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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부자.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차라리 10억. 아니 1억만 되도 고개나마 끄덕여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님 박수라도 쳐줄까.
그래도 만약 100억이 생긴다면 기분이 어떨까. 아니 제일 먼저 무엇부터 할까. 일단 컴퓨터 먼저 하나 사자. 골목 분리수거함에서 힘들게 주워온 컴퓨터는 이제 맛이 가서 부팅한번 할려면 커피를 한잔 타마시고 담배 한대 다 태우고 와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하니까. 그래 좋아. 최신형 컴퓨터 한대. 그리고. 그래 폼 나게 말보루 담배 한 보루 사서 피는 거야. 돈 아까워서 2천 원짜리 디스만 태우는 것도 이제는 지겨우니까. 아니지. 이런 소소한 것들 말고 좀더 큰것도 많잖아. 100억인데. 그래 일본 한번 가보자. 나도 한번 노천탕 이런데 한번 가보자. 옆집 김 씨 얘기 들으니까 산속 온천에서 눈도 맞고 옆에는 원숭이가 담배도 핀다는데.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과는 다르게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최소한 좀 전까지는.
"또야?"
깜빡임이 멈춘 마우스 커서만 바라보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이제는 짜증도 화도 못 내겠다. 이렇게 맛이 갈 동안 쓰고 있어서 내가 오히려 컴퓨터한테 미안할 따름이다. 폐기처분 되었어도 한참 전에 되었어야할 놈을 몇 년째 혹사를 시키고 있으니.
이참에 손으로 써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지만. 아서자. 늘그막에 무슨 고생이냐. 괜히 파스 값만 더 들겠다.
내일까지 원고는 마무리 해야겠고. 주머니를 뒤적거려보지만 PC방 갈 돈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있을 리가 있나 있었으면 담배나 사러 갔지.
당신은 참 글을 길게 쓰는 재주가 있어. 뚱땡이같은 편집장이 나에게 한말 중 가장 좋은 말이었다. 돼지 같은 놈 지가 글을 어찌 안다고. 그런 말을 입에 담는지. 사장 빽으로 들어온 놈이 글을 알기나 해?
군데군데 담배 불로 인해 구멍이 뚫린 셔츠를 챙겨들며 편집장을 떠올렸다. 그렇게 말하는 편집장에게 사정 사정해가지고 간신히 얻은 일이 남이 써놓은 글 짜집기나 아니면 글자 교정하는 일이었다. 20대 젊은 시절. 미래의 노벨문학상을 꿈꾸었던 내가 나이 40이 넘은 지금은 겨우 남의 글 맞춤법 교정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 박복함 보다는 그저 굶어 죽지 않은 게 어디냐고 위로해보지만.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글을 써보긴 하지만 그마저도 중단한지 오래전이었다. 이제는 열정도. 글을 지속할 끈기도 찾아보기 힘든 게 나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아무도 없는 줄만 알았던 거실에서 딸내미가 뭔가를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딸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괜스레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아빠의 의무감 때문에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지 엄마의 대해 물어봤다.
"엄마는 어디 갔니?"
"100억 프로젝트"
딸은 여전히 쳐다 도 안보고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100억 프로젝트라는 말만 내뱉고.
100억 프로젝트. 정말 거창한 제목이지만 웃을 수도 그렇다고 면박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는 돈독이 올랐다. 물론 내가 그만큼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니고 줄 능력도 되지 않았기에 더 그러는지는 몰라도 아내는 돈에 관한한 정말이지 악착같은 여자였다. 식당일부터 파출부일 산후 조리원 일까지 닥치는 대로 돈을 벌고 은행에 고이 모셔 놓았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책 한권을 들고 오고 나서부터 180도. 아니 540도 변해 버렸다.
재테크. 정말 세상이 사람 버려 놓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동안 이자도 쥐꼬리만큼 붙는 은행에 돈을 맡겨놓았다고 한탄하던 마누라를 본 사람이면 분명 내 말에 동조할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재테크에 빠져 버린 것이다. 참내 재테크라는 게 돈이 있는 사람이 그 돈을 적절히 불리는 것이지 돈도 없는 사람이 무슨 재테크를 하냐고 말 한번 잘못했다가 정말 혼이 쏙 빠져 나갈 뻔한 이후로는 그저 속으로만 한숨 쉴 뿐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정한 금액이 정확히 100억.
그때나 지금이나 난 마누라가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내가 벌어오는 돈이라야 겨우 돈 백을 간신히 넘기니 반찬값에 집세에. 그나마도 내 용돈으로 쓰고 나면 남는 게 없었으니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자 시빗거리 였기에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더구나 아내는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벌써 오랫동안 내게 통장을 보여준 적도 없었다. 물론 내가 아주 가끔. 그것도 한때. 정말 한때. 몰래 돈을 찾아서 다른 곳에 유용한 전적이 있긴 했지만. 아내는 내게 통장이 있다는 것조차 비밀로 하고 싶어 했다. 사실 궁금하지도 않다.
아무튼. 아내가 100억 프로젝트를 위해 제일 먼저 시도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중 가장 쉬운 일중 택한 것은 은행에 있는 돈을 CMA 통장에 옮기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나 역시 CMA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사실 지금도 잘은 모르지만. 자산관리 어쩌고 하던데. 아무튼 그게 이자율이 훨씬 좋다며 아내는 CMA에 자신이 가진 돈(내가 알지 못하는 돈)을 몽땅 옮겼다. 그것도 우연찮게 Tv위에 놓인 동양종금이라 적힌 통장을 보고서야 알았다. 통장을 발견했다고 내가 그 안에 얼마가 들었는지 본 것도 아니었다. 아내는 내가 통장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 고함을 치며 통장을 앗어 갔다. 물론 나는 미안하다는 말로 그 자리를 모면했고. 그게 불쌍했는지 아내는 그것이 CMA 통장이고 이자율이 훨씬 놓은. 물론 금액은 얘기 안했고.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며 딸의 눈치를 살펴봤지만 딸은 여전히 자신의 일에 집중한 채로 내가 있거나 뭘 하거나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집의 가장이란 사람 꼴이 정말 말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딸에게 야단칠 입장도. 사실 그녀가 잘못한 것도 없으니까. 더구나 설교할 입장은 더더욱 아니었다.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용돈을 헤프게 쓰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보니 용돈을 준일도 없었다. 딸은 아르바이트도 하는 등 필요한건 자신이 알아서 하는 아이였다. 어쩔 땐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해본적도 있다. 어쩔 때가 아니라 매일이지만.
"아빠 PC방 가서 작업 좀 하고 오마."
묵묵부답. 어차피 궁금해 하지도 않겠지만. 그나마 그것도 마지막 남은 아빠의 자존심이라고 애써 입 밖에 꺼내고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라도 말해서 아빠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문을 닫으니 그제야 조금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우리 집은 다가구 주택. 그러니까 아파트 라기는 뭐하고 그렇다고 주택이 라기도 뭐한 그런 곳이다. 그나마 소유는 아내의 동생 소유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얹혀사는 것이다. 항간에 재개발 소문이 일긴 하지만 우리 하고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재개발이 되면 우리로써는 살 곳을 잃어버리게 되니. 제발 뜬소문이기를 바랄뿐이다. 처남이 알면 죽이려고 하겠지만.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고 구석진 계단을 걸어 내려가니. 김 씨가 길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김 씨 담배한대만 줘."
김 씨는 별 표정 없이 그저 주머니에서 담배를 뒤적이고는 내게 건넸다. 나는 담뱃갑에서 담배 3대를 꺼내들었다. 헤 거리며.
"고마워"
"라이터"
김 씨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라이터를 건네주었다. 사실 라이터는 가지고 있었지만.
김 씨는 정말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었다. 이런 곳에서 평생 살 사람이 아니었다. 뭐. 물론 재계발이 되면 한 몫 잡긴 하겠지만. 아. 내게 담배를 줬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염치 불구하고 담배를 얻어 피우긴 하지만 돈이 생기면 한 갑 정도는 그에게 건네준다. 물론 얻어 피는 게 더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두 갑을 주기에는 아까우니까.
PC방에 도착하니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행히 자리가 하나 비어 있는 게 보였다.
"안 돼요 아저씨. "
카드를 잡는 내손을 낚아채는 알바 생이었다. 알바 생은 죽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임마 왜 안 돼?"
"아. 아저씨 외상값 주셔야죠. 저 사장님한테 혼나요"
"야 내가 외상값 뗘먹어? 어? 말 일 날 준다고! 이 세끼 이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내가 띄어 먹은 적 있어?"
"아 그래도 사장님이."
"이 자식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너까지 나 무시하는 거야?"
화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더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 알았어요. 말 일 날 꼭 주셔야 되요. 그전까지 제 돈으로 채우는 거 아시죠?"
"알았어. 임마"
다소 누그러진 말투와 함께 한쪽 눈을 찡그리고 알바생의 어깨를 두두려 줬다. 임마 이것도 다 작전이다. 나라고 이러고 싶겠냐.
집에 있는 고물 컴퓨터와 달리 PC방 컴퓨터는 김 씨한테 빌린 담배 한대를 미쳐 주머니에서 꺼내기도 전에 시작 음이 들리고 있었다. 역시 최신 컴퓨터가 좋구먼.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자료가 들어있는 USB를 찾을 요량이었다.
"어라."
이럴 수가. 미쳐 챙겨 오질 못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 갈수도 없고. 돌아가면 자리가 사라질지도 몰랐다. 분명.
"아 이메일이 있었지"
이렇게 바보 같다. 아내가 봤으면 분명 또 한소리 했을 것이다.
이메일에서 파일을 열었다. 어라.
"야 여기 한글 안 깔았냐?"
알바 생이 인상을 찌푸리고 다가왔다.
"다운받으시고 여셔야 되요. 요즘 보안 때문에 그래요. 옥션인지 뭔지 때문에 시끄럽잖아요."
"그래. 알았어 임마. 야, 짜장면 하나만 시켜줘라."
"예?. 하. 알았어요."
알바 생은 어차피 반항해 봤자 란걸 이제야 깨달았나 보다. 알바 생에 말대로 파일을 다운 받으니 그제야 쉽게 파일이 열렸다. 요즘은 세상이 참 편해져서. 한글이란 워드 프로그램이 웬만한 맞춤법과 교정은 알아서 해줬다. 우선 전체적으로 한글이 알아서 교정을 해주면 그제야 내가 한번 훑으면서 이상한 곳이 없나 살펴본다. 프로그램이 알아서 다 해주면 좋겠지만. 그래도 사람만은 못했다. 내가 아직은 한글 너 보다 낫다 임마. 사실 이런 프로그램한테까지 밀리면 정말 꼴이 말이 아닐 테니까. 쯧. 편집장이 내가 이런 꼼수 부리는 거 알면 가만 안두겠지.
PC방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역시 김 씨의 담배를 다 태우고. 나름 완벽히 마무리한 원고를 편집장에게 이메일로 쏘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 밖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달리 갈 데도 없지만 그냥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는 싫었지만 주머니에는 한 푼도 없었다.
다음 달에는 보수를 좀 더 올려달라고 할까. 아서라. 그 놈이 올려주면 죽을 병 걸린 게지. 이런저런 신세 한탄을 하며 집 앞에 다다랐지만 오늘은 정말 들어가기가 싫었다. 고개를 드니 우리 집은 어두컴컴했다. 외로운 가로등만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너라도 반겨줘서 다행이다. "
"반겨주기는. 거기서 뭐해. 안 들어가고"
칼지고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내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 잘 갔다 왔어?"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에 아내가 한숨을 쉬고는 나를 제쳐 계단을 올라갔다. 저런 저런. 가장을 뭘로 아는 건지. 저러니까 딸내미까지 아빠를 우습게 알지. 라는 말은 아마 평생 못해볼 것이다. 그저 이렇게 초라하게 아내를 뒤따를 뿐이었다.
열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내는 벌써 안방에 들어가 있었다.
일단 집에 들어왔으니. 집에서는 한숨도 조심스러웠다. 조심히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응?"
부스럭거림에 다시금 몸을 일으켜 소파를 보았다. 소파위에 종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상호 저축은행.. 대출 신청서?"
첫댓글 재밋어요
색다른 소재네여 ㅋㅋ 흥미로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