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 ] Beramode and Dark Prince - Still friend, Forever friend
순환(循環)이라는 거대한 숙명의 흐름은 언제나 그 끝을 아늑한 만족으로 맞이하며
자성(自省)의 의지와 욕구로 시작되었다. 언제나 시작과 끝은 함께 하기에, 모든 것은
잃어버릴 수 없다는 사실조차 망각하였다.
왜냐하면 믿지 않기에.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태초부터 고독(孤獨)은 존재했다. 이 고요하고도 따뜻한 어머니의 공간은
설령 겁쟁이나 위선자라 할지라도 포근히 안아주기 때문이었다.
절대(絶大)의 심연.
베라모드는 고독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할 수 없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그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웃고, 울며, 쓰러지고, 미소짓는 절망
으로 미쳐버릴 것 같은 긴 시간을 함께 해온 친구였기에. 그래서 이제는 조금 귀찮아진
것 뿐 일 것이리라.........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빠르든, 늦든. 좋든, 싫든.
언제고 간에 자신은 반드시 고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
거대한 방안.
수 많은 회로로 연결되어 벽에 부착해져 있는 컴퓨터들 사이에 실버블론드에 가까운
아름다운 백발을 찰랑이는 남자가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아니, 울고 있는 건지도 모
른다. 가느다란 턱선과 흰 피부, 손톱이 길게 자란 매끄러운 손가락은 그에게 신비스러
움을 느끼게 한다. 황금색과 붉은색의 알아볼 수 없는 문양이 그려진 그의 정복은
도저히 그의 가녀린 몸이 지탱해 주지 못할 것 같은 인상을 주고있다. 보는 사람의 가
슴을 철렁 내려앉게 할만한 블루아이즈, 성스럽게 조차 보이는 장밋빛 입술.
음모의 달콤한 검은 색의 유혹은 독한 만큼 요염하다. 음모의 신.
진실을 구현하는자.
베라모드.
그것은 곧 이름이자 보편(普遍)의 의지.
에스겔력 1213년.
다크아머와 실버애로우 연맹군은 신들의 음모, '귀환 프로젝트'를 저지하고 안타리아
의 멸망을 막기 위해 오랫동안의 앙숙관계를 청산하고 동맹을 맺었다. 암흑의 수장
데이모스를 주축으로 한 동맹군은 주위의 이목을 속이고 제국의 재상으로 군림해왔던
음모의 신 베라모드를 숙청하기 위해 힘을 모아 오딧세이로 쳐들어갔다. 초시공 도
약 우주선 오딧세이는 지금 베라모드와 주신들의 휘하에 오랜 숙면을 깨고 아르케
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신들의 고향. 그 그리운 태초의 아르케로.
안타리아 최강이라는 4대 검사 중에서도 제일(第一)의 절대검객으로 불리우는 제국
의 황제 흑태자(黑太子) 칼 스타이너는 안타리아인 모두의 염원을 한몸에 받고 아
스모데우스로 주신들을 추격했다. 그러자 베라모드를 제외한 주신 모두는 오딧세
이 밖으로 나가 자신들이 창조한 최고의 걸작 마장기 아스모데우스와 일전을 겨루었
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오직 베라모드만이 알고 있는 진실로의 순환은 시작되고
있었다. 비참한 노래가, 파멸의 장송곡이.
헌신의 에르지야스를 마지막으로 내보내 흑태자의 추격을 지연시킨 베라모드는 크
리스탈 생명유지장치에 반듯이 누워 잠들어 있는 푸른 머리의 청년을 지긋이 바라보
고 있었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은 가슴에 장검 하나를 안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이제 곧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겠지요. 그리고.........그
리고 이제 또다시 지속하고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거듭하고 거듭해서. 그렇게 영원
히."
베라모드가 조용히 읊조렸을 때 수많은 회로 선이 요동치듯 움직이고 기기 중 가장
거대한 크기의 컴퓨터가 붉을 빛을 번쩍거리며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오
딧세이에 한발 먼저 숨어들어 동력원을 파괴한 칼스와 샤크바리의 일전이 승부가
난 모양이다.
"삐삑 - 오딧세이 메인 제어 시스템 '살라딘' 경고합니다. NO.479 지역에 침입자 칼스
이동 중. 주신(主神) 샤크바리, 생명반응 나타내지 않습니다. 4중 방어체제 작동시작.
목표물 확인. 동력 시스템 27.09% 손상되었습니다. 유지모드로 전환. 완전 자동 복구
불가능. 오차율 0.241%로 46시간 후 손상 범위의 74.20% 복구 가능합니다. 삐삑
- 경고. 아스모데우스와 격전중인 주신 8명 모두 소멸하였습니다."
"죽은 건가요.........믿지 않기 때문에 포기해버린 폐물들은 사라지는 것이 낫지요.........숙원
은 그렇게 쉽게 이룰 수 있는게 아니잖습니까. 안그래요? 프라이오스."
"경고. 경고. 아스모데우스 내부에서 오딧세이로의 접촉시도. 접촉 가능합니다. 접
촉하시겠습니까?"
"스타이너......왔구나. 고요한 이 슬픔의 지옥에."
스타이너. 스타이너. 칼 스타이너.
소중한 장난감. 그러나 이제는 소유자가 바뀌어 통제가 불가능해져버린 가엾은 마리오
네트. 이제는 추억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아픈 기억의, 그만큼 미소짓게 만들어버리
는 사랑스런 이름. 칼 스타이너.
그가 오고 있다. 자신의 목숨을 받으러. 베라모드는 흑태자의 분노한 얼굴을 떠올리고
는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이기 전에 용서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궤도를 바꾸
어 잘못 회전하는 것이 불가능한 흐름의 시간. 더 이상은 양보하거나 봐줄 생각은 없다.
"미안해.......정말. 좋아했는데."
"반복합니다. 접촉하시겠습니까?"
"yes......."
베라모드가 가볍게 중얼거렸다.
"삐삑 - 접촉 허가. 게이트를 오픈 합니다. 삑 - 엔터링 불가능. 에러 발생. 접촉 불
가능합니다. 재시도 허락되지 않음. 명령이 거부되었습니다. 메인 컴퓨터 '살라딘'은
'베라모드'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져 있으므로 이번 메시지 입력
불가능 합니다. 삑 - 경고. 목표물 칼 스타이너. 게이트를 부수고 침투중입니다."
베라모드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이런..........성격 급한건 여전하군."
"침입자 칼 스타이너 1층의 '참회의 석실'도달. 파괴신 20마리 배치. 평소의
89.24% 활용 가능합니다. 전투 시작. 오차율 0.583%로 32분 8.12초 후 3층 홀 '속박
의 옥'에 도착합니다."
"이제.........라스트 스퍼트다."
베라모드는 크리스탈에서 눈을 떼고 외쳤다.
"오딧세이가 현 재 수행중인 입력 메시지 '아르케로의 귀환' 삭제한다! 두 번 째로 입
력된 비밀 메시지를 로드 하라!"
"삑 - 입력자 프라이오스. '아르케로의 귀환' 삭제하시겠습니까? 삭제되었습니다. 세
컨드 메모리 로드합니다. 삐삐삑 - 로드 완료. 입력자 베라모드. 패스워드 확인. 입
력시간 28일 오전 6시. 메시지 내용은 '칼스 게이저와 칼 스타이너의 생명반응이 사
라지면 모든 기관은 작동을 정지하고 안타리아에 착륙한다.' 입니다. 새로 입력중.
입력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명령의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오딧세이는 모든
작동을 정지합니다."
베라모드의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시 시작한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기다림의 끝은 뒤
틀려져 있기 때문에..........스타이너. 마치 너와 나처럼. 반복하고 반복해서, 이제 다시
한번 그 때가 돌아오겠지.........."
잠시 뒤에 드르륵 문이 열렸다. 무의미하지 않은 정적의 애달픔 속에.
베라모드의 눈에 아주 조금이지만 숨을 몰아쉬고 있는, 파괴신의 피로 범벅이 된
흑철의 갑옷과 헬름을 걸친 남자가 기형적으로 생긴 거대한 검붉은색의 검을 들고
걸어오는 것이 비춰졌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흑태자도 살짝 눈을 감은채로 자신을 바라
보고 있는 베라모드를 보고서는 멈칫했다. 그는 투구를 벗어 벽에 던졌다. 아름다운 긴
흑발이 나풀거렸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
".........."
변하지 않았다고 느꼈다. 말로 표현되지는 못했지만 둘만이 공유했던 시간의 파편은
여전히 둘을 묶어 주고 있었다. 그토록 긴 시간 속에 그토록 많은 생각을 하여 기나
긴 인연을 부정하려 해도 불가능했던, 이제까지의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을 때. 깨끗하고
단호하게 모든 것을 종결시킬 시간이었다.
잠시 후, 지속되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베라모드였다.
"지금 온 거야? 조금 늦었어, 스타이너. 우리가 서로 만나는 것이 오늘이 마지막 날일텐
데,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난 조금이라도 길게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소중한 친구. 소년일 때부터 만나 순수하고 깨끗한 신뢰를 쌓아온 관계.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베라모드는 이게 아니라고 느꼈다. 어렸을 때의 아름다운 추억은 언제까
지나 남아있었지만 소년이었던 태자는 언제까지나 소년으로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태자는 성장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어른으로. 그가 계속 많은 것을 생
각하고 익혀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게될 때까지도 자신은 언제나
태자와의 권태 속에 있고 싶어했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실수를 깨달은 베라모드는 자신의 손으로 태자
를 부쉈다. 태자에 관련된 모든 것을 부숴버렸다. 그를 비공정 켈베로스에서 떨어뜨
릴 때에도 일말의 후회감 조차 들지 않은건 10여년 전의 아주 오래된 기억.
저번 암흑성에서는 갖지 못한 둘만의 재회였다. 흑태자 역시 마음 한켠이 쓰라려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밝게 미소지어주던 그인데. 베라모드는 자신을
배신하고 다시 만나는 지금에도 일말의 두려움이나 변명없이 당당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
었다. 복잡한 심정 가운데 흑태자는 문뜩 다시 한번 베라모드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왜......왜 날 배신한 거지? 베라딘."
흑태자의 추궁하는 목소리는 재회의 반가움, 추궁해야만 하는 안타까움, 꺼지지 않은
증오와 오열이 거듭 뒤섞여져 있었다. 그만의 냉정하고 압도적인 기운이 배제된, 감정
의 파편이 잔뜩 묻어있는 아련한 좌절이었다.
베라모드가 더욱 빙긋이 미소지었다.
"내 본명은 리겔 드 베라모드 알데바란(Rigel d' Beramode Aldebaran). 베라모드라고
불러주기 바래."
흑태자가 도리도리 머리를 저었다.
"아니, 난 널 베라딘이라 부를꺼다. 네가 설령 내가 알고 있는 베라딘과 다른 이라 할지
라도. 그게 과거부터 내가 너를 불러오던 이름이었으니까!"
"뭐, 좋을 대로 해."
"베라딘. 다시 한번 묻겠다. 아무리 너에게도 두 번 이상 대답을 회피하는 예외는 주지
않았어. 왜 그날 켈베로스에서 그런......행동을 한 거지? 왜 나를 배신한 거야? 대답해!
왜? 왜!"
베라모드의 입가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져갔다.
흑태자의 추궁은 계속 되었다.
"제국을 원했던 건가? 그건 아닐 테지. 파괴신상을 모아서 그 힘을 오딧세이에 사용
했으니 단순히 힘을 얻는 것만은 목적이 아니었겠지. 정말로 단순히 네 고향인 아르케
로 돌아가고 싶어서 장애물이 될 나를 제거하려 했던 거냐? 그런 거였나!"
".......그건 아니야. 애초부터 파괴신상 따위 모을 필요도 없었어. 어디까지나 머저리
들인 빛의 주신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 한일이었으니. 굳이 이유를 대라면.........흑태자
란 위험인물을 8년 동안 침묵시켜 시간을 버는 것......이라고 말하면 될까?"
미소를 멈춘 베라모드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빙옥의 외모에서 싸늘하게 풍겨 나
오는 압도적인 살기와 사람을 짓누르는 권위의 표출은 제아무리 흑태자라도 마음을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흑태자가 실종된 뒤에도 게이시르 제국이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자랑했던 것은, 칼스를 제외한 제국7용사가 변방으로
축출되었는데도 아무런 항변을 하지 못한 것은 베라모드의 강력한 일면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라모드의 대꾸는 거의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는 흑태자의 마음을 당황하게 만
들기에 충분했다.
"설마.......너.......내가 8년간 기억을 잃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냐?"
"........네가 없는 동안.......무척이나 괴롭고 슬펐어, 스타이너. 하지만 너에게 전혀 미안한
마음은 없어. 업(業)은 도는데, 사념에 씻겨 내리는 건 아니야. 넌 나를 원망하겠지. 그
건 말이지.......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난 너를 배려해 줄 수가 없었어. 그리고 그건 지금
도 마찬가지. 하아.......이해해 달라고 하지 않지만 그저 알아주었으면 해. 내가 널 사랑해
서 이제까지 친구로 지낸 건 거짓이 아니라는걸."
베라모드가 웅얼거리자 흑태자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난 이미 널 믿을 수가 없어......넌 오늘 죽는다......베라딘."
베라모드는 슬프게 웃었다. 부드럽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목소리로 흑태
자에게 중얼거렸다.
"네가 알고 있는 과거. 만들어 가고 있는 현재. 그리고.....그 미래까지.......넌 알 권리가 있
지.........스타이너. 우리 처음 만났던 거. 기억하고있어? 모든 것의 시작은 거기였지."
"기억하고 있어. 그것도 네 의도 아니었던가?"
"그래. 한편의 긴 비극이었지. 내 기억 속에 있던 너는 어렸으면서도 어른인척 하는 귀
여운 꼬마였는데.......아무튼 변명은 하지 않겠어.......하지만 널 사랑했어."
흑태자는 멍청하게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목소
리도 어딘가 베라모드처럼 구슬프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나도 널 정말 좋아했다. 아니, 지금도 난 널 좋아하고 있어. 우린 어렸을 적부터
둘도 없는 친한 친구였었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우리들은. 이건 가식인 걸까?
네가 나를 배신하고, 내가 너를 죽이러 왔다는 이 상황이. 안타리아를 위해서가 아니었
어. 게이시르를 위해서가 아니었어. 난........네가 내 곁에서 웃어주는 걸로도 만족했는데.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 언젠가 날아가 버릴 작은 새의 정체를. 네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야. 그래, 네가 언젠가 나를 떠나리라는 것을 알았던
거야. 견딜 수 없었지. 10년 전 켈베로스에서의 네 작별인사........"
"...........모두 어쩔 수 없는 거야."
"물론 난 널 죽일 거다. 더 이상 약해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난 죽은 너를 껴안고 아
마 울겠지? 잘 몰라. 운다는 행위는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어렸을 때의 일이지만........하지
만 난 아마도 널 죽이면 슬퍼 할 꺼야. 우습지? 이 졸부 같은 패왕의 모습이? 내가 평
생을 걸고 사랑한 사람.......베라딘이여."
스타이너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래.......네 말대로 모든 건 우리의 만남으로 인해 시작되었지. 내가 10살 때, 붉은 노을
이 지는 어느 가을 저녁때였어. 잊지 않고 있어. 너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 보았을
때......넌 그때도 아름다웠었지."
"무겁고 고귀한 숙명의 조각......이었어. 우리의 과거는."
둘은 원하지 않은 아픈 과거를 회상했다. 그것은 25년 전의 암흑성에서 있었던 아주 작
은 사랑의 이야기. 모래로 화해 사라진 하나의 슬픈 노래였었다.
현 게이시르의 황제 칼 대제의 넷째 아들이었던 칼 스타이너는 사람을 극단적으로 혐오
했다. 위선과 가식으로만 뭉쳐서 아양이나 떠는 인간들. 이미 그 나이 때의 검술과 학
문이 스승을 뛰어넘은 스타이너는 모든 것이 경멸의 대상이었다. 아버지 칼 대제조차
증오했다. 그는 그날 자신들의 재력만 확고히 하고자 하는 무능한 관료들의 회의를 고
찰한 후 울분에 휩싸여 개인정원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황혼이 스러져 가는, 너무나도 쓸
쓸한 가을의 저녁이었다. 노을이 태자의 얼굴을 붉게 물들여 보이게 했다.
'죽인다. 후에 모두 죽일 테다. 날 능멸 하려드는 귀족들, 황족들, 외가세력들. 모조리 죽
여버리겠다. 칼 대제께서 돌아가시면 내가 제국을 차지하겠다. 그리고 팬드래건을 멸망
시켜 안타리아를 나의 수중에 넣을 것이다. 나도 남들과 똑같다. 빌어먹을. 나도 죽여버
리고 싶다. 제기랄! 제기랄!'
미웠다. 남들도 자신도 흙탕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개와 같았다. 외인들이 자기에게 보이
는 반응은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가까이 있을 때 아양을 떨며 존경하는 척 하는 행위,
그리고 자신들끼리 있을 때 욕설을 퍼부으며 모략을 꾸미는 행위. 그는 친구가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칼스가 있었지만 그는 친구라기보다는 자신의 신하이며 검술상대였다. 친구
따윈 만들지 않았다. 소년 칼 스타이너에겐 야망과 분노밖에 허용될 수 없었다. 그는 그것
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응?"
그는 걷다가 잠시 멈칫거렸다. 저 발치 쪽에서 정원사로는 보이지 않는 아이가 등을 돌
린 채 데이지 꽃밭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대충 보아하니 긴 백색의 머리를 길렀는데 자기
또래쯤 되어 보였다. 왕자의 정원에 정원사가 아닌 다른 이가 들어오면 사형을 면치 못한
다. 스타이너는 내심 화가 나서 그 아이의 어깨를 움켜잡은 다음 우악스럽게 뒤로 돌렸다.
"!"
순간 눈앞이 새하얘졌다.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다. 지금 앞에 앉아서 놀란 눈으로 이
쪽을 쳐다보는 소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노을의 주홍빛에 반사되는 하얀
머리에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 옷도 백의를 입고 있었던 소녀는 붉은 황혼과 만발한 가
지각색의 데이지와 어울려 절묘하고도 환상적으로 보였다. 스타이너는 자신의 얼굴이 어
느 사이 엔가 새빨개 진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멍하니 소녀의 얼굴만 들여다보며 할말을 잃
고 있는 중이었다. 소녀가 살짝 웃었다.
"정원의 주인이신가 보군요? 실례했습니다. 데이지가 무척 화려해서 그만.......성함을 물어
도 될까요?"
평소 같으면 의심을 하거나 크게 분노할 스타이너였지만 그녀 앞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나
지 않는 듯했다. 소녀를 보는 순간 경멸심이나 분노는 씻은 듯 사라졌다. 소녀가 이름
을 묻자 스타이너는 그제야 깜짝 꿈에서 깨어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이 나라를 통치하시는 칼 스타이너(Karl Styner)대제의 넷째 아들 칼 스타이너라고
한다. 이 나라의 왕자다. 네 이름은 뭐지?"
홍안의 미소녀는 상대가 왕자라고 말하는데도 별로 놀라지도 않는 듯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왕자전하. 제 이름은 베라딘 폰 베텔게우스(Beradin von Betelgeuse)
라고 합니다. 6조 선대 게렐트 폰 베텔게우스 공의 후손입니다. 무례를 용서바랍니다."
'베라딘 폰 베텔게우스.........'
그것은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 ◎ ◎ ◎ ◎ ◎
시간은 흘렀다. 많은 대화를 했으며 서로에게 공감했다. 달랐다. 스타이너는 베라딘이 언
제나 자신이 보아온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고 느꼈다.
스타이너의 눈에 비친 소녀 베라딘은 언제나 자신에게 생긋 미소를 지어주었었다. 허나
왜였을까, 그의 눈에는 그것이 공허하고 슬프게 보였다. 게다가 확신할 수는 없어도 베라
딘은 은연중에 상당히 자신에게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 눈을 감고 기
억해줄 수 있는 시간. 베라딘은 다른 사람들과 '아주 다른' 사람이다. 그녀의 청아한 눈망
울은 위선과 거짓을 담지 못한다. 스타이너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 담담하고 무서운 왕자라고 알려진 칼 스타이너의 정원. 수백 종류의 아름다운 꽃이 흐
드러지게 만발한 그만의 조용한 정원에서. 그가 처리할 정무가 끝나고 휴식을 취할 때 꽃
밭에 와 털썩 드러누우면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베라딘은 조용히 웃으며 무릎으로 태자의
머리를 받쳐주었다. 그녀의 냄새가 좋았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곱게 쓰다듬어주는 베라딘
의 고운 손길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자신도 내려다보고 있는 베라딘의
뺨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면 저녁에 찾아오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주홍빛
황혼이 두 사람을 가슴아프게 비췄다.
"가을도 거의 다 갔어......오늘도 어제처럼 시원하군......"
"......그렇군요. 왕자전하."
"넌 쓸데없는 말은 많이 하지 않더군.......마음에 드는 점이야. 넌 확실히 뭔가 달라."
"감사합니다. 왕자전하."
잠시 석양을 바라보며 누워있던 스타이너는 뭔가 생각났는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놀란 얼굴을 하는 베라딘에게 빙긋이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그대.......미래를 얻고 싶지 않나?"
베라딘의 눈매가 약간 찌푸려졌다.
"왕자전하?"
"들어봐라. 베라딘. 칼 대제께서 돌아가신다면......이 제국은 내전의 열화에 휩싸일 것이다.
다음 황제가 되기 위해서 왕자들끼리 칼을 빼들고 서로를 죽이는 것은 게이시르의 필연적
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물론 난 승리할 것이다. 이 제국을 차지하는 것은 나다. 베라
딘......그대에게 다시 한번 묻지. 미래를 얻고 싶지 않나?"
"......저를 회유하시는 겁니까? 무엇보다 왕자전하께서는 저를 능력 등을 포함한 개인적인
것들을 잘 모르시지 않습니까?"
"쿡쿡......그런 건 상관없어."
스타이너는 특유의 위엄으로 가득찬 목소리로 베라딘에게 말했다.
"함께 새하얀 꿈을 보자는 거다. 베라딘. 이 제국을 얻고 싶지 않나? 내 곁에서 미래를
손아귀에 움켜잡고 싶지 않은가?"
"전하.......그 말씀은?"
"아직도 모르겠는가? 베라딘 폰 베텔게우스여. 나 게이시르 제국 황제의 넷째 아들 칼
스타이너는 그대에게 청혼하는 것이다. 그대가 나의 비가 되기를 바라는 거다."
".........!"
어둑어둑 밤이 빠르게 찾아왔다. 노을에 가려져 있던 보름달이 환하게 빛났다. 스타이너
는 팔을 벌려 멍하니 앉아있는 베라딘을 가볍게 껴안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입술을 베라딘
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왜 이렇게 너에게 푹 빠졌는지 모르겠다. 너에게는 조금의 거부감도 생기지 않아.
그래, 후회하지 않게 해주마. 평생 사랑해주겠다. 베라딘. 그대에게 이 제국을 주겠어.
그대에게 이 미래를 주겠다는 것이다. 나와 함께 보면서 나와 같이 걸어가지 않겠는가?"
"전하......"
"긴말하지 마라. 난 말 많은 사람을 싫어해. 베라딘......사랑한다."
"전하께서는 순혈의 그리마를 잇기 위해서라도 같은 왕족과 결혼하셔야 합니다......안 그래
도 지금 전하의 배필은 죠세핀님의 여식 아이린 왕녀님이 가장 유력시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내 사촌누이이지 아내가 될 사람이 아니야. 내가 택한 것은 바로 너다."
"전하......"
베라딘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저를 이렇게 생각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굳이 저 같은 남자라도 괜찮다면 앞으로 전
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스타이너는 기뻐했다.
"그래, 너 같은 남자라도 상관없다. 응?......가만......남자?"
"예. 설마 모르고 청혼하신 건 아니겠지요?"
베라딘이 싱긋 웃었다.
"베라딘.........농담이 심하군?"
스타이너가 웃으며 자신에게 농을 건넨 줄 알자 베라딘는 몸에 걸치고 있던 가디건과 겉
옷을 휙 벗어버렸다.
"!"
속옷 위에 드러난 베라딘의 나신은 확실히 여리여리 했지만 여자가 아닌 남자의 몸이었다.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목젖도 있고 가슴도 없었다. 스타이너는 기가 막혀서 자신도 모
르게 헉 소리를 내며 말을 더듬었다.
"베......베라딘......서......설마?"
"흠......전 또 전하께서 남자를 좋아하는 취미를 가지시거나 농담을 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어디 편찮으십니까?"
잠시 후 그 근처를 칼스가 지나가다가 목격했다. 자신도 안면으로 익히 알고 있는 베라딘
이 석상에게 웃으며 지속적으로 말을 거는 것이었다. 그는 궁금해져서 들어가서는 안돼는
태자의 정원 안 해바라기가 있는 곳에 들어갔다. 그리고 뒤에서 자세히 보니 그건 석상이
아니라 굳은 사람이었는데 긴 장발로 봐서는 아마 칼 스타이너 전하 같았다. 순간 당황했
으나 곧 그는 다른 생각을 했는지 픽 웃었다.
"나도 참. 그럴 리가 없잖아. 이제까지 전하의 포커페이스는 깨진 적이 없는걸. 저건 왕자
전하가 아냐."
"아하핫......쿡쿡......맞아, 그랬어. 그게 꼬마 스타이너 왕자의 첫 번째 고백이자 청혼이었
지? 다시 생각해보니 이거 정말 영광인걸?"
회상 뒤 베라모드가 즐거운 듯 쿡쿡 웃자 흑태자의 얼굴이 조금 벌개졌다.
"흥. 남자에게 고백한 건 내 생애 최고의 실수였지만........그때 네가 앉아있던 데이지 꽃
밭........데이지의 꽃말을 그 당시 알고 있었으면 10년 전 켈베로스의 악몽은 없었을지도 모르
지."
"데이지의 꽃말.......'순진'과 '평화' 그리고 숨은 뜻 '배신' 말이야? 하긴......그럴지도."
아직까지도 흑태자의 말은 험악했지만 분위기는 많이 누그러졌다는 걸 베라모드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스타이너."
베라모드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 졌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슬픈 소야곡의 결말.......그래. 난 알고 있어, 스타이너. 좋아해 준
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내가 널 사랑했기에 널 죽여 줄꺼야. 언제나 너와 해가 지고 달
이 뜨는 그 언젠가 까지 함께 하고 싶었지."
베라모드는 잠시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좋은 공기야. 안 그래? 조금만 내쉬어도 왈칵 눈물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 좋은
조용한 공기. 과거로 돌아가기는 늦었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보여주기에는 사랑
의 대가가 크지. 모든 걸 포기하고 모든 걸 버려서라도 평범하게 네 곁에서 안식을 맞았으
면도 했어.
그저 안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사랑한 만큼. 앞으로 살아갈 만큼. 난 충실하지 못했
어. 흐릿해지는 망각의 끝에서, 깨어진 조각을 다시 맞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내가 바보
였던 거야. 끝도 없이 정화해도 언젠가 깨트려 버릴 미지의 심연, 칼 스타이너. 그 무엇
보다도, 내 자신보다도 널 사랑했었다는 걸 넌 믿어 주지 않겠지?
네가 행복했으면 했어. 내가 널 사랑한 만큼 네가 행복하게 살길 바랬어. 그리고 우리의
공존의 행복. 그것을 내가 깨트렸을 때, 켈베로스에서 네가 나에게 이유를 물으며 떨어진
시련의 행복만큼. 그래, 그 만큼........."
베라모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경멸해주기 바랬어. 그랬던 만큼의 내가 대가로 받을 경멸. 참회를 비겁하다 해도, 그
만큼 변하지 않을 너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해야할 사랑. 침묵 속에서. 자학하면서. 속죄
의 길을 걸어온 나에 대한 너의 경멸. 바랬어. 진심으로. 그러면 내가 널 죽이는데 조금
이라도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을까 했어. 하지만 그것도 틀린 것 같아. 난 널 영원히 잊지
않겠지. 숙명의 시간 선이 꼬아진다 해도 말이야."
흑태자는 베라모드의 말에 잠시 침묵한 뒤 말을 받았다.
"네가 날 죽인 다라.......파괴신의 힘을 얻은 정도로는 힘들다고 생각하지만......실수 한번
없었던 너의 말이니 뭔가 다른 생각도 있다는 말이겠지. 그래......우리가 함께 불렀던 아름
다운 소야곡은 이제 그칠 때가 되었다는 거야..........그리고, 끝도 없이 정화해도 언젠가 깨
트려 버릴 미지의 심연이란 건 날 가리키는 건가? 무슨 뜻이지?"
베라모드는 아직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흐느낌 아닌 평상시의 목소리
가 나오고 있었다.
"미래.......미래를 먼저 보여주겠어. 그리고 너의 정체도 알려주겠어. 시간이 얼마 남지 않
았으니까."
베라모드가 소매를 펄럭이자 마법으로 그려진 세 장의 그림이 펄럭이며 흑태자의 앞으로
가 저절로 펴졌다. 그림 한 장 당 사람 하나가 그려져 있었는데 두 장이 남자, 한 명이
여자였다. 그들은 모두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맨 왼쪽 그림의 여자는 로브로
몸을 감쌌는데 매혹적이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눈매를 하고있었다. 가운데 그림의 남자는
보통사람 키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강인한 체구에 상반신에는 옷을 입지 않은 근육질의
사내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자는 푸른 머리에 장검을 하고 있는 남자였는데 대단히 빼어
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흑태자는 잠시 의아해 하다가 그들에게서 자신이 알고 있는 어
떤 기를 느꼈다.
"설마.......사천왕(四天王)인가? 죄악의 대승정(Arch Bishop of the Sin) 디아블로, 파력
신(破力身) 이루스, 그리고 또 하나는......"
눈물을 멈춘 베라모드가 답했다.
"역시 눈매가 날카로워, 스타이너. 그 사람은 저기 큐브 안에 들어있는 사람과 같지? 재
물의 알하스마야."
그 말에 흑태자는 베라모드가 가리킨 방향끝을 자세히 보았다. 확실히 큐브 장치 푸른
머리의 청년이 눈을 감고 잠들어있었다. 그림은 그의 모습과 일치했다.
"그가 알하스마.......그럼 설마 사천왕의 정체도............그렇군. 네가 음모의 베라모드란 걸
안 순간부터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달의 디아블로와 파멸의 유스타시아 였군."
"그래 맞아. 그들은 모두 나의 동반자들인 쓰리 어비스 가디언(Three Abyss guardian)
이다. 타락의 광기를 지배하는 달, 모든 죄악을 개방시키는 문, 나락에서 헤어나가지
못하게 하는 사슬.
타락한 신월의 제례(Ceremony of Depravity Crescent) 디아블로. 단죄의 문(Door of
Damn) 유스타시아. 나락의 사슬(Chain of hell) 알하스마지."
"그렇군......그런데 미래와 무슨 관련이 있는거지?"
"모든 것은 '그 계획'을 막기 위해 시작되었어. 그리고 그들과 '그 계획'은............이건 좀
뒤에 얘기하지. 이것도 보도록 해."
베라모드가 잠시 정신을 집중하자 그림의 옆쪽에 환영이 펼쳐졌다.
"이건......?"
환영 역시 그림처럼 세 개였다. 맨 왼쪽에는 검은머리를 한 꼬마가 주저앉아서 울고 있
었다. 가운데는 황금빛 머리의 준수한 소년이 분노한 표정을 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리고 마지막에는 천사가 웅크리고 앉아있었는데 날개가 13개였다. 흑태자는 왼쪽의 환영
부터 살펴보았다. 쭈그려 앉아서 엉엉 울고 있는 꼬마. 그를 본 순간 흑태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나?"
"그래.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봐. 그가 하는 말이 들릴꺼야."
흑태자는 잠시 베라모드를 노려보다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곧 어렸을
때의 자신이 울면서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네?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폐하께서도 오늘 절보고 기
특하다고 하시면서 선물을 주셨단 말이에요. 불길하다 하지 마세요. 형제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요. 때리지 마세요. 책망하지 마세요. 어머니......흐흑......제발.......아.......왜 칼
을? 아......아......안돼!'
"안돼! 그건......"
흑태자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르자 베라모드는 영상을 보다말고 그에게 중얼거렸
다.
"넌 5살 때 그리마의 암흑마법으로 널 죽이려는 네 어머니를 죽였지. 당시 어린 넌 이
해하지 못했겠지만, 네 어머니는 어리고 착한 네가 그 암흑성에서 누굴 증오하고 타락하
는 법을 배워서 결국 은연중에 너를 꺼리던 네 아버지 칼 대제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차
라리 자식을 먼저 보내고 자신도 따라갈 생각이었던 거야."
"그만해........"
흑태자가 말하자 이번에는 흑태자의 귀에, 아니 정확히는 영상 속 꼬마 칼 스타이너의
귓속에 첫째 형부터 막내 동생까지의 절규와 오열이 들려왔다. 그것은 자신이 칼 대제
사후 그들과 싸워 이겨서 목을 벨 때 그들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빌어먹을......으핫핫핫! 네놈 따위는 예전에 네 어미와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결국 오늘
내가 네 손에 죽는구나! 큭큭, 내 오늘 내게 죽임을 당하지만 다시 태어나면 반드시 네놈
을 죽이리라! 아하하하!'
'널......많이 귀여워 해줬었는데......호랑이 새끼의 눈에는 그저 포식거리만 보인다는 거냐,
칼! 칼 스타이너!'
'동생 따위로 여긴 적도 없었지만......설마 네게 지다니.......크하하! 칼 대제여! 그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 악마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과 똑같이 지은 거란 말이오!'
'저......절 정말 죽이실 건가요? 칼 형? 저......저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전 아파서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는 것, 아시잖아요? 모든 건 제 주위의 늙은이들이 한 짓이에요. 칼
형......옛날에 친하게 대해 주신 걸 생각해 주셔서 절 살려주세요. 네? 형? 제발 살려주세
요......죽고 싶지 않아요......제발.........흑흑.'
'킥.......이보시오, 칼 형님. 아니, 이 저주받은 마귀의 자식아. 널 미리 죽이지 못한 게 후
회스러울 뿐이다. 빨리 죽여라!'
그 말들을 기억한 흑태자는 어딘지 모르게 심정이 비참해졌지만 결코 동요하지 않으려
했다. 영상 안의 꼬마 흑태자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며 서럽게 울고 있었다. 냉정히 바
라보던 베라모드가 말했다.
"울고 있는 아이.......그것은 바로 스타이너. 너 자신이다. 모든 것을 투영하는 맑은 눈물
이 슬픔에 섞이면 결국 자신을 속이게 되지. 넌 첫 번째 영혼. 미래를 바꿀 가장 위험
한 자. '우는 아이(Crying boy)'다."
"이 자식.......무슨 꿍꿍이냐?"
흑태자가 분노해서 말하자 베라모드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두번째 아이의 얼굴을 봐. 왠지 괴롭지?"
흑태자는 그 말에 가운데 영상에서 얼굴을 홱 돌리는 어린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
굴엔 분노와 저주가 가득했다. 어떤 악신이나 악마가 환생한다해도 저런 얼굴은 하지 못
할 것이리라. 섬뜩해진 흑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한발자국 물러섰다. 그 아이는 귀가 째
질 것 같은 비명을 질렀고 디아블로와 유스타시아의 그림이 찢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아름다운 금발은 하얗게 세어버렸다.
베라모드가 쓸쓸히 말했다.
"격노는 이성을 잃게 만들고 또한 운명을 깨트려 부숴 버리라고 충동질하지. 그는 두
번째의 마음. '증오하는 아이(Hatred boy)'야. 네 도제라고도 할 수 있겠지."
"내 도제(徒弟)라고?"
"정확히는 널 사모하는 여인 이올린의 도제겠지. 그리고 마지막 셋째....."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천사의 몸에 여기저기서 사슬이 날아와 그를 칭칭 동여맸다.
"나락의 사슬이 그를 억제한다.......'치천사(Seraphim)'는 끔찍한 지옥(hell)을 맛봄과 동시에
'제물(Secrifice)'로 화할 것이다. '새벽의 루시퍼(Lucifer of Dawn)'는 죽음으로써 새롭게
시작되어 순환할 것이다."
베라모드는 계속 말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건 너의 숙명과 함께 한 미래임과 동시에 모든 것이 네 자신이기도
하다는 걸 가르쳐 준거지. '우는 아이'만 네 자신의 모습 일뿐만 아니라 다른 두 개도 너
일 수 있다는 거야."
뜻 모를 베라모드의 예언에 흑태자는 침묵했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군.......확실히 말해라.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나란 도
대체 뭐지?"
"알고 싶나? 놀랄지도 몰라. 그보다 더 비통해 할지도 몰라. 그리고 네가 행해야만 하
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어. 무엇보다도 넌 네 자신을 용서 안 하게 될 꺼야. 그래도 좋다
면 알려주지."
".......말해라."
"좋아, 후회는 하지 마라. 모든 것은 신들이 존재하기도 전의 태초에부터 시작되었던 일
이다. 너의 육신이 아닌 너의 존재는......."
"거짓이 아냐........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됐어........네가 스스로 선택해야한다. 네 스스로 너
의 운명을 깨트려보던지, 아니면 속아버린 마리오네트로 지낼 것인지."
"닥쳐! 내가 인형이라니!"
흑태자가 격하게 화를 냈다. 베라모드는 그런 흑태자에게 뭔가 말하려 하다가 뭔가 이
질적인 기운을 느끼고 멈칫하는 듯 했다.
"스타이너......너도 느껴져? 칼스다. 그가 오고 있어."
"........!"
칼스였다. 그는 오딧세이에 잠입하여 동력원을 차단하여 아스모데우스의 추격을 가능하
게 해주었다. 과거부터 일심으로 자신만 따르던 금발의 미남 검사. 팬드래건 측에서 검
마(劍魔)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자신과 유일하게 검을 섞을 수 있었던 남자. 그가 7
용사로부터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도 혈혈단신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충심을 다
하는 것을 떠올린 흑태자의 눈에 핑 눈물이 돌았다.
갑자기 베라모드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내가 기척도 못 느낄 것으로 생각했는가? 이런 건방진......!"
"칼스!"
흑태자가 외친 바로 그때 베라모드가 서있던 옆쪽 벽이 쾅 하고 터져 나가더니 칼스가 나
타났다. 그는 베라모드의 기가 느껴지는 옆방의 벽면까지 가서 최대한 기를 감추고 기습을
시도한 것이다. 그가 소유한 피의 마검 멸살지옥검(滅殺地獄劍)이 먹이를 찾았다는 듯 음
습한 붉은 빛을 발했다. 칼스는 온 힘을 다해서 베라모드를 향해 내리쳐갔다. 칼스가 완
성했다는 자신의 최강 기술. 천지파열무였다.
"천지파열무(天地破裂武)!"
"가소로운 녀석!"
베라모드가 한 손을 가볍게 흩뿌리자 천지파열무의 기운이 삽시간에 사라지면서 칼스와 멸
살지옥검 둘 다 튕겨 나가고 말았다.
"크윽!"
"칼스!"
"저는 괜찮습니다, 태자 저하!"
칼스는 빨리 흑태자의 앞으로 가 주군이 혹시나 부상을 입었는데 숨기는 것 아닌가 이상하
게 생각했다. 그러나 칼스 자신 역시 샤크바리에게 부상당한 옆구리의 통증이 심해서 정
신이 가물가물 한데다가 방금 전까지 싸운 분위기가 아니라고 느끼자 혼란을 느꼈다.
'태자저하가 승리하시도록 도와드려야 한다.......'
칼스는 보았었다. 베라딘과 함께 빙룡성으로 파괴신상을 찾으러 갔었을 때, 베라모드가
빙룡왕 자비에르를 단 한방에 사경의 경지까지 헤매게 했다는 것을. 자신이 붙어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던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는 베라모드를 이길 수 없다
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군이 패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
다. 다만 죽는다하더라도 주군 흑태자저하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베라모드가 칼스에게 말했다.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 여기는 너 따위가 끼어 들 곳이 아니야. 네가 죽을힘을 다해 공
격한다 하더라도 내 머리칼 하나 건드릴 수 없다. 자, 선택해라. 나에게 죽겠느냐? 아니
면 그 사람에게 죽겠느냐?"
'여기 나와 태자저하와 베라모드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베라모드의 말이 순간적으로 이상하다고 판단했지만 그의 말에 깊이 고려할 여유는 없었
다. 칼스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자신 최강 기술을 펼쳐서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야 했
기 때문이다.
'설령 죽이지는 못하더라도......빈틈 정도는!'
칼스가 스윽 멸살지옥검을 들어올렸다. 검이 웅웅 울었다. 그리고 모든 정신과 기를 검에
집중 시켰다. 바로 그때였다.
"퍼억."
순간 칼스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자신의 갑옷을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아득해 질 정도의
고통이 엄습했던 것이다. 누군가 뒤에서 검으로 자신의 등을 찌른 것이었다. 그 검은 자
신의 등을 관통하여 가슴 쪽으로 비져 나와 있었다. 칼스는 가물가물 해지려는 정신을 가
다듬고 그 검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 것은 아수라였다. 그는 찔렸을 때 보다 더 아찔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아니기를 바라는 간절한 부정의 마음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역시 자신을 찌른 것은 자신이 충성을 맹세하고 섬겼던 자신의 주군이었다.
"미안하다......칼스. 하지만.......널 죽이지 않으면 난 결코 이 지긋지긋한 순환의 저주 속
에서 해방될 수 없어. 이 못난 주군을 용서해라......칼스. 머지 않아 너를 따라가겠다."
칼스는 쓰러졌다. 흑태자는 급히 검을 빼내고 그를 품에 안았다. 그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다가 쿨럭 피를 토하는 것을 보고 흑태자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칼스가
말했다.
"신.......칼스 게이저........는.......어렸을......어렸을 적부터 태자저하를 보필하면서......저하께 불
경한 생각을 품은 적이 다......단 한번도 없었습니다.......제가......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
르겠지만.......태자 저하께서 원하셨으면......얼마든지 바쳤을 목숨......을......"
흑태자가 급히 말했다. 베라모드는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다! 넌 잘못한 것이 없어! 내가 널 죽이는 건 다 내가 못났기 때문이다. 날 용서
하지 마라, 칼스. 편히 쉬어라. 넌 내 최고의 친구였다."
칼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저하........부디......염원을 이루소서......"
"반드시 이루겠다........잘 가라......칼스."
"역시 난 네가 그를 죽일 줄 알았어."
웃는 어투로 베라모드가 말했지만 흑태자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칼스의
시신을 구석에 잘 눕혀 놓은 다음 손에서 멸살지옥검을 떼어 두 손을 모아주고 뜬눈을
조심스레 감겨주었다. 그리고 텅 빈 것 같은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베라모드를 바라
보았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리라.
"네 말대로.......칼스를 죽였다. 내가 과거의 내 자신을 죽여 버린 거야! 모든 건 잊었다.
추억은 소멸해버렸어! 이제 나는 내 자신의 손으로 증명 해 보일 수밖에 없어! 네가
말한 나의 존재성의 의미를! 나의 이기심으로 한발 먼저 구천에 가 기다리고 있을 칼스
를 위해!"
흑태자는 흑염마검 아수라를 들어올렸다. 그리마검 아수라의 형태가 조금씩 변해가는 듯
싶었다.
"널 죽이겠다! 베라딘!"
흑태자가 검을 허공에 내리치자 강력한 검기가 베라모드에게로 날아갔다. 검기는 베라모
드의 왼쪽 팔을 잘라버렸다.
"아니.......이런......!"
흑태자로서는 베라모드가 당연히 막을 수 있는 공격이라 생각했었는데 어이없게도 왼쪽
팔이 피를 흩뿌리며 잘려져 나간 것이다. 망연자실해 있는 흑태자를 보며 베라모드가 가
볍게 웃었다.
"이런 이런.......그래. 팔이 잘렸군.......하지만......."
다음 순간 흑태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왼쪽 팔은 어느새 베라모드의
어깨에 붙어있었는데 바닥에는 잘려졌던 팔은 물론이고 쏟아졌던 피조차 마치 닦은 것처
럼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베라모드가 말했다.
"이 공간의 시간을 잠깐 역행(逆行)시켜서 팔이 붙어있기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려 버린
거야. 스타이너. 이건 나의 힘의 일부지."
"이럴 수가........."
"뭐 이런걸 갖고 그래. 근원적인 순환의 힘 일뿐. 아까 칼스의 천지파열무 역시 강력한
파괴의 힘을 순환시켜 어린아이의 손짓처럼 약하게 만든 것 뿐이야. 그 외엔 어떤 짓도 하
지 않았어. 극한(極限)의 끝은 시작이니까."
잠시 놀랐던 흑태자는 냉정을 되찾았다.
"그렇군......그게 네 능력이었군........그래서 자신만만해 한 거였어. 정말 무서운 힘이야........
하지만 이것도 막아낼 수 있을까!"
흑태자가 검을 들어올렸다.
"차원과 시공을 가르는 내 최강의 기술 아수라파천무(阿修羅破天舞) 오(五)식은 네 순
환의 능력도 통하지 않을 거다!"
"흐음........그럴지도. 이제야 정말 즐겁게 놀 수 있겠어. 나를 즐겁게 해준 상대는 이제까
지 없었거든."
베라모드가 전혀 동요의 빛을 보이지 않자 흑태자는 자신의 그리마혈을 끌어올렸다. 그
가 미웠지만 가능하다면 고통 없이 보내주고 싶었다.
"간다.......베라딘!"
"와라! 스타이너!"
비참한 비극을 연주하는 마지막 무대에서의 외침. 이게 서로가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희망은 이미 없다. 증오만이 남지는 않았지만, 이해도 남지 않은 최강자들의 마지막 결투
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은 흥분과 슬픔뿐이리라.
"아수라파천무 제 일(一)식! 자무흑연라(滋茂黑煙羅)!"
흑태자가 마구잡이로 보이는 것처럼 검을 사정없이 휘두르며 베라모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흑태자의 검에서 무시무시한 흑기(黑氣)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흑기는 주
변에 닿는 벽이나 돌가루는 물론이고 먼지조차 무(無)로 화해 사라지게 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두려움을 느끼게 할 정도의 가공할 위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본 베라모드는 피식 웃기만 할뿐이었다.
"뭐야........별것도 아니었잖아."
그는 팔을 들어올리고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곧 베라모드의 몸 근처에서 웅웅 소리와
함께 그의 기로 이루어진 10개의 구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구체는 모두 똑같이 보
이면서도 자세히 보면 각각의 색이 모두 달랐다.
구체는 베라모드를 보호하려는 듯 그의 주위를 휘감다가 각각 움직임을 멈추고 자리를 잡
았다. 그러자 구체에서 자색의 기운이 쏟아져 나와 서로에게 튕기며 오망성(☆)의 팬타
그램을 이루었다. 10개의 구체로 이루어진 오망성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흑태자에게 날
아가기 시작했다.
"십계(十戒)!"
"뭐, 뭐지!?"
당황한 흑태자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오망성의 한가운데를 암흑의 기로 부딪쳐가며 뚫으
려했다. 허나 자신의 흑기는 베라모드의 오망성에 막혀서 기묘한 파열음만 내며 팽
팽한 평형을 유지했을 뿐이다. 흑기와 오망성 사이에서 압력으로 불어오는 바람만 해도
보통 사람은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 흑태자는 자신이 전력을 다해도 베라모드의 오망성을
뚫을 수 없자 크게 놀랐다.
'파괴신의 육체마저 감당하지 못하고 바스라지는 위력의 자무흑연라가......베라딘의 저
오망성조차 못 뚫고 있다니.........베라딘........넌 대체?'
이를 악물고 구슬땀을 흘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려 하는 흑태자를 바라보며 베라모드는 냉
소를 지었다.
"고작 그 정도였나! 스타이너, 아니면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건가! 이 정
도로 끝날 바에야 차라리 빨리 죽여주는 것이 편하겠구나! 죽어라!"
베라모드가 소리질렀다.
"파련(波蓮)!!"
흑태자의 주위에 수백 개의 조그만 연꽃봉오리들이 생겨났다. 하얀 색의 조그만 연
꽃들이 환상 마법이 아니라는 걸 흑태자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흑태자는
오망성이 자신의 몸에 부딪치려는 것도 전력을 다해서 막아내야 했기에 이 정체 모를 꽃봉
오리들을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제길......그렇다면!'
흑태자는 최대한 오망성을 밀쳐낸 다음 재빨리 자신이 시전한 흑기를 거둬들였다.
"연봉(蓮 )!!"
흑태자가 흑기를 거둬들이자마자 베라모드가 주먹을 으드득 쥐고 흔들었다. 그러자
수백 연꽃의 하얀 봉오리가 활짝 피었다. 아찔하게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며 오망성은
태자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에워싸고 있던 연꽃들이
흐드러지게 핌과 동시에 엄청난 고음을 내며 폭발해 버렸다.
"콰앙!"
흑태자 주위의 연꽃들이 모조리 터져 버리면서 오망성과 흑태자의 모습도 사라져버렸다.
신이라 할지라도 죽음이 불가피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 베라모드의 얼굴엔 기쁨
이 아닌 놀라움이 떠올랐다.
"호오........제법이군. 스타이너. 십계(十戒)와 파련(波蓮)이 동시에 공격하는 것을 막
아내다니........이제 까지는 네가 처음이다."
흑태자가 팔을 벌려 아수라를 횡으로 베는 듯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
작했다. 베라모드의 기술을 전부 파괴시킨 것이다. 그러나 몇 군데 갑옷이 움푹 들어가
고 허리 장식이 날아가 버리는 등 그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만은 오히려 더 차
가워져서 내가 설마 질 꺼 라는 착각은 하지 마라 라는 등의 말을 건네는 것 같기도 했
다. 흑태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수라파천무. 제 이(二)식."
그러나 베라모드의 눈에 비친 그는 확실히 지쳐있었다.
"아비마수라(阿悲魔修羅)."
'큭.........제길.........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날 죽이겠다고 한 건 정말 허언이 아니었어.'
흑태자는 입가에 주륵 흘러내리는 선혈을 슥 닦고 베라모드를 노려보았다. 베라모드의
눈빛은 차가웠다. 조금 전 까지 자신과 이야기하며 지었던 따듯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흑태자는 베라모드의 얼굴이 자신도 알고 있는 사람의 것과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을 떠
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왕국의 신검 바리사다(Barisada)가 자신의 몸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던 그 감촉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이제 보니 그 팬드래건 왕자가 나를 보던 눈빛과 똑같아.'
검귀(劍鬼).
자신과 정확히 두 번 충돌했던 그 팬드래건의 왕자는 정말로 무서운 상대였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이 패배를 직감한 상대. 데이모스가 불어 넣어준 궁극의 그리마의 힘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도 하기 싫은 승부였었다. 칼스에게도, 팬드래건의 국
왕 라시드에게도 그와 비슷한 기운은 느껴 본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 최대 최강
의 적수였다.
'하지만.......그는 이미 죽었어!'
그랬다. 사체는 확인 할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은 몸으로 기억을 잃을 정
도의 아찔한 공격을 쏟아 부어 양패구상의 궁지에까지 몰아넣은 것이다. 그런 상황이
라면 설령 자신이라도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때 떠내려가는 갑판 위에서 정신을
잃어가던 자신은 배 위에서 흥건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노려보는 그 왕자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분함과 증오를 넘어선, 차갑고도 슬픈 눈빛이었다.
베라모드는 흑태자가 자신을 계속 바라보면서 공격을 하지 않자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벌컥 화를 냈다.
"정말 이럴 거냐! 네가 덤비지 않겠다면 내가 먼저 공격하겠다!"
베라모드가 분노한 목소리에 흑태자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생각을 마무리지었다.
'하지만..........베라딘은 그 왕자보다 더 강하다!'
"편광(偏光)!!"
"치잇!"
베라모드의 노호성과 함께 눈부신 빛의 광채가 태자에게 몰려들자 그는 이를 악물고
검을 떨쳐냈다.
"아수라파천무 제 삼(三)식! 극명태라천(極冥太羅天)!"
흑태자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자(死者)로 바꿔버리는 죽음의 기운을 마주 내 쏘았다.
두 기운은 맞부딪치며 잠시 뒤엉키더니 주춤했다. 그리고 잠시 후, 베라모드가 조금씩 밀
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라모드는 전혀 당황하는 빛 없이 흑태자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
다.
".........그 정도였냐?"
"뭐라고?"
상황이 유리해지자 단숨에 승부를 매듭지으려고 기를 모으던 흑태자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베라모드가 살짝 감았던 눈을 부릅떴다.
"그 정도였냐!!!!"
"크윽!"
베라모드가 소리지르자 순간적으로 강력한 힘이 쏟아져 나와 전세가 역전되었다. 힘겨
워하는 흑태자에게 베라모드가 화난 듯 말했다.
"고작 그 정도였단 말이냐? 데이모스가 너에게 줬다는 궁극의 그리마의 힘을 그 정도
밖에 소화하지 못한 거냐? 난 네가 다른 멍청이들과는 뭔가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내
가 틀렸어. 꼴도 보기 싫다. 죽여주마!"
강렬한 금빛이 흑태자의 검은 안개를 밀어내며 그에게 거의 닿을 듯 근접했다. 흑태
자가 막 빛에 직격 당하기 직전, 베라모드는 태자의 입가에 걸쳐진 가느다란 미소를
보지 못했다.
거대한 빛의 기둥은 흑태자가 있던 곳을 쿠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쓸고 지나갔다. 그
러나 베라모드는 자신의 공격이 빗나간 것을 직감으로 느끼고는 깜짝 놀랐다.
"뭐지? 설마?"
"걸렸다, 베라딘!"
흑태자가 베라모드의 뒤쪽에서 워프를 사용하여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그리마혈을 극
대화시켜 시전 하는 최강의 필살기 아수라파천무의 3단계는 베라모드의 빛의 기둥을 충
분히 부숴 버릴 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체력이 떨어짐을 염두에 두고 단
한방에 승부를 결정 짓기 위해 온 몸에 기를 모아두면서 베라모드의 시야를 가릴 순간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받아봐라! 아수라파천무 제 사(四)식! 조라어소성(操羅圄消聲)!"
베라모드가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아아 하는 노래 소리가 흘러나와 베라모드의
육신을 구속해버렸다. 그것은 노래가 아니었다. 아수라에게 죽임을 당하고 영혼을 잡아
먹혀 빠져 나오지 못한 수많은 망령들의 절규였다. 흑태자는 움직이지 못하는 베라모드
를 향해 검을 날렸다. 제아무리 베라모드라고 해도 일단 검에 궤 뚫리면 순환의 힘
을 사용해도 살아날 수 없었다.
"마지막이다, 베라딘!"
"훗, 어리석은. 내가 그 정도 속임수를 못 알아차릴 줄 알았나? 걸린 건 바로 너야!"
'뭣이!'
베라모드의 외침에 흑태자는 당황했다. 그게 정말이라면 역으로 자신이 베라모드에
게 속은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아수라는 베라모드의 가녀린 목에 닿
으려 하고 있었다.
"번무(飜舞)!"
간발의 차이로 베라모드는 흑태자가 내려치는 아수라를 피하는 동시에 통곡의 결계를
무력화시키며 사라져버렸다. 그러고는 태자가 검을 휘두르는 동작을 취소하기도 전에
등을 보인 채 결계 밖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왼손을 펴서
뒤로 내밀었다.
"압궤(壓潰)!"
순식간에 자신 주위의 모든 중력이 뒤바뀌어 엄청난 압력으로 사방에서 짓눌러 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흑태자는 으악 비명을 질렀다. 제국에서 최고로 견고하다는 그의
흑갑(黑鉀)이 어이없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리버스 그래비티(Reverse Gravity : 역중력장)
와는 차원이 다른 공격이었다.
"으아아악!"
"미안하다, 그러니 이제 죽어라! 타훼(打毁)!"
베라모드가 오른손 마저 내밀자 갑옷마저 통과하는 그의 무형의 신기(神氣)가 흑태자
의 몸 전체를 엄청난 속도로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극심한 통증의 괴로움으로
스타이너는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악! 이........이익.......크.......크악! 제기랄, 으아악!"
공중에 뜬 채 압력에 짓눌리면서 갑옷 안쪽에서 몸과 장기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은 흑태자의 눈이 돌아가더니 피를 왈칵 쏟으며 쓰러져버렸다. 그러자 베라모드는
태자에게 보내던 힘을 정지시켰다. 이미 살아남을 수 없는 상처였다. 흑태자의 육체가
붕괴나 되지 않았으면 다행일 정도의 깊은 타격이었던 것이다. 베라모드는 한숨을 쉬며 냉
랭한 표정을 풀었다.
"미안해. 스타이너.........넌 내 예상보다 훨씬 강했어. 네가 조금만 더 약했더라도 큰 고
통 없이 죽여줄 수 있었을 텐데.........."
"아니.........그래도 난........난 아직 죽을 수는 없어.........."
베라모드가 움찔했다. 죽어가던 흑태자가 검에 체중을 싣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천천히
일어났던 것이다. 베라모드가 안절부절못하다가 흑태자에게 크게 외쳤다.
"그만! 그만해! 날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잖아! 지금 다시 한번 격돌하면 넌 틀
림없이 죽고 말 거야!"
"흥,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인데 네 목숨 걱정이라 하라구. 베라딘,
이번이 내 마지막 일격이다. 이걸로 우리의 긴 인연을 마무리 짓자."
흑태자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칼스가 떠올랐다.
칼스는 먼저 떠나 가버렸다.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저쪽에 누워서 편안히 눈을 감고
있는 그를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칼스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기에 찔렀는데도, 그
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죽어 가는 순간까지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칼스는 조금도
죄가 없었다. 굳이 죄가 있다고 하면 그의 운명뿐이리라. 변명이었다.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변명의 대가로 칼스의 목숨을 바친 것이다. 칼스, 그리고.
'죽음.'
죽음. 그때 죽은 팬드래건의 왕자는 아직까지도 자신을 미워하고 있을까? 죽기 전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만인의 두려움을 사는 사망의 여신 도네프로게스는 어디에선가 자
신에게 미소짓고 있을 것이다. 죽음. 그리고 7용사. 그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자신을 따
랐던 한조와 카슈타르가 생각나자 흑태자는 매우 안쓰러웠다.
'내가 만약 여기서 베라딘의 손에 죽는다면 한조는 어떻게 행동할까? 흑영대를 잘 이끌
어 나갈 수 있을까? 나만 믿으며 힘든 길을 걸어왔던 커티가 가장 사랑하는 사부 칼스
를 내가 죽였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행동할까? 날 원망할까? 하, 그럴지도.'
순간 쓸데없는 망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흑태자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홱홱 저어
그 생각을 날려버렸다.
'쯧, 정말 죽을 때가 다 되었나 보군.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잊고 살았던 모든 기억들
이 스쳐지나간다던데. 하긴, 이렇게 다치고도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용하기만 하지,
뭘.'
망국 팬드래건의 후예였던 이올린 왕녀와 라시드 왕자도 생각났다. 베라딘에게 밀려 떨
어진 후, 자신은 모든 기억을 잃고 레인저로서의 삶을 살아오면서 아이러니한 죗값을
치르게 되었다. 제국의 황제였던 자신이 팬드래건의 재건을 위해 목숨을 다 바친 것. 그리
고 기억을 잃은 시간동안 이올린 왕녀와 사랑에 빠진 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은
곧 사랑하는 사람이자 아버지와 오빠들을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이기도 했다. 물론 이올린
그녀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르겠지만.
라시드 왕자. 어렸을 적부터 나라를 잃고 떠돌았지만 결코 쾌활함을 잃지 않으며 자신
에게는 결여된 자비심과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꼬마는 이제 다시 재건한 팬드래건의
총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주는 뛰어난 카리스마와 통찰
력, 검술은 만인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가 정말 10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자신도 상
대하기 버거웠으리라.
'착한 녀석........너는 꼭 행복해야 한다. 나 때문에, 복수 때문에 행복을 포기한 네 누나
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돼. 반드시 행복해라!'
다갈용병단. 대장 랜담을 비롯한 자신의 전우들인 용병단 전원이 웃는 얼굴로 함성
을 지르며 무기를 치켜올리는 장면이 눈에 잡히는 듯 했다.
그 밖에 스트라이더, 사라와의 우정. 그들이 꼭 맺어졌으면 했다.
아이린.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으리라. 눈에 눈물을 가
득 괸 채 자신을 노려보던 그녀의 얼굴에게.
더 많은 시련. 더욱 많은 만남. 그보다도 더 많았던 행복한 시간들. 생애에서 가
장 떨리는 순간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베라딘에 대한 자신의 고백. 그리고
사랑. 그 정점에서 언제나 웃어주던 사람, 베라딘.
죽을 만큼 좋아했었다고, 사랑했었다고, 만약 그의 손에 패해 죽게 된다 하더라도 결코
비참하거나 부끄러운 죽음은 아닐 것이다. 틀림없이. 흑태자는 감았던 눈을 뜨고 웃었다.
피범벅이 되어서 망토를 휘날리는 흑태자의 모습이 처연함을 느끼게했다.
"사랑했다, 베라딘. 이야아압!"
자신에게 남은 모든 힘. 생명의 힘까지 태자는 그것을 아수라에 불어넣었다. 아수라
가 기쁜 듯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흑태자의 뺨을 타고 무언가가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최후로 연성한 내 마지막 일식! 나도 아직 그 위력을 알지 못하고 시전 해 보
지도 못한 내 최강의 일식을 받아보아라! 간다! 아수라파천무 제 오(五)식!"
진정한 끝. 더 이상은 허무하지 않은 마지막 엔딩. 베라모드도 그의 마지막 공격을
막을 준비를 했다. 베라모드의 눈빛은 결연에 차 있었다.
"나도 사랑했어, 스타이너! 어서 와라! 어비설 비젼(Abyssal vision)!"
"하아아아압!!"
흑태자가 베라모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베라모드의 눈앞이 환하게 빛났다.
◎ ◎ ◎ ◎ ◎ ◎
'아......!?'
베라모드가 눈부심을 피해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자신에게 보인 것은 달려드는
스타이너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스타이너와 꼭 닮은 얼굴이었다. 너무도 잘 아는 사
람.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 왜 스타이너가 그로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베라모드는 한
없이 마음이 편했다.
'당신이었군요.'
어째서 당신이?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상관없어.
'이대로.........이대로 모든 걸 다 버리고.'
그를 따라가 버렸으면.
'울지도 않고 긴, 정말로 긴 억겁의 시간을 기다렸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더 이상 나를 기다리게 하지 말아요. 당신의 곁으로 가고 싶어요.'
영원히 말이에요.
'또 혼자 가지 말아요. 약속을 어기지 말아요. 나도 데리고 가주세요.'
베라모드는 행복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스타이너를 향해 양팔을 쫙 벌렸다. 스
타이너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 했다. 그리고 아수라가 베라모드를 삼켜버렸다. 이
모든 것은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찰나의 일이었다.
◎ ◎ ◎ ◎ ◎ ◎
흑태자는 자신의 마지막 공격이 적중한 것을 느끼고는 비틀비틀 일어나서 허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베라모드는 사라졌다. 차원의 공간에 가둬 진 채 깨어져 버린 것이
겠지. 흑태자는 생각했다.
"이긴........건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전혀 기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최후까지 모든 힘을 다 써버
린 후 밀려오는 정적의 고통이 흑태자를 엄습했다. 그는 의관을 재정비 한 후 간신히 일
어났다. 바로 그때였다.
"너는 패했어."
"!!"
베라모드의 따듯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흑태자의 눈앞에서 시공의 차원이 갈라지더니
베라모드가 그 안에서 빠져 나왔다. 흑태자는 너무나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 이유를 알아차리고 비틀대며 주저앉았다.
"큭.........역시 이 몸으로 완벽하게 시전 하기는 무리였어........실패한 거로군."
"그래. 네가 정상적인 몸으로 그 기술을 나에게 썼다면 내가 졌을지도 몰라. 하지만 넌
실패했고........네 몸에는 실패한 만큼의 반동이 돌아오겠지."
베라모드가 말을 마치자마자 흑태자가 우왁 하며 피를 한바가지도 넘게 쏟아냈다. 큰
기술을 시전 했을 때 만약 실패하게 된다면 그 카운터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것이다.
태자는 정신을 지탱하기도 힘들었던 듯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베라모드가 얼른 달려
와 흑태자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놓이게 했다. 태자는 잠시 경련을 일으키다가 눈
을 떠 베라모드를 보았다. 그리고 몹시 힘들다는 듯 말했다.
"그래........베라딘. 난 결국 너에게 졌구나."
"말하지마!"
베라모드는 말을 하게 되면 고통과 충격이 더 커진다고 말하려 했다가 태자가 손을 들
어 손가락으로 입을 막아 제지당했다. 애교 있는 행동이었지만 배라모드는 흑 하는 흐느
낌과 함께 눈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자의 입가에는 반대로 미소만 가득했
다.
"너에게 졌어........후훗. 패왕 흑태자의 첫 번째 패배야. 과거에는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
고 생각했지. 승리만이 나의 욕구를 채워주는 조건이었거든. 하지만 지금은 달라. 오
늘 네가 이겼지만 난 조금도 분하거나 괴롭지 않아. 최고의 승부였어."
"흑........바보........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오히려 베라모드가 울고 있었다. 태자는 담담하게 눈물이 흐르는 베라모드의 뺨을 부
드럽게 어루만졌다.
"우리 어렸을 때도 넌 자주 나에게 무릎 배게를 해주었지. 그러면 난 항상 네 얼굴을
올려다보았어. 언제나 아름답다고 느꼈지. 뭐, 지금도 넌 아름다워. 오히려 이올린이
훨씬 떨어지는 걸."
베라모드가 눈물을 슥 닦더니 슬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보. 나 같이 음침한 남자 좋아해서 뭐 하려구? 이올린이 훨씬 더 낫지."
흑태자는 베라모드가 다시 웃자 계속 농을 건넸다.
"둘 다 좋아해. 만약 살아난다면 둘 다 아내로 맞고 싶은걸. 양다리도 나쁘지 않겠어."
마지막 기술을 위해 모든 생명까지 다 써버린 태자는 절대로 살아날 수 없었다. 그 사
실을 잘 알고 있는 베라모드는 다시 얇게 흐느꼈다.
"흑흑.........나도 좋아해. 스타이너. 평생 사랑한다고."
"하하........그래. 이렇게나 빨리 칼스를 보러 가다니...........그런데 이올린은 어쩌지? 난
아직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어. 그녀가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게 두려웠
기 때문이야. 용서받고 싶지만.........지금 이 몸으로는 틀린 것 같은데."
"걱정 마. 내가 너의 모습으로 변해 내려가서 대신 용서 받을게. 안타리아 창세전쟁
기록의 정사(正史)에는 흑태자가 음모의 베라모드를 꺾은 것으로 기록 될 꺼야. 그리고 흑
태자란 별호는 영원히 제국민들과 음유시인들의 입에서 회자되어 지겠지. 넌 전설이 되
는 거야."
"그래? 하하, 그거 정말 괜찮은걸."
하아 하고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쉬던 흑태자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불현듯 말을
건넸다.
"어렸을 때 내가 너에게 한 청혼........아직 거절한 건 아니지?"
"응?"
베라모드가 무슨 영문인지를 되묻자 스타이너가 웃었다.
"난 너에게 제국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켰으니.........내가 다시 태어나면 넌 반드시 나와 혼
인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야해. 알겠지?"
베라모드는 멍하니 흑태자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흑태자의 영혼은 다
른 사람들과는 달리 순환이 인정되지 않는 특별한 것, '우는 아이' 였던 것이다. 만약 죽으
면 혼 자체가 영원히 소멸되기에 다시는 살아날 수 없다. 그러나 베라모드는 흐느끼면서
도 억지미소를 지어 보이며 태자에게 거짓말을 했다.
"응, 물론이야. 꼭 너랑 결혼 할게."
그리고 한가지 조건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가 여자로 태어나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어야 하지만."
그 말에 흑태자는 잠시 베라모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통증을 참
으려 했다.
"하하...........이 바........."
갑자기 퍼억 소리와 함께 흑태자가 눈을 크게 떴다. 더 이상 그의 고통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베라모드가 수도로 가슴을 궤 뚫어 버린 것이다. 베라모드는 비참하게 통곡하
고 있었다. 태자는 그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보."
흑태자가 베라모드의 품에서 숨을 거두자 오딧세이가 다시 작동을 시작했다. 오딧세
이의 메인 컴퓨터 '살라딘'이 침묵에서 깨어난 것이다. 컴퓨터의 음향은 베라모드의 울음
소리와 뒤섞여 어딘가 모르게 애절하게 들렸다.
"삑 - '칼스 게이저'와 '칼 스타이너'의 생명반응이 정지했습니다. 메시지의 조건이 충족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오딧세이는 팬드래건 왕국령 솔즈베리를 기준으로 174도에 좌
표 32km떨어진 곳에 5분 뒤 착륙 개시합니다. 오차율은............"
◎ ◎ ◎ ◎ ◎ ◎
베라모드는 흑태자의 육체로 변한 다음 그의 갑옷을 벗겨내어 입고 아수라를 물질계에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태자가 타고 온 아스모데우스를 타고 안타리아의 폭풍도 정상에 내렸
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붉은 눈을 하고 있던 이올린이었다. 이올린은 베라모드를
보자 자신의 애검을 빼어들었다. 팬드래건 세 개의 명검중 으뜸이라는 비스바덴의 선물
액스칼리버였다. 비스바덴을 떠올리자 베라모드는 가슴이 아팠다. 베라모드는 투구를 벗
어버렸다. 예상대로 이올린은 크게 놀라는 듯 했다. 그러나 베라모드의 시선은 이올린에
게 가 있지 않았다.
'그도 날 용서하지 않겠지.'
하지만 조금 뒤, 저녁 노을에 반사되는 순백의 검날 빛을 본 베라모드는 다음 순간 자기
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탄성을 지를 뻔했다. 검에서 느껴지는 비스바덴의 마음을 보았
기 때문이었다.
'날.........용서한다는 거야? 응? 그런 거야, 란?'
울면서 혼란스러워 하는 이올린의 외침이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올린은 엑스칼리
버로 베라모드를 푹 찔러 버렸다. 안타리아의 역사가 베라모드의 예정대로 흘러가는 순간
이었다. 이올린은 충격에 휩싸여 절규하며 산을 뛰쳐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별이 아스라이 빛나는 밤에 이올린이 다시 정상에 올라 왔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것
은 땅바닥에 꽂혀있는 아수라와 아수라를 감싸며 펄럭이는 흑태자의 회색 망토뿐이었다.
◎ ◎ ◎ ◎ ◎ ◎
50년 뒤.
에스겔력 1231년 57일의 봄 밤.
게이시르 제국의 수도 게이시르 시티의 번스타인 가(家)에서는 경사가 났다. 젊은 마님이
현 가주 루크 번스타인의 후계자를 낳은 것이다. 집안은 잔치 분위기로 떠들 썩 했다. 30
대 중반정도 되어 보이는 금발의 남자 루크 번스타인은 지금 아내가 누워있는 침대 곁에서
아내의 건강을 묻고 있었다.
"몸은 괜찮소? 부인."
"예. 괜찮군요."
그녀가 아기를 낳고 어느 정도 편찮아 보여서 걱정을 했었는데 이 말을 듣자 루크 번스
타인은 적이 안심하는 듯 했다.
"음. 그래도 잘 먹고 푹 쉬도록 하시오. 산모에게는 그게 제일이라오."
여인이 빙긋 웃었다.
"그러겠어요. 참, 이 아이의 이름은 정하셨나요?"
"아아, 이 아이. 그렇지."
루크는 부인에게서 아이를 건네 받아 번쩍 들어올렸다. 아이가 까륵 웃었다. 아직 머리
도 이도 없는 아이였지만 눈동자는 선명한 루비보다도 매혹적이고 깨끗했다. 루크는 뭔
가 섬짓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애써 웃으며 아내에게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시라노라 할까하오. 장차 이 번스타인 가를 이낄 훌륭한 젊은이가 될
꺼요."
그녀는 시라노 시라노 중얼거려 보다가 미소지으며 아기를 달라고 손짓했다.
"시라노라고요..........정말 좋은 이름이네요."
"허허, 부인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 아이의 이름은 시라노요. 헛, 빨
리 자라서 이 가문을 책임져야 할텐데........"
"시라노는 훌륭히 자랄거에요."
"물론이요. 다만 당신이 몸도 안 좋은데 아기를 낳았으니 더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이라오.
어서 나아야 할텐데........아, 내 정신 좀 보게. 이 시간이면 축객들이 전부 모여 있을 시간
이로군. 그럼 나는 다녀오겠소."
흰 후드를 눌러쓴 아담한 체구의 사람이 저 멀리서 시끄러운 번스타인 가를 바라보며 중
얼거렸다. 누구라도 그의 얼굴을 봤다면 3일 동안은 침식을 불가할 정도의 용모. 그는
바로 베라모드였다.
"예언은 실행된다. 미래는 돌아가고 있어. 이제 '증오하는 아이(Hatred boy)'가 태어
났어. 그는 강해지겠지. 그는 모두를 미워 할 꺼야. 당한 만큼 그 배로 돌려주는 사
람이 될 꺼야."
베라모드는 한숨을 쉬었다.
"증오하는 아이여. 스타이너의 또 다른 모습이여."
새삼스레 그를 떠올려서인지 베라모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행복하세요. 그가 얻지 못한 만큼의 행복한 순간들을 당신은 가지기 바래요. 친구를
사귀고, 경쟁하면서, 사랑하고, 화해하세요."
하지만 언제나 그러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흑태자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더 못하
지는 않은 과거를 안고 살 악귀가 되리라.
"그래요. 부디 행복하세요. 당신이 모든 행복을 잃어버리는 그 순간이, 설령 이 세상
의 지옥(地獄)이 될 거라 해도. 그렇게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나를 미워하세요. 나의 아
들이여."
베라모드가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 등을 돌렸다. 이제부터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
리라.
"나도 봐주지 않을 테니까요."
-끝-
이렇게 해서.........드디어 긴 시간 동안 저를 괴롭혀 오던 단편이 끝났습니다! 아........감
동.......(비록 문체나 글 자체가 쓰레기 수준에 근접한 허접 이었지만. -_-)
사실 이 글을 다 보시고 나면 궁금해하시는 게 많을 줄 압니다.(아니면 됐고 -_-) 어째서
흑태자가 베라모드에게 죽었느냐, 흑태자는 왜 칼스를 죽였느냐, 이건 창2의 엔딩과는
전혀 다르지 않느냐, 하는 것 말입니다.(-_-) 이것은 모두 제가 내년 서풍의 광시곡을 소
설화 할 때 이유를 밝힐 생각입니다.
험험;; 정녕 이 글을 해부해 본다면 이것은 작가가 '야오이'란 (야오이가 뭔지 모르겠다고
요? 모르겠으면 누나나 여동생에게 물어봐요! -_-;;) 여성분들에게만 허용된 무시무시한
금단의 세계에 발을 내 놓은 작품이기에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다는.......(컥! -.-;) 하지만 아
주 약하게 했지요. 흑태자와 베라모드의 사랑과 우정 정도로.-_-;
사실 흑태자가 여기서는 베라모드에게 죽기 때문에 흑광도 분이 계시다면 뭔 소리를 들
을 법도 한 단편이건만 (백태자 님이었던가? 베라모드와 흑태자의 능력 차이가 얼마나 큰
데 흑태자가 죽느냐고 하셨던 분. -_-;;;) 어쨌거나 그거는 작가소관이니 왜 흑태자가 패
한단 말이냐~! 하고 따지실 거라면 차라리 답변을 주지 마세요. 약간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안 그러면 제가 욕먹어야 할 부분이 무지무지 많아서 그렇답니다^^;( 흑태자 좋아하지 않
는 것도 죄란 말인가? 줴길 -_-;;)
사실........창2때부터 그리 좋아하지는 않던 캐릭 이었지만(G.S는 좋아했다. -.-) 새삼 글로
표현해보니 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그래도 시라노가 더 좋다.;;)
흑태자의 아수라파천무 오식이나 베라모드의 짧은 한자로 된 마법 비스무리한 공격(-.-;)
은 물론 창세기전 원작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작가의 상상력에서 파견된 겁니다. 물
론 타락한 신월의 제례 디아블로니 단죄의 문 유스타시아니 하는 호칭도 작가가 지은거
지만 너무 허접해서 바꾸려고 했어요. 그대로 쓴 이유는 단지 시간이 없어서리............왕
허접이죠. ㅠ.ㅠ
사실 양으로 보면 아시겠지만 하루 이틀 사이에 완성한 작품은 아닙니다. 방학 시작 때
부터 써서 방학 끝날 때 완성한 작품이죠. (고3이라는 놈이-_-;;)
그리고........이제는 정말 글을 그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수능 봐야죠^^ 로카네스프 전기
를 쓰지 못하게 된 건 아쉽게 생각하지만..........뭐, 또 헬카이트가 부활해서 낄 수도 있지 않
겠습니까?-_-
제가 고3이라서 답변을 하나도 못드린 점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라도
몽땅 올릴께요-_- 그럼 전 이만 물러 갑니다. 모두들 베라모드의 말처럼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