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이방원 제146편: 하륜에게 직격탄을 날리다
(권력은 바람이고 권세는 구름이어라)
태종 이방원은 어이가 없었다. 명을 내리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야 할 지신사가 엎드려 일어나지 않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당장 의금부에 하옥하라고 불호령을 내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유사눌을 내치고 나면 민무휼 사건을 물 흐르듯이 처리해 나갈 인재가 마땅치 않았다. 그것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 유사눌이었다. 태종이 노하여 지팡이로 바닥을 치며 말했다.
"지금 중궁이 이 일을 알고 울면서 먹지 않고 있으니 내가 어찌 한양 거리에서 형을 집행하겠는가? 외방에 귀양보내어 신민(臣民)의 청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
왕비는 억장이 무너졌다. 민무구 민무질 두 동생을 잃고 또 다시 두 동생의 목숨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달렸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자신의 투기에서 비롯되었다니 괴로웠다. 왕비의 영화도 가문의 영광도 모두가 부질없는 일장춘몽(一場春夢)만 같았다. 민무휼 민무회 두 동생이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충격에 식음을 전폐하고 눕고 말았다.
죄인을 분리하여 각각 외방에 안치하라:
태종 이방원은 지신사의 반대를 물리치고 민무휼을 원주로, 민무회를 청주로 분리 유배시켰다. 무릎이 부서져 일어서지도 못하는 민무휼, 민무회는 함거에 실려 유배지로 떠났다. 살인적인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두 형제는 살아있어도 산목숨이 아니었다. 민무휼 민무회가 귀양지로 떠났으나 조정은 들끓었다. 당장 참형에 처하라는 것이었다. 의금부에서 주청이 올라왔다.
"민무휼과 민무회는 먼저 복주(伏誅)된 두 형이 세자에게 뜻을 쏟다가 이미 죽어 장차 세자의 은혜를 바랐기 때문에 세자에게 그러한 불경스러운 말을 했던 것입니다. 원윤의 모씨(母氏)가 임산(臨産)할 때 다듬잇돌 옆에 내다 둔 것도 알고 있었으며 교하로 보낸 것까지 알고 있으면서 말리지 않았으니 종지를 범한 것입니다. 율에 따라 참형으로 다스려 주소서"
"정비가 몸져 누워있고 송씨가 병을 얻었으니 후일을 기다려 바로 잡겠다." 의정부 육조 대간에서 다시 민무휼 민무회 등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형조판서 정역이 상소하였다.
"대역은 천지에서 용납하지 않는 것이고 왕법에 마땅히 죽이는 것입니다. 역신 민무휼 민무회가 종지를 제거하고자 한 정상이 나타났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대의로 결단하여 신민의 울분을 쾌하게 하소서."
이어 사헌부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송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죄인을 귀양 보냈습니다. 전하가 어떻게 송씨 때문에 핑계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박소(薄昭)가 한(漢)나라 사자를 죽이자 문제(文帝)가 베었는데 박소는 태후
(太后)의 아우입니다. 문제가 어찌 태후의 마음이 상할 것을 생각지 않았겠습니까? 법이라는 것은 천하와 함께 하는 것이어서 사사로이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형(典刑)대로 처치하소서."
의정부·공신·육조·대간에 이어 3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 조온도 상언하여 민무휼과 민무회의 죄를 청했다. 그래도 임금이 꿈적하지 않자 영의정 성석린이 상언했다. 성석린은 태조 이성계 년배의 국가 원로. 조선 개국과정에서 정도전에게 이색, 우현보 일파로 몰려 숙청되었으나 태종 이방원의 무인혁명에 참여하여 좌명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민무휼과 민무회의 불충한 죄가 명백하게 드러났으니 잠시라도 용인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대의로 결단하여 후세에 감계(鑑戒)를 내리소서."
귀신같이 따라붙은 지신사:
태종 이방원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잠을 이루지 못한 태종은 침전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지신사 유사눌이 귀신처럼 따라붙었다. 부엉이 소리가 간간히 들리는 후원을 거닐던 태종이 정자 앞에 멈추어 섰다. 궁궐에 유일하게 연못이 있는 해온정(解慍亭)이다.
훗날 창덕궁 후원이 사색의 공간이 아닌 임금의 놀이터가 되면서 부용정, 애련정, 존덕정 등 유희용 정자가 많이 들어섰지만 태종 때는 유일한 정자였다. 창덕궁 동북방에 정자가 완성되었을 때 권근이 '하늘이 맑고 땅이 편하다'는 뜻으로 청녕(淸寧)이라는 당호를 지어 올렸지만 태종이 직접 해온(解慍)이라 명명한 정자다.
오늘따라 무엇을 해온 할 것인지 의미심장하다. 태종이 당호를 지을 때 인친의 정을 끊어내는 결정을 한 장소로 쓰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해온정에 쏟아지는 별빛이 유난히 차갑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그래도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유사눌 뿐이었다.
"오늘 정부·공신·육조와 3성(三省)에서 청한 것이 윤당하니 유윤(兪允)을 내리소서."
"민무구와 민무질은 이미 그 죄에 벌을 받았고 민무휼과 민무회도 또 죄에 걸렸다. 민씨의 네 아들을 서로 잇달아서 죽이는 것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옛날 두헌이 궁액(宮掖)의 세력을 믿고 남의 땅을 빼앗았으나 장제(章帝)가 그에게 죄 주지 아니하니 후세의 사가들이 우유부단한 처사라고 기록 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두 사람을 죽이지 아니한다면 신 같은 자는 전하를 우유부단하다고 사책(史冊)에 쓸 것이니 만세의 뒤에 전하께서 어찌 우유부단하다는 이름을 피하실 수 있겠습니까?"<태종실록>
"알았다. 그러나 나는 차마 발언(發言)할 수 없다. 전날부터 오늘 밤에 이르기까지 이 일을 반복(反覆)하여 생각하여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겠다."
"이것도 또한 전하의 고식적인 인(仁)으로 백중흑점(白中黑點)
입니다." 신하로부터 질책을 당하는 임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자진(自盡)하면 가(可)할 듯하다."
"사사(賜死)하도록 하십시오. 저들의 자진함을 어찌 기다리겠습니까?"
처형 방법이 결정되었다. 이튿날, 의정부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부복하였다.
"불충한 죄는 왕법(王法)에 있어서 주륙(誅戮)에 해당하는 것으로 천지(天地)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역신 민무구와 민무질은 이미 그 주륙을 당하였으나 그 형들이 죄도 없는데 죽었다고 하여 몰래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 불충한 죄가 뚜렷하게 나타났으니 법대로 처치하여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민무휼과 민무회를 내 어찌 사랑하여 보호하겠는가? 다만 어미 송씨가 연로하고 중궁이 몹시 애석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은 즉시 끊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륜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하공의 말이 옳다."
태종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맹진을 민무휼이 있는 원주로, 송인산을 민무회가 있는 청주로 즉시 떠나라 명했다. 다음날 한양으로 돌아온 이맹진과 송인산이 보고했다.
"민무휼과 민무회가 모두 자진(自盡)했습니다."
"민무휼과 민무회의 불충한 죄를 정부, 공신 육조, 대간 등 문무각사(文武各司)에서 여러 차례 신청하였으나 다만 정비(靜妃)의 지친이기 때문에 차마 법대로 처치하지 못하고 외방으로 유배했는데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서로 잇달아 목매어 죽었으니 더 이상 논하지 말라."
권력은 바람이고 권세는 구름이어라:
민무휼 민무회 형제가 세상을 떠났다. 왕비를 지친으로 둔 부귀영화도, 4형제가 입신양명하는 가문의 영광도 막을 내린 것이다. 왕기가 서려있는 사위를 맞아 좋아했던 민제를 비롯한 아들 4형제가 모조리 죽었다. 누가 그랬던가? 권력은 바람이고 권세는 구름이라고.
이 때 세종 나이 열아홉이었다. 위로 양녕 효령 두 형을 둔 셋째였다. 남달리 효성이 지극했던 충녕은 아버지로 인하여 몸져 누운 어머니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등극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시기다. 태종은 양녕이나 충녕 인물 중심이 아니라 차세대 왕권에 걸림돌이 될 우려가 있는 외척을 척결한 것이다.
민무휼 민무회가 자진하던 날. 하륜을 탄핵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하륜과 민무휼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민씨 형제를 처치한 칼끝이 하륜을 겨냥한 것이다. 하륜에게 직격탄이 날라 온 셈이다. 외곽을 때리던 공격의 칼날이 하륜의 심장을 겨누었다. 이제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한 백병전이 벌어진 것이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47편~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