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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결 교 회 사
대현교회 홍순성 목사
Ⅰ. 성결교회의 출발 배경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성결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영적 부흥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감리교 신자였던 카우만(Charles E. Cowman, 1867-1924) 부부는 1894년 9월 시카고의 무디교회에서 개최한 ‘심프슨 선교대회’에 참석했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인도 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인 레티 카우만의 건강이 좋지 않아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던 중, 나까다 쥬지(中田重治, 1870-1939)라는 일본인 유학생을 만나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카우만은 만국성결교회에서 목사와 선교사로 안수를 받고 파송 받아 1901년 2월 일본에 도착하여 ‘중앙복음전도관’(일본홀리네스교단의 시초)을 세우고, 밤에는 ‘동양성서학원’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시작한 카우만 부부의 선교사역은 그들 자신도 놀랄 만큼 날마다 신장하여 그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디성서학원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길보른(E. A. Kilbourne, 1865-1928)선교사 부부를 일본으로 초청하여 동역하게 되었습니다. 카우만 부부와 길보른 선교사 그리고 일본인 전도자들은 활발한 노방전도와 개인 전도를 통해 많은 회심자들이 나오자 일본 곳곳에 ‘복음전도관’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활동을 관장하기 위해 1904년 11월 ‘동양선교회(OMS)’를 조직했습니다.
Ⅱ. 성결교회의 기원과 선교원칙
1904년 어느 날, 전통적인 한국식 복장을 입은 두 청년이 카우만과 길보른 선교사가 운영하는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이들이 정빈과 김상준이었는데, 정빈은 10세부터 고향에서 예수를 믿었고, 김상준은 20세에 예수를 믿고 가족에게서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각각 일본에 동경성서학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온전한 구원을 갈망하여 동경에 갔습니다. 그들은 밤늦게까지 성경을 연구하였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몇 시간씩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성결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1906년 세 번째 조선인 유학생인 이장하가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정빈, 김상준 이들과 함께 하며 늘 만나 기도하고 장차 조선에 돌아가 ‘복음전도관’을 개척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1907년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세 사람은 동양선교회 본부를 찾아가 재정적 도움을 받기로 하고 귀국하여 1907년 5월 서울중심지인 종로 염곡에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중앙교회의 전신)’이란 간판을 붙이고 복음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5월 30일 창립집회에서 5명의 구도자가 나왔습니다. 1911년에는 경성성서학원을 세워 4중복음의 전도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입니다.
정빈, 김상준이 전도를 시작할 때 두 가지 선교원칙을 세웠습니다. 하나는 새 교단을 만들지 않고 단지 4중복음의 체험을 동족에게 전하려는데 목적을 두었고, 또 하나는 노방전도와 개인전도와 같은 직접전도의 방법을 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노방전도는 파격적인 방법으로 많은 오해와 핍박이 따랐지만, 많은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여 즉시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당시 외치던 전도의 말씀은 불을 토하는 듯 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시오! 믿기만 하오! 믿기만 하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지금 곧 예수께로 돌아오시오.
그리하면 중생합니다. 새사람이 됩니다!"
복음전도관을 연지 6개월만인 1908년 1월에는 272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Ⅲ. 성결교회의 발전과정
1. 복음전도관시대(1907-1910)
성결교회의 선구자인 정빈, 김상준은 동양선교회가 운영하는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였고, 2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1907년 졸업과 함께 곧바로 귀국,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 염곡, 현재 종로2가에 위치한 작은 집을 세내어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Oriental Missionary Society Jesus Doctrine Mission Hall)’이라는 간판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한국 성결교회의 ‘복음전도관’의 시초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번화한 길거리로 나가 큰소리로 복음을 외치며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정빈과 김상준의 뜨거운 전도활동에 계속적인 성령의 역사로 복음전도관은 경성 장안에서 화제가 되었으며, 카우만과 길보른의 도움으로 염곡의 것보다 더 큰 기와집을 ‘동현(현 을지로 입구)’이라는 곳에서 한 채 세를 얻어 이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곳도 곧 자리가 좁게 되자 장로교인 이씨의 도움으로 경성중심지 번화가(현 무교동12번지)로 옮기게 되었으니, 이곳이 ‘경성중앙복음전도관’이 세워진 한국성결교회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1908년에는 이장하, 김혁준, 강태온 세 명이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이장하는 서울에서 전도활동을 도왔고, 김혁준과 강태온은 지방인 황해도 진남포에 가서 전도관을 세우고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1909년에는 김두엽이 귀국하여 개성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그 이듬해 1910년에 안동원이 동경에서 돌아와 그와 함께 활동 하였습니다.
2.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시대(1910-1921)
동경성서학원에서 훈련받은 정빈, 김상준 두 사람의 전도활동을 통해 자국민에 의한 전도의 성과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된 동양선교회는 피선교지의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와 같은 성서학원을 세워 훈련시키는 일을 선교전략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았습니다. 처음에 동양선교회는 한국 청년들을 동경성서학원에 입학시켜 훈련하려했으나, 언어문제, 경비 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 9명, 여자2명의 동경성서학원 졸업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10년 토마스 목사가 감독으로 파송된 것을 계기로 성서학원의 설립계획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11년 3월13일에 경성 무교동 복음전도관 안에 임시로 교사를 정하고 공식적인 경성성서학원을 개원하였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조선성결교회의 감독이며 원장으로, 교수에는 정빈, 통역에는 이장하가 맡아 10여명의 남녀학생들에게 3년 동안 집중적인 성서교육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서대문에 위치한 죽첨정 3정목 35번지(현 충정로 3가 35번지, 애고개 마루턱)에 땅을 구입하고, 건물을 지어 1912년 6월에 봉헌식을 거행하고 성서학원을 이전하였습니다.
경성성서학원은 뜨거운 전도열에 불타는 젊은 전도자들을 양성하였는데, 1912년 4월 1회 졸업생으로 이명헌을 비롯하여 1920년까지 남자 43명, 여자 1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초기 성결교회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동양선교회 선교정책은 롬16:18-20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 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가 함경도에서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지역분할을 해놓고 복음을 전하기로 하였으나 복음을 전하지 못한 곳이 많아 성결인들이 그곳을 다니며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동양선교회는 장로교와 감리교로 조직된 교회협회의 이 같은 분할이 그리스도의 운동에 실제적인 해를 입힌다고 판단해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되도록이면 소홀히 된 지역에 전도관을 세우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당시 압제받고 짓밟힌 백성들을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느낀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은 마을마다 다니며 천막을 치고 전도하는 ‘장막 전도대’를 만들어 수많은 영혼들을 예수께로 인도했습니다. 이 ‘장막 전도대’는 가는 곳마다 북과 나팔을 불면서 사람들을 모아 옥외집회, 노방전도, 축호전도, 전도지배포 등을 통해 전도했습니다. ‘장막 전도대’ 외에 ‘순회 전도팀’이 있었는데, 선교사와 성서학원 수양생이 한 조가 되고, 훈련된 한국인 목사와 수양생이 한 조가 되어 마을에서 마을로 다니며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예수의 70인 제자가 복음전도를 위해 짝을 지었던 것과 동일한 전도방식을 취했습니다.
또한 성결교회는 민족적으로 암울한 시기에 일제에 대한 항장과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는데 김상준, 토마스, 강시영, 김시삼, 천세봉, 백신영, 한도숙, 윤판석, 서용란 등이 앞장서서 주도하였습니다.
3.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시대(1921-1945)
한국성결교회가 조직되게 된 요인과 역사적 과정은 다름 아닌, 처음에 사용한 복음전도관이 교회가 아닌 전도관이라는 이름 때문에 같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백안시되고 이단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세확장과 발전에 이름이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1921년 9월 이름을 “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고 바꿈으로서 성결교회라는 새로운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성결교회는 1921년 교단조직을 하고 그 이름을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고 칭한 후, 1922년 11월 25일 교단의 기관지인 ‘활천’을 창간하였으며, 1929년 2월 27일에 “성결교회 제1회 연회(年會)”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1932년 2월에는 만주 선교활동을 개시하여 봉천과 하르빈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1934년 1월에는 성결교회 청년운동을 전개하면서 암울한 시대에서도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36년 하나님의 교회분리 사건이후, 1943년 ‘재림신앙’으로 인해 박봉진 목사의 순교를 비롯하여 많은 지도자가 검거되었고, 교단 강제해산을 당하는 교회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4.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시대(1945-현재)
광복 후 각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재흥을 서두르는 가운데, 성결교회는 1945년 9월 첫 주일 서울에서 300여명의 신도가 신학교 강당에 모여 재흥예배를 드렸고, 이 재흥의 불길을 시작으로 성결교회 ‘교단 재흥 준비 위원회’를 발족시켜 박현명 목사를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교단 부흥준비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1945년 11월9일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기독교 조선 성결교회 재흥총회”(제1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재흥총회는 재흥성결교회 7개 강령을 발표하며, 새로이 임원들을 선출하는 등 성결교회를 재건하였습니다.
이때의 중요한 의제로서는 교단명칭변경, 신학교 개교문제와 ‘활천’ 복간, 그리고 각 기관의 부활과 부흥 대책 등이었습니다.
일제말기인 1940년 10월22일 제1회 총회에서 교단명칭을 “동양선교회 기독교 조선성결교회”로 개칭하였다가 1945년 11월9일 재흥총회에서는 완전 민족 독립교회로서의 명칭인, 동양선교회 단체명을 삭제한 “기독교 조선성결교회”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45년 4월18일 제4회 총회 때,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확정됨에 따라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33년 제1회 총회 때, 선교부로부터 자치선언을 하자 교권 장악에 대한 세력 간의 마찰이 생기기 시작하여, 1935년 제3회 총회 때는 감독제를 주장하는 이사회와 순회목사 등 기성세력과 의회제를 추구하는 지방출신 교역자들 간에 의견차이로 결국 200여 교회 중 12개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 갈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나사렛 성결교회도 1948년 성결교회 6명의 목사와 300의 신자가 갈라져 나가 세운 교회입니다. 해방 후 기독교계는 신사참배 때 변절한 인사문제와 신학교의 신학사상문제, 그리고 기독교연합회(NCC)와 복음동지회(NAE) 가입문제 등으로 분열하였는데, 우리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를 통한 물자와 재정지원에 대한 의혹이 겹쳐져 보수측에서 ‘성결교 신학교’를 설립하고, 1962년 “예수교대한 성결교회”로 갈라져 나갔습니다. 다행히도 1965년에 예성으로 분리했던 이명직목사의 합동권유 메시지에 힘입어 일부 합동이 이루어졌으나 완전하게 합동하지는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Ⅳ. 성결교회의 수난의 역사
우리 성결교회의 상징은 ‘가시밭의 백합화’입니다. 다른 교회보다 더 많은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렸기 때문입니다. 성결교회 초기의 전도자들이 활동하던 때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진출에 대한 특권을 가지고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을 때였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대륙침략이 노골화되면서부터 일제의 기독교 박해도 노골화되었습니다. 언론이 통제되어 우리 교회의 기관지인 ‘활천’도 폐간 당했고, 일본의 천조 대신이라는 신을 하나님으로, 일본 천황을 예수님 대신 천지의 주로 숭배하게 하였으며, 기독교 대표들에게는 일본의 이세신궁에 참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우리 성결교회는 특별히 우리 주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심판하러 오신다는 재림의 교리로 인해 더욱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결국 우리 교단의 200여 남녀 교역자와 100여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교단은 해산 당했으며, 교회건물이 군수공장으로 빼앗기고 교회 기물들은 판매 처분되었습니다.
1950년 6.25 동란 중 받은 피해도 엄청났습니다. 106개 교회가 전소되거나 무너졌고, 투옥자들을 제외하고도 집단순교당한 교회들이 많았는데, 66명이 순교한 병촌교회, 35명이 순교한 진리교회, 김용은 목사 일가족 23명이 집단학살 당한 두암교회 등 산발적 순교자를 합하여 확인된 순교자가 156명에 달하며, 납북되거나 행방불명된 교역자들도 20여명에 달합니다. 그러나 성결교회는 피난의 와중에서도 순교자들의 피를 헛되이 하지 않았습니다. 1951년 부산피난시절 동광교회를 비롯하여 영도, 서면, 부용, 보신교회 등을 개척하였고, 피난총회를 열어 복음전열을 정비하였습니다. 또 피난신학교를 개교하여 육신적으로는 허기로 배를 졸라매었지만 영적으로는 오순절 분위기를 방불케 하는 전도사역이 있었습니다.
Ⅴ. 성결교회의 사중복음
우리 성결교회가 초창기부터 전파해 오던 전도표제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중복음입니다. ‘사중복음’은 성경의 진리이며, 성령세례는 성결신학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중생이란 거듭난다는 것이요, 본래 의롭지 못한 사람이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으로 신학적인 용어로는 ‘칭의’ 또는 ‘의인’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이 중생을 ‘기독교의 입문이며 천국시민의 자격을 갖추는 유일한 도리’라고 헌법에 규정하여 중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되며,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우게 되는 것입니다.(요 5:24)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이기고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성결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 헌법은 “성결은 성도가 받을 성령세례를 가리킴이니… 우리도 모든 사람을 중생으로 인도하고 중생한 처지에 있는 신자들은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도록 인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결이란 중생한 사람이라도 자기 힘으로는 거룩하게 될 수 없다는 전적무능을 깨닫고, 하나님께로부터 죄를 이기고 살 수 있는 능력 즉, 성령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중생의 은혜’가 순간적으로 오는 것처럼 ‘성결의 은혜’도 순간적으로 옵니다. 이것을 ‘성령세례’라고 하며(행 1:5),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기를 소원하기 때문에 언제나 성령께 순종하며 살게 되고, 실패하면 즉시 자백하여 새 힘을 받아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 몸을 경영하십니다. 우리 교회 헌법은 “신유는 신자가 하나님의 보호로 항상 건강하게 지내는 것과 또는 병들었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음을 얻는 것을 가리킴이니 이 은사는 우리 육신을 안전케 하는 복음이다. 그러나 의약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유란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유하심은 신유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 죄를 서로 고하며 기도하면 혹 죽을병에서도 일으킴을 받을 수 있습니다.(약 5:14~16) 또한 의약과 의원들도 하나님의 지혜로 병을 다스리는 능력을 받은 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치료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은 주님의 재림시에 완성됩니다. 우리교회의 헌법에는 “구약성경의 예언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수육탄생이라면, 신약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 할 수 있나니 우리는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재림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심판주로 다시 오심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다시 오실 때에 아무도 그 앞에서 변명 할 사람이 없습니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며(계21:7),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은 둘째 사망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계20:12)
Ⅵ. 성결교회의 나아갈 길
1. 전도 중심의 교회
성결교회는 원래 전도중심의 교회입니다. 19세기에 영국과 미국이 산업화되면서 도시는 노동자와 이민자로 가득 찼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기존 교회는 도심을 떠나 변두리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성결운동가들은 도심의 슬럼가에 들어가서 그들과 어울리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실 성결운동은 모든 사람들이 버린 빈민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운동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성결교회의 처음 이름은 ‘복음전도관’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결교회가 처음부터 전도 지향적인 교회였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결교회는 전도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1907년 9월 정빈과 김상준은 동경 동양선교회본부에 다음과 같은 선교 보고를 보냈습니다.
한 달 동안 우리는 8번의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가졌고, 4번의 성결집회, 12번의 구령회, 한 번의
특별집회를 가졌습니다. 주께서는 36명의 영혼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한 달 동안 1,200부의
전도지를 배포했습니다. 이제 성결을 구하는 3명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많은 마귀들이 우리를
대항해 나타나니 저들과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정빈, 김상준이 세운 ‘복음전도관’은 마을마다 다니며 수많은 영혼들을 예수께 인도했습니다. 성결교회의 선구자들의 영혼에 대한 열정이 이를 가능케 했습니다.
죽은 자는 생명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의 진정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신의 죄와 죽음의 비참함을 인식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각성케 하심이 있기 전에 초대 교회의 신실한 사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가 곧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했고(행 2:14-36)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행 2:37) 회심했던 것입니다. 어두운 시대 현실 속에서도 성결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빛을, 성결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로 이끌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세워진 성결교회, 그리고 그 기초에 뿌리내린 성결인으로서 구령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우리는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2. 온전한 신자를 양육하는 교회
한국성결교회는 성결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세워진 단체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성결의 복음은 등한히 했습니다. 성결이란 온전한 신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성결교회는 이 성결을 순간적으로 받는 것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중생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성결도 그렇게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성결은 오랜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의 제단 앞에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맡김으로써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은 부흥회적인 전통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한국성결교회는 이 전통을 계승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중생한 이후에 그리고 성결을 체험한 이후에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순간순간 의지하고 나가는 점진적인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목적은 세상에 성결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엡 5:26-27)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개인적으로 성결하고 온전한 신자가 되는 것이어야 하며, 교회적으로는 성결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재림 예수를 기다리는 성결인으로서 ‘근신하고 깨어있으라’(벧전 5:8)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내게 맡겨 주신 직분과 믿음과 은사와 사명에 대하여 계속해서 충성을 다하고, 교회에서의 삶과 사회와 가정에서의 생활이 일치가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성결한 사회를 만드는 교회
요한 웨슬리는 개인의 성결은 사회의 성결로 나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사실 성결한 개인이 모여 사는 사회가 성결한 사회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를 개혁하는 좋은 전통을 성결교회의 성결운동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결교회가 개인구원과 정교분리를 강조한 나머지 사회참여에는 소극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물론 성결교회가 사회개혁에 소극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결교회는 그들 나름의 사회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결한 신자를 만듦으로 사회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07년 대부흥 운동 기간에 이 땅에 들어온 성결교회는, 당시 한국에 나타나고 있던 성령운동이 한국인들의 마음을 새롭게 만들어 결국은 한국사회를 위하여 공헌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인의 도덕을 높이는 것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은 구체적인 독립운동보다 소극적인 방법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결교회는 종교는 종교로서 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국성결교회의 부흥집회는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건전한 시민생활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축첩제도의 철폐, 부정한 뇌물의 근절, 금주금연운동의 강조 등은 한국사회를 건전한 사회로 만드는 데 의미 있는 공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성결교회는 성결한 삶을 실천함으로써 한국사회를 위해 공헌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경적 가르침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회개하면서 고쳐 나가는 교회, 성도가 이 땅 가운데서 참 복음을 그 행위로도 증언하여 나가는 교회요, 성도인 것입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존재답게 감사하며 날마다 잘못된 것을 고쳐 나가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가는 성화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 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과정을 통해 복음을 드러낼 수 있고, 성결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성결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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