시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해주는 천사입니다.
그리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온갖 쾌락이나 복을 누리다가 벌 형태의 하느님 사랑을 사탄을 통해 받겠습니까?
온갖 고통이나 시련을 받다가 복 형태의 하느님 사랑을 천사를 통해 받겠습니까?
대천사의 축일에 사탄에 대해서도 생각하며
사탄을 통해서나 천사를 통해서나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든 사랑에 감사드리는 오늘 우리입니다.
죄송합니다.
어제 공지하기로 한 뮤지컬 3차 공지가
어제 공지되지 못하고 오늘 공지하게 되었습니다.
골자는 공연을 늘려달라는 요청이 많이 있어서
11월 15일 광주 공연과
11월 16일 서울 공연이 추가되었다는 내용과
11월 16일 서울 공연에 어떻게 예약하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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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9.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58?referrerAllArticles=true
2026.09.29. 05:35
예수님과 더불어 생각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고 행동하는 삶을 살기 위해....
천사(angel)’라는 말은 그리스어 ἄγγελος(aggelos)에서 왔는데, 이는 '전령' 혹은 '사자(使者)'를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에서는 이를 하늘의 사자, 즉 천사(天使)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 mal’ak(말락)은 이 '사자'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데, 인간과 하느님의 사자를 모두 가리켰습니다. 하느님께서 멀리 계신 듯 느껴질수록 중재자의 필요가 커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는 후에 대천사라 불리게 된 위대한 존재들이 등장하며 이름이 붙여진 천사들의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미카엘은 "하느님과 같은 이", 가브리엘은 "하느님은 힘세시다", 라파엘은 "하느님께서 치유하신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천사 신앙을 이어받았지만, 그 관심은 다소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을 것을 알려준 가브리엘 천사의 의미는 교회의 영성 안에서 영원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신약성경은 천사들을 제자리에 두면서도, 하느님께서 더 이상 멀리 계시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신약성경은 그분이 이제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오신 분임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여전히 천사들의 존재에 대해 의미를 두는 것은 천사들이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며 사랑으로 돌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이 멀리 계신 분으로 인식되었기에 천사가 필요했다면, 이제는 그분이 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 우리 삶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 주시는 아주 친밀하고 친근하신 분임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천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달리 말해, 어떤 면에서 보면 구약과 신약에서 천사들의 역할이 달라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천사들이 단순히 멀리 계신 하느님과 인간의 통교와 만남을 위한 중재 역할을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면 신약에 와서는 그들이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마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을 깊이 의식하고 인식하게끔 해 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요.
다 아시겠지만, 이 장면은 야곱의 사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상기시켜 주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이제 사람의 아들, 즉 완전한 하느님이시자 완전한 인간이신 당신이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을 하시는 분, 즉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제 믿음의 여정, 즉 하느님께서 저에게 선물로 주신 이 삶의 여정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생각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제 에고가 이끌어가는 경향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너는 정말로 주님을 만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너는 정말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인가?"
전에는 이런 사실을 일상 안에서 별로 의식하지도 못한 채 살아왔지만, 요즘은 이런 사실을 가끔씩 의식하며 예수님 안에서 다시 저 자신을 추스를 때가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제대로 된 회심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이런 사실을 의식한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은총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임마누엘 하느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그분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분 안에서 생각하고 그분 안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믿음의 여정에서 가장 큰 관건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씩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소설 "작은 세상, 돈 까밀로"(돈 까밀로와 뻬뽀네")에 나오는 돈 까밀로 신부처럼 주님과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마음 먹을 때가 있습니다.
비록 돈 까밀로 신부는 성격이 급하고 세상적인 기준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주님을 만나고 또 주님과 대화하며 주님의 뜻을 찾아가고자 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아니, 어쩌면 돈 까밀로가 주님의 뜻을 찾아가고자 했다기보다는 주님께서 매번 그를 찾아가 당신의 뜻을 그에게 주지시켜 주고자 하셨던 것일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돈 까밀로 신부는 자기를 찾아와 주시는 주님을 알아차리고 그분과 만나 대화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ㅎ
그런데... 이런 삶을 살아갈 때 치러야 할 큰 대가(?)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과감히 내려놓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큰 은총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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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9.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5739
2026.09.29 05:37
그리스도와의 우정 2 말씀에 굴복하는 자유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아버지의 뜻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와의 우정은 사랑의 순종으로 깊어집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두려움에서 나온 굴복이 아니었습니다. 성부께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온 자유로운 자기 내어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자유를 아버지의 뜻에 내어드렸고, 그 사랑의 순종은 마침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분 곁에서 위로를 받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선택하신 사랑의 방식까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것을 저도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이 내려가신 곳으로 저도 내려가겠습니다. 당신이 용서하신 사람을 저도 용서하겠습니다. 당신이 자신을 내어주셨듯이 저도 저 자신을 내어놓겠습니다.”라는 삶의 응답이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완성해갑니다.
여기에서 순종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순종은 자신의 생각과 인격을 없애는 일이 아니며 누군가의 부당함이나 폭력을 무조건 감수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의 순종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사랑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순종이고, 때로는 말하는 것이 순종이며, 때로는 기다리는 것이 순종이고, 때로는 사랑 안에서 분명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순종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뜻이 이루어지는가?”가 아니라 “이 관계 안에서 아버지의 뜻, 곧 진실과 사랑과 생명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찾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공동체의 관계가 그리스도와의 우정이 검증되는 가장 현실적인 장소가 됩니다. 우리는 성당 안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를 오해하는 형제 앞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성체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나를 비판하는 사람 앞에서 내 자존심을 내려놓고 듣는 것은 어렵습니다. 십자가에 입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약함을 품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야말로 관상이 삶으로 내려오는 자리이며, 기도가 육화되는 자리입니다.
특히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합니다. 누군가 나의 수고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내가 한 일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공동체 안에서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것이 삶의 중심이 되면 사랑은 거래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나를 알아주어야 한다. 내가 너를 배려했으니 너도 나를 배려해야 한다.”라는 보이지 않는 계약서를 마음속에 쓰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시면서도 인정받지 못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친구에게는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찾아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가, 칭찬받지 않아도 선을 계속할 수 있는가,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 안의 인정 욕구가 조금씩 죽고 그리스도의 자유가 태어납니다.
다른 사람이 빛날 때 기뻐하는 것도 같은 십자가입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다른 사람이 더 잘하고, 내가 받고 싶었던 인정을 다른 사람이 받으며, 내가 오래 수고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감사와 칭찬이 돌아갈 때 마음은 쉽게 흔들립니다. 비교는 형제를 경쟁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칸 형제성은 다른 사람의 선을 자신의 선처럼 기뻐하는 자유를 요구합니다. “저 사람이 빛나도 괜찮다. 내가 주목받지 않아도 괜찮다.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진다면 누가 하든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자기중심성이 조금 죽고 형제성이 태어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내려놓는 것도 관계 안의 중요한 작은 순교입니다. 공동체의 갈등에서 우리는 흔히 “누가 옳은가?”를 묻습니다. 물론 진실은 중요하며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친구에게는 그보다 한 가지 질문이 더 필요합니다. “나는 이 진실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진실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진실을 무기로 사용하여 상대를 꺾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틀린 말을 했는가?”만 묻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려 하는가?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인가,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어떻게 말해야 진실과 사랑이 함께 살아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옳으면서도 사과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려던 내용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말을 하는 방식으로 당신을 아프게 한 것은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신의 옳음을 사용할 줄 아는 자유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틀렸기 때문에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옳으셨지만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네가 원하는 것은 승리인가, 아니면 생명인가?”라고 묻습니다.
통제의 욕망 역시 관계 안에서 죽어야 할 중요한 거짓 자아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기를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저 형제는 바뀌어야 한다. 내 말을 좀 들어야 한다.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을 말하고 도움을 주어야 하지만, 사랑과 통제는 다릅니다.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통제는 상대가 내 기대에 맞아야 내가 편안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실패를 허용하셨고, 베드로의 배신도, 유다의 떠남도 강제로 막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붙잡는 능력만이 아니라 놓아주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때로 순종은 “주님, 저 사람을 제 방식대로 바꾸려는 욕망을 내려놓습니다. 제가 해야 할 사랑은 하되 그 사람의 변화와 미래는 당신께 맡깁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시도록 허용하는 가난입니다.
서운함 역시 우리의 숨은 욕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거울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는가. 적어도 이 정도는 알아줄 줄 알았다.”라는 마음 속에는 우리가 상대에게 기대했던 것이 숨어 있습니다. 서운함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것을 정직하게 바라보면 내가 사랑 뒤에 어떤 보이지 않는 청구서를 붙여놓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운함이 찾아올 때 “나는 무엇을 기대했기에 이렇게 아픈가? 나는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던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의 반응을 기대했던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면 서운함조차 자기 인식과 자유의 길이 됩니다.
용서는 이 관계성의 가장 깊은 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상처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아니며 부당한 행동을 선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상처가 내 삶의 마지막 말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한 일이 내 미래와 내 사랑의 능력을 결정하게 두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용서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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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그리스도와의 우정 1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삶(260924. 01:38)
http://www.ofmkorea.org/ofmkfb/585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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