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빨치산의 딸인 작가 정지아의 자서전적 소설입니다. 마지막으로 읽었던 소설이고, 정지아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에 감탄했던 나로서는 독후감을 써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는 아픈 사실을 마치 코메디처럼 이야기 했지만, 사실은 슬픈 소설입니다.
더구나 동해시정 소식지, ‘동트는 동해 알리미’ 가 원룸 앞에 있어서 우연히 읽어보다가 동해시립도서관에서 독후감 공모전을 한다기에 오랜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는 지리산과 백운산을 카빈 소총을 들고 누빈 빨치산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가 끝난 직후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싸웠으나 처절하게 패배했다. 동지들은 하나둘 죽었고, 아버지는 위장 자수로 조직을 재건하려 하지만 그마저 실패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자본주의 한국에서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평등한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고, 생판 초면인 사람들의 어려움도 무시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금 우스꽝스럽게 생각한다. 누구나 배불리 먹고 차별없이 교육받는 세상이 이미 이뤄진 마당에 혁명을 목전에 둔 듯 행동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블랙코미디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행선을 달려온 ‘나’와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죽었다. 노동절 새벽,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이 이야기는 크게 네 줄기로 이뤄진다.
첫번째는 아버지와 평생을 반목해온, 그의 동생인 작은아버지와의 이야기다. ‘빨갱이’ 형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고 생각하는 작은아버지는, 형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대꾸도 없이 끊을 만큼 냉담하다.
평생 술꾼으로 산 작은아버지는 이따금 집에 찾아와
“니는 그리 잘나서 집안 말아묵었냐?”
라며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맞서지 않고 묵묵부답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작은아버지가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죽은 아버지와 산 작은아버지는 화해할 수 있을까.
두번째는 구례에서 아버지가 사귀어온 친구들의 이야기다. 이들의 면면은 실로 다양하고 입체적이라 살펴보는 것만으로 한편의 시트콤을 보는 듯하다.
아버지의 소학교 동창이자 시계방을 운영하는 박선생. 그는 평생을 군인과 교련선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대척점에 있지만 아버지의 둘도 없는 친구다.
정치적 지향 차이로 발생하는 두 노인의 투닥거림은 어딘지 귀엽고,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
라는 말은 지금의 정치권이 배웠으면 싶은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이 장례식에 어울리지 않게 등장한 샛노란 머리의 소녀.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아버지의 “담배 친구”란다. 열일곱살 소녀와 허물없이 친해지는 것은 아버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그 와중에도 어머니가 베트남인인 소녀에게 ‘미 제국주의’ 운운하는 것을 잊지 않는 아버지의 캐릭터는 여전히 웃음을 자아낸다.
그밖에 ‘학수’를 비롯해 아버지의 아들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 총부리를 맞서고 싸웠지만 이윽고 친구가 된 웃지 못할 사연들이 속속 등장한다.
세번째는 ‘나’와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가장 큰 줄기는 ‘빨치산의 딸’로 힘들게 살아온 딸이 아버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사회주의자이고 혁명 전사였기에 생활력은 없었고, 그런 주제에 보증을 서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늘 가난했던 집안 형편은 전부 아버지 탓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버지가 늘어놓는 장광설은 지금 현실과는 맞지 않았고,
그런 만큼 ‘나’는 아버지가 있는 고향을 떠나고 싶어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는 내가 알던 아버지의 얼굴이 아주 일부였음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면들이 밝혀지고, 사람들을 감화시킨 담대한 모습들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내가 잊고 있었던, ‘나’를 사랑했던 순간순간들이 떠오른다. 마침내 ‘나’는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들고, 아버지를 가장 아버지다운 방식으로 보낼 한가지 결심을 한다.
네번째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일화들이다. 이들은 이야기의 무게를 한층 발랄하게 한다. 평생의 동지이자 그 역시 사회주의자였던 어머니는 아버지보다는 현실적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로 늘 구박을 받는다. 옷을 털지 않아서 술 담배를 끊지 못해서와 같은 비교적 소소한 일도 있고, 빚보증을 서서 농사를 내팽겨친 수 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큰일도 있다.
어찌 보면 앙숙 같은 이들은 ‘유물론’과 ‘민족’ 앞에서 경건하게 하나가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티키타카’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는 유쾌한 촉매제가 되어준다.
아버지의 장례식으로 아버지는 다시 태어난다. '나'에게는 능력 없는 아버지, '나'를 빨치산의 딸로 고통받게 했던 아버지는 그의 굳은 심지처럼 기어코 다시 일어나 진짜 자기 모습을 보여준다.
이념이 휘몰아치던 70년대에 배척과 갈등을 몸에 얹고 살아간 사람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각국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분쟁하고 종종 전쟁도 일어나는 시대지만 민주주의를 배우고 그것이 세계관인 현재에는 매우 특이하고 치열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다시 아버지를 본다.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죽음을 통해 떠오르는 것일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해명할 수 없다. 죽은 사람만 탓하기에는 산 사람이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보기 좋다. 그래서 늘 죽음은 나와 타인에 대한 깨달음이자 아쉬움을 남기는 것 같다.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본인의 생각과 삶의 태도가 확실한 부모님이 떠오른다.
원래 고집이 세고 양면적인 사람들이었는지 궁금하다. 이것 또한 내가 알기만 한 부모님의 모습일 것이다.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이념'이라는 주제를 구수한 사투리와 특유의 유머로 풀어낸 소설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치밀하고 현실적이다.
한 개인의 이념, 가치관, 삶의 태도를 다양한 인물과 사건으로 전개하여 풀어낸다.
그냥 '재밌다'라는 감상평이 절로 나오는 소설이다.
구슬프고, 웃기고, 씁쓸한 일화를 통해 70년대 사회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간 '아버지'를 만난다. 내가 잊고 살았던 소중함, 나의 인생과 가치관을 두루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큰 매력이자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