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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틀랜드의 우승 이후 시대를 회고하는데 있어 중요한 점은 우리가 77-78 시즌을 다루면서 언급했던 것이다 : 포틀랜드 팬들에게 있어 우승은 '성취'만큼 '정체성'이었다. 포틀랜드는 1978년에 공식적으로 우승 타이틀을 잃었지만, 포틀랜드 팬들은 여전히 속으로 포틀랜드가 챔피언에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우승 트로피가 합당한 주인에게 돌아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불행히도 빌 월튼의 발을 둘러싼 드라마는 소용돌이가 되어 즉각적인 우승으로의 복귀에 대한 모든 희망을 집어삼켰다. 부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월튼은 팀 닥터를 비난하고 그것을 숨기지 않았으며, 끝내는 팀의 의료진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월튼은 78-79 시즌 전체를 결장했다. 팀에 대한 월튼의 불만은 포틀랜드 팬들에게 재밌는 선택지를 주었다 : 사랑하는 블레이저스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그들로 하여금 먼저 팀에게 빠지도록 만든 '우승'을 가져다준 선수의 편에 설 것인가? 상황은 월튼에게 불리했다. 월튼은 이미 우승 전에 두 시즌을 부상으로 시달렸다. 월튼의 생활방식은 포틀랜드 기준으로도 독특했다. 월튼은 능숙한 대중 연설가도 아니었고 코트 밖에서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팀이 월튼에 대해 불평한 것이 아니라 월튼이 팀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 "team basketball"이라는 생각은 포틀랜드 팬들의 마음속에 너무도 굳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들은 래리 스틸의 공헌을 칭찬하고, 밥 그로스에게 경의를 표했다. 월튼의 부재로 팬들은 10여명의 찬양받는 영웅들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월튼의 불만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 크게 설명되지 않은 장기간의 결장이 겹치면서("어떻게 발 부상이 그렇게 오랜 결장을 초래했지?"), 포틀랜드 팬들은 월튼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월튼의 연봉, 월튼의 life choice, 무엇보다도 부상에 대한 월튼의 내구성에 대해 수근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구단에서 보유했던 최고의 선수이자 어쩌면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월튼이 1979년에 FA로 팀을 떠났을 때, 그것은 애도와 회상을 동반하여 큰 전환점으로 받아들여졌어야 했다. 그 대신에 월튼과의 결별에 대한 반응은 모두들 어깨를 으쓱하는 것이었다. 우승한 해의 주요 선수 대부분이 남아있었다. 월튼은 어쨌든 거의 뛰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가 팀을 앞으로 이끌 것이다.
사실 우승 이후의 시대에도 유명한 포틀랜드 선수는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나타난 선수는 미네소타 대학 출신의 F-C 마이캘 톰슨이었다. 바하마 특유의 발랄한 성격을 지닌 톰슨은 모리스 루카스(78-79시즌 평균 20득점 10리바운드), 톰 오웬스(평균 18.5득점 9리바운드)와 빅맨 삼각편대를 이루어 평균 15득점 8리바운드로 NBA 커리어를 시작했다. 포틀랜드는 프론트코트에서 빌 월튼의 대체자를 가진듯 했다. 개인적 재능 면에서는 아니었지만 집단의 생산성 면에서는 그러했다. 라이오넬 홀린스의 부상은 백코트를 약화시켰고, 포틀랜드는 그해 1라운드에서 피닉스에게 1승 2패로 탈락한다.
1979-80 시즌에는 포틀랜드 역사에서 거의 레전드급으로 떠오를 두 명의 가드가 들어온다: 빌리 레이 베이츠와 짐 팩슨. 베이츠는 엄청난 운동능력을 가진 6-4의 폭발력 있는 선수로, 이후 "길거리 농구" 패션으로 알려진 방식으로 플레이했다. 베이츠가 덩크하는 걸 보면 누구도 그것을 잊지 않았다. 팩슨은 정반대였다 : 스크린을 이용했고, 공을 갖지 않은 상태로 움직이는 슈터(off-ball moving shooter)로서 원하는 때에는 언제든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두 가드 모두 루키 시즌에는 큰 공헌이 없었고, 라이오넬 홀린스의 계속된 부상은 백코트의 생산성을 저하시켰다. 프론트코트에서는 톰슨과 오웬스가 꾸준한 성적을 유지했고, 월튼을 FA로 넘긴 댓가로 샌디에고에서 받아온 커밋 워싱턴이 가세하면서 리바운드가 강화되었다. 2월에 포틀랜드는 라인업을 좀 더 바꾼다. 모리스 루카스와 2장의 1라운드픽을 뉴저지로 보내고 PF 캘빈 냇을 받아왔다. 냇은 그해에 포틀랜드에서 25경기만 뛰었지만, 평균 20득점 이상을 했다. 우승 듀오의 나머지 반쪽을 잃은 슬픔은 이 새롭고 젊은 재능에게 잠재된 가능성에 대한 흥분으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포틀랜드는 1라운드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번 상대는 시애틀 슈퍼소닉스였다.
1980-81 시즌은 가드쪽에 진정한 변화가 있었다. SF 밥 그로스가 76-77 멤버 중 유일한 잔류자였다. 이 해는 평균 17득점으로 약진한 존 팩슨과 전부문이 상승한 베이츠의 해였다. 베이츠는 1980년 12월 30일 포틀랜드 역사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겼다. 이날 베이츠는 76ers와의 접전에서 마지막 순간에 커밋 워싱턴으로부터 인바운드 패스를 받아 덩크를 성공시켜 포틀랜드에게 승리와 더불어 영원히 남을 하이라이트를 주었다. 이러한 엄청난 순간에도 불구하고, 포틀랜드는 대부분의 시즌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냇의 성적은 떨어졌다. 톰슨은 평균 17득점을 하면서 잘해줬지만, 차세대 빅스타가 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월튼, 루카스, 이제는 라이오넬 홀린스가 빠지면서, 포틀랜드는 안정성과 우승 경험을 잃어버렸다. 시즌 막판의 상승세로 플옵에는 진출했지만, 1라운드에서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이번 상대는 캔자스시티 킹스였다.
1981-82 시즌에는 마이캘 톰슨이 포틀랜드 유니폼을 입고는 마지막으로 큰 활약을 했다. 출전한 79경기 중 78경기를 선발로 나온 톰슨은 커리어 하이인 21득점 1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짐 팩슨이 평균 19득점으로 뒤를 바짝 쫓았고, 캘빈 냇은 18득점 8리바운드로 부활했다. 포틀랜드는 두 명의 새로운 피로 PG 자리의 구멍을 메웠다: 켈빈 랜지는 뛰어난 스코어러였고 다넬 발렌타인은 체력이 좋았다. 2년차인 랜지는 폭발하면서 16득점 7어시스트를 기록한다. 커밋 워싱턴은 PF 자리를 지켰다. 빌리 레이 베이츠는 개인적인 문제와 한방향만 되는 드리블로 인해 활약이 급격히 감소했다. 이 시즌은 밥 그로스와의 작별이기도 했다. 그로스는 아직 튼튼했지만, 과거에 주위에 있던 강렬하고 재능있는 선수들이 사라지자 전혀 효과적이지 않았다. 포틀랜드 라인업의 새로운 피들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시즌에는 발렌타인 외에도 4명의 루키가 뛰었다 : C 피터 구드문손, 칼 베일리, G 제프 램프, F 피트 버호벤. 정규 로테이션 멤버 중 2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선수는 8년차인 워싱턴과 6년차인 그로스 뿐이었다. 개인의 몇몇 영웅적 활약에도 불구하고 포틀랜드는 42승 40패로 시즌을 마감했고, 우승 이후 처음으로 플옵 진출에 실패했다. 이 시즌의 친선 관계는 일반팬들로부터 사라지고 있었다. 블레이저스는 여전히 포틀랜드의 의식 속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어떤 것도 그것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언급할 때 기쁨에 겨워하기보다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했다. 포틀랜드는 재능을 갖추고 있었지만(항상 자신들의 선수를 응원하는 편인 포틀랜드 팬들의 눈에는 최소한 그랬다), 그것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빌 월튼과의 미적지근한 결별이 있은지 겨우 2년만에, 포틀랜드 주위의 아우성은 "우리는 센터를 얻어야 경쟁할 수 있어!"가 되었다. 팩슨은 백코트에서 위대함의 징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포틀랜드는 PF진이 풍부했다. 포틀랜드는 공격의 중심을 잡아줄 빅맨이 없었다. 포틀랜드가 "한 명만 더 있으면 된다"는 믿음은 다음 몇 시즌 동안 계속된다. 여전히 NBA 학습 곡선의 중간에 있는 포틀랜드 팬들은 압도적인 센터가 굴러들어오기는 불가능하고, 다른 20여개의 팀들도 똑같이 "한 명만 더"인 상태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팬들은 기다리고 소망했다.
1982-83 시즌에는 두 가지 중요한 트레이드가 있었다. 부상에 시달리던 커밋 워싱턴은 육중한 PF 케니 카와 트레이드 되었다. 유망한 스코어러인 켈빈 랜지는 댈러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대신에 C 웨인 쿠퍼와 포틀랜드 역사상 가장 성공한 트레이드 중 하나가 되는 1라운드픽을 받았다(이 픽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다루겠다). 유망한 젊은 PG인 팻 리버도 가세했다. 포틀랜드의 최고 듀오인 팩슨과 냇은 각각 20득점 이상을 하면서 강력함을 증명했다. 3번째부터 7번째 선수 - 톰슨, 발렌타인, 카, 쿠퍼, 리버 - 까지는 합격선이었다. 나머지 선수들은 재앙이었다. 열성적인 팬들조차도 돈 부스나 제프 저킨스 같은 선수들로부터 많은 흥분을 찾기는 어려웠다. 사실 시즌 중에 가장 힘이 나는 소식은 팩슨의 올스타 선정이었다. 올스타의 영예는 5년 전에는 흔해빠졌지만 지금은 하나뿐이었다. 포틀랜드는 시애틀을 2승 1패로 물리치면서 끝내 1라운드를 통과했지만, 쇼타임으로 빠르게 떠오르던 레이커스의 칼날과 마주친다. 1승 4패의 참패에 이어 카림 압둘 자바에 맞설 센터에 대한 요구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가까운 시일 내에는 해답이 없었다.
로테이션의 top 7은 1983-84 시즌에
그대로 남았다. 팩슨은 다시 한번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냇은 다시 성적이 떨어졌다. 톰슨은 그대로 정체되어 있었다. PG진의 팻
리버와 다넬 발렌타인은 둘 다 잘했지만, 출전시간을 나누느라 방해를 받았다. 둘 다 벤치로 갈만큼 못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쪽도
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만큼 잘 하지는 못했다. 휴스턴 대학 출신의 드래프티가 유일하게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6-7의
G-F는 슛폼이 굉장히 거칠었지만, 빌리 레이가 오픈 코트에서 해오던 것보다도 훨씬 높이 날아서 덩크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클라이드 드렉슬러. 운동능력에도 불구하고, 드렉슬러는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한 팩슨에게 가려 평균 17분만을 뛰었고, 또한 잭 램지
스타일의 플레이를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몇몇 순간에는... 와우. 포틀랜드는 이 그룹으로 48승으로 향상되었고 우승 시대
이후 최고점을 찍었지만, 1라운드에서 피닉스 선즈에게 2승 3패로 밀려 탈락했다. 스토리는 익숙했다 : 재능과 몇몇 헌신이
있지만, 항상 중요할 때는 한 경기가 모자랐다. 포틀랜드 팬들은 이 이야기가 바뀔 수 있는지 진지하게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구단 역사상 최대의 실수와 영광을 비롯한 엄청난 변화가 몇주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아는 팬들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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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팩슨이 블레이져 출신이었군요. 블레이져에서 오래 뛰었나요? 시카고는 언제 옮겨서 얼마나 뛴가요?
아마 존 팩슨을 말씀하시는거 같네요. 본문에 나온 팩슨은 '짐 팩슨'으로 존 팩슨의 형이고, 포틀랜드에서 선수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포틀랜드의 3가지 가정 ...포틀랜드가 모제스 말론을 지켰다면? 84년에 조던이나 하킴아니면 바클리를 뽑았다면? 사보니스와 벅윌리엄스가 몇년만 일찍 합류했다면?
여러 가지로 빅맨과는 참 인연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_-
포틀랜드 구단은 우승을 했던 77년 당시와 우승권이었던 90년대 초반을 제외하면, 항상 재능이 괜찮고 고만고만한 인재들과 유망주들만 모아놓은 집단소 같은 느낌을 줍니다. 어떻게 세월이 많이 지나도 이런 팀칼라에 전혀 변화가 없는 지... 비슷한 롤에 포지션이 겹치는 유능한 선수들 모아놓기를 취미로 삼는 팀 같기도 하고 말이죠.-_-;)
네.. 말씀하신대로 재능이 부족했던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걸 융합시키는데는 참 서툴렀던거 같습니다;;
빌 월튼의 전성기가 좀 더 길었거나, 사보니스가 조금 일찍 왔거나... 했다면, 그런 많은 재능들을 융합시키는 기둥과 버팀목으로서의 역할들을 잘 해줬을 텐데요.
저는 그게 포틀랜드에 매력 같애여.. 꼭 열매를 맺을것 같은데 안터진다는게 문제지만.. 그래도 포틀랜드경기는 재밌드라구여. 어떤팀이랑 붙어도 아슬아슬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