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중국 자금 유입… 日증시, 33년만에 장중 최고치
엔저 영향… 11개월간 29% 상승
日기업 실적 개선에 외인 투자도 몰려
“증시 보면 ‘잃어버린 30년’ 벗어난듯”
엔저 장기화에 소비 침체 우려 커져
일본 주식시장 지표 닛케이평균주가가 20일 장중 한때 33년 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버블경제 붕괴가 시작된 1990년 3월 이후 가장 높았다. 증시만 놓고 보면 ‘잃어버린 30년’에서 마침내 벗어난 것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 같은 증시 활황은 기록적인 엔화 약세 현상 장기화에 따른 일본 주요 기업의 실적 개선 영향이 컸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탈(脫)중국에 나선 기업들의 투자가 일본으로 향하는 효과도 누리고 있다. 다만 세계 주요국 중 유일하게 금융 완화를 고수하고 있어 유동성 과잉 부작용 및 향후 닥칠 금리 인상 충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체질 개선이 아닌 환율이 성장률 등을 좌우하면서 경제가 외부 변수에 흔들리는 경향도 강해지고 있다.
● 코스피-美 증시 웃도는 日 증시
이날 닛케이평균주가는 장중 33년 전 최고치(3만3753엔)를 넘는 3만3808.64엔까지 올랐다. 오후 들어 ‘팔자’ 주문이 몰리며 전 거래일보다는 0.59%(197.17엔) 하락한 3만3388.03엔으로 마쳤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33년 8개월 만의 최고치 경신 이후 목표를 달성했다는 분위기에 매수세가 한풀 꺾였고 오후에는 차익 실현을 위한 매도세가 강했다”고 분석했다.
일본 증시는 지난해 말부터 이달 17일까지 약 11개월간 29% 상승했다. 같은 기간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18%), 코스피(10.4%), 유로 스톡스 600(7%) 상승률을 웃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본 기업이 세계적으로 좋은 실적을 거두면서 외국인 투자가 몰리고 있다. 일본 상장기업의 올 회계연도 상반기(4∼9월) 순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 증가해 역대 최고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주도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따른 탈중국 러시가 강해지면서 대만 TSMC, 미국 마이크론 같은 반도체 기업의 대규모 투자도 잇따르고 있다.
이처럼 기업 실적 및 투자가 개선되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 9월 경제 전망에서 일본이 올해 1.8% 성장해 한국(1.5%)을 성장률에서 25년 만에 추월할 것으로 내다봤다.
여기에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예상보다 낮게 나오며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 가능성이 낮아진 영향도 받았다. 금리 인상이 주춤하면 위험자산으로 분류되는 주식 등에 돈이 몰린다. 이 같은 이유로 미 다우존스산업지수는 지난주 13∼17일(현지 시간) 1.9% 상승했고 S&P500지수는 같은 기간 2.2% 올랐다. 두 지수가 3주 연속 상승한 것은 올 7월 이후 처음이다.
● “엔저 장기화, 日 소비 부진 우려”
최근 눈에 띄는 일본 경제 성장세를 견인하는 것은 단연 엔저 현상 장기화다.
20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1.34엔 하락(엔화 가치 상승)하며 149.11엔에 거래됐다. 150엔 밑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올 1월 128엔에 거래된 것과 비교하면 연초 대비 엔화 가치가 17% 넘게 하락했다.
하지만 엔저 현상이 길어지면서 수입 물가는 올라 소비가 침체되는 악영향이 커지고 있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엔저에 따른 물가 상승, 부진한 임금 인상으로 소비가 얼어붙을 위험이 있다”며 일본 4분기(10∼12월) 성장이 둔화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는 움직임이 약해지면 엔화 가치는 상승할 수 있다. 수출이 끌어올린 일본 기업 실적이 언제라도 악화될 수 있는 요인이다. 경제 체력 회복에 따른 체질 개선은 아직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도쿄=이상훈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