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귀화한 재중동포(조선족) 지인과 저녁식사를 할 자리가 있었습니다. 친구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이지만, 민감한 이야기는 서로 피합니다. 그에게서 늘 빠지지 않는 말이 재중동포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라는 강조점인데요. 일견 사실이지만, 6·25 남침 주력이 조선족 6만5,000명이었고 3년 동안 모두 10만명이 넘는 조선족이 중공군으로 참전한 역사적 사실에는 얼굴을 붉힙니다. 그런 역사적 빚에 대해서는 오히려 고려인들에게 저는 상당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대일로나 미중무역갈등에 대해 한국의 스탠스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더군요. 서구는 동아시아를 뒤흔들던 외세라는 시각도 비추고요. 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만 가지고 판단하면 안되겠지요. 인연이란 상당히 복잡다감해서 여러 시각에서 봐야합니다. 여기에 하나 심심풀이로 글 한꼭지 올립니다.
-이하 인용글-
한국과 노르웨이 수교 60주년 기념전이 전쟁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다. 6월 말까지 할 것이라고 한다. 이 기념전을 기회로 노르웨이가 파견한 의료지원단이 한국전쟁에서 비중있게 활약했었다는 사실과 지난 60년간 양국의 관계가 나름대로 긴밀했었다는 사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유라시아 대륙 먼 서북쪽 끝, 통일이 되어서 기차로 간다면 한국에서 제일 멀고 먼 국가일 수도 있는 노르웨이는 20세기 중반만 해도 우리 한민족과 별다른 접촉이 없었다. 그저 청소년들은 교과서를 통해서 알게된 남극 정복의 영웅 아문센이나 용감한 바이킹의 나라, 일반인들은 솔베이그 노래를 작곡한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노르웨이, 큰 체구와 금발에 푸른 눈의 미남 미녀가 많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한 나라다.이들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바이킹 후예들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때 한반도에 달려왔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스웨덴과 노르웨이, 그리고 그 남쪽 덴마크 3국이었다. 핀란드는 같이 붙어있는 국가지만 민족이 달랐었고 1950년대에는 소련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국가였다. 스칸디나비아 3국은 모두 전란의 변고에 시달리던 한국에 의료 지원을 했다. 헌신적인 의료 활동이 잘 알려진 국가는 유트란티아라는 병원선을 파견한 덴마크였다.
그러나 스웨덴과 노르웨이도 군 야전 병원 운영을 위한 의료지원단을 파견했었다. 스웨덴은 부산에서 활동했었다. 스웨덴의 활약은 다음 기회에 설명하겠다. 노르웨이는 1951년 6월 22일, 5명의 외과 전문의가 포함된 63여 명의 지원 인력이(후에 증원되어 106명) 병상 60석의 야전 병원을 운영하는 의료지원단을 파견했었다. 이 병상은 곧 100석 이상으로 늘어난다. 노르웨이 의료지원단의 주임무는 미 1군단(국군 1사단, 미 24보병사단, 미 1기병사단)의 의료 지원이었다. 미군들은 이 노르웨이 야전 병원을 노르메쉬라고 불렀다.(NorM.A.S.H-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
말했듯이 노르웨이 이동외과 병원은 의정부에 6개월 정도 있다가 동두천으로 이동해서 2년 넘게 활동하다가 전쟁이 끝나 귀국했다. 그 결과 한국에 세워진 노르웨이 군 참전 기념비는 두 개나 된다. 한 곳은 노르웨이 의료지원단이 2년 넘게 머물렀던 동두천이다. 동두천에 세워져 있던 노르웨이 참전 기념비는 훨씬 전인 1972년에 세워졌다. 노르웨이 야전병원에서 일을 했던 한국인 70명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참전 기념비는 현재 동두천 자유 수호 공원에 있다.
다른 한 곳은 의정부로써 참전기념비가 있는 곳은 노르웨이 공원으로 명명되었다. 당시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한국은 비참했다. 전국민이 가난에 시달렸고 의료체계마저도 거의 붕괴했었다. 이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가난한 한국인들에게 서구의 일류 의료를 지원해주는 것은 고맙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노르웨이가 한국 국민들에게 베푼 의료 온정의 한 사례를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 이철호 씨인데 어린 나이에 너무 심한 부상을 당해서 노르웨이 야전 병원에서도 치료가 불가능했다.이 소년은 노르웨이로 보내져 시설 좋은 병원에서 여러번 수술을 받고 살아남았다.
노르웨이에 남게된 이철호씨는 노르웨이에 정착한 제 1호 한국인이 되었다. 그는 성장하면서 여러 일을 하다가 요리를 배워 요리사가 되었다. 그는 한국산 라면을 우연히 접하고 라면의 사업성에 눈을 떴다. 요리사였던 그는 노르웨이 사람들 입맛에 맞는 레시피를 개발해 이를 한국 라면회사에 생산 의뢰해서 만든 라면을 노르웨이에 판매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성공 사례는 노르웨이 교과서에 소개되어 있으며 ‘미스터 리’라는 브랜드의 라면은 노르웨이에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철호씨는 2018년 작고했는데 자기가 모은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여 칭송을 받았다.
국립의료원 내 스카디나비안하우스 건물. 60년대 한국에 파견된 북구의료진이 여가를 즐기던 클럽하우스 같은 곳으로, 60년대 제대로된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는 명물이었다함. 모교 60학번 선배이자 은사님이셨던 은퇴 교수님은 여기서 맞선을 보거나 데이트도 하셨다는 전언을 주심. 십년전까지 바이킹부페가 있었으나 현재는 커피전문점만 입주한 상태임. 국립의료원 뒤쪽으로 가면 도심 속 고즈넉한 분위기가 엿보임.
전쟁이 끝나고 1954년 10월 18일, 노르웨이 의료지원단은 한국을 떠났다. 그러나 이들 스칸디나비아 군의 의료 봉사와 그 기술을 체험한 한국은 당시 유엔 한국 부흥단[운크라]을 통해 이들의 지속된 한국 원조를 간곡히 요청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자금과 인원을 대서 1958년 서울 을지로 5가에 메디칼 센터를 건립했다. 그 당시에 아시아에서는 보기 드문 최신 설비의 병원이었다.
첨단 병원에 650명의 한국인 직원과 의사·간호사·행정직원 등에 북유럽 3국에서 파견된 의료 전문 인력 89명이 근무했다. 메디칼 센터는 아주 싼 진료비로써 가난한 서민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첨단 병원은 오늘날 세계 수준의 의료기술을 자랑하는 한국 의학의 한 디딤돌이 되었다. 메디칼 센터는 1950년부터 의대 졸업생을 받아서 인턴과 레지던트 코스를 받게 했었다. 1968년 메디칼 센터를 한국 정부에 인계하고 철수할 때까지 기술 높은 북구의 의사들과 간호사들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수많은 한국인 의료 전문 인력들을 배출하였다.
초창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미국의 미네소타 대학에 파견되어 미국의 선진 의료 기술을 전수받았었다. 일본의 그늘에 있던 한국의 의료 인재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유럽과 미국의 의료 기술에 접하게 되었는데 양쪽의 기술을 토대로 한 한국의 의료 기술은 현재 세계적 수준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이 경제 개발의 고속 질주를 할 때 한국과 노르웨이는 상당히 깊은 제휴와 교류를 했었다. 조선과 전자의 기술 교류도 있었다.
한국과 노르웨이를 더 가까워진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한국의 아픔을 노르웨이가 나누어 가져간 사실일 수가 있다. 인구 500만 수준의 노르웨이가 받아준 한국계 입양아가 6,000명이나 된다. 이들 중에 프랑스와 같이 미래의 노르웨이의 장관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원문 출처: https://blog.naver.com/mnd9090/221554223683(사진과 더불어 더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음)
참고.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65436#09T0
국립의료원 https://namu.wiki/w/%EA%B5%AD%EB%A6%BD%EC%A4%91%EC%95%99%EC%9D%98%EB%A3%8C%EC%9B%90
덧. 불과 수십 년 전 도움을 받던 국가가 이제는 도움을 주는 국가로 탈바꿈한 사실이 참 가슴 뭉클한 일임. 이런 사연을 활동시 현지인에게 꼭 전달하는 꼭지 중 하나임.
첫댓글 조선족은 포용해야 할 대상이면서도 가시가 너무 많아 내가 다칠수 있는 그런 존재인것 같습니다.
평생 살아오면서 정신교육받은건 어쩔수 없죠 우리도 어쩔수 없는게 얼마전 일왕 죽었을때 트와이스 일본인 멤버가 sns에 많이 아쉽다라고 했던가 그정도 올리니 벌때처럼 달려들어 비난하던일이 있었는데 똑같은거죠 일본인이면 상실감에 그정도 말할수 있고 그냥 그렇군아 하면 되는건데 이조차도 용납 못하는
그 노르웨이 라면왕 미스터리....2018년 작고하셧군요... 성공시대인가 ...엠비씨 다큐로 봣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