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1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새 아침을 맞이합니다.
이 하루도 주님과 함께 하는 주의 날이 되기 원하여 속히 주의 말씀 앞으로 달려가오니 나를 주의 품으로 맞아주소서.
육신에 매인 아담의 생명으로 눈을 떠 심령이 여러 가지로 복잡하지만 아들의 생명으로 평안을 누리기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 비록 연약하여 순간순간 넘어지는 연약한 종임을 고백하오니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오늘 하루도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넉넉히 살아낼 수 있도록 나에게 주의 은혜만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전 8:1-8
제목 : 하나님의 지혜는커녕 하나님을 이용하여 나의 유익의 도구로 삼으려던 자를 심판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1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2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3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4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5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6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7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8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 나의 묵상
코헬렛 곧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깨달은 인간의 지혜가 한시적이지만 나름대로 그 의미와 효력이 있다고 한다.
사물의 이치 곧 만물의 의미를 아는 지혜자는 그 얼굴에 광채가 난다.
이로써 인간의 지혜는 사나운 얼굴을 변하게 만든다.
이제 전도자는 주제를 바꾸어 왕 앞에서 바르게 처신하라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맹세했다면 왕의 명령에 순종할 것이다.
왕ㅇㄴ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이므로 왕 앞에서 경솔하게 물러나지 말고, 좋지 못할 때에는 머물러 있지 말 것이다.
‘머물러 있지 말라’는 말은 나쁜 일을 가지고 왕에게 갔다가 갑자기 소송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이다.
왕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경솔하게 자기를 주장하여 위험에 처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왕의 명령을 지키는 자는 해를 받지 않는다.
지혜자의 마음은 그 ‘때와 심판’을 안다.
우리 성경에는 ‘때와 판단’으로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시간(헬, 카이로스)과 심판(히, 미쉬파트)이다.
재앙이 그를 덮칠지라도 모든 것은 때와 심판이 있다.
그리고 때와 심판을 아는 지혜자의 통찰력은 세상을 측량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세상을 측량할 수 없다는 말은 이 구절에서 왕과 그의 심판을 측량할 수 없다는 뜻이다.
때와 심판은 인간의 지혜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힘에 따른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누가 그에게 일어날 일을 고지할 수 있겠는가?
전도자는 자기 일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4가지 관찰한 내용으로 확언한다.
어느 누구도 바람을 능가할 힘을 지니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죽을 날을 제어할 힘을 지니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전쟁을 벗어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재물로 이를 소유한 사람을 구출하지 못한다.
전도자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때와 심판’을 경구로 삼아서 인간의 지혜가 헛됨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때와 심판을 알지 못하며 그로 인해서 어찌할 수 없이 한계 앞에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지나치게 현명하게 살라는 가르침은 이와 같이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부닥치게 한다.
인간이 세속적인 권력자인 왕 앞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도 때와 심판의 말을 알지 못하는 인간,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상황이다.
인생의 때와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몫이다.
하나님의 때와 심판이 임할 때 인간의 지혜와 시도는 무용한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때와 그 심판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기약대로 아들을 보내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며 동시에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장사됨은 해 아래에 속한 모든 사람에 대한 심판이다.
그의 구원의 사건 곧 그의 죽음과 무덤에 연합된 자는 아담 안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다 헤아릴 수 없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한다.
성령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그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때와 심판이 성취된 자이며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기업에 속한다.
나는 40세가 가깝도록 지혜를 궁구하지 못하는 자였다.
나는 그저 대학을 나오고 교회 열심히 다니며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였다.
직장 생활과 학원 사업에 집중하면서 교회에서는 찬양대 지휘와 함께 주일학교 교사로서 직분을 힘써 감당하였다.
이렇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던 차에 학원을 운영하는 일이나 직장 생활보다도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영적인 차원에서 신학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늦깎이로 신학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내가 신학을 하려는 목적은 이 땅에서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목사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여 예수를 전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함에도 나는 나 중심적인 사역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것이 결코 온전할 리 없는 내 신학과 목회의 방향 앞에 나는 털끝만치도 의심을 하거나 회의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학과 목회 그것 자체로 나는 만족을 했기 때문이다.
하여 신학을 할 때는 솔로몬이 궁구했던 인생의 지혜는 물론이거니와 목회를 할 때 역시 하나님의 지혜는 생각지도 못했다.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흘러갔다.
처음 생각은 정말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섬기며 목회를 할 것이라고 마음을 먹었지만 이내 그 순수함은 시들고 말았다.
왜냐하면 교회를 개척하고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 교인 수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금방 부흥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몇몇 성도들과 함께 열심히 전도도 하였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나는 영적인 부분에 전혀 민감함이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교회가 잘 성장하니까 나의 마음이 너무 교만해졌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교회 안에 작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고 내 육신에 암이 찾아오기도 하면서 목회에 큰 장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가 한참 커질 무렵 그동안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왔다.
바로 복음생명캠프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원래 세미나 같은 걸 별로 즐기는 류가 아니어서 몇 번을 고사했지만 친구를 통해서 소개를 받은 이 복음생명캠프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참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사실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도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고, 더 큰 문제는 그런 복음에 대한 고민이나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음을 고백한다.
이런 내가 복음생명캠프에 참석을 했을 때 나의 얼어붙은 심장을 터뜨리는 메시지가 첫 날 첫 시간부터 울렸던 것이다.
솔직히 나는 복음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면 교회를 부흥시킬 것인가, 성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캠프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전혀 그런 류가 아니었다.
나는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정신을 잃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듣기 시작하였다.
그 내용은 이 세상 곧 땅에 속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만물 위에 속한 생명 곧 영생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내 심장이 얼마나 콩닥콩닥 뛰는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목회하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데 내가 이를 전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강사 목사님에게 우리 교회에 오셔서 복음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정중하게 부탁을 하였다.
목사님은 흔쾌히 나의 부탁을 들어주셨고 나는 그 때부터 매 달 있는 캠프에 참여하여 이 복음을 들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결코 이 세상에 있지 않은데 나는 심지어 목회를 통해서도 이 땅에서 무언가를 얻어 볼 요량으로 교회를 운영했던 것이다.
나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무역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그런 상업적인 차원에서 이익을 남기는 차원으로 교회를 운영을 하였고 생각보다 그런 이익을 잘 남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할 무렵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하심을 믿는다.
이 땅의 지혜와 돈 버는 지식이 결코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 복음을 알고 난 뒤에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 복음을 알고 난 후에 내가 할 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에 많은 사람을 채울까, 에서 어떻게 하면 이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로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난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때와 심판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조롱하던 자였음을 고백한다.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그저 나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과 도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내가 이 땅에서 부자 되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며 죽음까지도 담당하신 분이 아니시다.
우리 주님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하여 낮고 천한 이 땅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오신 것이다.
지금이 그 나심을 기념하는 성탄의 계절이다.
날 위하여 하나님이신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감격과 감동이 넘친다.
하나님이 만드신 바람도 하나 제어하지 못하며 죽는 날을 내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내가 모아놓은 재물로 나의 죽어가는 목숨 하나 지키지 못하는 내가 감히 하나님을 이용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려 했다니 이게 과연 말이 되겠는가?
나는 오늘 정말 토기장이 앞에 있는 질그릇이 되어 단지 우리 주님의 긍휼만을 구한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아 바닥을 쓸고 닦는 여주인과 같이 길을 잃은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아 회개할 것 없는 99마리 양을 들에 두고 나서신 목자의 그 은혜와 긍휼하심을 구할 뿐이다.
길을 잃고 헤맨 어린 양이 여기 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가장 적확한 때에 복음을 들고 나에게 찾아오셔서 그 생명의 복음을 들려 주셨음에 감사의 찬양을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지옥과 같은 흑암의 구렁텅이에서 헤매며 흔들리던 나를 생명의 복음을 들려주시고 건져주신 그 크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지금 죽어 지옥으로 던짐을 받아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자입니다.
하오나 이런 무능력자요 무기력한 자를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건져주시고 새 생명을 주시어 하늘의 사람으로 세워주셨으니 이것이 웬 은혜요 웬 사람인지요?
오늘 이 하루도 우리 주님과 복음으로 연합되어 나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고 무덤에 장사되어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매일매일 옛 사람은 죽고 또한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삶이 되게 하소서.
모르고 행했던 나의 무지는 주님의 덮으심의 은혜로 참된 진리로 행하는 자 되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가 충만한 날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