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에 관한 책이 있은 지가 옛날부터입니다. 황제(黃帝)는 들을 구획하여 나누었고, 당우(唐虞) 때에는 12주로 나누었으며, 하 나라 때에는〈우공(禹貢)〉이 있었고, 주 나라 때에는 직방(職方)이 있었으며, 진한(秦漢) 이후로는 각각 지(誌)와 도(圖)가 있었습니다. 송 나라 가희(嘉熙) 연간에 건안(建安)의 축목(祝穆)이 《방여승람(方輿勝覽)》을 편찬하여 사물의 중요한 것을 널리 채택하여 구절마다 각 주(州) 밑에 나누어 넣었으니, 그 문장이 칭찬할 만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송(南宋) 시대에 천지가 분열되어 남쪽과 북쪽을 다 차지하지 못한 탄식이 있었습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명 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문자와 궤도(軌道)가 통일되자, 《일통지(一統誌)》를 지어서 온 천하를 포괄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아, 훌륭합니다.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단군이 나라를 처음 세우고,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았는데 모두 평양(平壤)에 도읍하였고, 한 나라 때에는 사군(四郡)과 이부(二府)를 두었습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이 오이처럼 나뉘어져 마한(馬韓)은 54국을 통솔하고,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각각 12국을 통솔하였습니다. 그러나 상고할 만한 도적(圖籍)이 없고, 그 뒤로는 신라ㆍ고구려ㆍ백제 세 나라가 솥발처럼 나뉘어졌습니다. 신라의 땅은 동남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지리산, 북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렀으며, 고구려는 동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며, 서북으로는 요하(遼河)를 넘었습니다. 백제는 서남으로는 바다, 동으로는 지리산, 북으로는 한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삼국이 강토가 비등하여 서로 위가 되지 못하다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니 강토가 더욱 넓어졌으나, 그 말기에 이르러 영역이 날로 줄어들어 궁예(弓裔)는 철원(鐵原)에 웅거하여 후고려(後高麗)라 칭하고, 견훤(甄萱)은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칭하니, 강토가 갈기갈기 찢어져 통일되지 못하다가 고려 태조가 계림(鷄林)인 신라를 멸망시키고 압록강(鴨綠江)을 차지했던 후고려를 쳐서 삼한을 합쳐 통일하였습니다. 성종(成宗)이 비로소 열 개의 도(道)를 정하고, 현종(顯宗)이 3경(京)ㆍ4도호(都護)ㆍ8목(牧)을 정하고 56지주(知州)ㆍ28진장(鎭將)ㆍ20현령(縣令)을 두었습니다. 예종(睿宗)이 여진을 쳐서 쫓아내서, 9성(城)을 두고 뒤에 5도(道)ㆍ양계(兩界)로 정하였으니, 지리(地理)의 융성함이 이때가 최고였습니다. 다만 서북으로는 압록강, 동북으로는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으니, 서북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고 동북은 그보다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그 역대의 지지(地誌)는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대강 보이지만 자세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태조 강헌대왕이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시어 열성(列聖)이 서로 이으니, 강토가 날로 개척되어 8도(道)로 정하였으니, 사방의 복판에 있는 것을 경기라 하고, 서남은 충청, 동남은 경상, 남쪽에 치우친 것은 전라, 정동은 강원, 정서는 황해, 동북은 영안(永安.함경), 서북은 평안이라 하였습니다. 경(京)이 둘이고, 부(府)가 넷, 대도호부(大都護府)가 넷, 목(牧)이 20, 도호부가 44, 군(郡)이 83, 현(縣)이 173이니 안팎의 산하(山河)의 세로와 가로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우리 전하(성종)가 즉위하신 9년 무술(1478)년 봄 1월에 신 양성지(梁誠之)가 《팔도지지(八道地誌)》를 바치고, 신 등이 《동문선(東文選)》을 바쳤더니, 전하께서는 드디어 선성부원군 신 노사신, 우찬성 신 강희맹, 지중추부사 신 성임, 남원군(南原君) 신 양성지, 대사성 신 정효항(鄭孝恒), 참의 신 김자정, 승문원 판교 신 이숙함(李淑瑊), 좌통례(左通禮) 신 박숭질(朴崇質), 행 호군 신 박미(朴楣) 및 신 거정 등에게 명하여 시(詩)와 문(文)을 《지지(地誌)》에 넣게 하셨습니다. 신등이 공손히 엄하신 명을 받자와 사신(詞臣)을 가려서 거느리고 분과를 나누어 이루기를 구하여 위로는 관각(館閣)의 도서(圖書)로부터 아래로는 개인이 보관한 초고(草藁)까지 열람하지 않음이 없이 일체 나누어 넣었습니다. 연혁(沿革)을 먼저 쓴 것은 한 고을의 흥폐를 먼저 몰라서는 안 되기 때문이고, 풍속과 형승을 다음에 쓴 것은 풍속은 한 고을을 유지시키는 바이며, 형승은 사경(四境)을 공재(控帶)하는 바이므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경위(經緯)로 삼고, 높은 성과 큰 보루를 금포(襟抱)로 삼았습니다. 묘사(廟社)를 맨 먼저 기재한 것은 조종(祖宗)을 높이며 신기(神祇)를 존경해서이고, 다음에 궁실(宮室)을 쓴 것은 상하의 구분을 엄하게 하고, 위엄과 무거움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오부(五部)를 정해서 방리(坊里)를 구분하며, 여러 관청을 설치하여 모든 사무를 보는데, 능침(陵寢)은 조종의 길이 편안한 곳이며, 사(祠)와 단(壇)은 또 국가의 폐하지 못할 전례입니다. 학교를 일으키는 것은 일국의 인재를 교육하려는 것이고, 정문(旌門)을 세우는 것은 삼강(三綱)의 근본을 표창하려는 것입니다. 사찰(寺刹)은 역대로 거기에서 복을 빌었고, 사묘(祠墓)는 선현(先賢)을 사모하여 추숭(追崇)한 것입니다. 토산은 공부(貢賦)가 나오는 바이고, 창고는 공부를 저장하는 곳입니다. 누대(樓臺)는 때에 따라 놀며 사신(使臣)을 접대하는 것이고, 원우(院宇)는 여행객을 접대하고 도적을 금하는 것입니다. 관방(關防)을 웅장하게 한 것은 도적을 방비하기 위해서이고, 참(站)과 역(驛)을 벌여 놓은 것은 사명(使命)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인물(人物)은 과거의 어진 이를 기록한 것이고, 명환(名宦)은 장래에 잘하기를 권한 것입니다. 또 제영(題詠)을 마지막에 둔 것은 물상(物像)을 읊조리며 왕화(王化)를 노래하여 칭송함은 실로 시(詩)와 문(文)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도(京都)의 첫 머리에 총도(摠圖)를 기록하고, 각각 그 도(道)의 앞에 도(圖)를 붙여서 이 양경(兩京) 8도로 50권을 편찬하고 정서하여 바치나이다. 신등이 지금 세상에 살면서 역대의 사적을 모두 찾아야 하고, 서울에 거처하면서 사방의 먼 곳까지를 상고하자니, 이것은 들고 저것은 빠뜨리며 그릇된 것은 그대로 따르고 진실은 잃은 것을 어찌 면할 수 있사오리까? 그러하오나, 책을 펴서 그 일을 상고하고 도(圖)를 펼쳐 그 자취를 본다면 태산(泰山)에 오르거나 황하(黃河)의 근원을 끝까지 파고들 것 없이 8도의 지리가 마음과 눈에 환하여 문을 나가지 않고도 손바닥을 보듯이 분명히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한때의 선비들이 임금의 총명을 열어 넓히고 융성한 정치를 도울 뿐이겠습니까? 반드시 장차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 조종의 넓은 토지와 멀리까지 미친 왕화(王化)를 이어받아 길이 만세토록 지킬 것이 의심이 없습니다. 성화(成化) 17년 신축(1481)년 4월 하완(下浣)에 순성명량좌리공신 숭정대부 달성군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신 서거정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서문을 쓰나이다.
註: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서문은 이행(李荇)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