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순국선열
제3편 광복군의 후기 활동
제1장 각 부대의 활동
제3절 제2지대
1941년 12월 8일 일제 침략군의 하와이 진주만(眞珠灣) 폭격으로 하여 확대된 전국은 중·일 전쟁의 작전 양상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우선 중국군은 홍콩에서 일본군과 작전 중인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광주(廣州)에 주둔한 적 일본군의 진지를
_______________
8) 김승학 지은 ≪한국독립사≫ 제6절 ‘한국광복군’ p.301. 참조
9) 추현수 펴낸 ≪자료한국독립운동3≫ p.228.
- 379 -
공격하는 한편 일부 병력을 버어마 지역으로 투입하여 그 방면에서 작전 중인 영국군을 직접 지원하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원조를 쉽게 받아 들일 수 있는 수송로 즉 버어마 루트를 개척하기 위한 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적 일본군은 그러한 의도 하에서 이루어지는 중국군의 병력 이동 상황을 미리 파악하고 그것을 견제하기 위한 작전으로 당시 중국군의 거점인 장사(長沙)지역의 공격을 계획하였다. 즉, 제3차의 장사 공격전을 감행하려는 것이었다. 이 제3차 장사공격전은 적군측으로서는 여기서 중국군의 주력을 완전히 격파하여 그들이 목적하는 태평양 지역 대전투 수행에 있어서의 후방의 방해 요소를 제거하자는 속셈에서 계획된 중대 작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적측은 12월 하순을 거하여 대병력을 집결, 제3차 장사 공격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전세는 그들의 예상대로 순조롭게 전개되지만 않았다. 즉, 적군측은 그들 특유의 속결 전법을 활용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지만, 중국측에서도 일본군에 못지않게, 아니 그 몇 배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적군을 좌우에서 반격하고 후방 보급선을 습격 차단하는 작전으로 나왔다. 따라서, 시일이 지나갈수록 적 일본군의 공세는 차차 누그러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따라서, 12월 23일을 기하여 시작되었던 적측의 소위 제3차 장사 공격전은 다음 해인 1942년 1월 4일까지의 사이에 그 기세가 완전히 좌절되었다.
여기서 적측은 중국군을 공격하기보다도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원래의 진지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기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군 대병력에 의하여 포위되다시피한 저들의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지상군의 철수 작전을 엄호하기 위하여 비행기로 독가스탄을 공중에서 투하하는 등의 비인도적방법까지 사용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추격 작전이 기민하고 활발하였기 때문에 적측의 철수 작전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면 전투, 일면 철수의 고전을 밤낮으로 계속하던 일본군은 1월 15일경에야 겨우 원래의 진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제3차 장사 공격전은 결국 중국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적측은 연대장 4 명을 포함한 1만여 명의 전사자를 내는 패전의 쓰라림을 다시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 380 -
적 일본군은 이 밖의 중국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태평양 전쟁을 틈탄 중국군의 활발한 작전을 견제하는 한편, 중국 방면에서의 일부 병력을 태평양 방면으로 빼돌리기 위하여 일종의 유한(有限) 공격 작전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때마 다 중국군의 맹공격을 받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도리어 병력의 손실, 사기의 저하를 초래하는 결과만을 가져오고 말았다.1)
한편, 이러한 정세 하에서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하고, 미·영·중 등 대일 항전 강대국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동시에 내부 단합, 전력 증강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가하였으며, 그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조선 민족 혁명당 등 반대파의 정당, 단체, 인사들을 임시 의정원과 임시정부내에 포섭하고,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한 일이었다. 이것은 모두 대일 항전 태세의 통합 강화가 절실히 요청되는 당시에 있어서 내외의 찬양을 받을 만한 성사(盛事)였던 것이다.
이 때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과 함께 종전의 광복군 각 부대에도 일대 개편이 있게 되었다. 즉, 새로 편입된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의 제1지대로 개편되었으며, 종전의 제1, 제2, 제5지대를 제2지대로 하고, 종전의 제3지대를 그대로 3지대로 하여 광복군을 3개 지대로 편성하였는데, 지대의 수에 있어서는 감소를 본 것이지만, 그 병력에 있어서는 새로이 조선의용대의 병력이 첨가되어 증강을 본 것이었다.
그 중에도 신편 제2지대는 종전의 제1, 제2, 제5지대를 통합한 병력으로서 종전 제2지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특히 이번 제2지대의 통합된 제5지대는 일찍부터 일선 공작에서 수훈을 세운 바 있는 청년 전지공작대의 후신으로서 많은 전투 대원을 가지고 있던 부대였던 만큼 이러한 제5지대 및 제1지대를 편입한 신편 제2지대의 전투 능력은 다른 어느 지대보다도 우수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다시 제2지대에는 역전의 용장이요, 총사령부 참모장인 이범석 지대장을 새로 맞이하게 되었으며, 제1, 제2, 제3 3개 구대장에 안춘생(安椿生)·노태준(盧泰俊)·노복선(盧福善) 등 신망 있는 중견 장교들이 임명되니, 종전 제1, 제2, 제5지대 당시에 일시 침체되었던 현상이 일신되고, 장병들은 모두 새로운 정세 하에서 새로운 각오로
_______________
1) 김홍일(金弘壹) 지은 ≪대륙의분노≫ 중 중앙군의 소장(少將)조 참조.
- 381 -
조국의 해방 독립을 위한 전투태세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2)
1. 초모 공작
광복군 병력 증강을 위하여 제1단계로 실시하여야 할 것은 초모 공작이었다. 즉, 처음 중경(重慶)이나 서안(西安)에 집결한 광복군 인원은 수백으로 세일 정도인 것이니, 이것은 초모·선전·정보 수집 등을 위하여 필요한 인원은 될지언정 직접 대적 전투를 수행할 병력은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광복군의 창설과 함께 3개 지대를 편성하는데 있어서도 1개 지대를 1개 사단으로 육성하여 제1차적으로 3개 사단 약 3만 명의 병력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러나, 3만 명의 장병 양성, 이것은 다시 광복군이나 또는 임시정부의 형편에 있어서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예산과 무장이 있어야 함은 물론, 첫째로 인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인원은 멀리 국내나 만주 지역, 또는 적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중국 지역의 청년이나 적진 중에 끌려 나와 있는 동포 청년들 중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실은 그 어느 하나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임시정부에서는 광복군 총사령부 창설과 함께 끊임없이 경비의 지원을 중국 정부에 청하고, 또 우리 일선 대원들의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 지원을 요청하며 그 행동 방안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나 중국 군사 당국에서는 우리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독립 투쟁, 항일 전쟁에 대하여 시종 동의를 표시하고 지원을 하여 오면서도 실지 광복군의 활동에 대하여서는 제한을 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현실은 적진 중을 뚫고 들어가 활동하는 대원들에게 다소 불편을 주기도 하였다. 또, 광복군 설립 후, 산서(山西), 수원성(綏遠省) 방변으로 나가 활동하던 제1·제2 지대(징모처)는 현지 사정으로 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와왔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여러 가지의 지장으로 하여 1942년, 종전의 제1·제2·제5 지대를 통합하여 광복군 산편 제2 지대로 출발할 때에도, 지대 병력은 제5 지대의 병력을 중심으로 한 수백의 인원에
_______________
2) 김승학(金承學) 지은 ≪한국독립사≫ 2편 3장 6절 한국광복군조 참조
- 382 -
불과하던 것이니 급격히 변화하는 대세 하에서 대일 작전을 앞둔 군의 재편성과 함께 각 지대 공히 인원의 증가를 위한 초모 공작은 제일 선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때 적 일본측은 무모하게도 전쟁을 중국 대륙에서 다시 태평양상으로 확대하여 놓고 그들의 부족한 인적 자원을 충당하기 하하여 지원병·징병·징용 등의 명칭으로 우리 국내의 수많은 청년들을 일선으로 끌어내었다.
원래 우리 한국 민족이 의협심이 강하고 전투에도 용감하며, 또 침략자 일제에 대한 적개심도 강함을 알고 있는 적측은, 전쟁에 우리 청년들을 무장 출동하는 것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국이 확대되고 전세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일제는 그 병력의 부족을 메꾸기 위하여 한국 청년들을 전선으로 몰아내는 일대 모험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니, 이것은 사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제 무덤을 제 스스로 파는 일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임시정부나 광복군에서 이들 일선에 나간 동포 청년들을 초모하는 공작을 펴는 데 특별 노력을 가하지 않으며 연합군측에서도 다만 무력에 의한 승리를 거두는 데에만 주력한다면 우리 동포 청년들의 전력은 일제 침략군에게 그대로 이용되고 말 것이니, 이야말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임시정부에서는 광복군의 일선 공작을 원하여 공작 계획을 세우고 이를 현지 당국인 중국측과도 의논하여 그 실천에 옮기도록 추진하였는데, 그 중에는 아래와 같이 초무 공작을 위한 3개 판사처(辦事處) 설치 계획이 있었으며, 이것은 그 후 단계적으로 실천을 보기도 하였다.
초무 공작(招撫工作)
임시정부의 특파로 적 후방 교포를 초무하는 사무 위원의 판사처를 임시로 세 곳에 설치하는데 그 지점은 아래와 같다.
[갑] 화북(華北) 총판사처를 낙양(洛陽)에 두고, 초대소(招持所)를 개봉(開封)·계수(界首)·제남(濟南)·천진(天津)·산해관(山海關) 등지에 분설(分設)하여 황하(黃河) 이북과 동북 각 성(雀)의 초무 사무를 통관(統管)한다.
- 383 -
[을] 화중(華中) 총판사처를 둔계(屯溪)에 두고, 초대소를 광덕(廣德)·의흥(宜興)·무석(無錫)·남경(南京)·상해(上海)·무호(無湖)·한구(漢口) 등지에 분설하여 장강(長江) 남북 각지의 초무 사무를 통관한다.
[병] 화남(華南) 총판사처를 남녕(南寧)에 두고, 초대소를 민(閩·복건)·월(粤·광동)·양 성(省) 적당한 지점에 분설하여 민·월 양 성 연해안 각지 및 안남(安南)·태국(泰國)·면전(緬甸) 등지의 사무를 통관한다.3)
그런데, 이 때 적전 중에 있는 무리 한국인 병사들을 항일 전선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는
① 제1선에서 적진을 향하여 선전하게 하는 것
② 공적 인원을 적 점령 지구 안으로 파견, 한국인 병사들을 선동하여 탈영(脫營) 또는 병변(兵變)을 일으키게 하는 것.
③ 동포 청년들이 아직 적 점령 지구에까지 오기 전에 미리 일사 보국(一死報國)의 결의를 굳건히 하였다가 기회를 보아 과감하게 복국 운동에 참가하게 하는 것
등의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제일 상책이 될 수 있는 것은 국내 또는 국외에 있는 동포 청년들이 모두 신성하고도 장엄한 결심을 가지고 광복 전선에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맹방(盟邦)인 중국이나 다른 연합국들이 모두 우리 한국 독립군에 대한 올바른 태도와 대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한국에 대한 독립을 보장하는 결의를 표시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즉, 현실 문제는 한국인의 독립 능력이 없다던가, 또는 정치적 경험이 없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요는 어찌하면 전쟁에 있어서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합작을 가져올 수 있으며, 또 수많은 적진 중 한국인 병사들의 자동적인 반정(反正)을 초래하고, 그리하여 연합국측의 전력을 증강하고 적 일본군의 병력을 삭감 궤멸하느냐에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맹방의 지도자들은 그 일언 일동에 있어서 우리 동포들의 자존심과 신념을 손상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런 언동이야말로 우리 동포들에게, 맹방에
_______________
3) 추헌수(秋憲樹) 엮은 ≪자료 한국 독립 운동≫ 권 1 p.174 임시정부 공작 대강
- 384 -
대한 회의와 실망을 가져오게 하는 일이 되기 쉬울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적측으로 우리 동포들을 기만하는 구실이 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니, 실지 백 가지의 해는 있을지언정 한 가지의 이익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중국측으로 볼 때에는 솔선해서 한국 독립 운동에 대한 명확한 태도를 표시하고 동맹국으로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이런 점에 있어서도 광복군에 대한 소위 행동 9개 준승(準繩) 같은 것이 솔선 시정되지 않으면 안될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과감한 시정이야말로 한·중 양국의 우호 관계는 물론, 대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길이기도 하였다.4)
따라서,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이러한 불합리한 문제의 시정을 끈기 있게 중국측에 요구하였으며, 중국의 정부 당국자들도 이를 받아들여 끝내는 모든 군권(軍權)을 우리에게 반환하게 되었다. 여기에 따라 광복군에서는 대적 선전, 반정 운동 등을 통하여 적진에 있는 한국인 병사 및 적 점령 지역에 있는 동포 청년들에 대한 초모 공작을 보다 더 활발히 전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서기 1942년, 광복군의 개편과 함께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을 지대장으로 하여 신편 증강되었던 제2지대의 전방 활동, 그 중에도 초모 공작 상황을 대강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942년 5월을 전후하여 그 동안 산서(山西)·하남성(河南省) 등지에서 선무·초모 활동을 전개하여 오던 대원 김천성(金天成) 등은 최철(崔鐵)·이원범(李元範)·최전(崔銓)·왕태일(王泰鎰)·김도제(金道濟)·강창복(康昌福)·배아민(裵亞敏)·강일성(江一成)·전일묵(田一默)·박영섭(朴永燮)·김명택(金明澤)·강정선(康貞善)·정인숙(鄭仁淑)·최동인(崔東仁)·김경인(金敬寅)·박훈(朴勳) 등 많은 청년들을 초모하여 산서성의 노안(潞安)과 운성(運城)을 거쳐 서안(西安)으로 들어와서 입대하게 하였다.
1942년 10월, 백정현(白正鉉) 등 공작원들의 초모 활동에 의하여 장덕기(張德祺)·김용(金湧)·유덕량(劉德亮)·이해순(李海淳)·황삼룡(黃三龍)·이우성(李宇成)·박인숙(朴仁淑)·한정임(韓貞任) 등 많은 인원이 적 점령 지구를 탈출하여 서안으로 들어왔다.
_______________
4) 동상 권 2, 제2장 4절 한국 문제에 관한 의견 참조
- 385 -
1942년 12월, 2지대에서는 그 동안 중국군 전시 간부 훈련단 안에 설치한 한청반(韓靑班)에서 새로 수업을 끝낸 대원들을 다시 전선 각지로 다수 파견하여 정보·작전·초모 등의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게 하였다. 그 중에도 한휘(韓輝)·이욱성(李旭成) 등은 석가장(石家莊)·신향(新鄕) 방면에서, 김유신(金有信)은 낙양(洛陽) 부근에서 장이호(張利浩)·정일명(鄭一明)·이한기(李漢基)·서곤(徐昆)·이해순(李海淳)·이한성(李漢成) 등은 산서성 및 하남성(河南省)의 초작(焦作)·신향·개봉(開封) 등지에서, 김천성(金天成)·백정현(白正鉉) 등은 산서성 일대에서, 김용주(金容珠)·김진호(金振鎬) 등은 하남성(河南省) 초작(焦作)에서 각각 활발한 공작을 전개하였는데, 그 중에도 중국어에 능통한 김유신은 낙양 부근 도구(渡口) 우체국의 직원으로 가장 잠입하여 긴밀한 연락 및 초모 공작을 폈다.
또 이무렵, 이범석 지대장은 서신을 중국측의 현지 군사·정보 책임자인 오종택(吳宗澤)·장공달(張公達)·오계성(吳啓誠)·우지후(于之厚)·이연년(李延年)·장옥현(張玉鉉)·왕진(王震) 등에게 보내어 협조를 요청하므로 하여 긴밀한 연락 활동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1943년 5월, 산서(山西) 지구에서 활동하던 김천성(金天成)·백정현(白正鉉)·정일명(鄭一明)·이해순(李海淳) 등은 박영만(朴英晩)·유기현(柳史鉉)·나광(羅光)·김성률(金成律)·김덕원(金德元)·신국빈(申國彬)·백준기(白俊基)·이우경(李宇卿)·이지성(李志誠)·김운백(金雲白)·이운학(李雲鶴)·안일용(安一勇)·정상섭(鄭相燮)·동방석(董邦石)·안정숙(安貞淑)·김의원(金義元)·문말경(文末景) 등 많은 사람을 적군 점령지로부터 탈출시켜 노안(潞安)·운성(運成) 등지를 경유 서안(西安)으로 들어와서 2지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1943년 6월, 김형철(金亨徹)·최전(崔銓) 등 4인의 대원이 다시 산서·하남 지구로 침투하여 종전 공작원들의 활동을 협조 보강하였다.
1943년 10월, 신향(新鄕)·초작(焦作) 등지에서 활동하던 서 곤(徐昆)은 중국군 군통국(軍統局) 요원으로 근무하던 인순창(印淳昌)을 광복군으로 포섭하였는데, 그 후
- 386 -
인창순은 정일명(鄭一明)과 함께 북평(北平)·정주(鄭州) 등지의 많은 공작 성과를 거두었다.
1944년 2월, 김천성(金天成)·백정현(白正鉉) 등은 다시 최봉상(崔鳳祥)·한종원(韓宗元)·박금동(朴金童) 등을 초모하여 서안에서 입대하게 하고, 10월에는 다시 계의성(桂義成)·송창석 (宋昌錫)·이순승(李淳承)·김숙영(金淑英) 등 4명이 적지에서 탈출하여 본대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 때에는 중국군과의 절충을 위하여 제2구대장 노태준(慮泰俊)이 직접 중국군 제34 집단군 사령부가 있는 극난파(克難坡)까지 가서 전기 인원을 대동하고 귀대하기도 하였다.5)
1944년 11월, 김천성·백정현 등의 적 점령 지구에서의 과감한 활동으로 전성윤(田成潤)·최창모(崔昌模)·윤치원(尹致源)·이병학(李秉學)·김두환(金斗煥)·박승렬(朴承烈)·김명천(金明天)·최봉련(崔鳳蓮)·김선옥(金善玉) 등 많은 청년들이 다시 적지를 탈출, 서안으로 들어와서 입대하였다.
1944년 12월, 장이호(張利浩)·정일명(鄭一明) 등은 낙양(洛陽) 방면에서 김기도(金基燾)·홍구표(洪嶇杓)·최일룡(崔一龍) 등 청년들을 포섭하여 바로 현지에서 공작에 참가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광복군 전방 공작원들의 활동이 점점 확대 강화되고, 또 전쟁의 대세가 하루 하루 적 일본측을 궁지로 몰아넣게 됨과 함께 국내에서는 더욱 더 많은 청년들이 혹은 소위 지원병으로, 혹은 징병으로 대륙 전선에 끌려나가게 되니, 이러한 청년들이 자진하여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광복군 진영으로 찾아와서 입대하게 되는 인원도 날로 늘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무렵 제2지대에 입대하였던 인원만을 대강 보더라도 학도병 출신의 장준하(張俊河)·김준엽(金俊燁)·홍기화(洪基華)·김성근(金星根)·김유길(金柔吉)·오건(吳健)·고철호(高哲鎬)·장재민(張在敏)·석근영(石根永)·이종무(李鍾鵡)·노능서(魯能瑞)·김성환(金聖煥)·윤재현(尹在賢)·김영호(金榮鎬)·한경수(韓景洙)·태윤기(太倫基) 등과 징병 출신의 이호길(李浩吉)·석호문(石鎬文)·
_______________
5) 노복선(盧福善, 당시 제2 지대 제2대장). 김석동(金奭東, 제2 지대 대원) 적은‘한국광복군제2 지대 연혁’및‘철기 이범석 서한문 초록’ 참조
- 387 -
장두성(張斗星)·홍재원(洪在源)·김성갑(金成甲) 등 재재다사(濟濟多士)였다.6)
2. 교육 훈련
광복군 각 지대의 활발한 초모 공작 및 선전 활동의 전개와 전국의 확대, 동포 청년들의 일선 참가 격증에 따라 각 전선에서 혹은 광복군 주재지 혹은 중국군 및 연합군진영으로 탈출하여 오는 한국 청년들의 수는 나날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 중에도 중국의 둔계(屯溪)·낙양(洛陽)·노하구(老河口)·임천(臨泉)·유양(劉陽)·상음(湘陰) 등지로 적군 진지에 있던 동포 청년들이 계속 탈출하여 왔는데, 이들은 광복군 공작대를 따라, 혹은 중국군 진지로 자진 탈출하였으며, 일시 전방 초대소(招待所)에 수용되었다가 광복군 부대로 인계되었다. 이렇게 많은 청년 동포들이 반정(反正)하여 돌아오게 되자 우리 임시정부와 광복군측에서는 그들에 대한 수용 시설과 교육 훈련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임시정부에서는 중국 정부에 향하여 우선 그들에 대한 경비조로 긴급 재정 원조를 요청하는 한편, 그들을 광복군에 정식 편입하기 위한 교육 훈련 계획을 세우기에 분망하였다. 그들 적진 중에 있던 동포 청년들은 대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군사 훈련을 받은 인물들이지만, 그것이 적치하(敵治下)에서 받은 교육 훈련이었던 만큼 광복군으로서의 필요한 재교육은 없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광복군 제2지대에서는 이미 개편의 뒤를 이어 중국의 군사 당국과 교섭하여 중앙군 전시 간부 훈련단[갈 무계(葛武啓) 중장 주관] 안에 한국 청년반을 특별 설치하고 김동수(金東洙)·박기성(朴基成)·유해준(兪海濬)·송호성(宋虎聲) 등의 담당으로 일선 활동에 필요한 군사 훈련과 외국어 등을 재교육한 바 있었지만 일선의 초모 공작이 활발해지고 적지에서 탈출하여 오는 동포 청년들이 격증함과 함께 이범석(李範奭) 지대장은 중국군 제10전구 사령관으로 중앙 군관 학교 제7분교 주임을 겸하고 있는 호종남(胡宗南) 상장 사령관과 교섭하여 서안(西安)에 있는 군관 학교 분교에 다시 한국
_______________
6) 동상 ‘한국광복군 제2지대 연혁’ 참조
- 388 -
청년반을 설치하고 박영섭(朴永燮)·최철(崔鐵)·왕지성(王志成)·이운학(李雲學)·박재화(朴裁和)·허봉석(許鳳錫) 등 많은 반정 청년들을 교육 훈련하였다.7)
한편,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도 이러한 반정 청년들의 교육 훈련 대책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그 시행 계획의 만전을 기하였는데, 그 중 중국군 장교로 광복군 총사령부에 파견되어 정훈 처장(政訓處長)직에 복무하는 황소미(黃紹美)는 한국광복군의 과거의 경험과 금후의 발전책을 중국 국민당에 건의하는 중에서 교육 훈련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보고하였다.
‘본군의 역랑을 증가하기 위해서는 먼지 건군(建軍)이 필요하며’ 건군을 하려면 먼저 간부를 배양하여야 하겠읍니다. 그러므로, 본군의 간부 훈련에 관하여는 이미 지난 해(1944) 1월에 공문으로 거행하기를 요청하였던 것인데, 그 후 중간에 파문이 생겨 아직까지 실시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본군에서는 더욱 더 간부의 수요가 박절하여지기 때문에 지난 11월 간에 여러 차례에 걸쳐 고급 막료(幕僚) 회의를 열고 아래와 같이 본군 간부 훈련반을 설치하기로 결정하는 동시에 군사위원회에도 보고하여 인준을 요청하게 되었읍니다.
① 성도(成都)의 중앙 군관 학교를 훈련 장소로 한다.
② 매 기(期)의 훈련 기간은 6개월로 한다.
③ 제1기의 훈련 인원은 2백 50명 내지 2백 80명으로 한다.
④ 본군의 한유 기본 대원을 더 훈련하는 외에 각지 한교(韓僑) 중에서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나누어 훈련한다.
⑤ 본 반의 훈련 장비는 본군에서 작성한 예산안에 의하여 군사위원회에서 발급한다.
본군에서는 상기 조항에 의거하여 적극 준비하고 있으며 본년 3월 1일에 정식 개학할 예정입니다.8)‘
_______________
7) 김승학 지은 ≪한국독립사≫ 중 한국광복군 조. 노복선(盧福善, 당시 2지대 제3 구대장) 증언 참고
8) 중화민국 34년 1월 15일 황소미 발신, 중국 국민당 중앙 집행 위원회 수신 문서
- 389 -
그런데, 여기에 말하는 성도의 광복군 훈련반 설치 계획은 곧 제2 지대의 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제2 지대의 성도 훈련반 설치 계획과 관련하여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다시 서안(西安) 및 부양(阜陽)에 제2 지대·제3 지대의 훈련소 설치 계획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 정부 및 국민당 요료에 제의하고 중국 당국으로부터 동의와 협조를 얻게도 되었다. 즉, 대한민국 27년(1945) 3월에 김구 주석은 중국 국민당 오철성(吳鐵城) 비서장에게 연락 부절로 내귀(來歸)하는 한국 동포들에 관한 경비로 매월 5백만 원의 예산을 증가 발급하여 줄 것을 요청함과 함께 광서군 훈련반을 조속한 기간내에 개설하며 참전의 준비를 진행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줄 것을 요청한 것을 비롯하여 중국 정부의 장개석(蔣介石) 주석 및 군사위원회의 하국광(賀國光) 주임 등 요료 인사들에게 제의하였으며, 중국 당국으로부터도 양해를 얻어 그 해 6월경에는 실현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9)
한편 2 지대에서는 조국 광복 전에 앞장 설 것을 다짐하고 활동하는 장병들의 독립 정신, 항일 사기를 보다 더 앙양하기 위하여 항일 군가(軍歌)를 지어 이를 전 군에 보급하였으며, 장병들은 교육 훈련을 받는 동안은 물론, 집무, 활동 중에도 단체로, 개인으로 이러한 항일 구국 정신이 담긴 군가를 부르며 조국의 독립 쟁취를 맹세하였다. 이러한 군가들은 대개 이범석 지대장을 위시하여 신덕영(申悳泳)·이재현(李在賢) 등에 의하여 작사(作詞)되고, 예술 방면 활동을 전담하던 한유한(韓悠韓)에 의하여 작곡되었는데, 1943년 10월에는‘광복군 제2지대 군가집’ 1·2집이 인쇄 배포되었으며, 또 일부는 중국문으로 번역되어‘항전 가곡집(抗戰歌曲集)’으로 서안(西安)의 황하 출판사(黃河出版社)에서 발행되기도 하였다. 이 때 제2지대에서 작사 작곡되어 장병들 간에 널리 불리어지던 노래로는, 전 장병들이 매일 아침 지대 광장에 모여 태극기를 올리면서 멀리 조국을 향하여 우렁차게 부르던‘국기가’를 위시하여, 광복군 제2 지대가·압록강 행진곡·조국 행진곡·출정·아리랑 행진곡 등의 군가와
_______________
9) 대한민국 27년 3월 26일자 김구 발신, 오철성 수신 문서. 동년 4월 4일자 오철성 발신, 김구 수신 유(兪) 34 기(機) 860호 문서 및 동년 5월, 6월 중 하국광, 장중정(蔣中正), 오철성 대 김구 주석간 왕복 문서 등 참조
- 390 -
조국의 어머니·흘러가는 저 구름·여명의 노래·고향의 달밤·건설하자 새 대한 등등의 가곡이 있는데, 이러한 군가와 가곡은, 조국 광복을 위하여 밤낮 없이 고심 노력 하던 광복군 용사들로 교육 훈련과 일선 활동에 한층 더 활기를 떨치게 하였던 것이다.10)여기서 그 중의 몇 편을 적어 보며 아래와 같다.
[국기가(國旗歌)] 이범석(李範奭) 작사
우리 국기 높이 날리는 곳에
3천만의 정성 쇠같이 뭉쳐
맹세하네 굳게 태극기 앞에
빛내랴고 깊게 배달의 역사
[광복군 제2 지대가] 이해평(李海平) 작사
총 어깨 메고 피 가슴에 뛴다.
우리는 큰 뜻 품은
한국의 혁명 청년들
민족의 자유를 쟁취하려고
원수 왜놈 때려 부시려
희생적 결심을 굳게 먹은
한국광복군 제2 지대
앞으로 끝까지 전진
앞으로 끝까지 전진
우리조국 독립을 위하여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_______________
10) 한형석(韓亨錫, 일명 한 유한, 당시 광복군 제2지대 예술 문화 활동 담당) 적은 ‘한국광복군 제2 지대의 예술 문화 선전 활동 상황’
- 391 -
[조국 행진곡] 신덕영(申悳泳) 작사
1. 팔도 강산 울리며
태극기 펄펄 날려서
조국 독립 찾는 날 눈앞에 멀지 않았다.
백두산은 높이 압록강은 깊이
우리들 바라보고 있고,
지하에서 쉬시는 선열들
우리만 바라보시겠네.
험한 길 가시밭 길을
헤치고 넘고 또 넘어
조국 찾는 영광(榮光) 길
힘차게 빨리 나가자.
2. 독립 만세 부르며
태극기 펄펄 날려서
조국 독립 찾는 날
눈 앞에 멀지 않았다.
아름다운 산천
사랑하는 동포
우리는 만나 볼 수 있고
한숨 쉬고 기다린 동포는
기쁨에 넘쳐 춤추겠네.
험한 길 가시밭 길을
헤치고 넘고 또 넘어
조국 찾는 영광길
힘차게 빨리 나가자.
- 392 -
[압록강 행진곡] 박영만(朴英晩) 작사
우리는 한국 혁명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우리는 한국광복군
악마의 원수 처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조국 우리나라 지옥이 되서
모두 도탄(塗炭)에서 헤메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밟힌 꽃포기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
우리는 한국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흘러가는 저 구름] 신덕영(申悳泳) 작사
1. 저산 넘어 저 멀리 흘러가는 저 구름
우리나라 찾아서 가는 것이 아닌가.
떠나올 때 말 없이 떠나왔지만
- 393 -
타는 마음 끓는 피 찾을 길 없어
방랑의 길 탈출길 지나고 넘어
조국 찾는 혁명길 찾아왔으니
전해 다오 이내맘 저 구름아
전해 다오 이내맘 저 구름아
2. 저 산 넘어 저 멀리 흘러가는 저 구름
우리나라 찾아서 가는 것이 아닌가
떠나올 때 울면서 떠나왔지만
나리는 비, 찬 바람 어둠 속에도
위험한 길 싸움길 드나들면서
혁명가의 나갈 길 걷고 있으니,
전해 다오 이내맘 저 구름아
전해 다오 이내맘 저 구름아11)
그리고 또 제2지대에서는, 일찌기 청년 전지공작대(靑年戰地工作隊) 시대에도 공연을 가진 바 있는 일제 침략주의에 대한 우리 민족의 항쟁 및 청년 용사의 활동을 소재로 하는‘아리랑‘한국의 한 용사’등 극본을 서안(西安) 시내의 극장, 공공 시설 및 보계(寶鷄)·한중(漢中) 지방에까지 나가 공연하여 우리 장병의 사기를 앙양하고, 중국인들에게 우리의 독립 정신, 구국 활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었으며, 또 이범석 지대장의 만주 방면 활동 중의 생활을 소재로 하는 소설‘북극풍정화(北極風情畵)’를 펴내어 중국인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기도 하였다.12)
3. 대적 각종 작전
광복군은 창설과 함께 먼저 최단 기간내에 많은 인원을 초모 훈련하여 전투 병력을
_______________
11) 김석동(金奭東, 당시 2 지대 종무 조원) 제공
12) 한형석(韓亨錫) ‘한국광복군 제2 지대의 예술 문화 선전 활동 상황’ 참조
- 394 -
편성한 다음 중국 및 영·미 등 연합군과의 연합 작전으로 동아에서의 일제 침략 세력을 섬멸하고 숙원인 본토 수복 작전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여기에는 우선 최소한3개 사단 정도의 지상군과 연락·보급 기타 필요에 이용할 수 있는 공군 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임시정부 당국과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여기에 필요한 초모 훈련과 함께 작전 계획도 작성하여 조국 광복전을 위한 제반 대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현실 사정은 영토도, 인원도, 예산도 없이 남의 나라 한 모퉁이에서 붙어 살고 있는 임시정부이며, 광복군 역시 현지 중국 정부의 양해를 얻어 성립을 보기는 하였지만 실지 일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의 애로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우선 초모 공작부터도 실은 일선 지역에서 혹은 생명을 내 놓고 적 점령 지구로 침투하여 가서, 또 모험적인 방법으로 적진 중에 있는 동포 병사를 끌어 내오고, 또는 적지에서 적군측과 연락을 가지며 생계를 영위하고 있는 동포 청년들을 포섭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용기도 결의도 필요하고 또 경비도 전방에 있는 우군(友軍)인 중국군 진영의 적극적인 지원 협조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일선 공작 대원에게는 결심과 용기는 있었지만, 활동에 필요한 경비나 무장같은 것은 부족하였다. 여기에 다시 중국 군사 당국은‘광복군 행동 9개 준승(準 繩)’의 규정을 만들어 군의 행동을 제한하니, 어려운 환경에서도 다만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 전쟁에 나서서 원수의 적 일본군을 쳐부순다는 의기로 나섰던 우리 광복군 일선 대원들의 사기가 저상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현실은 초모 및 각종 작전 활동에도 침체 부진의 현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광복군의 활동을 제한하는 여러 가지의 문제들은, 1942년에 조선의용대를 통합함과 함께 전부대를 개편 정비한 후에도 나타났으며, 1944년 9월에 광복군의 행동을 제한하던 소위 9개 준승(準繩)이 페기되고, 군의 모든 활동이 본군 자체 운영으로 돌아온 다음에야 겨우 해결을 보게 되니, 그 동안 광복군의 실지 업적은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초 최단기간에 최소한 3개 사단의 병력을 편성하여 대일 전쟁에 참가하려던 계획은, 그대로 제자리 걸음만을 하는 동안에 귀중한 4개년의 세월을 흘러보내고 말았다고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1945년 1월, 광복군 총사령부 정훈 처장으로 와있던
- 395 -
중국군 소장 황소미(黃紹美)가 중국 국민당 중앙 집행 위원회에 보고한 문서는‘한국광복군의 과거 경험과 금후 발전 방침’중 과거 경험에 대한 아래와 같은 내용도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여실히 말하여 주는 것이다.
“본군은 한국 독립당과 조선 민족 혁명당의 두 혁명 무력에 의하여 성립되었으며, 민국 30년(중화민국 29년의 오기인듯) 9월 중, 중경(重慶)에서 정식 성립을 선언하고 중·한 양국의 협상 동의도 얻었다. 그리고, 각국에서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기 이전에는 본군은 군사위원회 (중국)의 책임 지휘를 받게 되었다.
당시 본군의 실력은 제1·제2의 두 지대 공히 기본 대원 1백여 명을 가졌는데, 이들은 모두 한국의 뜻 있는 인물로 혁명 사상을 풍부하계 소유한 자들이었다. 더구나, 본군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 인사들은 진심 계획하여 본군의 역량을 발휘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간에 방해되는 일이 여러 가지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뜻하고 바라던 바를 완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본군의 진로를 저해하여온 요인으로 말하자면, 대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다. 즉, 첫째는 한국 당파의 분열과 의견의 상이로 하여 무슨 문제에 있어서나 쓸데 없는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적색(赤色)·흑색(黑色) 및 민족·독립의 각 당이 때로 암투(暗鬪)를 일으켜서 양해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 가장 큰 유감이었다.
둘째는, 본군이 군사위원회에 직속됨으로 하여 인사·업무 등 모든 일이 다 군사위원회 판공청(辦公廳) 군사처 후(候) 처장이 주관하는바 되었는데, 뜻밖에도 후 처장이 하는 여러 가지 조치가 다 적당하게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시기 의심하는 심리를 일으켜서 그만 중·한간의 결렬하는 현상을 가져 왔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정형으로 하여 본군은 3년 반 동안을 실속 없는 형체만으로 발전의 길을 찾으려 하여도 형세가 어찌할 수 없었으며, 여기서 뜻 있는 인사들은 모두 떠나갈 마음을 가지게까지 되었다. 다행히도 본군에서 책임을 진 사람들이 나누어 가지고 위무하며 효유하여서 안정할 수 있게 되었다.
종합하여 말하면, 지금 본군은 이러한 현상 하에서 적극적으로 나가야 하고 소극적으로 하면 안 되며, 발동하여야 하고 정지(靜止)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한국의
- 396 -
독립을 쟁취하려는 마음이 비상히 박절(迫切)하고 중국의 부조(扶助)를 희망하는 의사 더욱 간절한 것이다.
다만 한국의 당파가 단결하지 못하고 집결이 일치되지 않아서 자체의 조직이 건전하지 못하며, 경비가 충족하지 못하여 본군으로 그 간난(艱難)하고도 거대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숨겨 두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중앙 당국에서는 이러한 한국 당파에 대한 문제를 조속한 시일내에 통일하고 한국을 부조하는 정책을 명백히 확정하여 주었으면 한다.”13)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동안 광복군 각 부대의 작전 활동이 전연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즉, 광복군 각 부대에서는 불우한 환경 중에서도 초모 공작과 교육·훈련으로 병력을 충실히 함과 함께 한유의 병력 일부를 다시 일선 및 적 점령 지구로 파견하여 선전 공작을 전개하기도 하고, 또 적군의 동태·병력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적 시설의 파괴, 적 인물의 도살(屠殺) 등으로 적 후방을 교란하고 적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제2 지대에 있어서도 김천성(金天成)·김찬원(金贊元)·전일묵(田一默)·안일용(安一勇)·이해순(李海淳)·백정현(白正鉉) 등등 많은 대원이 산서(山西)·하북성(河北省) 일대로 나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작전 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한·중·일 3개 국문으로 된 인쇄물 등을 통하여 후방 한·중 양국 민중들의 항적 의식을 환기하고 민중 봉기를 촉구하며, 또 지하 조직을 통하여 비밀 정보를 얻어 우군에게 제공하고 공작 대책을 세우게도 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확대와 공작 활동의 진전에 따라 광복군의 적 복멸을 위한 활동은 중국 관내 지방에서만이 아니라 만주 방면, 나아가서는 한국 국내로의 발전도 계획하게 되었다. 조국의 급속한 광복 또는 자력에 의한 독립 쟁취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힘으로 우리 강토내에 있는 적 침략군을 섬멸 소탕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한국 국내에서의 지하군(地下軍) 조직이나 한국에 인접한 만주 지역에서의 무력 조직을 위한 활동은 기대해 볼만한 일인 것이었다.
_______________
13) 1945년 1월 I5일자 황소미(黃紹美) 발신, 중국 국민당 중앙 집행 위원회 수신 문서. 필자국역
- 397 -
당시 한국 본토는 이미 30여 년간 일제 침략 세력 하에 들어가 있고, 독립 세력은 저의 비인도적 수법에 의하여 탄압되고 있었다. 그러나, 2천 수백만 동포의 가슴과 가슴, 핏줄과 핏줄을 통하여 서로 통하고 서로 연결되는 민족정신, 독립 의욕만은 남아있었다. 이 정신, 이 의욕이 서로 연결되고 합치는 때에는 어떠한 큰일도 일으킬 수 있고 성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국내에는 기성 조직체라고 볼 수도 있는 천도교·기독교·불교·유교 등의 종교 교육 기관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수백만 명의 단결된 힘이 있었다. 따라서, 전국의 대세를 따라 이들 기성 조직체를 통하여 국민의 역량을 독립 전선으로 동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체를 통하여 또 방계적인 결사대 등을 별도로 조직, 적측의 군사·정치·경제 등 각 부문에 걸친 정보를 수집하고 때로는 비행장·군항·무기고·교통로 등을 파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전세의 확대와 함께 사지(死地)로 끌려 나가는 수많은 청년 자제들을 이끌어 광복군 별동대를 조직하여 익숙한 산천 산림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 후방 유격전을 시도하여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국내에서의 활동이 다시 만주 방면으로 연결되고 만주 방면에서 다시 중국 관내 지역으로 연결된다면, 우리 광복군의 항일 전쟁은 예상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임시정부에서는 아래와 같은 군사 진행 계획을 세우고 전면적인 군대 조직 및 작전 수행을 서두르게 되었다.
한국 임시정부 군사 진행 계획
[방침]
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실력으로 조선 반도를 점거한 왜적을 소멸하고, 독립 자유 국가를 세울 목적으로 즉시 각종 군사 역량을 조직하고 맹군(盟軍)의 작전과 연합하여 육·해 양면으로 적인(敵人)을 쳐서 섬멸한다.
② 본 계획은 즉시 착수하여 진행하되 아주(亞洲) 전국의 발전에 따라 목표를 향하여 점차 강력하게 실시하여 간다.
- 398 -
[지도 요령]
③ 현재의 광복군으로 중국군과 협동 작전하고 동북 방면(만주)의 한국인 의용군으로 동북 방면의 중국 의용군과 협동 작전한다. 이상 양군이 균일하게 작전하면서 일면으로 그 조직을 확대하여 국군의 기간 부대를 이루게 한다.
④ 통수부(統帥府) 직속 하에 지하군(地下軍) 조직 기구를 설치하고, 간부를 보내어 한국 본토로 진입하여 원래 있던 애국 조직의 지하군을 진작하고, 적당한 시기에 국내에서 발동하여 적을 공격하며 함께 민중을 지도하여 적군에 대항하게 한다.
⑤ 간부를 남양(南洋)으로 파견하여 미군에 참가, 적군 중에 있는 한국인으로 반정(反正)하여 나오게 하고, 이와 동시에 해상 한국군을 조직, 태평양 방면의 미군과 협동 작전하여 해상으로 일본 본토를 공격함과 함께 조선 반도 상륙 작전에 참가한다.
⑥ 이상의 3,5 두 항목은 중·미 양국 정부와 교섭하여 신속 실현하도록 한다.
[부서와 실시]
⑦ 한국광복군 전체 인원은 먼저 중경(重慶)에 집합하여 단기 군사 훈련을 받은 후 광복군 총사령부 통솔 하에 중국 제1전구, 혹은 제2 전구의 전선(지점은 중국 군사 당국과 협의하여 정한다)으로 이주, 중국 전구 장관의 지휘를 받아 협동 작전한다.
또, 총사령부 소재지에는 관하 훈련반 1개소를 설치하고, 각 전구 적군 전후방에도 초모참(招募站)을 설치하여 적군 중의 한국인 병사 및 내부에서 찾아오는 애국 청년들을 흡수, 훈련소로 보내어 단기 훈련을 실시한 후에 모두 광복군에 편입하여 점점 그 조직을 확대시킨다. 그리고, 그 작전 능력이 강대하여져서 동북 지구로 진출하게 될 때에는 동북 지구의 항일 의용대를 통일 지휘하고 국내의 지하군과 협동하여 한반도 안의 적군을 소탕하고 국토를 광복한다.
⑧ 동북 지역 한국인 의용군의 근거지는 북만에 두고 동북 지역의 한국 교포들을 지도 조직하되, 그 실력을 보아서 점차 장백(長白)·안도현(安圖縣)부근으로 집중하게 한다. 그리고, 지대(支隊)를 안봉(安奉)·천도(天圖) 연선으로 파견하여 적군의
- 399 -
교통을 방해하며 중국군이 동북 지역으로 진출하기를 기다려서 패퇴하는 적을 요절(邀截) 공격하고, 한국광복군과의 합동으로 한국 본토에 쳐들어가게 한다. 혹시라도 소련이 일본을 공격하게 되는 일이 발생할 때에는 그들과 협동 작전을 하되 그들보다 앞서 조선으로 쳐들어가서 지하군과 협력하여 적군을 해상으로 몰아낸다.
⑨ 국내 지하군은 비밀 지휘부를 경성(京城)에 설치하고 본부(分部)를 용산(龍山)·평양(平壤)·나남(羅南)·대구(大邱) 등 적 병사구(兵事區) 소재지에 설치한다. 이와 동시에 널리 세포 조직을 각 요지에 두고 강제 입대하게 되는 한국인 군사들을 조직하여 적의 군사 조직을 약화하며, 적군 중의 한국인 애국 분자를 흡수한다. 동시에 기본 대오(隊伍)를 강원도 산악 지대에 숨겨 두었다가, 광복군과 동북 의용군 또는 해상으로의 한국군의 공세가 한국 본토에 접근할 때에는 일어나 적의 교통로를 차단하고, 나가서 경성을 점령하여 적군의 남·북간 교통을 차단하며 우군과 협력하여 적인을 섬멸한다.
[보급]
⑩ 광복군의 장비·급양(給養)은 중국 정부와 조차(租借) 조약을 체결하여 보급한다.
⑪ 동북 지역 의용군의 무장은 현재 보유물을 이용하는 외에는 먼저 민간 무기를 구입하고 추후로 중국 정부, 혹은 소련 정부와 교섭하여 조차 조약을 체결, 보급한다. 그리고, 피복 급양 같은 것은 거류 교포들에게서 징발(徵發) 보급한다.
⑫ 지하군의 장비는 시기를 보아 적인의 창고에서 탈취 보급하고, 적당한 시기에 중·미 정부와 교섭하여 비행기로 수송 보급하며 급양물은 민간 물자를 취하여 준다.
⑬ 해상 한국군의 장비와 급양을 미국 정부와 교섭하여 조차 조약을 맺어서 보급하는 동시에 반정군(反正軍)의 장비도 이용한다.
[통신 연락]
⑭ 광복군 및 해상 한국군의 통신 연락은 중·미 양국 정부와 연락하여 주로 무선 전신을 이용하며 다음으로 우편 전신을 이용한다.
⑮ 동북 지역 한국 의용군 및 내지 지하군의 통신 연락은 먼저 육로에 비밀 교통선을 설치 이용하고,
- 400 -
적이 설치한 통신 기관도 이용하되 비밀 방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추후로 무선 전선을 설치하여 연락하며 맹군의 비행기도 이용하여 연락한다.14)
그리고, 1945년 봄에는 다시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좀 더 자세한 내용의 ‘한국광복군 건군 및 작전 계획’을 작성하고 중·미 등 관계국들과 연락하여 가며 그 실현을 추진하였는데 그 중에서 부서 설치와 작전 진행 관계만을 보면 아래와 같다.
중국 경내에서의 작전
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임시로 중국 경내 적당한 장소에 설치하여 군대의 편성과 지휘를 담임하며 군사 훈련관을 부설하여 훈련을 분담하게 함.
② 중국 각 전구(戰區) 사령관 소재지와 중국 육군 총사령부 관하 각도 성(省) 사령 소재지에 한국광복군 초모처(招募處)를 분설(分設)하고, 초모처에서 전선 각 교통 요점 및 적 후방에 인원을 분파(分派)하여 병운(兵運)과 민운(民運)을 겸행하며 적군 중의 한적(韓籍) 사병과 적 후방의 공·상 인민을 반정 내귀(反正來歸)하게 하며 정보와 모략 공작을 진행함.
③ 각 초모처에서 초모한 인원과 중국 각 한교 초대소(韓僑招待所)에서 인수한 인원은 먼저 군사 훈련반에 집중하여 단기간의 일반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그 중에서 특징 있는 인원을 선발하여 다시 특종 훈련을 실시함.
④ 일반 군사 훈련을 받은 인원은, 그 인원수에 따라 전투 부대를 편성, 중국 최고 통수부(統帥部)에서 지정하는 전지(戰地)로 파견하여 그 지구 중국 최고 군사 장관의 지휘를 받아 중국군과 합동 작전함.
⑤ 특종 훈련을 받은 인원은 한국과 적군 점령지 먼 후방에 파견하여 지하군을 건립하며 정보와 모략 공작을 진행함.
⑥ 특종 훈련은 중국 군사 당국의 동의를 얻어 미국 기술 인원의 초빙, 또는 기재(器材)의 협조를 받아 실시함.
_______________
14) 추헌수(秋憲樹) 엮은 ≪자료 한국 독립 운동≫ 3권, 제2장 1절 중 ‘한국 임시정부 군사 진행 계획서’ 원문은 한문, 필자 국역
- 401 -
⑦ 한국 전투 부대의 편성이 상당수에 달할 때,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즉시 부대 소재지로 이동하고, 직접 부대를 지휘하여 중국군과 배합하여 대륙 작전을 수행하며, 조선 반도로 진출하기 위한 시기의 초모와 훈련을 위하여는 한국광복군 유수처(留守處)를 설치하여 계속하되, 유수처는 중국 최고 통수부의 추진에 따라 축차 전방으로 진주함.
태평양 방면의 작전
① 미국 정부 또는 태평양 작전 미군 당국의 협조를 신속히 얻어서 태평양 지역 중 적당한 지점에 한국광복군 태평양 파견 사령부를 설치하여, 이 구역에서의 한국광복군 편성 훈련 작전을 통할하게 함.
② 현재 미군에게 포로된 한적 사병과 공원(工員)을 기초로 전투 부대를 편성하여 중국 경내에서 실시하는 변법을 참작, 초모와 훈련을 진행하며 나아가서 한국과 일본 본토에 대한 지하 공작을 진행하여 미군과 연합 작전, 해상으로 조선 반도에 진입함.
한국 지하군의 조직
① 최초에는 기밀을 보전하기 위하여 중국 경내에서 파견한 인원과 태평양 지구에서 파견한 인원이 각기 별도로 공작을 진행하되 그 파견한 본부와 연락하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이를 통일하다가 그 공작이 어느 단계에 오른 후에는 한국광복군 지하사령을 임명하여 그 일체 활동을 통할하게 함.
② 지하군의 임무는 제1 기 (약 6개월)를 잠복 시기로 하여, 조직과 선전·정보 공작을 위주하고, 제2기(약 4개월)를 활동 시기로 하여 파괴 교란을 위주하며, 제3기는 전투 시기로서 제1,2 기의 공작을 계속하는 외에 무장 근거지를 형성하고 한국 경내의 적 일본군과 전투를 개시하며, 적진 중의 한국인 병사들로 무장 혁명을 일으켜서 대륙과 해상 양방의 동맹군의 진격을 용이하게 함.
③ 한국 지하군을 건립하기 위하여는 태평양 지구 미군의 기술과 물질적 협조를 필요로 함.
- 402 -
비행대의 편성과 작전
① 중국 경내와 태평양 지구에서 각각 한국광복군 비행대를 조직하여 각지에 연락·운수 및 맹방(盟邦) 공군과 연합 작전함.
② 중국 경내의 한국광복군 비행대는 현재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는 한국인 비행 인원을 기초로 조직하고, 먼저 연락용 비행기 수대를 조차(租借)하여 한국광복군 소재 각지와의 연락과 군인 수송을 담임함.
③ 비행 인원의 양성은 중·미 양국과 협상하여 양국 항공 학교에 청년을 입학시켜 훈련하도록 함.
④ 항공 인원의 양성에 따라 중·미 양국 정부로부터 각종 비행기를 조차(租借) 광복군 비행대를 정식으로 조직하여 맹방의 공군과 합동으로 작전을 진행하되, 적 점령지구 및 한국 경내에 대한 선전과 지하군과의 연락 및 원조를 주로 담임하게 함. 단, 광복군 비행대의 실력이 독립 작전을 수행하기 불능한 시기 중에는 맹군(盟軍) 비행대에 소속하여 그 지휘를 받아 행동하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필요로 하는 공중 연락과 군인 수송에 관한 일은 맹방 공군이 이를 수응하게 함.
⑤ 태평양 지구 한국광복군 파견 사령부 소속 비행대의 조직은 재 미주 한국인 비행사를 기초로 하여 이상 각항에 비조(比照) 시행함.15)
이상의 작전 계획에 의하면 전국(戰局)의 진전과 함께 우리 광복군의 작전 방략도 크게 확대되었음을 볼 수 있다. 즉, 종래 군의 공작 활동은 대개 중국 관내의 적 일본군과의 전선 전후방에 한하였던 것이지만, 이 때에 와서는 중국 경내에서 동북 지역, 즉 만주 방면으로까지 공작 구역이 확대되었음은 물론, 만주 방면에서 다시 국내로 연장되고 한 걸음 더 나가서는 태평앙 방면으로까지 확장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광복군의 태평양 지구 사령부 설치와 함께 공군 건설 계획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_______________
15)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소장≪소앙문서(素昻文書)≫ 제81호 한국광복군 건군 및 작전 계획
- 403 -
또 이렇게, 작전 구역이 확대됨과 함께 강대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종전의 중국에만 의존하던 데에서 진일보하여 태평양 방면의 작전을 주도하고 있던 미국과의 긴밀한 연락과 원조 교섭을 진행하기도 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계획은 뒷날 국내 진입 작전을 위한 한·미 합동 특수 작전 훈련의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군 전체의 작전 계획이 확대됨에 따라 전방 공작을 전개하고 있던 각 지대의 활동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게 되었으며, 제2지대의 활동 지역 역시 중국 관내에서의 활동에서 점차 만주 방면과 본국 방면으로까지 확대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무렵에는 본 지대 소속의 용사 문응국(文應國)·최봉진(崔俸鎭)·나동규(羅東奎)·송철(宋哲)·김성호(金成浩)·박영진(朴永晋)·김상준(金尙俊) 등이 인도·버어마 전선으로 나가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일선 공작과 작전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또 많은 대원들이 조국 광복 전선에서 고귀한 희생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도 산서성(山西省) 지구를 공작 거점으로 하고 화북(華北) 일대를 무대로 수많은 동포 청년들을 초모하여 본대에 입대하게 하며, 또 중국군 유격대와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적 일본군이 이용하는 철도 및 그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적군 부대를 습격하여 적지 않은 타격을 주는 등의 많은 전공을 세우던 김천성(金天成) 및 이서룡(李瑞龍)·정태희(鄭泰熙) 등은 1943년 3월, 산서성 태원(太原)에서, 이해순(李海淳)·권혁상(權赫祥)·차영철(車永徹)·송병희(宋炳熙) 등은 같은 시기에 하북성(河北省) 석가장(石家莊)에서, 정기주(鄭起周)·정윤희(鄭允熙) 등은 북평(北平) 등지에서, 백정현(白正鉉) 등은 하남성(河南省) 신향(新鄕)에서 적 헌병대에게 체포되어 곤욕을 당하게 되었는데, 김천성·이해순·정윤희·백정현 등은 적의 악랄한 고문과 재판에도 끝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고 항쟁하다가 순절하였다. 또, 이 해에는 2월에 김유신(金有信)이 산서성 태행산(太行山)에서 전사한 것을 위시하여, 중국군 제27집단군에 파견되어 작전 중이던 이한기(李漢基)·문학준(文學俊)이 7월에 임현(林縣)에서 전사하고, 중국 제24집단군에 파견되었딘 김운백(金雲白)·정상섭(鄭相燮)은 태행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리고, 뒤 이어서는 한휘(韓輝)·전일묵(田一默)·김찬원(金贊元)·안일용(安一勇) 등 역시 광복 전선에서 몸을
- 404 -
바치고 차영철·권혁상·정기주 등 많은 대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16)
서기 1945년 5월 현재 제2지대의 편제 관계는 별표와 같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연혁 도표
1938년 10월
〜1939년 9월
1939년 10월
〜1940년 12월
1941년 1월
〜1942년 3월
1942년 4월〜1945년 8월
한국 광복 진선 청년 공작대(1938년 10월 현재)
대장
고운기(高雲起)[공진원(公震遠)]
대원
김동수(金東洙)·박영준(朴英俊)·노복선(盧福善)·이재현(李在賢)
진춘호(陣春浩)·이하유(李何有)·전태산(全泰山)·마초군(馬超軍)
지달수(池達洙)·민영구(閔泳玖)·이우송(李又松)·한대원(韓大元)
김인(金 仁)·유평파(劉平波)·조시제(趙時濟)·김원영(金元英)
김진헌(金鎭憲)·김석동(金奭東)·이윤장(李允章)·지정계(池正桂)
이윤철(李允哲)·방순희(方順熙)·김병인(金秉仁)·김효숙(金孝淑)
신순호(申順浩)·연미당(延美堂)·오광심(吳光心)·오희영(吳姬英)
오희옥(吳姬玉)·맹조화(孟兆和)[중국인] 이상 31명
_______________
16) 노복선(盧福善), 김석동(金奭東) 작성 ≪한국광복군 제2 지대 연혁≫ 및 김승학(金承學) 지은 ≪한국독립사≫ 중 한국광복군조 참조
- 405 -
한국광복군 제2 지대 편제(본부) (1945년 5월 현재)
- 406 -
제1구대
1 분 대
2 분 대
3 분 대
조원구(趙源九)
이도순(李道淳)
강일성(江一成)
이월봉(李月峯)
이원범(李元範)
최문식(崔文植)
이삼녀(李三女)
황삼룡(黃三龍)
유덕량(劉德亮)
강창복(康昌福)
이경녀(李敬女)
이우성(李宇成)
이건림(李建林)
김동걸(金東傑)
안일용(安一勇)
백준기(白俊基)
박명광(朴明光)
허봉석(許鳳錫)
윤태현(尹泰鉉)
이지홍(李志鴻)
최간란(崔澗蘭)
김세용(金世用)
신영묵(申榮默)
한정임(韓貞任)
박인숙(朴仁淑)
박익득(朴益得)
박금동(朴金童)
홍재원(洪在源)
조순옥(趙順玉)
장준하(張俊河)
김유길(金柔吉)
홍기화(洪基華)
김준엽(金俊燁)
이호길(李浩吉)
이준승(李濬承)
문말경(文未景)
오건(吳健)
김욱배(金旭培)
김성근(金星根)
이순승(李渟承)
김두환(金斗煥)
이동환(李東煥)
김복성(金福成)
제2구대
1 분 대
2 분 대
3 분 대
이하유(李何有)
임재남(林載南)
배아민(裵亞敏)
오동수(吳桐秀)
김해성(金海星)
이계현(李啓玄)
김봉식(金鳳植)
임정근(林正根)
장덕기(張德祺)
최봉상(崔鳳祥)
고여순(高如順)
김영준(金永俊)
정정산(鄭正山)
김명택(金明澤)
박영섭(朴永燮)
조광선(趙光善)
김용(金湧)
지창순(池昌順)
장경숙(張景淑)
이우향(李宇鄕)
이한기(李漢基)
전일묵(田一默)
이운학(李雲鶴)
백옥순(白玉順)
정순옥(鄭順玉)
임소녀(林少女)
동방석(董邦石)
이지성(李志成)
이덕산(李德山)
노성환(盧星煥)
신국빈(申國彬)
김상을(金商乙)
송석형(宋錫亨)
한종원(韓宗元)
이동학(李東學)
안국보(安國寶)
- 407 -
김성률(金聲律)
송수일(宋秀一)
전성윤(田成胤)
고철호(高澈浩)
최창모(崔昌模)
김숙영(金淑英)
안정숙(安貞淑)
제3구대
1 분 대
2 분 대
3 분 대
선우기(鮮于基)
김도제(金道濟)
장철(張鐵)
이명(李明)
염재항(廉宰恒)
이보비(李寶妣)
문학준(文學俊)
박지호(朴芝鎬)
최군삼(崔君三)
박성화(朴成和)
최복련(崔福蓮)
이한성(李漢成)
이준명(李俊明)
장두성(張斗星)
이정선(李正善)
김운백(金雲白)
왕태일(王泰鎰)
김선옥(金先玉)
정상섭(鄭相燮)
박규채(朴圭彩)
송창석(宋昌錫)
계의성(桂義成)
한경수(韓景洙)
김명천(金明天)
석호문(石鎬文)
윤치원(尹致源)
신덕영(申悳泳)
정인교(鄭仁敎)
노능서(魯能瑞)
김영호(金榮鎬)
석근영(石根永)
김춘정(金春鼎)
김덕원(金德元)
김중호(金仲浩)
윤재현(尹在賢)
태윤기(太倫基)
구자민(具滋民)
김성갑(金成甲)
이종무(李鍾鵡)
장재민(張在敏)
박수덕(朴樹德)
박승렬(朴承烈)
박춘규(朴春圭)
남지현(南智鉉)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고생되시겠지만 좋은 일 많이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