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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BE의 Dave가 포틀랜드의 2000년대를 연재한걸 제가 번역했던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구단 역사 전체를 다룬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역사물을 좋아해서(...) 영어를 잘 못함에도 불구하고 한번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분량이 꽤 되어서 과연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대한 우리의 다소 개인적이고 약간은 역사적인 고찰은 포틀랜드가 우승 가능성이 높았던 76-77, 77-78 시즌부터 현재까지 이어진다. 오늘은 우승 시즌을 다루고, 이어서 내일은 그 다음 시즌을 다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1976년 포틀랜드의 약진을 NBA에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증거로 인용하며, 그전까지 별볼일 없던 팀이 갑자기 무대에 등장해서 영광으로 가는 길을 열어젖힌 사례라고 말한다. 포틀랜드가 플옵 첫 진출에 그들의 처음이자 유일한 우승을 거머쥔건 사실이지만, 76년 가을의 로스터는 76년 봄과는 거의 비슷한 점이 없었다. 남은 사람들 중 유명한 선수는 라이오넬 홀린스, 밥 그로스, 래리 스틸이지만, 나머지 로테이션은 두번 다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이 한번의 오프시즌에 일어나면서 재구성되었다.
- 전체 1번픽 출신인 빌 월튼은 루키와 2년차 시즌을 부상으로 신음했지만, 커리어 중 유일하게 단일시즌 2000분 이상을 소화할 수 있을만큼 건강한 상태였다.
- ABA 통합으로 인한 확장 드래프트에서 포틀랜드는 PF인 모리스 루카스를 지명했다. 루카스는 다가올 시즌에서 리그 최고의 PF로 각광받게 된다.
- 같은 드래프트에서 데이브 트워직 역시 포틀랜드에 합류했으며, 주전 PG를 꿰차게 된다. 트워직의 재능은 루카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트워직의 농구 센스는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꿰차기 충분했을뿐 아니라 이후 리그의 프런트에서 일하게 될 정도였다.
- NBA의 정규 드래프트에서 포틀랜드는 2라운드 5번픽으로 조니 데이비스를 뽑았다. 데이비스는 백업이 되었고, 플옵이 진행되면서 트워직의 출전시간을 상당부분 가져온다. 트워직처럼 데이비스도 영리해서 은퇴 후 프런트의 일원이 되고, 어시스턴트 코치와 감독으로도 일했다.
- 이 모든 것들이 예전에 버팔로와 필라델피아에서 감독을 역임했던 잭 램지가 오면서 하나로 융합되었다. 램지는 코칭에 관한 책을 썼으며, 이후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96-97 시즌에는 NBA 역사상 최고의 감독 10인에 선정된다. 램지가 강조한 육체적 건강, 압박 농구, 코트를 넓게 쓰기(spacing the floor), 패싱, 견고한 수비 원칙은 재능을 갖춘 포틀랜드가 자신의 걸작을 완성하는데 있어 밑바탕이 된다.
이러한 건강, 재능의 유입, 좋은 드래프트, 고취시키는 코칭의 갑작스러운 결합은 곧바로 포틀랜드에서 블레이저스에 대한 열광을 이끌어냈다. 세자리수의 득점과 20승 8패의 출발은 12월 중순까지 화제가 되었다. 이 팀이 단결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거 리얼이야?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을까? 한번도 플옵에 오르지 못한 팀으로서 이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TV 시청률이 상승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오레곤 사람들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빌 숀리(역자 주: 포틀랜드의 전설적인 라디오 캐스터)의 경쾌한 톤의 목소리를 만났고, 월튼과 루카스가 사람들의 거실과 차에서 화제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떤 어린 아이 하나가 거실의 TV로 걸어와서는 아버지가 새로운 뭔가를 시청하는 것을 보았다. "이게 뭐에요?" 아이가 물었다.
"농구, 이건 경기야."
"어떻게 하는 건데요?"
나는 아버지 옆에 앉아서 모든 뜀박질에 매혹되었고, 다양한 거리와 각도에서 공이 림으로 들어가는 것에 놀라움으로 얼어붙었다. 공이 림 안으로 들어가면 2점이고, 파울일 때는 1점씩만 올라간다고 아버지가 설명했다. 선수는 드리블을 해야 했다. 선수는 공을 가지고 뛸 수 없었다. 선수는 많은 스텝만 밟을 수 있었고, 서로 공을 뺐으려고 노력했다. 아버지의 설명 중에 가장 중요한건 빨강과 흰색 유니폼을 입은 팀이 우리가 응원하는 팀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왜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의 대답은 간단했다. "저게 우리 도시의 팀이야." 그때가 내가 이 팀이 우리 팀이라고 처음으로 어렴풋이 알았던 순간이었다. 그때가 내가 포틀랜드와 그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유대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때가 팀이 이겼을 때 나만 기뻐하는게 아님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우리 가족이 블레이저스에 대해 얘기했다. 내 친구들이 블레이저스에 대해 얘기했다. 도시 전체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포틀랜드의 가능성의 진짜 크기는 천천히 자리잡았다. 배경이 결여된만큼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의 회의론은 아니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꿈꾸기는 힘든 법이고, 이런 종류의 성공은 포틀랜드의 의식 훨씬 밖에 있는 것이었다. 남은 시즌을 29승 25패로 마무리한 것은 망설임을 확인시키는듯 했다. 포틀랜드는 플옵에 진출하게 되었다... 확실히 큰 사건이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지 못했다.
정규시즌의 어떤 연장선상이고 (시카고는) 멀리 동쪽에 위치한데다 단축된 3차전 시리즈였기에, 시카고 불스에 대한 포틀랜드의 첫 맹공은 사람들의 인식을 뒤바꿔놓지 못했다. 모두들 홈에서의 승리를 즐겼다. 모두들 포틀랜드의 승리를 기뻐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지? 데이빗 톰슨, 댄 이셀, 그리고 덴버 너겟츠와의 다가올 7차전 시리즈가 진짜 시험대였다. 덴버는 경험이 풍부했다. 덴버는 득점할 수 있었다. 포틀랜드는 서부의 엘리트 집단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포틀랜드가 시골뜨기가 되어 웃음과 함께 날려버릴 수 있을까?
덴버에서 열린 시리즈 첫 경기에서 포틀랜드가 101-100로 신승하자 흥분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한끗 차이로 갑자기 홈코트 어드밴티지가 포틀랜드로 넘어왔다. 2차전 패배는 열광을 희석시키지 못했다. 어느 편인가 하면, 결의를 더욱 강화시켰다. 홈코트가 중요하다면, 포틀랜드 팬들은 포틀랜드가 리그 최고의 홈코트를 가졌음을 확실히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3차전과 4차전을 승리한 후, 도시는 정말로 믿기 시작했다. 3승1패의 리드가 뒤집히는건 불가능해 보였다. 포틀랜드는 연장전 끝에 덴버에서의 5차전을 졌다. 그리고 홈에서 거센 기세로 시작하여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포틀랜드는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포틀랜드는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와 맞붙게 될 터였다. 이제는 모두가 집중하고 있었다.
포틀랜드 팬들은 1977년 레이커스와의 시리즈에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CBS가 머무르면서 도시를 전국으로 방송했다. 월튼 vs 자바의 스토리는 포틀랜드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로 격상시켰다. 이것은 최고의 무대였다. 누구도 이 시리즈를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또한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레이커스는 농구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이름이었다. 덴버와의 시리즈가 엘리트 집단에 밀고 들어오는 것이었다면, 레이커스와의 시리즈는 카네기홀 무대에 서는 것과 같았다. 몇몇은 희망을 가졌고, 몇몇은 포틀랜드가 정말 살아남을 기회가 있을지 지켜보았다.
1차전에 포틀랜드가 적지에서 레이커스를
121-109로 격파하면서 그 기회는 "in your face!!"가 되었다. 이것은 직전에 승리했던 덴버 시리즈가 재현되는
신호탄 같았다. 축하는 포틀랜드가 2차전마저 승리하자 충격 속의 확신으로 변했다(불신은 이제 논의의 일이었다). 2승을 거두고
홈으로 돌아오자, 팀은 절대 잊을 수 없는 환영을 받게 되었다. 포틀랜드는 홈에서의 다음 두 경기를 질 수 없었다. 그것은 팀과
팀이 속한 도시가 대표하는 모든 것에 대한 배반이 될 터였다. 패배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포틀랜드는 패배하지 않았다.
포틀랜드에서의 경기는 더 치열했지만, 포틀랜드는 홈코트를 지켜내면서 레이커스를 스윕했다. 스타들로 바글바글한 필라델피아
76ers는 꺼져버릴 것이고, 그 시점에서 포틀랜드 외에는 누구도 우승에 다가가지 못하게 되리라. 플옵 13경기 동안, 포틀랜드는
이후 30년 이상 팬들을 참고 전진하게 만든 열정과 완전히 불합리한 믿음의 토대를 만들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1977년 NBA 파이널의 첫 두 경기를 포틀랜드가 패배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린 아이로서 나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포틀랜드는 홈에서 질 수 없었다. 그들은 홈에서 무적이기 때문에 포틀랜드에서의 3경기는 모두 승리할 터였다. 남은 원정 2경기 중에 1경기만 이기면 되는 것이었다. 포틀랜드가 시리즈에서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게 쉽지는 않다해도 말이다. 닥터 제이는 다스베이더처럼 무서웠다. 닥터 제이는 놀라웠고 어떤 순간에는 물리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 블레이저스가 있었다. 빌 월튼은 더 나았다. 적어도 어린 내 마음에는 그랬다. 어빙이 림으로 돌진하거나 점퍼를 쏘며 솟구칠 때마다 나는 움찔거렸지만, 그렇다 해도 포틀랜드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필리가 동부에서 포틀랜드를 혼내준 만큼이나, 포틀랜드는 메모리얼 콜리세움(역자 주 : 포틀랜드의 옛 홈구장)에서 그 이상으로 필리를 혼냈다. 팬들은 팀을 공항부터 경기장까지 따라갔고,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세가 불어났다. 그리고 아주 '시끄러웠다'. 불협화음은 거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포틀랜드의 거리는 조용했을지 몰라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경기를 보고 있었다. 이웃들이 소리치는게 들렸다. 사람들은 경기가 끝나면 집안에서 나와 입구 쪽의 베란다에서 떠들었다. 우리들 아이들이 얘기하는건 블레이저스가 다였다. 어느곳 어디서나 블레이저스 얘기였다. 가장 무관심하고 상관 안 하는 친구들마저 경기가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포틀랜드가 3,4차전을 승리하는걸 지켜봤고, 필라델피아로 돌아가면서 다같이 숨을 죽였다. 그리고 포틀랜드가 110-104로 5차전을 잡아내자 우리는 알았다. 때가 왔다. 포틀랜드는 홈에서 한경기를 남겨두고 돌아왔고, 우승까지는 1승만이 더 필요했다.
6차전은 내가 여지껏 살아오면서 가장 긴장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경험이었다. 포틀랜드는 좋아보였지만, 필라델피아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다스베이더가 포틀랜드의 목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도망칠 수 있을까?(그때까지 나는 블레이저스를 '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여기는 포틀랜드다. 블레이저스는 여기서 절대 지지 않는다. 여기는 포틀랜드다. 이것은 마법이다. 여기는 포틀랜드다. 그런데 경기는 정말 치열했다! 인바운드 플레이, 슛 미스, 팁 미스, 데이비스가 드리블해 나간다. 버저가 울린다. 스코어는 어떻게 됐지? 저게 진짜 스코어다, 맞지? 우리가 꿈꾸는건 아니지? 109-107.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가 NBA 챔피언이다!
요즘은 모든 것이 카메라에 담긴다. 나는 인생 전체에서 내 사진보다 세살짜리 내 아들의 사진이 더 많다. 누군가 과거로 돌아가서 그때 내 얼굴을 찍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내가 그보다 더 깨끗하고 순수하고 완전히 기뻐하는 웃음을 지을 것 같지는 않다. 보호받는 유년기에, 복잡한 삶에, 이것은 정화의 순간이었고, 어른과 아이, 친구와 이웃을 단결시킨 하나의 이벤트였다... 장벽을 부수고 도시가 들썩거린 이벤트였다. 그 순간 포틀랜드와 오레곤에 있는 우리 모두가 NBA 챔피언이 되었다. 베이커 시티부터 메드포드까지, 우리가 아는 모든 곳에. 우리는 지켜보았다. 우리는 우리의 두 눈으로 보았다. 꿈은 이루어졌다. 모든 것이 가능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블레이저스는 단지 성공에 의한게 아니라 믿음에 의한 문화를 스스로 만들었다. 1977년 플옵을 통틀어 포틀랜드가 홈에서 패한 경기수는? 0이다. 많은 상황에서, 그것은 약팀이 승리하기 위해 우호적인 영역에 의존한다는 표시로 간주된다. 이 경우에 그것은 강함의 상징이 되었고, 팀에 의해서가 아니라 팬층에 의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차이를 만들었고 적절히 행동했다고 믿었다. 표지들, 댄싱, 우승 행진에 몰린 수십만의 인파, 귀를 찢는듯한 함성, 오늘날로 넘어와서는 Blazersedge가 이 네트워크(역자주: SBN)에서 1인당 방문과 참여가 가장 많은 블로그가 되고 세계에서 단일 팀 기반으로는 가장 큰 사이트 중 하나가 되고... 이 모든 것들은 1977년 환희의 도가니에서 생긴 팬덤 고유의 것이다. 팀도 도시도 우리 중 누구도 그때와 같지는 않다. 포틀랜드 팬덤은 양쪽 모두 줄 것이 있다고 믿는 관계처럼 구단에 대한 투자가 아니다. 포틀랜드 팬들은 즐거움을 선사받길 기다리지 않으며, 차이를 만들어낼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시즌 전의 소란부터 포스트시즌의 환희까지, 76-77시즌은 불멸이 되었다. 즉각적인 소통과 닳고닳은 팬덤이 있는 요즘 시대에,
이런 일이 반복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아니, 나는 더 말할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들과 그 결과에 의한 변화는 절대 복사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미국 스포츠에서는 아니다. 순수한 환경, 동요하는 믿음으로 가는 사다리, 확신으로의 불가사의한 이동...
이러한 것들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올해 댈러스 어린이들의 눈에서 그런 움직임에 대한 공명을 찾을
수 있을거라 확신한다. 올라주원이 첫 우승을 했을 때, 휴스턴에 있는 친구에게서 찾을 수 있었듯이 말이다.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어린이는 이러한 사건들에 감동을 받는다. 1977년에 그랬던 것처럼 자발적이고 행복하게 어린이가 되었던 사람들을 절대 다시
찾을 수 없을 뿐이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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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본문에선 데이브 트워직과 쟈니 데이비스가 언급되고 있는데, 사실 77년 시즌의 블레이저스에서, 특히 플레이오프와 파이널에서 이 두 선수의 활약은 그리 대단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포틀랜드가 75년에 드래프트한 '라이오넬 홀린스'(현 미네소타 감독)가 당시 포틀랜드의 최고의 가드였죠. 시즌 평균 15득점에 어시스트도 팀내 1위. 홀린스와 센터인 빌 월튼이 팀의 플레이메이커였고, 특히 홀린스와 루카스, 바비 그로스, 빌 월튼, 이 4인방의 수비 라인업이 역대급이었던 팀이죠.
사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나, 2차전이 끝나갈 무렵의 양 팀 분위기로 보나, 이 시리즈는 '호화군단' 식서스가 가져가야 정상(?)이었습니다. 하지만 2차전이 끝날 무렵에 모리스 루카스가 식서스의 괴물 센터, 대럴 도킨스에게 펀치 한 방을 먹이면서 시리즈 전체의 무드와 흐름이 한 순간에 바뀌고 말았죠. 모두가 두려워 하던 도킨스는 갑자기 '호구'가 되었고, 루카스의 한 방으로 인해 다 죽어가던 포틀랜드의 불씨가 활활 타오른 것입니다.
당시에 식서스를 응원하던 입장에선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었지만, 시리즈가 끝났을 무렵, 저는 이미 루카스의 팬이 되어 있었습니다.
설명 감사드립니다(__) 사실 이후에 77년보다 더 좋은 전력을 갖춘 적도 여러번 있었지만 번번히 실패했던 것을 보면, 우승은 하늘이 내려주는건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잘봤어요 ㅎㅎ 잼나네요 ㅎ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재밌네요 언젠가 그 경기 영상들을 다시 볼수 있으면 좋겠군요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좋은글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들렸는데 좋은글 보고 가네요 ^^ 로이와 오든의 무릎만 멀쩡했더라도 또다른 역사를 쓸 수 있었을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ㅠ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기대어야 하는 슬픈 현실(...)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0-2 리버스스윕이 웨이드가 최초가 아니었었군요.
파이널이 현행 2-3-2 체제로 바뀐 이후에는 웨이드가 처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