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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3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루카 6,39-42
사람을 뽑을 때 유일하게 보아야 하는 한 가지
오늘 복음도 원수까지 사랑하고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리더’가 자비롭지 못한 사람이라면 눈먼 인도자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인도자는 타인을 판단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횡포에 서민들이 들고일어난 운동입니다.
그러나 서민들이 정치할 때 더 무서웠다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그 공포정치(1793-1794) 동안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와 급진적인 자코뱅 같은 지도자들은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적들을 제거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혁명적 이상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화국에 위협이 되며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공공안전위원회는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며 반대 의견에 대한 그들의 해결책은 잔인했습니다.
그들의 통치 중 가장 악명 높은 도구 중 하나는 단두대였습니다.
그것은 종종 반혁명 활동에 대한 의심이나 모호한 비난을 바탕으로 수천 명의 사람을 처형하는 데 사용되는 테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약 16,000명이 공식 처형되었으며, 역사가들은 약 40,000명이 즉결 처형이나 기타 형태의 폭력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희생자 중에는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성직자, 심지어 한때 로베스피에르와 가까웠지만
온건한 접근을 제안한 자와 같은 전 혁명 동맹자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결점에 대한 이러한 무지의 비극적인 예는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 중에 일어났습니다.
혁명가들은 폭군에게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자신들의 행동에서 점점 커지는 폭정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왕의 눈에 있는 ‘티’를 제거했지만, 그들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러한 공포정치를 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로베스피에르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권변호사였고 사형폐지 운동을 벌였으나
자신이 권력을 잡게 되자, 그가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연설을 한 횟수는 11차례에
이르렀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직접 처형 명령서를 작성했고, 사형 집행을 지켜봤습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루이 16세가 사형된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맙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78회 ‘가족 앞에 서면 숨이 턱 막히는 아들’에게서는 내가 통제하고 지적하고
잔소리하면 상대가 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십니다.
아들조차도 엄마에게 “엄마는 항상 강압적, 지시적, 명령적이었어요, 항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아들도 어머니를 비난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금쪽이는 아빠, 할머니의 지나친 통제와 지적질에 숨이 막히고 그래서 가끔은 소변을 지리기도
합니다.
엄마가 이혼한 상태라 빈자리가 큰 금쪽이는 할머니와 아빠를 화해시키려 노력하다가 혼자 방에 들어와 숨죽여 웁니다.
타인을 심판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들보를 지닌 인간입니다.
하느님은 타인의 잘못을 감싸주는 인도자를 원하십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했지만 회개하고 변화한 사람의 심오한 성경적 예입니다. 처음에 젊은 왕이었던 다윗은 믿음과 의로움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밧세바와 간음을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투에서 죽게 함으로써 그의 능력은
그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다윗의 죄는 예언자 나탄에 의해 그에게 드러났습니다.
그의 이 죄는 그의 평생을 따라다녔습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의 기도에서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시편 51,5)라고 말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진정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지정한 교회의 수장이 되었을 때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부터입니다.
그는 닭이 울 때마다 자신도 배신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눈에서 들보가 빠져나가면 눈물이 납니다.
사람을 뽑을 때 유일하게 보아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자기 죄 때문에 끊임없이 울고 있는가!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3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 루카 6,39-42
저는 성전(聖戰)을 했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습니다!
이천 년 교회 역사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 강론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을 기억합니다.
시리아 안티오키아 출신인 그는 원래 은수자의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산으로 광야로 들어가서 6년간의 금욕과 수덕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기간 동안 요한은 얼마나 깊이 성경을 묵상했던지 신구약 전체 내용을 통째로 외울 정도였답니다.
광야에서 깊은 내공을 닦고 성덕의 정상으로 올라간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세상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다시 도시로 돌아옵니다.
요한의 출중함을 눈여겨 본 안티오키아 주교는 그에게 사제품을 수여하고 주교좌 대성당 주임 설교가로 임명합니다.
그 시점을 계기로 요한은 물 만난 고기처럼 사목자이자 명강론가로서의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의 설교는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시원하고 달콤했으며 강렬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요한의 강론이 얼마나 감동적이었으면 사람들은 혹시 사도 바오로가 다시 태어나신 것은 아닐까
의구심을 지닐 정도였습니다.
그의 강론을 듣는 청중들은 큰 감동을 받아 울고 흐느꼈으며 그 자리에서 회개를 하였습니다.
강의가 너무 은혜로워 기쁨에 찬 나머지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많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오늘 내 강론은 어떠한가?
말씀이 살아 있는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지?
말씀을 통해 교우들이 다시금 힘차게 세상을 살아갈 힘과 위로를 주고 있는지?
오히려 반대로 내 강론이 청중들을 분심으로 몰고가며, 분노와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한의 말년은 참으로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초대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영입되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 수난과 십자가 길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강직한 성격상 대도시 신자들의 나태함과 문란함을 간과하지 못했습니다.
사도 시대의 열렬한 신앙과 소박한 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단이 성행했고, 악습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엄격한 수도생활이 몸에 밴 요한은 탄식을 거듭하며 악폐를 개혁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주교관을 건립하는 대신 병원과 순례자 숙소를 지었습니다.
훈계할 일이 있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하게 훈계를 했습니다.
요한의 꼬장꼬장한 모습은 즉시 악습에 젖어 사는 사람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습니다.
동료 주교, 사제들조차도 요한을 향해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치다며 반감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과격함을 지적했습니다.
결국 황제와 황후의 심기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그는 주교좌 자리에서 추방되고 맙니다.
이리로 유배되었다가, 또 저리로 유배되고, 마침내 흑해 해안가 폰투스 코마나에 도착한 그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요한이 체포되어 주교좌 성당에서 쫓겨날 때 남긴 말입니다.
“저는 성전(聖戰)을 했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강론>
(2024. 9. 13. 금)(루카 6,39-42)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만’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39ㄴ-42).”
1)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태 23,16-17)”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마태 23,24).”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에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자들’을 아주 엄하게 단죄하셨습니다(루카 17,1-3).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지식을 자랑하다가 흔히 그렇게 잘못된 길로 갑니다.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지식을 전해 주는 일이 아니라 ‘삶’의 모범을 보이는 일입니다.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묵상하고,
온 삶으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직무를 받지 않았더라도, 모든 신앙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고(마태 5,13-16),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또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만일에 어떤 신앙인이, 또는 교회 전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그것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일이고,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뒤의 12장에 이런 경고 말씀이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2)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든지 아니든지 간에 모든 신앙인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만 충실하게 따라가야 하는 제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도 예수님보다 위에 설 수 없고, 예수님보다 앞에서 갈 수도 없습니다.
신학이나 성서학 박사 학위를 몇 개씩 가지고 있더라도...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3-17).”
3) ‘티’와 ‘들보’에 관한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씀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마태 18,15-16ㄱ).”
죄를 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를 때, ‘티’와 ‘들보’에 관한 말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시 형제의 죄는 ‘티’이고, 그 형제를 타이르고 있는 나의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은, ‘의인’인 내가 ‘죄인’인 그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이 아니라, 같은 죄인으로서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나의 눈 속에 티는 있어도 들보는 결코 없다.” 라고 아주 자신 있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 퍼센트 ‘교만한 위선자’입니다.
4)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라는 말씀은, 남의 죄를 꾸짖고 타이르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삶부터 회개하고 바로잡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자기반성과 회개만 하면서 남을 타이르는 일을 아예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잘못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멸망을 당하든지 말든지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고, 나에게는 내가 구원받는 일만이 중요할 뿐이다.” 라는 ‘사랑 없는 이기적인’ 생각도 역시 죄입니다.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형제의 티를 빼내는 일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