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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순국선열
독립유공자 공적서
유공자명. 이태원(李兌遠)
생년월일. 1925년 00월 00일
본적. 慶北 義城郡 丹相面 細村洞 35-7
독립운동당시 주소. 大邱市 鳳山洞 222番地
관리번호 8932
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운동계열. 학생운동 소속및 지위. 부관및 경기부장
공적개요.
경북 의성(義城)사람이다.
대구상업학교 재학중 1943년 4월경, 동교생 이상호(李相虎)・김상길(金相吉)・서상교(徐尙敎) 등이 앞서 조직했던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 활약하였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독립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통한 무력항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단원들은 우선 조직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힘을 쏟았다.
1943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 전원이 대구시 앞산인 비파산(琵琶山)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갖고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써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育成府) 아래 관방국(官房局)・체육국(體育局)・과학국(科學局) 등 3국을 두고 그밑에 10여 부(部)를 두어 조직을 체계화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부관 및 경기부장의 일을 맡았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비파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 각종체육회를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노력하였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에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도 학교에서 수업도중 다른 단원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후 그는 일경의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동년 10월 대구형무소로 옮겨졌으나 건강악화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234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9卷 786~789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13卷 836・842・844・845・846面
(애국지사 이태원 선생님은 현재 88세로 사단법인 한국독립유공자협회 감사님 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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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 제9권:학생독립운동사 제5편 1940년대의 학생민족운동 제1장 전시체제하의 학생결사운동 제1절 대구지방의 학생운동
2. 대구상업학교의 태극단(太極團)
(1) 대구상업학교 태극단의 배경
대구상업학교는 한·일 양국 학생이 공학하는 학교였다. 때문에 한·일 학생간에는 쉴새 없이 충돌사고가 일어나고 이럴 때마다 일본인 교사는 한국인 학생만을 탄압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었다. 이 같은 사태에 대하여 한국 학생의 대일감정은 격화되었고 그것은 마침내 항거정신으로 성장하였다. 그 중에서 구체적인 항거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제1차 항거
1929년 1월 중순 경, 1학년 2반의 정모 학생이 동급생인 일본인 학생으로 부터 발길에 차이고 난로에 부딪쳐 전치 3주를 요하는 화상과 두부파열상을 입혔다. 그러나 때린 당자는 반성하는 바가 없었다. 정운균(鄭雲均) 학생은 이에 분격하여 구타한 일본인 학생을 구타하니 일본인 체육교사 천구보(天久保)는 정운균을 무수히 난타하여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이같은 사태를 맞이하여 한국인 학생은 ① 체육교사를 파면시킬 것 ② 폭력을 행사한 일본인 학생은‘정’모군에 사과 시킬 것 ③ 정운균의 치료비를 학교에서 부담할 것 ④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동맹휴학에 들어간다. 등의 결의를 하고 표문철(表文哲)·이종출(李鍾出)·석희원(石熙元) 등이 학생 대표로 부영(富永) 교장을 만나 요구 했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어 이탈자 7명을 제외하고 일주일간의 맹휴를 단행하였다.
제2차 항거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에 호응하는 궐기 준비를 진행하였다. 2학년 유태룡(柳太龍)·이종출(李鍾出)·석희원(石熙元), 3학년 정학진(鄭學鎭)·이동우(李東雨)·권태섭(權泰燮) 등이 주동이 되어 1930년 2월 15일을 기하여 시위 운동을 추진 중, 발각되어 주동 학생들은 경찰로 연행되어 고문을 당한 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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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항거
1930년 6월 중순경, 3학년 1조 체육시간에 폭력을 행사한 일본인 천구보(天久保) 교사의 야만적인 처사에 항의하여 ① 해당 체육교사의 파면 ②한·일 학생 차별대우의 지양 등을 요구하고 학교당국과 맞섰다. 이 때의 주동학생도 광주학생운동 당시, 궐기 준비를 주도한 학생과 하복동(河福東)·하용만(河龍萬)·이만득(李晩得)·박희동(朴熙東) 등이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강당에서 한때 농성투쟁을 벌렸다.
제4차 항거
1931년 2월 중순경, 교내의 항일 학생운동에 번번히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오는 한국학생 몇명을 응징하기로 하였다. 학생의 저항계획이 몇 차례나 사전에 발각된 것은 사정을 잘 아는 밀고자의 소행이라 단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까지 학교 당국에 밀고되어 이종출·표문철 등이 경찰의 탄압을 받았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신학기 개학식이 끝난 뒤, 학생 운동에 비협조적이고 밀고자로 지목된 학생 11명을 학교 앞의 논바닥으로 끌고가서 철권(鐵券)세례를 가했다. 이 같은 사건으로 김계동(金啓東)·김동욱(金東旭)·이응정(李應貞)·이재송(李在宋)·정운균(鄭雲均)·석회원(石熙元)·유태룡(柳太龍)·권영달(權寧達)·이현택(李鉉澤) 등이 퇴학을 당하고 김재교(金再敎)는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이태형(李泰亨)의 일기장
4월 29일은 소위 일본 천황의 생일로서 천장절(天長節)이라 하였다. 1940년 4월 29일, 대구상업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이 태형은 아침 일찍 집을 나와 경축식장으로 나가는 길에 향교(鄕校)옆 언덕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사방에 보이는 것은 일장기(日章旗) 뿐이었다. 그는 너무나 민족적 울분에 넘친 나머지 식장으로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때의 느낌을 일기장에 옮겼다.
‘이 땅은 우리 땅인데 우리나라의 국기는 어디로 가 보이지 않고 왜 저 일장기만이 펄럭이며 휘날리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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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이태형이 그날 적은 일기의 요지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1주일에 한번씩 일기장을 검열하고 있었다. 이태형은 자기가 적은 일기 그대로 학교에 제출하였다.
이태형은 수재로 2학년 전체의 수석이었고 1조 급장으로 있었다. 그는 학교당국에 의해 사정없이 퇴학처분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반일운동을 펴던 중, 구속되었는데 태극단의 주모자로 복역중이던 이상호(李相虎)·김정진(金正鎭)과는 김천(金泉) 소년형무소에서 극적인 상면을 한바 있다.
(2) 태극단의 조직
대구상업학교에서의 태극단 조직은 이상과 같은 교내적 배경과 분위기를 바탕으로 출발하였다.
1942년 5월경부터 태극단 조직의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는데 그 주동 학생은 다음과 같다.
이상호(李相虎)-대구상업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앞에서 잠간 논급한 바와 같이 평소 반일 민족사상이 풍부하여 학교 출석과 성적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말없는 가운데 나름대로, 민족의식을 개발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제 교육당국의 눈에 벗어나서 낙제생이 되어 5학년에 진급하지 못하였다. 그는 당시 18세였다.
서상교(徐尙敎)-대구상업학교 5학년 학생으로서 가정 환경이 좋고 성적이 우수했거니와 특히 체육기능이 다양하였다. 그는 당시 18세였다.
김상길(金相吉)-대구상업학교 5학년 학생으로서 평소 민족 의식에 대한 취향이 왕성하고 성격이 우수하여 학우들간에 신망이 높았다. 그는 당시 17세였다.
위의 세 학생은 뜻을 함께하여 민족자결원칙에 따라서 조선의 자주독립과 전세계적인류의 영원한 평화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헌신한다는 대망 앞에 굳게 맹세하고 이것의 실천에 따른 투쟁방침과 계획 등을 다각도로 연구한 끝에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조직활동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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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① 단명(團名)을 태극단이라 하였다. 한편 약칭을 T·K·D로 정했다. 단명을 태극단이라고 제정한 이유는 구한말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태극기를 본딴 것이다.
② 강령은 조선민족의 이상적인 단결과 능률로서 당면 최대목표인 조선독립을 꾀하며, 또한 투쟁할 것이고 그 마지막 목적은 온 세계 인류의 영원한 평화, 자유, 평등을 실현하는데 있었다.
(3) 조직체계
조직에 있어서는 일반조직과 특수 조직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조직의 체계와 세칙은 다음과 같다.
(1) 일반 조직
[그림 독립운동사 제9권 784-01]
간부회의(幹部會議)
① 단(團)의 간부회의는 최고 결의기관으로 부장급 이상의 간부로서 구성한다.
② 간부회의에는 의장 1명, 부의장 1명, 서기관 2명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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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특수조직=건아대(健兒隊)
[그림 독립운동사 제9권 785-01]
이상 특수조직인 건아대(健兒隊)의 구성은 장차 준단원(準團員)이 될 민족사상이 왕성하며 의지와 실천력이 강할 것과 또한 책임감이 투철한 학생 가운데 엄선하기로 하였다.
위와 같이 태극단의 일반조직과 특수조직을 볼때 비록 어린 소년들의 구상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할 수 있는 미래상을 크게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태극단의 포섭공작과 결단(結團)
앞에서 적은 이상호(李相虎)·서상교·김상길등, 태극단의 기본 구성원들은 1942년부터‘우리 청소년들의 일본군 입대기피 및 침략전쟁에 대한 비협력으로 독립투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애국동포들에게 호소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외각지대에 살포하는등, 산발적인 활동을 계속해 오다가 이를 더 발전시켜 본격적인 동지포섭 활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포섭활동의 범위는 학교별, 지역별 조직과 세포를 조직한다는 구상 아래 우선 학교 단위로 상호간의 친목을 표방하고 접촉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방과후나 휴일을 이용하여 교내외 각종 운동행사와 산책시간에 체력을 단련하는 한편 학술연구토론을 하고 시국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가운데 상대방의 민족의식을 타진하여 동지로 포섭하는 방법을 취득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진행한 결과 가장 먼저 참여한 학생이 김정진(金正鎭[대구상업학교 5학년 18세]), 이준윤(李浚允[동교 5학년 18세]), 이원현(李元鉉[동교 4학년 17세), 윤삼룡(尹三龍[대구공업학교 2학년 17세]) 등이었다. 이들이 태극단에 흔쾌히 참여한 시기는 1943년 4월의 일이다. 뒤이어 계속 활동을 펴서 다음과 같은 학생을 동지로 포섭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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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李兌遠, 대구상업학교, 3학년 16세)
정광해(鄭光海, 동교 4학년, 16세)
정완진(鄭晥鎭, 동교 4학년, 16세)
최두환(崔斗煥, 경북중학교, 2학년 14세)
김광연(金廣淵, 대구상업학교, 5학년 18세)
황칠암(黃七岩, 동교 4학년 16세)
안광준(安光璿, 동교 4학년, 18세)
정병준(鄭炳準, 동교 4학년, 17세)
김정하(金井夏, 동교 4학년, 18세)
이상학(李相鶴, 동교 3학년, 17세)
하두영(河斗永, 동교 3학년, 16세)
이응락(李應洛, 동교 3학년, 17세)
김종우(金鍾宇, 동교 3학년, 17세)
노정열(盧定烈, 동교 2학년, 17세)
박상포(朴商包, 동교 1학년, 13세)
강기인(康基仁, 동교 1학년, 15세)
안창용(安昌鏞, 동교 1학년, 15세)
손문호(孫文鎬, 동교 1학년, 13세)
박규인(朴圭寅, 동교 1학년, 14세)
이상의 학생들을 준단원 및 건아대원으로 포섭하여 1943년 5월, 어느날 방과후에 대구상업학교 5학년 교실과 3학년 교실에서 일동이 모여 단장 이상호의 사회로 동지간의 유대강화와 심신단련을 내세우고 결단식(結團式)을 겸한 실질적인 전체회의를 개최하였다.
당일의 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5월 9일, 대구 앞산에 집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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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 부터는 교내외 활동 및 지도를 서상교 동지가 맡을 것이며 그의 지시를 받도록 하라는 문제
(3) 이상호의 사회에 이어 서상교가 사회를 맡아 5월 9일, 일동은 비파산(琵琶山) 부근에 있는 약수터로 모이라는 것과 단체행동을 취하지 말고 개별적으로 목적지에 오라는 지시를 했다.
당일 동지학생들은 약속한 장소에 모여 정식 결단식은 생략하고 등산으로 위장하는 한편 간부급들은 투쟁방안 등을 협의하였다. 비파산 약수터에서 약 10리 동쪽으로 가면 태극단 주동학생들이 비밀회합을 하던 곳이 있었고 그들은 그곳이 바로 용두산(龍頭山) 밑이었다. 당일 일행은 그 코스를 지나 각자 해산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뒤 결정된 간부진용은 다음과 같다.
단장 이상호, 관방국장 김상길, 비서장 김정진, 비서관 이원현, 부관 이태원 회계관 김정진, 체육국장 서상교, 무도부장 서상교, 군사부장 김상길, 경기부장 이태원, 등산부장 서상교, 씨름부장 서상교, 체육위원 윤삼룡, 과학국장 이준윤 항공부장 최두환.
그리고 정광해·정완진 두 동지를 정단원(正團員)으로 결정하였다.
(5) 태극단의 활동
중요간부의 부서를 정한 뒤, 태극단 구성원들은 대구 덕산동 이상호 집이나 용두산, 비파산, 학교 운동장, 교실 등의 장소를 이용하여 동지간의 유대의식을 강화하고 교양의 향상, 체력증강을 도모하면서 기본적인 목표인 민족자결의식의 체계화에 노력하였다. 이들은 중국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관한 서적을 윤독(輪讀)하고 기타 사회과학에 관한 연구와 토론을 폈다.
간부회의는 그들 궁극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고 소속 구성원들에게 이를 주지 시켰다.
(1) 군사학의 연구에 정진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군사 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에 관한 연구, 폭발물 제고에 관한 연구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2) 재정면에서는 미약하나마 위선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금품을 모두 출자하고 한편 애국적 유지와 선배를 상대로 후원을 호소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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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국선배들의 지도를 존중하고 전국의 학교와 지역별로 동지의 조직이 완성되면 여론을 환기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불가능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 망명을 하여 중국 정부의 군사후원을 받는다는 결의를 했다.
(6) 태극단의 발각과 수난
태극단이 발족한 이후, 구성원들도 그들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중, 배반자의 밀고로 말미암아 1943년 5월 23일, 단장 이상호가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한국인 경관도 끼어 있는 경찰은 체포한 이상호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여 빈사의 지경이 되도록 했으나 이상호는 조직내용과 동지의 명단을 자백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은 이상호의 집을 샅샅히 수색하던 중 이상호의 집, 천정 한쪽에 숨겨 두었던 태극단 관계문서가 발각되어 동년 5월 25일 수업중이던 김상길·서상교·김정진·이준윤·이원현·윤삼룡·정광해·이태원·정완진 등 9명이 체포되고 5월 27일 단원, 준단원 16명이 구속되니 태극단 구성원 26명은 모두 체포되었다(이중에서 16명은 동년 6월 20일경 석방되었다).
나머지 주동 학생 10명에 대하여 경찰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고 비인도적인 고문과 박해를 가했기 때문에 이준윤은 급성늑막염에 걸려 9월 30일 석방됐으나 10월 2일 태극단의 첫 희생자로 사망하고 말았다.
동년 10월 11일 대구 경찰서는 9명의 주동 학생을 대구 형무소로 옮겼다. 이 중에서 정광해·정완진·이태원은 동년 10월 중순, 출감하고 나머지 주동학생은 1944년 1월 10일 대구 지방법원에서‘일본제국의 국시를 반역한 국적(國賊)’이라는 노호 속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이 적용되어 다음과 같은 선고를 받았다.
성 명
검 사 구 형
선 고
이상호
단기 5년 이상, 장기 10년
단기 5년 이상, 장기 10년
서상교
단기 4년 이상, 장기 7년
단기 4년 이상, 장기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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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길
단기 4년 이상, 장기 7년
단기 5년 이상, 장기 7년
김정진
단기 1년 이상, 장기 3년
단기 3년 이상, 장기 3년
이원현
″
″
윤삼룡
″
″
이상과 같이 일제는 미성년자에 대한 최고 중형을 선고하였다.
1944년 4월 중순, 이상호·김정진은 김천소년형무소로, 서상교·김상길·이원현·윤삼룡은 인천소년형무소로 이감되어 옥살이를 했다. 이들은 전쟁말기의 형무소에서 영양실조는 물론 피부병, 심장병, 늑막염 등에 시달리고 지쳤다. 이원현은 고문으로인한 악성 늑막염으로 신음하다가 1945년 3월 10일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집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8·15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체 동년 음력 5월 5일 사망하여 태극단 제2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상호도 늑막염으로 사경에 이르러 1945년 2월 중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병석에서 8·15를 맞이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는 조국 광복의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동년 12월 9일 사망하니 태극단 세번째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12월 11일 덕산동 반월당(半月堂) 앞 광장에서 사회단체 대표, 시민, 대구시내 각 학교 대표들이 모여 못 다핀 애국 학생 이상호를 위한 사회장(社會葬)이 거행되었다.
한편 나머지 4명은 8월 16일 출감하여 해방된 조국의 품에 안겼다. 윤삼룡은 출감 이후 모교에 복교했으나 고문으로인한 옥고가 악화되어 1947년 7월 중순, 사망하였다.
1963년 3월 1일 정부는 이들의 애국 공적을 다음과 같이 표창하였다.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
이상호(李相虎, 순국)·서상교(徐尙敎)·김상길(金相吉)
건국 공로훈장 애족장
김정진(金正鎭)·이준윤(李浚允)·이원현(李元鉉, 순국)·윤삼룡(尹三龍, 순국)·이태원(李兌遠)·정광해(鄭光海)·정완진(鄭晥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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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단 관련자
김광연(金廣淵)·황칠암(黃七岩)·안광준(安光璿)·정병준(鄭炳準)·김정하(金井夏)·이상학(李相鶴)·하두영(河斗永)·이응락(李應洛)·김종우(金鍾宇)·노정열(盧定烈)·박상포(朴商包)·강기인(康基仁)·안창용(安昌鏞)·최두환(崔斗煥)·손문호(孫文鎬)·박규인(朴圭寅)
그리고 1969년 1월 20일 제41회 졸업식전에서 순국 열사 이상호(李相虎)·이준윤(李浚允)·이원현(李元鉉)에게 모교인 대구상업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증정하였고 한편 생존자인 김정진(金正鎭)·김상길(金相吉)·서상교(徐尙敎)에게도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여 나라와 겨레에 대한 공적을 빛나게 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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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자료집 13 : 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
대구상업학교 비밀결사(태극단)
1931년 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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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상업학교의 한인 학생들은 일인 학생과 충돌한 다음 7개조의 요구서를 제출하고 동맹휴교하다.
1. (삭제됨)
2. 폭행 학생의 수괴약림(若林) 전중(田中) 등 4명에게 퇴학 처분을 하여 줄 것.
3. 폭행을 수수방관한 고택(古澤)·명구보(明久保) 두 선생을 사면 혹은 전임의 처분을 하여 줄 일.
4. 입학 수리를 조선인 일본인이 각 반수로 하는 것을 철폐하고 시험성적 순서대로 할 일.
5. 조선인 선생을 더 채용하고 조선문(朝鮮文) 참고서와 이화학 재료 등을 더 비치할 일.
≪동아일보≫ 1931. 1. 28
무저항주의 본받아 독립운동
3 소년원 옥사
아동들에게까지 민족사상 고취
대구상고생들의 비밀결사‘태극단’
당시의 공판 청구서로 밝혀진 전모
10대 소년들로서 일제의 악랄한 탄압 정책에 못이겨 태극단(太極團)이란 비밀결사를 조직,‘간디’의 무저항주의를 본받아 한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모진 고문에 못이겨 옥사하거나 간신히 해방을 맞아 영어의 생활에서 풀려 나온 나이 어린 경북 대구(大邱)상업학교 학생들의 피어린 항일투쟁사가 새로 나타나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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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상업학교 학생 36명이 피검되어 그 중 6명이 장기 10년까지 징역 선고를 받고 김천(金泉)과 일천(仁川)소년형무소에서 복역했고 이들 중 3명이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늑막염으로 죽어 갔던 이‘태극단사건’은 일제 말기인 1943년에 발생했으나 당시 왜경은 이 사건을 극비에 부쳐 오늘날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모두들 17~18세의 중학생이 주동체가 되었고 국민학교 학생까지 단원으로 받아들여 민족 사상을 고취시켰던 이 사건은 최근 대구 지검에서 발견된 당시의 경찰조서와 공판청구서에 의해 비로소 그 전모가 밝혀졌다. 내각 사무처는 태극단사건의 주동자였던 이상호(李相虎 작고 당시 17세 대구상 4년), 김상길(金相吉·당시 17세), 서상교(당시 17세)씨 등 3명에게 오는 3·1절에 건국공로훈장인 단장(單章)을 수여키로 결정하였다.
태극단이 조직된 것은 태평양전쟁이 날로 치열해 가던 1942년 5월 당시 대구공립상업학교 4학년 재학생이었던 이상호(李相虎)·김상길(金相吉) 서상교 씨들은 1919년의 세계 약소 민족 해방운동과‘간디’의 무저항반제국주의운동에 자극받고 민족자결 원칙에 입각한 한국의 독립을 전취하기를 선언-태극단을 조직하고 단명, 강령, 조직 세칙을 만들어 투쟁 방법을 구체화시켰다.
이들은 1943년 4월에 이르러 단세(團勢)를 확장, 태극단의 조직을 일반조직과 특수 조직으로 나누고 단의 최고 의결 기관으로 간부회의까지 구성 군사학 연구를 실시하고 재정을 해결하기 위해 각자가 돈을 내기로 했다. 그리고 특수 조직인 건아대(健兒隊)에는 중학교 1,2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키고 일반 조직에는 관방국(官房局), 체육국(體育局), 과학국(科學局) 등의 부서를 두어 단원들에게 민족의식 고취와 학술 연구, 체력 향상 등을 위한 집회와 행사를 계속해 나갔다. 태극단은 정단원, 준단원, 건아대원으로 단원을 구분하여 비밀을 지키는 한편, 전국적인 조직 확대를 목표하여 우선 학교 단위의 동지 규합에 힘썼다. 이들은 한말부터 사용되어온 태극기를 상징하여 태극단이란 이름을 붙이고 태극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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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으로서 조선 독립을 도모하며 종국의 목적은 전세계 인류의 영원한 평화·자유·평등을 얻는데 있다고 밝히고 전국적인 학교 및 지역별 동지 조직이 완성되는 때에는 국내외에 여론을 환기함과 아울러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조직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만약 국내 투쟁이 불가능할 때에는 중국으로 망명, 중국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극단 활동은 1943년 5월 대구경찰××××……
서상교, 김정진(金正鎭), 이준윤(李浚允), 이원현(李元鉉), 윤삼룡(尹三龍), 정광해(鄭光海), 이태원(李兌遠), 정완진(鄭晥鎭) 등 9씨가 체포되었으며 3차로 정당원 및 준단원 26명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 주모자 이상호(李相虎) 씨를 비롯한 6씨는 1944년 1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대 일본제국(?)의 국시에 위반한 국적(國賊)이라는 이유로 2년 내지 10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고 김천과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은 어린 태극단원 이준원, 이원현(李元鉉·17세 당시 4년), 이상호(李相虎·17세) 씨 등 3명을 늑막염에 몰아 넣어 형기를 끝내지 못하고 죽게 했다.
이준원씨는 경찰 문초 중에 죽고, 이원현(李元鉉), 이상호(李相虎) 양씨는 병보석되었다가 바로 사망했으며, 나머지 사람은 해방으로 석방되었다. 태극단 주모자 6씨에 대한 선고 형량은,
△ 이상호(李相虎·17세 대구상 4년)=단기 5년 이상 장기 10년
△ 김정진(金正鎭·18세 대구상 5년)=단기 5년 이상 장기 8년
△ 김상길(金相吉·17세 대구상 5년)=단기 5년 이상 장기 7년
△ 서상교(19세)=단기 5년 이상 장기 7년
△ 이원현(李元鉉·17세 대구상 4년)=단기 2년 이상 장기 3년
△ 윤삼룡(尹三龍· 18 대구상 2년)=단기 2년 이상 장기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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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단 조직표 일반조직
이상호(李相虎) 단장
관방국
체육국
과학국
비서관
부관
회계관
(會計官)
무도관
(武道官)
군사부
경기부
등산부
씨름부
박물부
(博物部)
이화부
(理化部)
항공부
특수조직
건아대(健兒隊)
단장→간부(幹部)→간부보→건아장(健兒長)→건아(健兒)
정단원(正團員) 준단원(準團員) (중학2년 이상) (중1·2년 및 국교상급생) (중1·2년 및 국교상급생)
≪경향신문≫ 1963. 2. 27.
1. 개요
우리나라 숙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불법적인 침략을 받아 식민지로써 통치를 받고 있던 당시 서기 1942년 5월부터 대구에서 움이 튼 대구공립상업학교 재학생을 중심으로 한 구국항일투쟁 비밀결사 태극단은 10대 소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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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서기 1943년 5월에 왜경에게 잡혀 갖은 야만적인 고문과 극형 즉, 그 당시 미성년자에 대한 최고 형량인 단기 5년 이상 장기 10년 등 무도(無道)한 선고로 흑심한 감옥살이 끝에 안타깝게도 4사람이나 고귀한 희생을 당한 일제 말기에 있는 우리 민족의 진통과 수난의 한 토막 소사를 초록(抄錄)하여 후세에 자(資)하고자 한다.
2. 동기
우리 조국이 세계의 평화와 자유의 원수인 일제에 의해 노예적 식민지로써 그들의 통치를 받고 있을 무렵, 우리 금수 강산 위에 있은 일제의 갖가지 야만에 대하여 이를 규탄하며 항거하는 나라 안팎의 유명 무명의 수십만 애국 동포들의 의거에 대하여 그들은 무자비하게도 대량 학살과 혹은 투옥을 일삼았다. 이로써 인적, 물적으로 그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앞서 숨진 선열(先烈)의 뒤를 잇고 또 쫓아 왜적의 배척과 조국 광복의 성업에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기를 그칠줄 모르던 중에 더우기 세계2차대전 당시에 있어서는 악마와 같이 그들이 그 본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밖에 들어내니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부르짖고 우리의 얼을 말살하며 말과 글을 없애는가 하면 창씨-우리성을 없애고 그들 성으로 바꿈-를 강요하며, 우리 식량을 제 나라로 빼앗아가고 만주산의 잡곡으로 겨우 연명케 하며 또한 청소년은 모조리 소위 대동아공영권건설(大東亞共榮圈建設)이란 미명 아래 강제로 징용, 징병을 해가고 우리 학도들의 향학을 억제하며 또 일본인 학생과 공학하는 곳에서는 수업에 이르기까지 차별하며,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불평과 불만을 겉으로 나타낼 때는 ‘후대이센징(不逞鮮人)’-건방지고 못난 조선 놈의 새끼-이라 하여 잠시라도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없게 하는 등, 우리나라와 겨레에 미치는 갖가지 죄악을 저질러 끝내는 비분에 쌓인 우리 민족의 거족적 반항과 우방 각국의 협조로써 그들은 준엄한 역사적인 심판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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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大戰)이 장기화함으로써 나라 안팎의 징묘(微妙) 야릇한 정세변화와 피압박 약소 민족들의 민족자결운동의 움직임 속에서 특히 그들은 인도의 민족주의자인 영웅 간디 옹의 무저항반제국주의 사상과 중국의 중산(中山) 손문 선생의 삼민주의 사상에 의한 구국투쟁 등을 계속 주시하며 이를 본받아 항일 구국 투쟁을 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3. 결사
이렇게 격동하는 세계의 정세에 따라 민족적 자아 의식이 구국대업(救國大業)의 때가 시급(時急)함을 자각하여 오던 중 서기 1942년 5월부터 태동한 태극단 결사의 기운(氣運)은 마침내 다음 해에 들면서 이상호(李相虎)-당시 대구상업학교 4학년 재학 17세에 사상을 의심받아 조행(操行)이 나쁘다는 이유로 낙제생이 됨-를 중심으로 서상교(徐尙敎) 대구상업 5학년 재학 18세, 김상길(金相吉) 대구상업 5학년 재학 17세의, 세 사람이 뜻을 모아 민족 자결 원칙에 따른 조선의 자주 독립과 온 세계 인류의 영원한 평화와 자유를 쟁취한다는 대의(大義) 앞에 죽음을 맹세하고 이에 따른 투쟁 방침과 계획 등을 여러모로 연구한 끝에 단명(團名)·강령·조직·세칙 등을 다음과 같이 제정하고 앞으로의 항일 투쟁 방법을 구체화 하였다.
(1) 단명(團名) : 태극단(太極團)이라 제정함. 혹은 T.K.D 제정의 유래는 구한국 말엽부터 사용되어 온 우리나라의 상징인 태극기를 본따서 단명을 태극단이라 제정한다.
(2) 강령 : 태극단은 조선 민족의 이상적인 단결과 능률로써 당면 최대 목표인 조선독립을 꾀하며, 또한 투쟁할 것이며 그 마지막 목적은 온 세계 인류의 영원한 평화, 자유, 평등을 찾는 데 있다.
(3) 조직과 세칙 : 조직에 있어서는 일반 조직과 특수 조직으로 구분한다. 그 조직의 체계와 세칙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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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체계
(ㄱ) 일반조직〓정단원(正團員) 단장
육성부(育成府)
관방국
비서관-기획, 법안, 인사, 상벌, 일반 서무
부 관-질서, 경호, 정보, 선전
회계관-예산, 심사, 경제, 회계
체육국
무도부
군사부
경기부
등산부
씨름부
과학국
박물부
이화부
항공부
간부회의……① 단의 간부회의는 최고 의결기관으로 부장급 이상의 간부로서 구성한다.
② 간부회의에는 의장 1명, 부의장 1명, 서기관 2명을 둔다.
(ㄴ) 특수조직〓건아대(健兒隊)
건아(健兒)
단장(團長)
간부(幹部)
간부보(幹部補)
건아장(健兒長)
건아(健兒)
건아(健兒)
정단원(正團員)
준단원(準團員)
중학2학년생 이상
중학1.2년 또는 국교상급생
건아(健兒)
이 조직의 구성은 장차 준단원(準團員)이 될 민족사상이 튼튼하며 의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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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력이 강할 것과 또한 맡은 바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사람 가운데서 엄선(嚴選)된 사람이라야 한다.
조직 세칙
1. 단장……일반 사무와 단원의 연성(鍊成) 활동의 중핵으로서 단을 통솔하며 단의 지상 목표인 조선독립을 한시 바삐 이룩하도록 단의 모든 것을 지도한다.
2. 육성부(育成府)……단원 전체의 연성(鍊成)의 정신적 원천이며 능숙한 방법으로 전 단원의 교룡적(蛟龍的) 연성계획(鍊成計劃) 밑에서 연성(鍊成)의 강화를 꾀하며 부(府)에 부감(府監)을 두고 그 밑에 참모 몇 명을 둔다.
3. 관방국(官房局)……단의 안팍 일반 사무 및 활동의 중핵체로써 기획 법안, 인사, 상벌, 질서, 경호, 정보, 선전, 예산, 심사, 경제 등을 담당하며 비서관은 기획, 법안, 임명, 상벌 등 일반 사무를 맡고 부관은 부관대장이 이를 지휘하여 질서, 경호, 정보, 선전 등을 담당한다.
4. 체육국……전 단원의 연성(鍊成) 활동 가운데 체육부문을 담당하며 여기에 무도부, 조사부, 경기부, 등산부, 씨름부의 5부를 둠. 국에는 국장을 두며 위원 몇 명을 둔다(약(略)해도 좋음). 국장은 연성활동(鍊成活動)의 제일선에 서서 단원을 지도 감독하며 위원은 국장을 보좌하고 그 상의(相議) 역할을 한다.
5. 과학국……단원의 연성활동 가운데 과학부문을 담당하며 박물부, 이화부, 항공부의 3부를 둠. 국에는 국장을 두며 위원 몇 명을 둔다.(약해도 좋음)
국장은 과학 부문의 연성(鍊成)을 지도 감독하며, 위원은 국장을 보좌하고 그 상의 역할을 한다.
부장은 각부에 1명씩 둠.
부장 밑에는 각부 전문위원 몇 명을 두고 부장은 다달의 계획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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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서(예산 관계도 넣음) 국장에게 제출하며, 부원 연성(鍊成)에 있어서 절대적인 의무와 감독을 한다.
6. 간부회의……부장급 이상의 간부들로서 구성하며 단의 중요 사두를 논의하며 결정하는 최고 결의기관임. 회의에는 의장, 부의장 각 한 사람씩과 서기관 두 사람과 위원으로 구성한다.
4. 공작(工作)
1942년부터 이상호(李相虎)를 중심으로 몇몇 동지들이‘우리 청소년들의 일제 군대 입대 기피 및 그들 전쟁에 대한 비협력으로써 독립투쟁에 적극 참가할 것’을 애국 동포에 호소하는 유인물을 외곽지대에 발포하는 등등 점선 조직으로 산발적인 소강상태(小康狀態)를 계속해 오다가 그후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학교별, 지역별 조직과 세포를 이룩하기 위하여 초기에 있어서는 학교를 단위로 상호간의 친목 도모를 위주로 하여 각자가 개별적으로 또는 2~3명씩 방과 후 혹은 휴일을 이용하여 학교 안팎의 각종 운동 행사와 산책 시간에 체력 향상을 꾀하며, 학술 연구 토론을 하면서 서로가 문학과 시국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는 중에 상대의 조국 의식을 타진하고 앞으로의 포섭 여부를 동지간에 의논하여 결정하던 중 1943년 4월에 김정진(金正鎭·대구상업 5학년 재학 18세), 이준윤(李浚允·동교 5학년 재학 18세), 이원현(李元鉉·동교 4학년 재학 17세), 윤삼룡(尹三龍·대구공업학교 2학년 재학 17세) 4명이 이에 동조 합류하였고, 이어 동지들의 굳은 신념과 눈물겨운 활동으로 이태원(李兌遠·대구상업 3학년 재학16세), 정광해(鄭光海·동교 4학년 재학 16세), 정완진(鄭晥鎭·동교 4학년 재학 16세) 3명이 용약(勇躍) 참가하고 뒤이어 최두환(崔斗煥·경북중학교 2학년 재학 14세), 김광연(金廣淵·대구상업 5학년재학 18세), 황칠암(黃七岩·동교 4학년 재학 16세), 안광준(安光璿·동교 4학년 재학 18세), 정병준(鄭炳準·동교 4학년 재학 17세), 김정하(金井夏·동교 4학년 재학 18세), 이상학(李相鶴·동교3학년 재학 17세), 하두영(河斗永·동교 3학년 재학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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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낙(李應洛·동교 3학년 재학 17세), 김종우(金鍾宇·동교 3학년 재학 17세), 노정렬(盧定烈·동교 2학년 재학 17세), 박상포(朴商包·동교 1학년 재학 13세), 강기인(康基仁·동교 1학년 재학 15세), 안창호(安昌鎬·동교 1학년 재학 13세), 손문호(孫文鎬·동교 1학년 재학 14세), 박규인(朴圭寅·동교 1학년 재학 14세)의 준단원 및 건아대(健兒隊)들이 조직됨으로써 5월에 접어들면서 대구상업학교 5학년 교실과 3학년 교실에서 방과 후의 시간을 정하고 일동이 회합하여 단장 이상호(李相虎)의 사회로 동지간의 유대 강화와 명목상의 심신 단련을 위한……그 실(實)에 있어서는 결단식을 위한 전체회의를 하게 되었다.
당일 의제로서
1. 일시는 5월 9일 행선지는 대구 앞산……비파산으로 결정한다.
2. 다음부터는 교내외 활동 및 지도를 서상교 동지가 맡게 되니 그 지시에 따르도록 일동에게 알리고 이상호(李相虎)가 참석한 다음
3. 서상교(徐尙敎)의 사회로서 5월 9일 행사에 대한 물품 등 제반 준비와 행군의 외부 누설됨이 없도록 각자가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행군에 따른 분대 편성은 각 대오가 분개행진(分開行進)하여 단체 행동이 아님을 위장하여 목적지에 정시 집합할 것 등을 결정한 다음 산회하였다. 결의에 따라서 5월 9일 비파산 약수터 부근에 모여 감격된 마음으로 결단식 행사의 형식을 약(略)하고 간부 동지들은 앞으로의 제반 투쟁 방안 등을 상론(相論)하고 점심밥을 지어 먹은 다음 산정을 따라서 약 10리 동진(東進) 끝에 주모 간부들의 평소 비밀집회 장소였고 또한 태극단의 단명·강령·조직 등을 결정지었던 연고지인 용두산록(龍頭山麓)을 지나서 산을 내려 해산하고 각자 귀가하였다.
그 동안 일차적인 결정으로 다음과 같이 인사 임명을 하였다.
단장 이상호(李相虎)
관방장 김상길(金相吉)
비서장 김정진(金正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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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관 이원현(李元鉉)
부관 이태원(李兌遠)
회계관 김정진(金正鎭)
체육국장 서상교(徐尙敎)
무도부장 서상교(徐尙敎)
군사부장 김상길(金相吉)
경기부장 이태원(李兌遠)
등산부장 서상교(徐尙敎)
씨름부장 서상교(徐尙敎)
체육위원 윤삼룡(尹三龍)
과학국장 이준윤(李浚允)
항공부장 최두환(崔斗煥)
기타 정단원으로 정광해(鄭光海), 정완진(鄭晥鎭) 두 사람을 결정하였다. 그동안 덕산동(德山洞) 이상호(李相虎) 집에서 혹은 동지들의 집과 용두산(龍頭山) 비파산(琵琶山) 학교 운동장 또는 교실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동지들 사이의 유대 결합과 교양 학술, 체력 향상의 연구와 더불어 기회를 보아 가며 틈틈이 근본적인 민족 자결 의식의 이론 체계화와 특히 정치와 경제면에 있어서는 조국의 완전한 자주 독립 해방을 위한 토론 등을 거듭하면서 간부회의의 결의 사항을 점차 실천에 옮기도록 공작 활동을 발전시켰다.
간부회의의 결의 사항은 앞으로의 완전한 활동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1. 군사학의 연구를 보다 더 힘써 하고(군사 관계 서적의 번역 및 글라이더에 관한 연구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 등)
2. 재정면에 있어서 미약하나마 위선 각자의 지분재산(持分財産) 전부를 출물(出物)하고 또한 여러 곳의 애국 유지 선배님들에게 호소하여 후원을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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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국선배들의 지도를 존중히 받으며 전국의 학교와 지역별로 동지의 조직이 완성될 때는 나라 안팎에 여론을 환기함과 아울러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한다. 만약 국내 투쟁이 불가능할 때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 정부의 군사 후원을 받도록 적극 기도한다.
5. 피체(被逮)와 판결(判決)
조국 광복을 위해 희생이 된 태극단은 발의 후(發議後) 일경에게 구금을 당할 때까지 그간 공작을 비밀리에 진행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배반자의 밀고로 서기 1943년 5월 23일 이상호(李相虎)가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피체(被逮)되었는데 그날부터 여러 놈이 덤벼들어 주먹질은 물론 구두 발로 차고 몽둥이로 개를 잡듯 두들겨 온몸이 찢겨 피투성이가 되고 걸음도 제대로 못걷고 겨우 기어서 움직일 수 있는 빈사(頻死) 상태로 취조실에 끌려다니면서도 그는 앞일의 중단을 염려하여 끝내 함구 부인했으나 한편으로는 형사들이 매일 같이 이상호(李相虎) 집 안팎의 기물, 책방, 다락, 마루 밑 등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진 끝에 천정(天井) 한쪽에 숨겨 두었던 관계 문서가 탄로(綻露)되어 5월 25일에는 학교에서 수업 중이던 김상길(金相吉), 서상교(徐尙敎), 김정진(金正鎭), 이준윤(李浚允), 이원현(李元鉉), 윤삼룡(尹三龍), 정광해(鄭光海), 이태원(李兌遠), 정완진(鄭晥鎭) 9명이 피체되고, 5월 27일에는 여타(餘他) 단원과 준단원 6명이 다시 피체되니 이로써 태극단 전원 26명이 한 사람 남김 없이 연행되었던 것이다(그 중 27일 구금된 16명은 6월 20일경에야 석방되어 귀가하고).
주모한 10명에 대하여 조사가 계속되던 중 9월 30일에 동지 이준윤(李浚允)이 그간 왜경의 모진 고문과 악취 가득한 비좁고 어두운 마루바닥 감방 속에서 장기 구금과 콩깨묵 해초 등을 주식으로 하는 비위생적인 급식으로 겨우 연명하니 영양실조는 물론 그들의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처우로 극도로 쇠약한 끝에 구타 등 고문이 원인이 되어 급성늑막염이 발병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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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死境)에 이르자 경찰서에서는 병가보석(病假保釋)으로 출감시켰으나 출감 3일만인 10월 2일에 비통하게도 태극단 첫번째 희생자로써 운명(殞命)하였다(본적지는 경북 영덕군 영덕면 화개리 179번지) 모(母)명은 손봉숙(孫鳳淑), 형 명은 이준용(李浚用), 매(妹)씨 명은 이정자(李貞子), 이정희(李貞熙).
10월 11일 대구경찰서에 남은 9명이 대구형무소에 보행으로 이감(移監)되었다. 모두가 포승줄로 줄줄이 묶인 채 맑고 드높은 가을 하늘 아래 조국의 대지를 밟고 눈부신 태양과 독립의 그날을 바라 보며 타국 아닌 조국의 죄수라는 신분으로 창백한 얼굴과 비틀어진 몸과 허적이는 수족(手足)을 가다듬으면서 팔목에 또 허리에 채인 수갑과 포승줄에 의지하는 10대 애국지사들이 반년만에 서로 맞이하는 장면이야말로 그 감개 비분충천(悲憤冲天) 그대로였으리라……
이런 경황 속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한 걸음 또 한 걸음 옮겨 가며 호송 경찰관의 눈길을 피하여 어떠한 역경에서도 끝까지 불굴의 투쟁을 서로 다짐하고 태극단 앞일의 중대성과 활동 재개의 조급함을 밀론(密論)끝에 앞으로의 법정투쟁 방법으로써― 모든 일이 이상호(李相虎) 단독의 소행이요, 계획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일을 꾸며 나가기로 하였으나,
〔정광해(鄭光海), 이태원(李兌遠), 정완진(鄭晥鎭)은 10월 중순에 건강악화로 출감하다〕
다음 해인 1944년 1월 10일 대구지방법원 제3법정에서 열린 첫 공판과 동월(同月) 19일에 있은 선고 공판에서 일본인 판검사는‘일본제국의 국시 반역한 국적’이라고 노호(怒號)하면서 치안유지법 위반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구형과 선고를 내렸다.
피고인 성명
검사 구형
판사 선고
이상호
(李相虎)
단기 5년 이상
장기 10년
단기 5년 이상
장기 10년
서상교
(徐尙敎)
단기 4년 이상
장기 7년
단기 5년 이상
장기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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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길
(金相吉)
단기 4년 이상
장기 7년
단기 5년 이상
장기 7년
김정진
(金正鎭)
단기 1년 이상
장기 3년
단기 2년 이상
장기 7년
이원현
(李元鉉)
단기 1년 이상
장기 3년
단기 2년 이상
장기 3년
윤삼룡
(尹三龍)
단기 1년 이상
장기 3년
단기 2년 이상
장기 3년
이와 같은 형량은 그 당시에 미성년자에 대한 최고 중형으로 단기 5년 이상 장기 10년형이면 성인에 대한 사형에 해당되며, 단기 5년 이상 장기 11년이면 성인의 무기 징역에 해당되며, 단기 2년 이상 장기 3년이면 성인의 징역 10년 이상의 유기 징역과 같은 형량이었다. 선고를 받은 이상호(李相虎)·김정진(金正鎭)은 김천소년형무소로 서상교(徐尙敎)·김상길(金相吉)·이원현(李元鉉)·윤삼룡(尹三龍) 4명은 인천소년형무소로 동년 4월 중순에 각각 이감되어 모진 옥고를 겪는 중 영양실조는 물론 심한 피부병, 심장병, 늑막염 등에 걸리더니 그 중에서도 이원현(李元鉉)이 또 다시 악성 늑막염으로 신음하기 시작하여 병세가 위독하던 1945년 3월 30일 겨우 병가보석이 되어 자기 집에서 요양을 했으나 백방의 치료도 효과 없이 멀지 않은 조국 광복도 못 본 채 음력 5월 5일 원통하게도 태극단 두 번째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유족…부 이병삼(李秉三), 모 이숙이(李淑伊), 제 이우현(李祐鉉) 자매 3명)
그리고 이상호(李相虎)도 같은 늑막염과 병발중환(病發重患)으로 사경(死境)에 이르러 1945년 2월 중순에 병가보석으로 출감 자택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는 8·15 해방을 맞자 한 없는 감격에 눈물 지우며 병상을 찾는 동지들에게 여지껏 조국을 등지고 배반했던 자들이 애국자인척하고 해방된 거리를 쏘다니니 조국의 앞일이 한심스럽다는 심회를 말하며 한시 빨리 회복을 바라고 있었으나 광복된 조국의 따뜻한 간호도 못받은 채 하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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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동년 12월 9일 세 번째 희생자로 순명하고 말았다. 이 비보가 일반에게 알려지자 그 비통한 지사의 죽음을 조위(吊慰)코자 장일인 12월 11일 고인의 집 앞인 대구시 덕산동 반월당(半月堂) 앞 광장에서는 사회 단체 대표는 물론 시내 전학교 대표들과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사회장(社會葬)을 치르게 됐다.
영결 당일의 상세한 보도가 12월 12일 ≪대구시보≫1면에 게재되고 기타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다. 이날 수많은 각계의 조사 중 당시 경북교육협회장 이규원(李圭元)씨, 도학무과장 이효상(李孝祥)씨, 조선 유학생 동맹 대표, 김정진(金正鎭) 동지 등 많은 조사가 유족에게 소장되어 있음[유족 제 이상기(李相麒), 상린(相麟), 익조(益助), 상준(相駿), 상곤(相坤)부 이권수(李權洙)]
반면에 그대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해 온 감옥 안의 나머지 4명은 조국 강산에 광명의 해방이 도래(到來)하자 8월 16일 쇠사슬에서 풀려 나왔다.
한편, 윤삼룡(尹三龍)은 8·15 출옥 후 모교였던 대구공립상업학교에 복교하여 학업을 계속하던 중 역시 그동안의 옥고가 원인이 되어 1947년 7월 중순에 늑막염으로 유명(幽明)을 달리하고 말았다.[피검당시 주소는 봉산동 162번지 그후에 이전 주소는 대봉동 583번지(유족―부 윤길수(尹吉秀), 모 선이(先伊)]. 본 기록은 당시의 조직면의 특수성과 인적 사항 및 투쟁 사항 등에 대하여 이미 30년이 흘러간 오늘 두서 없이 기억을 더듬어 또한 당시의 공판 기록을 참조하여 태극단 독립운동 의거의 시말을 약술한 것이며 빠진 것과 불비한 점은 후일 다시 기회 있는 대로 추록(追錄)코자 한다.
첫댓글 스크랩하고픈데... 허락이 안되나요?
땅엔터선생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카페에서 하세요
드래그 안되는 건 ㅅㅅㅅ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