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5 / 요한복음의 시작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2023년10월6일(금)■
(요한복음 1장)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고)
성경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등 네 권의 복음서가 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생애를 다루고 있어서 복음서라고 한다.
예수께서 구주로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동일한 사건을 공통된 관점으로 다룬 내용이 많다.
그래서 공관(共觀)복음서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은
이 세 복음서 이후에 쓰인 기록으로써 세 복음서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들을 다루었고,
또한 예수님의 측근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예수님의 메시지와 영적으로 깊은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아주 가깝게 모시던 사도가 아니면 기록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요한복음의 기록연대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요한계시록을 쓰기 직전인 AD 80-90년경으로 본다.
요한의 나이도 대략 80~90세 가량되었을 것이다.
(묵상/요 1:1-5)
◆ 태초에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는 헬라어 '아르케(ἀρχῇ)'를 번역한 것으로써 '처음'(beginning), 또는 '시작'이란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신약에서만 60번가량 사용된 흔한 단어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사용된 태초는 어느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모든 것의 처음 시작점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보다 더 이전의 태초다. 그러기에 매우 특별한 태초다.
만일 우리가 수직선을 그려보자면 당장은 짧은 선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은 왼쪽으로 무한, 오른쪽으로 무한히 뻗어나간다. 누구도 여기가 왼쪽 시작점이고, 저기가 오른쪽 종착점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무한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며, 우주의 어떤 것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진다.
사실 무한에 있어서 처음과 끝이란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이지만, 유한한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AD 1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인간으로 오신 시점이고, 존재의 시작은 특정할 수 없는 무한의 처음이다.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다.
'베들레헴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1)
이때 '상고에'라는 말을 칠십인 역에서는 '아르케'를 사용했다.
예수님은 창조되신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명확하게 밝혔다.
◆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사용된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λόγος)'를 번역한 것인데, 여기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 너무나 많아서 손댈 엄두가 안 난다. 다만 이 단어가 신약에서만 무려 300번 이상 사용된 흔한 단어이며, 일반적으로 '말'로 번역된 단어라는 것쯤은 알아두자.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주시길 간구하면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마 8:8)할 때 사용된 '말씀'도 로고스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때 사용된 말씀은 종이에 기록된 글자나 공기 중에 소리로 퍼져나가는 음성은 아닐 것이다. 존재와 생각은 언제나 함께하며,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생각이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된 것이 말씀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한 것은 삼위일체를 기가 막히게 설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재와 말씀은 어긋날 수 없고, 충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말과 행동이 다르고, 속의 생각과 쏟아낸 말들이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일치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생각이 곧 하나님이며, 그의 말씀이 곧 그의 생각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했지만, 솔로몬은 다른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했다. 즉 '지혜'라는 단어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잠 8:22-26, 30).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분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 되신 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분수에 넘는 일이다. 무한은 유한의 틀에서 절대로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이미 수학자들이 유한과 무한이 근본적으로 다름을 증명했다. 온 우주에 무한을 보여주는 존재 자체가 없는데, 무엇을 비교해서 무한을 설명하겠는가? 우주의 공간 자체가 무한처럼 여겨지나 우리가 볼 수는 없다. 무한은 수학의 이론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훌륭하게 사셔서 하나님의 지혜와 말씀으로 인정되신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그분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지혜였으며, 하나님이셨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우리도 노력하면 예수님처럼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학 사상이 있는데, 아주 건방진 생각이며 악한 마귀적 사상이다. 우리가 불 가까이 가면 몸이 따뜻해질 수 있지만, 따뜻해졌다고 해서 내가 곧 불은 아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님 안에 빛이 있다. 예수님은 빛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고, 나는 그 빛과 생명을 받은 사람이다. 이 관계를 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연구해야 할 가장 큰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다. 이 지식이 가장 귀하고, 이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제대로 된 세계관, 올바른 인생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생명의 빛 되신 주님,
이 땅에 오셨음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더욱 알게 해주십시오.
[출처] 요 1:1-5 / 요한복음의 시작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작성자 야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