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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발(啓發)
지식과 지혜를 깨우쳐 열어 준다는 뜻으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재능과 인성(人性)등을 깨우쳐 주거나 열어 준다는 말이다.
啓 : 열 계(口/8)
發 : 필 발(癶/7)
출전 : 논어(論語) 술이(述而)第七 8장
이 성어는 논어(論語) 술이(述而)第七 8장에 나오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했다. “분발하지 않으면 일깨워 주지 않고,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일깨워 주지 않으며, 한 귀퉁이를 들어 가르쳐 주었는데도 세 귀퉁이를 미루어 알지 못하면 되풀이하지 않는다.”
子曰 : 不憤不啟, 不悱不發, 舉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배우려는 사람이 깨우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서둘러 알려 주지 말고, 하나를 일러 주었는데도 나머지 셋을 미루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되풀이해서 가르쳐 주어도 소용이 없으므로, 스스로 알아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뜻이다.
공자(孔子)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스스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알려 주지 않았다. 공자의 이런 교육 방법은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기보다는 제자들이 스스로 알아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법이었다. 공자는 제자의 수준에 맞는 교육을 시켰으며, 특히 스스로 깨닫게 하는 교육을 시켰다.
불분불계 불비불발(不憤不啓, 不悱不發)에서 ‘계발’이 나왔는데, ‘분(憤)’은 마음으로 알아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애태운다는 뜻이며, ‘비(悱)’는 입으로 말하려고 해도 표현이 잘 안 된다는 뜻이다. 계(啓)는 그 뜻을 열어 주는 것이고, 발(發)은 그 말을 열어 주는 것이다. 우(隅)는 모퉁이, 반(反)은 되새겨 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 모퉁이만 알려 주면 나머지 세 모퉁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계발(啓發)
재능이나 사상, 지혜와 지식을 깨우쳐 열어주다
스스로 알고자하는 뜻을 열어주고 지식(知識)과 지혜(智慧)를 넓혀주며 사물의 이치를 밝게 해주고자하는 참 교육을 말한다. 논어(論語) 술이편에 "분발하지 않으면 계발해 주지 않고 표현하지 못해 더듬거리지 않으면 밝혀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즉,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깨우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알려주지 말고, 하나를 알려주었을 때 나머지 셋을 미루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되풀이해서 가르쳐 준들 소용이 없으며, 스스로 체득(體得)하여 알아 낼 때 까지 기다리는 교육 방법이 가장 좋다는 이야기다.
공자의 가르침은 요즘 말하는 '자기 주도 학습'과 일맥상통하는 교육 방법을 시행하려고 했던 것이다. 현대의 유태인 교육 방식이 이와 유사한 토론방식 교육이다. 문제를 풀면서 해답을 보지 않고 그 문제 해결능력을 완전히 알고 난 뒤에 해답으로 확인 하는 방식이다.
해답을 먼저 보면서 문제를 풀면 그때는 쉽게 처리할 수 있으나 비슷한 문제를 변형해서 내면 이 사람은 그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지 못한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식이 공자의 교육 방법이었다. 이런 방식의 교육을 계발(啓發)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사교육을 실시한 인물이다. 공자 아카데미를 세워 약 3천명의 제자를 배출했고, 그 중에는 학장 급 되는 명철한 제자가 10명, 일반 교수 급 되는 제자가70여명 배출된 최고의 학문 기관이었다. 제자들의 나이층도 다양하고 부자(父子)가 함께 제자인 경우도 여럿 있으며, 대부분 신흥 선비계급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는 귀족 계급이 대세였지만 공자는 인격 도야(陶冶)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신분을 따지지 않은 선진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그의 교육 형태는 학숙(學塾)을 하면서 공부한 것으로 보여 진다.
논어에서 공자와 제자 간에 진솔한 대화 장면이 자주 나오며 제자들 상호간에 대화도 여러 번 나온다. 그리고 같은 질문을 하더라도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대답을 다르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제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할 수 있다. 처지를 잘 알지 못하면 그런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이른바 토론 학습이었다고 볼 수 있다. 토론하다가 부족하고 더 알고 싶으면 선생님께 질문하고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진행하므로 공자 자신은 학습교제나 마찬가지로 만인의 스승이 될 수 있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계발도 이때 만들어진 공자의 교육 방법에서 유래 되었다. 공자는 자신의 교육 방법은 자발성을 기대한다고 말하면서 "애써 공부하러 왔는데도 바로 눈앞에 와서 무엇인가에 걸려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는 사람이 있다. 이런 상태가 아니고는 암시를 줄 수가 없다"면서 하고 싶은 말은 머릿속에 있으나 아무리해도 잘 표현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면 도와줄 수가 없다고 했다.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호기심을 유발하여 진정 알고자 하는 지식을 깨우치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가르치고자 하는 방법이었으며 계발이란 성어가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동양 최고의 교육자로 만세사표(萬歲師表: 만세토록 스승의 표상)라고 추앙받고 있다.
계발(啓發)
고등학교 때로 기억된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개발(開發)과 계발(啓發)에 대한 차이를 알고 있는가를 학생들에게 물었다. 학생 중 어느 누군가가 비교적 정확하게, 개발은 자연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말이고 계발은 사람에게 쓸 수 있는 말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개발(開發)을 사전적 의미로 보면, 주로 자연이나 인공적으로 무엇을 더 나아지도록 만든다는 의미에, 사람을 대상으로도 나아지도록 한다는 내용도 지니고 있다. 계발(啓發)을 사전적 의미로 보면, 재능이나 정신 따위를 깨우쳐 열어 줌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로 본다면 개발이 계발보다 훨씬 그 의미가 폭넓고 자연과 사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쓸 수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계발(啓發)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재능과 인성(人性)을 깨우쳐 주거나 열어주는 의미로 한정되어 있다. 계발(啓發)에서 계(啓)는 입을 열어 주다는 의미가 본뜻이다. 계(啓)는 공식적인 기도문이나 성가(聖歌)를 두 사람 이상이 서로 주고받으며 읽거나 노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상대를 두고서 입을 열어서 주고 받는다는 의미이니, 이는 서로 간에 소통이 있다는 뜻이다. 발(發)은 사람이 길을 나서는 모습이다. 그래서 ‘떠나다’ ‘일어나다’ ‘들추다’ ‘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계발(啓發)이란 말은 논어(論語)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공자께서 “분발하여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열어주지 않고 마음 절절하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밝혀주지 않으며, 한 모서리를 들어주어도 세 모서리를 들어볼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다. 不憤不啓 不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말씀하였다.
분발하여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길이 열리게 되어있고, 마음으로 절절하게 구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뜻에서 계발이 나왔으니, 계(啓)는 분발하여 노력하는 사람에게 그 길을 열어줌이요, 발(發)은 마음이 절실하고 간절하게 구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밝게 비추어 찾도록 도와줌을 뜻한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고 한 성경구절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계발은 ‘스스로가 얼마나 간절하게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인간이 올바르게 변화할 수 있다는 실천철학을 담고 있는 말이다. 그 중에 하늘이 부여한 착한 본성을 계발하려한다면 이것이 현자(賢者)로 나가는 첫걸음이리라.
계발(啓發)
뜻과 지식 지혜를 열어 일깨워준다
계발(啓發)의 뜻은 뜻을 열어주고 지식과 지혜를 넓혀 주며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하여 맑게 해 줌을 일컫는다. 이 말은 공자의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것으로 공자의 교육 방법을 말한 것이다.
공자는 제자를 교육할 때 그 제자의 특성과 질문에 따라 각기 다르게 교육하였는데 교육할 때 학습자가 스스로 배움과 궁리의 절실함이 있어야 교육과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짐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이 말은 대체로 '창의성이나 소질을 계발하다'는 말로 쓰인다.
1. 강요에 의한 기계적 학습의 시대의 아이들
교육이 잘 이루어지려면 학습자(학생) 스스로 배움의 의지와 열정이 있어야 한다. 그 배움의 의지와 열정이 없는데 가르치려 하면,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쌍방 모두 고통일 수 있다.
그런데 옛날에도 권세나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자제를 가르치기 위하여 어린 나이부터 무척 애를 써 왔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모두에게 유효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현상은 오늘날은 더 심하다. 특히 옛날에는 신분에 의해 학문하는 자가 제한되어 있었으나 오늘날은 보편화된 전 국민 교육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교육은 만인의 권리이자 의무가 되었다.
부모들은 저마다 자녀를 똑똑하게 교육하기 위해 온갖 투자를 한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날 한국의 부모들은 치열한 삶의 영역을 넘어 치열한 자녀교육 경쟁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아는 분의 딸은 사업가와 결혼했다. 딸은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세 살 정도 되어 말을 배울 때부터 가정교사를 들였다. 가정교사도 하나가 아니었다. 영어 가정교사, 중국어 가정교사를 들여 오전은 영어를 배우게 하였고 오후는 중국어를 배우게 하였다.
이제 막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에 무슨 가정교사냐는 의문을 가지겠지만 그의 딸은 그랬다. 그분의 딸은 학교 다닐 때 공부가 늘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스스로는 그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고 아이를 똑똑한 아이로 키우겠다는 마음으로 조기 언어교육에 매진한다지만 너무한 일이었다.
이제 막 아빠, 엄마라는 말을 배우고 엄마와 놀면서 마음의 정을 키워갈 시기에 아이에게 우리말보다 영어와 중국어를 가르친다니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자녀교육에 있어서 정말 부모가 문제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보도에 의하면,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영어유치원이 치열한 경쟁 속에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부모들은 세살배기 어린아이를 점심시간 쪼개기를 하여 영어유치원 입학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아이의 영어 입학 능력이 모자라면 대입처럼 재수도 불사하여 기어코 우수하다는 영어유치원에 보낸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 등 일부 유명한 영어 학원가에서 성행 중임 이 영어유치원은 모두 '학습식'인데 유치원 졸업 때까지 미국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에 이르는 영어 읽기, 말하기 등의 능력을 갖추는 것이 교육목표라고 한다.
아이들은 4세부터 입학하여 3년간 빠른 속도로 학습해야 하기 때문에 입학 자격부터 까다로우며 일정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어떤 학원은 특정 교육기관에서 실시하는 영재테스트 ‘상위 5% 영재’ 성적표를 요구하거나 5세 반에 ‘유급제도’를 도입하는 학원도 있다고 했다.
학원가들은 영어유치원에 입학하고자 하는 3세짜리 아이를 의자에 앉혀놓고 5-10분간 검사를 하여 영어 영재 여부를 확인한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어느 정도 영재성이 인정되는 아이만 선발하여 입학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이 영어유치원에 보내기 위하여 3세부터 영어 교육에 매진하며 영어유치원에 입학하지 못하면 재수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3세부터 점심시간 쪼개기 과외도 불사한다고 한다. 유치원비도 상상을 초월한다. 기본이 월 180만 원에서 200만 원이며 여기에 방과 후 학습비와 교재비는 별도라고 한다.
이것은 엄연한 부모의 과열 경쟁 심리와 왜곡된 자녀교육관이 빚어낸 병폐의 하나다. 사교육을 조장하는 차원을 넘어 아이에 대한 고문이며 아이의 바람직한 발달과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
아이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특히 3세의 아이는 한창 말과 사회성을 배울 시기다. 부모와 또래의 활동을 통해 놀이와 사회성을 기르는 것이 중요한 시기다. 그런 시기에 영어학습의 세계로 내몰리는 아이들은 어쩌면 불쌍한 아이들이다. 우리나라의 의대 광풍은 하나의 큰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다. 여기에 영어유치원 광풍 또한 이에 못지않다.
영어유치원이라는 학원은 그들의 유명세를 키우기 위해 일정한 능력을 가진 소수정예를 선발하여 홍보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방법은 대체로 스파르타식의 레벨식 교육이다.
아이들은 주어진 프로그램에 기계적으로 적응하며 학습해야 한다. 자기의 생각이나 의견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테스트에서 떨어져 다음 단계의 레벨로 올라갈 수 없다. 그러면 3~6개월 후 다시 시험을 치러야 한다. 입학한 뒤 진도를 못따라가면 유급을 한다. 여기서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얼마나 클까?
유치원에서부터 치열한 경쟁과 학습 스트레스에 아이들을 내몬다. 어쩌면 교육이란 이름을 붙인 잔인한 고문이다. 어린아이 시절부터 유급이란 낙인을 경험한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3세부터 이런 학습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 수많은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 불나방처럼 몰려들어 자녀의 소중한 인성과 소질을 망가뜨린다. 소질의 계발(啓發)은커녕 소질의 계발을 가로막고 망가뜨린다.
그런 아이들이 성장하여 제대로 된 인성과 학습 능력을 가지고 삶을 밝게 개척하리라고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과잉된 부모들은 여기에 몰입한다. 내가 아는 지인의 딸처럼 말이다. 부모들의 광기 어린 왜곡된 교육관이다. 이런 학습 풍토에서 계발은 일어날 수 없다.
교육은 그 목표가 잠재력의 계발에 있다. 계발은 그가 가진 뜻(목표)과 잠재된 소질을 일깨워 열어주고 지식을 넘어 지혜를 넓혀 주는 작업이다. 그런데 3세부터 시작하는 영어유치원 학습은 이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이들 스스로 뜻을 세우지도 않았을뿐더러 스스로 자기의 잠재력을 열 기회도 사라졌다. 그 잠재력은 놀이와 각종 체험을 통해 일깨워지고 발전된다. 그리고 자각적인 과정을 통해 심화하며 더욱 발전된다.
교육과 학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뜻(목표)을 세우는 일이며 자발적인 학습 충동을 갖게 하는 일이다. 동양의 유명한 철인 공자도 1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뜻(입지 立志)을 확고하게 세웠다고 하지 않았던가? 뜻이 세워지지 않은 아이들에게 계발은 불가능한 일이다. 3세에 뜻이 세워졌을까?
그런데 지금의 한국 교육이 그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학력은 점점 떨어지고 아이들은 학교 학습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이를 보충하기 위한 사교육만 늘어나고 있다. 우린 지금 계발이 아닌 기계적인 학습의 시대로 아이들을 내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공자가 말하는 계발(啓發)의 의미와 공자의 교육방식
공자의 교육은 그 본바탕을 계발에 두고 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학습을 강요하거나 채찍을 가하지 않았다. 학습이 뒤떨어지는 제자를 걱정은 할지언정 한탄하거나 비난하거나 질책하지도 않았다. 각자에게 수준에 맞는 교육을 하였으며 늘 인격을 존중하였다. 그러한 공자의 교육 방법과 철학이 계발(啓發)이란 한 단어에 녹아 있다.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속으로 통하려고(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스스로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으니, 한 귀퉁이를 들어 보이면 이것을 가지고 남은 세 귀퉁이를 반증(反證)하지 못하거든 다시(더 이상) 일러주지 않았다(子曰: 不憤이어든 不啓하며, 擧一隅에 不以三隅反이어든 則不復也니라 / 논어 술이편 8장)."
위에서 憤(분)은 '성을 내다, 괴로워하다, 번민하다, 흥분하다, 감정이 북받치다'의 뜻을 가진 것으로 마음속에서 통하려고(무엇인가를 알고 깨우치려고) 하나 잘되지 않아 애태우는 모양을 말한다. 이를테면, 공부를 하다가 의문이 생겨 그 뜻을 알려고 애를 써 보지만 그 뜻이 통하지 않아 애태우는 장면을 말한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누가 조금만 알려주어도 알게 되며 그 이상의 뜻을 터득하게 된다.
이는 학습자가 가져야 할 기본자세다. 학습자가 憤(분)하려면 우선 뜻(입지 立志-목표)이 세워져야 한다. 뜻이 세워지면 학습의 열정이 자발적인 내부에서 솟아오르고 그러면 憤(분)하게 되어 있다.
啓(계)는 그 뜻과 의문을 열어주는 것이며 悱(비)는 ‘표현 못할 비’로 ‘마음으로는 알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알고 있는 것을 표현하지 못할 때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거나 그 단서를 알지 못해서 일 수도 있고, 용기가 부족하여 못할 수도 있다. 發(발)은 그 말문을 열어주는 것을 일컫는다. 그래서 不悱어든 不發하는 것이다.
모든 교육은 스승의 설명이나 가르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스승은 단지 그 이치의 단서(端緖)를 열어주고 나머지는 학습자가 이치를 궁리하여 터득하고 그것을 스스로 말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공자는 만약 擧一隅(일거우 -한 귀퉁이를 들어보여줌)하면, 나머지 세 귀퉁이는 스스로 알아 증명해 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不以三隅反) 더 이상 일러주지 않았다(則不復也)는 것이다. 여기서 反(반)은 반증(反證)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 반증(反證)은 부정의 뜻이 아니라 그에 대하여 설명하고 증명해 내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공자가 不憤(불분: 학습자가 분발하지 않으면) 하면 스승이 不啓(불계:그 뜻을 일깨우고 가르쳐 주지 않음) 한다는 것과 擧一隅(일거우)에 不以三隅反(불이삼우반)하면 則不復也)하였다는 것은 공자가 교육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憤(분) 할 때까지 기다려 주고 憤(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을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하여 정자(程子)는 이렇게 해석한다. 만약 제자가 不憤(불분)한데 가르쳐 주면 아는 것이 견고해(확실해)지지 않으며, 憤悱(분비)하기를 기다린 뒤에 알려주면 확연히 깨달을 것이다(待其憤悱而後發이면 則沛然矣니라)
교육은 성급하게 가르치려고 하고 막무가내로 끌고 갈 일이 아니라 뜻을 일깨워주고 스스로 내적 동기가 발휘되도록 조장하며 내적 동기가 충전되어 스스로 알려고 애를 쓰고 의문을 가질 때까지 기다려 주며 그렇게 되도록 조장하는데 근본이 있다. 스승은 그런 제자에게 앎의 단서를 열어주고 끝없이 앎을 향해 나아가도록 조장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공자가 말하는 교육의 기본 요체다.
이러한 공자가 말하는 계발은 네 가지의 영역이 통합된 것이다.
첫째는 입지(立志)를 강화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뜻을 열어주는 일이다. 그것은 교육에서 가장 먼저 하여야 할 일이다. 율곡 선생도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입지(立志)를 최우선으로 하였다. 입지(立志)를 강화한다는 것은 삶과 공부의 목표를 세우고 분명히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을 가 보고자 하거나 서울에 대하여 궁금증이 전혀 없는 자에게 서울을 설명하는 것은 우이독경(牛耳讀經: 소귀에 경전 읽기)이 될 공산이 크다. 따라서 입지는 계발의 최우선 요건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육은 그 소중한 입지(立志)를 제쳐두고 지식만 쏟아붓는다.
둘째는 지식을 일깨우는 교육이다. 공자의 방법에서 지식을 일깨우는 것은 오늘날처럼 무조건 강의하는 방식이 아니다. 공자는 늘 교육 이전에 제자들에게 개별질문을 하였다. 당시 공자의 세자들은 삼천 명이 넘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들에게 일괄적인 강의나 강연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질문을 하고 대답하도록 하였으며 거듭된 질문을 통해 그 대답을 스스로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여기서 학습의 내적 동기도 강화되고 스스로 문제를 찾아가는 발견학습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셋째는 지혜를 넓혀 주는 교육이다. 공자 교육의 근본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의 터득과 확장에 있었다. 지식이 발전하면 지혜가 된다. 따라서 지식은 지혜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라는 사람도 지식으로 끝나고 지혜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지혜는 삶과 세상 만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그것을 삶에 바르게 적용하는 능력이다. 여기에는 인간성의 함양과 문제해결력을 동시에 포함된다. 그것은 어쩌면 교육의 기본 목표이며 방법이다.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선 지식습득은 그 기본 바탕으로서 매우 소중하다.
넷째는 궁리궁행(窮理躬行) 하는 일이다. 이는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어떻게 하면 바르게 행동할까는 고민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지식과 지혜가 동원되면 지식과 지혜를 넓히기 위해 사물의 이치를 곰곰이 관찰하고 숙고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고뇌하는 일이다. 그것이 궁리궁행(窮理躬行) 하는 일이다. 고뇌가 없는 곳에서 진리가 터득될 리 없다. 그래서 공자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터득함)에 이르기 위해 궁리궁행(窮理躬行) 할 것을 강조하였다.
공자는 중국에서 최초로 대규모의 교육 집단을 형성하여 교육한 스승이다. 앞에서 말햇듯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3천 명이 넘었으며 수제자만 해도 70명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 공자의 제자들은 신흥 선비계급, 신흥 지식인층에 속했다. 그들은 뒷날 대를 이어 공자의 학문을 전파하고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공자의 학문은 중국 한나라 통치의 중심 철학이 되었으며 그 이후 계속 국가 통치의 중심 철학이 되었으며 동북아 학문의 주류를 이루었다. 한나라 이후에도 공자의 학문인 유학은 당나라를 이어 송나라에서 程子(정자)와 朱子(주자-朱熹)를 거쳐 화려한 꽃을 피웠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고 다산 정약용은 이를 실학사상으로 발전시켰다. 실로 그 영향은 지대하다.
오늘날 어떤 이들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하였는데 이는 유학의 근본을 버리고 지나치게 정파적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한 조선의 정치 풍토 탓이었다. 공자는 결코 인간의 생각과 행위를 한 곳에 묶어두지 않았다.
3. 啓發(계발)의 교육을 위하여
어쨌든 계발에 나타난 공자의 교육 방법은 개별화 교육이었으며 문답식의 자발적 동기 강화의 교육이었다. 이러한 계발과 통하는 말이 줄탁동시(啐啄同時: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배우려는 의지가 없는데, 배움을 강요하면 그것은 고문이 된다. 우선 중요한 것은 배움에 뜻을 두게 하는 일이다. 유아교육에서 지식을 가르치는 일도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래서 오늘날 교육도 계발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문맹률이 낮다. 취학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행복 지수는 낮다. 어쩌면 뜻이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학습만 강요당하기 때문일 수 있다.
거기다가 최근에 와서는 학생 흥미 중심을 강조하면서 목표 잃은 흥미 중심으로 흐른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말로는 목표 중심 진로 교육을 부르짖지만 실제로는 정교하지 못하고 상당수의 아이는 목표에 관한 한 방황한다. 교육이 계발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고 지식 주입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계발에 초점이 맞추어진 교육은 우선 목표지향적인 교육이다. 그 목표는 일련의 성취 수준이 우선이 아니라 인생 목표 삶의 나아갈 길, 삶의 설계 등에 초점이 맞추어진 교육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발적인 동기가 육성되도록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타율적인 동기는 채찍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것은 스트레스와 공격성의 원인이 되고 반 학교적, 반사회적 비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이제 부모들은 자녀교육의 철학적 숙고와 전환이 필요할 때다.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3살 아이에게 영어와 중국어를 강요하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 한다. 교육은 부모의 한(恨)과 성취욕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미래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교육은 계발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아이들이 뜻을 세우게 하고 그것을 존중하며, 지식습득에 관심을 가지게 하며 지혜를 위한 탐구와 토론을 증진하는 일이다.
공자처럼 아이들 하나하나의 지적 특성과 신념을 존중하며 일깨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가정에서부터 출발하여 학교로 확산해 가야 한다. 공자가 말한 계발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한국 교육의 갈 길을 생각해 본다.
불분불계 불비불발(不憤不啟 不悱不發)
분발하지 않으면 일깨워 주지 않고,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일깨워 주지 않는다.
12월이 되면 모든 학교가 방학을 한다. 아이는 학교 다니느라 하지 못한 것을 하고 싶어 한다. 아침에 늦잠도 자고 가족 여행을 가고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싶다. 반면 부모는 평소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뒤떨어진 공부를 보충하고 집안일을 거들었으면 한다.
이렇게 생각이 크게 다르다 보니 방학은 유쾌한 시간이 되지 못한다. 부모의 바람이 크면 아이는 학교 다닐 때랑 마찬가지로 여러 학원을 다니며 보충 수업을 하고 아이의 바람이 크면 부모는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힘겨워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경험이 적다. 이것은 그만큼 아이와 부모가 대화와 토론을 하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뜻이다. 함께 있는 시간이 익숙하지 않으니 아이와 부모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요구를 하게 된다. 특히 부모는 아이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고 아이의 시간에 끼어들려고 한다. 부모의 마음을 말로 하면 "빈둥거리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라고 압축할 수 있다.
아이가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부모의 요구를 따라가게 된다. 이렇게 아이의 시간이 어른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면 아이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정작 대학에 입학했지만 뭘 할지 몰라 1~2학년 동안 방황하는 평범한 대학생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어른은 아이가 "무엇을 하고 살까?"라고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했는지 돌이켜봐야 한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스스로 나서지 않고 기다리는 인내를 중시했다. "무지에 분노하지 않으면 갈 길을 터주지 않고, 표현에 안달하지 않으면 퉁겨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비不發)."
공자는 제자가 모르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제자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화를 낼 때 비로소 "이러면 되지 않을까?"라고 길을 터주고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몰라 답답해할 때 옆에 다가가 "이 글자는 다른 글자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라고 퉁겨줬다.
사람은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키워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자 한다. 우리는 이를 '자기 계발'이라고 한다. 공자는 이 계발(啓發)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다. 선생인 공자가 뭔가를 가르치려고 애달아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인 제자가 알고자 애달아 하는 것이다. 이때 교육의 효과가 극대화될 수가 있다.
공자는 지금의 교육 현장보다 몇 배나 더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었지만 3,000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숫자에 다소 과장이 들어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학생들이 공자를 찾아 떠나지 않은 이유를 되새겨 봐야 한다.
학생들은 뭔가를 알고 싶어 공자를 찾아왔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모른다. 공자와 어울리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신이 무엇을 알고자 하고 무엇을 하며 살려고 하는지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인해 학생들은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하지 해야 하기에 내몰려서 하는 것이 아니다.
방학은 '무지에 분노하지 않으면 갈 길을 터주지 않을 수 있는' 불분불계의 좋은 기회이다. "오늘 무엇을 했느냐?"라고 성과를 묻기보다 무엇이 잘되지 않고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질문을 바꾸면 좋겠다.
시간은 무엇을 해낼 수 있는 자원이기도 하지만 가족이 함께 누릴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하다. 이번 방학에는 선물 보따리를 풀며 기나긴 밤 이야기를 풍성하게 나누면 좋겠다. 이 제안이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가족마저 너무나도 각박한 사이가 된 것이다.
계발(啓發)과 개발(開發)
더 이상 꽂을 데가 없어 책장 정리를 했다. 책장 상단의 책들은 오랫동안 읽지 않아서인지 먼지가 가득했다. 그 사이에 '자기개발서'라고 적힌 책들도 나란히 꽂혀 있었다. 쌓인 먼지를 타닥타닥 떨어내다 눈에 띈 책 표지의 문구들, '자기계발'과 '자기개발'.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표현이지만 막상 쓰려고 하면 계발이 맞는지, 개발이 맞는지 헷갈려 하는 이들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자기계발' '자기개발' 둘 다 쓸 수 있다. 하지만 의미상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계발(啓發)은 슬기나 재능, 사상 따위를 일깨워 주는 것을 뜻한다. '잠재된 창의력을 계발하자' '그는 타고난 소질을 계발해 과학자가 되었다' 등과 같이 사람이 타고난 능력을 깨우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개발(開發)에도 계발과 비슷한 뜻이 있다. '직원들의 능력 개발에 힘써야 한다' 처럼 지식이나 재능 따위를 발달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 외에도 '토지 개발' '자원 개발' 처럼 토지나 천연자원 따위를 개척하여 유용하게 만든다거나, '산업 개발'과 같이 산업이나 경제 등을 발전하게 한다는 뜻도 있다. 새로운 물건을 만들거나 새로운 생각을 내어놓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프로그램 개발' '신약 개발'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두 단어의 정의에서 살펴보았듯이 '상태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자기계발' '자기개발' 둘 다 바른 표현이다.
우리가 계발과 개발 중 어떤 것을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유는 발음이 같아서 생기는 혼동일 수도 있으나, 한자의 쓰임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계발의 계(啓)와 개발의 개(開)는 둘 다 뜻이 '열다'이다. 다만 啓에는 '일깨우다'는 뜻도 있다. 한자에서 알 수 있듯 '계발'은 잠재되어 있는 것을 깨우쳐서 발전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개발'은 개척하여 발전하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계발과 개발은 의미상 차이가 있다.
둘의 구분이 헷갈린다면 계발은 타고난 것을 일깨워서 발전시키는 것이므로 선천적인 것에 기인한 반면, 개발은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 더 낫게 하는 것이므로 후천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 啓(열 계)는 ❶형성문자로 启(계)는 통자(通字), 啟(계)는 본자(本字), 启(계)는 간자(簡字), 唘(계)는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문을 손으로 연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계)로 이루어졌다. 입으로 사람을 가르쳐 깨우침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啓자는 '열다'나 '일깨워주다', '여쭈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啓자는 启(열 개)자와 攵(칠 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서는 戶(지게 호)자와 又(또 우)자, 口(입 구)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戶자는 외닫이 문을 뜻하고 又자는 손을 그린 것이니 이것은 문을 열어젖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口자까지 더해진 것은 문을 열어 누군가를 깨운다는 뜻이다. 그래서 갑골문에서의 啓자는 '열다'나 '일깨워 주다'라는 뜻을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전에서는 又자가 攵자로 바뀌게 되면서 마치 몽둥이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啓(열 계)는 (1)공식적인 기도문(祈禱文)이나 성가(聖歌)를 두 사람 이상이 서로 교송(交誦) 또는 교창(交唱)할 때의 그 첫 부분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열다 ②열리다 ③일깨워 주다 ④여쭈다 ⑤보도(報道)하다 ⑥사뢰다(웃어른에게 말씀을 올리다) ⑦책상다리를 하다 ⑧안내(案內)하다 ⑨인도(引導)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열 개(開), 열 벽(闢),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닫을 폐(閉)이다. 용례로는 무식한 사람이나 어린아이를 깨우쳐 가르침을 계몽(啓蒙), 슬기와 재능을 열어 깨우쳐 줌을 계발(啓發), 동면하던 벌레가 봄철을 맞아 나와서 움직이게 됨을 계칩(啓蟄), 계발하여 지도함 또는 깨우쳐 이끌어 지도함을 계도(啓導), 나아갈 길을 지적하여 가리켜 줌을 계시(啓示), 가르쳐 길을 열어줌을 계적(啓迪), 일에 대한 경위나 의견을 윗사람에게 말이나 글로 여쭘을 계고(啓告), 윗사람에게 말씀을 올림을 계상(啓上), 황무지를 일구어 농사 지을 땅을 넓힘을 계토(啓土), 여닫음을 계폐(啓閉), 앞장서서 인도함을 계행(啓行), 계발하여 기름을 계배(啓培), 깨우쳐 이끎을 계유(啓誘), 갑자기 일어남을 발계(勃啓), 도와서 계발함을 우계(佑啓), 공경하여 답장함이란 뜻으로 회답 편지의 첫머리에 쓰는 말을 복계(復啓), 편지에 첫머리에 쓰는 말로써 삼가 사뢴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을 경계(敬啓), 절하고 아뢴다는 뜻으로 한문 편지 첫머리에 의례적으로 쓰는 말을 배계(拜啓), 편지의 서두에 쓰는 말로 삼가 아룁니다의 뜻을 근계(謹啓), 편지의 사연을 다 적은 뒤에 또 적어야 할 일이 생겼을 경우에 다시 이야기한다는 뜻으로 쓰는 말을 재계(再啓), 삼가 아뢴다는 뜻으로 편지의 첫 머리에 쓰는 말을 숙계(肅啓), 편지 겉봉에 받는 이의 이름 밑에 앞이란 뜻으로 쓰는 말을 승계(升啓), 정해진 절차를 밟지 않고 먼저 임금에게 아뢰어 재가를 받음을 일컫는 말을 경선계하(徑先啓下), 병사丙舍 곁에 통로를 열어 궁전 내를 출입하는 사람들의 편리를 도모함을 일컫는 말을 병사방계(丙舍傍啓), 군율을 어긴 사람을 먼저 처형하고 나중에 임금에게 보고함을 일컫는 말을 선참후계(先斬後啓),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을 일깨워 줌을 일컫는 말을 소질계발(素質啓發) 등에 쓰인다.
▶️ 發(필 발)은 ❶형성문자로 発(발)의 본자(本字), 发(발)은 간자(簡字), 彂(발)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필발머리(癶; 걷다, 가다)部와 부수(部首)를 제외한 글자 殳(몽둥이 수)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필발머리(癶)部는 발을 좌우(左右)로 벌리다에서 벌리는 일, 弓(궁)과 부수(部首)를 제외한 글자 殳(수)는 치는 일, 음(音)을 나타내는 癹(짓밟을 발)은 나중에 풀을 밟아 죽이는 것이라고 일컬어지지만, 본디는 물건을 치거나 튀기거나 하는 일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發자는 '피다'나 '쏘다', '드러나다', '밝히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發자는 癶(등질 발)자와 弓(활 궁)자, 殳(창 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發자의 갑골문을 보면 癶자와 又(또 우)자, 矢(화살 시)자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도망가는 사람을 향해 화살을 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發자의 본래 의미는 '쏘다'나 '발사하다'였다. 그러나 금문에서부터는 矢자가 弓자로 바뀌었고, 소전에서는 又자가 몽둥이를 들고 있는 모습의 殳자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의 發자는 활과 몽둥이를 들고 누군가를 뒤쫓아 가는 모습이 되었다. 發자는 본래 화살을 쏜다는 뜻이었지만 누군가를 추격하기 위해 발자국을 따라가는 모습에서 '나타나다', '들추다', '밝히다'라는 뜻이 파생되었다. 그래서 發(발)은 (1)차, 배, 비행기 따위의 출발을 나타내는 접미어 (2)지명(地名)이나 날짜를 나타내는 명사(名詞) 다음에 쓰이어 전신(電信), 전화(電話) 등의 발신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피다 ②쏘다 ③일어나다 ④떠나다 ⑤나타나다 ⑥드러내다 ⑦밝히다 ⑧들추다 ⑨계발하다 ⑩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⑪빠른 발 모양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쏠 사(射), 펼 전(展), 세울 건(建), 창성할 창(昌), 우거질 번(蕃), 성할 성(盛), 설 립(立), 세울 수(竪), 일어날 기(起), 일 흥(興),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붙을 착(着)이다. 용례로는 법령을 공포하거나 명령을 내림을 발령(發令), 증서나 영장 따위를 발행하는 것을 발부(發付), 소식이나 우편이나 전신 등을 보내는 것을 발신(發信), 채권이나 승차권 따위를 발행함을 발권(發券), 움직이기 시작함을 발동(發動), 마음과 힘을 떨쳐 일으킴을 발분(發奮), 총포나 활 따위를 쏨을 발사(發射), 한 상태로부터 더 잘 되고 좋아지는 상태로 일이 옮아가는 과정을 발전(發展), 어떤 일을 생각해 내는 것 또는 그 생각을 발상(發想), 무슨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냄을 발심(發心), 의견을 내놓음이나 무엇을 생각해 냄을 발의(發意), 땅 속에 묻힌 물건을 파냄을 발굴(發掘), 미개지를 개척하여 발전시킴을 개발(開發), 숨겨진 물건을 들추어 냄을 적발(摘發), 길을 떠남 또는 일을 시작하여 나감을 출발(出發), 일이 자주 일어남을 빈발(頻發), 불이 일어나며 갑작스럽게 터짐을 폭발(爆發), 범죄 사실을 신고하여 처벌을 요구하는 행위를 고발(告發), 액체나 고체가 그 표면에서 기화함을 증발(蒸發), 정당하지 못한 일이나 숨기고 있는 일을 들추어 냄을 일컫는 말을 발간적복(發奸摘伏), 죄나 잘못 따위가 없음을 말하여 밝힐 길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발명무로(發明無路), 장차 운이 트일 땅이라는 뜻으로 좋은 묏자리를 일컫는 말을 발복지지(發福之地), 강성해지기 위하여 분발하다는 뜻으로 개인이나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분발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발분도강(發憤圖强), 일을 이루려고 끼니조차 잊고 분발 노력함을 일컫는 말을 발분망식(發憤忘食), 사냥개를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가리켜 잡게 한다는 뜻으로 시문 따위의 빼어나고 웅대함을 평하는 말을 발종지시(發踪指示)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