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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러셀은 공격에서 아주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이게 역사적으로 러셀이 부당하게 취급받는 부분이다.
70 시즌 닉스와 77시즌 빌 월튼의 이타적인 패스 게임과 웨스 언셀드의 역대 최고 아웃렛 패스는 칭송하면서
빌 러셀이 리그 역사상 두번째 등장한 훌륭한 패싱 센터라는건 언급되지 않는다.
(월튼은 77 플레이오프에서 경기당 5.5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러셀은 플레이오프에서 경기당 평균 어시스트를 5개 이상 기록한 시즌이 7번이나 된다.
더군다나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시스트 기록을 얻기가 힘든 때였다.
러셀은 플레이오프에서 30경기 이상 뛴 센터 중 평균 어시스트 (4.7) 가 가장 높다.)
쿠지가 은퇴한 후 셀틱스에는 PG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하프코트 공격이 러셀을 통해 진행됐다.
러셀의 경기를 보면 수비 만큼이나 패스도 두드러져 보인다.
러셀은 컷인 하는 선수에게 레이업 기회를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블럭이나 리바운드 후 달려나가는 가드를 찾아 속공 기회를 만들어줬다.
하블리첵은 그의 자서전에서 러셀이 은퇴한 다음 시즌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우린 여러 가지 면에서 러셀의 빈자리를 아쉬워했다.
사람들은 러셀을 수비와 리바운드에 대해서만 생각하지만 그는 우리 공격의 핵심이었다.
그는 내가 같이 뛰어봤던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훌륭한 패스를 던져줬다.
이건 넬슨, 하웰, 지그프리드, 샌더스, 나 모두에게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들 중 누구도 일대일 공격을 하는 선수가 아니었고
러셀 덕분에 우린 더 나은 공격수가 될 수 있었다.
그의 패싱, 스크린, 일반적인 공격 예측 능력은 언제나 과소평가 받았다."
3. 통계적으로 월트가 러셀을 압도했다.
월트의 첫 9년 동안 공격 기록은 그 무엇과도 비교가 안된다.
그는 신인 때 평균 37.6점 27.6 리바운드를 기록했고
그 후 38.4점 27.2 리바운드
44.8점 24.3 리바운드
36.9점 22.3 리바운드
34.7점 22.9 리바운드
66 시즌엔 33.5점 24.6 리바운드 5.3 어시스트
67 시즌 24.1점 24.2점 7.8 어시스트 FG% 68.3%
68 시즌 24.3점 23.8리바운드 8.6 어시스트 (리그 1위) 를 기록했다.
그는 커리어 평균 30.1점 22.9 리바운드 4.4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기록만으로 보면 이건 정말 놀랍다
(밥 쿠지는 이 기록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는 1964년에 쓴 자서전 The Last Loud Roar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 농구는 팀 스포츠다.
챔벌린이 필라델피아에 온 이후 처럼 농구가 일인 활동이 되어버리면 이건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다.
9명의 다른 선수들이 한 명의 선수를 위해 자기 자신과 자신의 능력을 묻어버려서는 안된다.
특히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양보한 대상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때 그러지 않는다면 이건 엉망이 되어버린다.
챔벌린이 부족한 팀 동료들의 역량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50% 이상의 확률로 슛을 성공시키는 선수가 있다면 왜 그 선수에게 더 공을 주지 않느냐는 얘기가 나온다.
그럼 난 왜 다른 선수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슛을 시도하도록 하나고 해주고 싶다.
농구에서 통계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러셀은 리바운드 말고는 월트와 비교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
러셀은 커리어 동안 평균 15.1점 22.5 리바운드 4.3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60 시즌 (18.2점 24 리바운드) 과 64 시즌 (15점 24.7 리바운드 4.7 어시스트) 에 최고 기록을 냈다.
둘이 상대했을 때 월트는 개인기록에서 러셀을 압도했다.
하지만 아워벡이나 다른 보스턴 동료들은 러셀이 처음 3 쿼터 동안은 힘을 아끼면서 월트가 맘대로 기록을 쌓도록 놔두다가
4쿼터에 그를 무력화시켰다고 할거다.
또한 러셀은 승패가 결정난 경기에서는 느긋하게 경기하며 의미없는 개인 기록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반면 월트는 개인기록에 집착했다)
러셀은 커리어 마지막 10년 동안 911 경기를 뛰었고 그 중 무려 142 경기 (15.6%)가 월트의 팀을 상대로 한거였다.
플레이오프를 포함한 그 142 경기에서의 성적이다.
월트: 28.7점, 28.7 리바운드
러셀: 14.5점, 23.7 리바운드
이것만 보면 비교도 안된다고 생각할거다. 그럼 이건 어떨까?
월트 팀의 성적: 58승 84패
러셀 팀의 성적: 84승 58패
그럼 두 선수의 커리어 플레이오프 성적을 보자.
월트: 160 경기, 22.5점, 24.5 리바운드, 4.2 어시스트, 52% FG, 47% FT
러셀: 165 경기, 16.2점, 24.9 리바운드, 4.7 어시스트, 43% FG, 60% FT
(역주: 좀 더 자세히 기록을 보기 위해 시즌별로 살펴보죠.
월트
1960: 37.6 P, 27 R, 2.3 A, 46.1% FG, 58.2% FT, 플레이오프 9 경기, 33.2 P, 25.8 R, 2.1 A, 49.6% FG, 44.5% FT
1961: 38.4 P, 27.2 R, 1.9 A, 50.9% FG, 50.4% FT, 플레이오프 3 경기, 37 P, 23 R, 2 A, 46.9% FG, 55.3% FT
1962: 50.4 P, 25.7 R, 2.4 A, 50.6% FG, 61.3% FT, 플레이오프 12 경기, 35 P, 26.6 R, 3.1 A, 46.7% FG, 63.6% FT
1963: 44.8 P, 24.3 R, 3.4 A, 52.8% FG, 59.3% FT, 플레이오프 탈락
1964: 36.9 P, 22.3 R, 5 A, 52.4 % FG, 53.1 FT, 플레이오프 12 경기, 34.7P, 25.2 R, 3.3 A, 54.3% FG, 47.5% FT
1965: 34.7 P, 22.9 R, 3.4 A, 51% FG, 46.4% FT, 플레이오프 11 경기, 29.3 P, 27.2 R, 4.4 A, 53% FG, 55.9% FT
1966: 33.5 P, 24.6 R, 5.2 A, 54% FG, 51.3% FT, 플레이오프 5 경기, 28 P, 30.2 R, 3 A, 50.9% FG, 41.2% FT
1967: 24.1 P, 24.2 R, 7.8 A, 68.3% FG, 44.1% FT, 플레이오프 15 경기, 21.7 P, 29.1 R, 9 A, 57.9% FG, 38.8% FT
1968: 24.3 P, 23.8 R, 8.6 A, 59.5% FG, 38% FT, 플레이오프 13 경기, 23.7 P, 24.7 R, 6.5 A, 53.4% FG, 38% FT
1969: 20.5 P, 21.1 R, 4.5 A, 58.3% FG, 44.6% FT, 플레이오프 18 경기, 13.9 P, 24.7 R, 2.6 A, 54.5% FG, 39.2% FT
1970: 27.3 P, 18.4 R, 4.1 A, 56.8% FG, 44.6% FT, 플레이오프 18 경기, 22.1 P, 22.2 R, 4.5 A, 54.9% FG, 40.6% FT
1971: 20.7 P, 18.2 R, 4.3 A, 54.5% FG, 53.8% FT, 플레이오프 12 경기, 18.3 P, 20.2 R, 4.4 A, 45.5% FG, 51.5% FT
1972: 14.8 P, 19.2 R, 4 A, 64.9% FG, 42.2% FT, 플레이오프 15 경기, 14.7 P, 21 R, 3.3 A, 56.3% FG, 49.2% FT
1973: 13.2 P, 18.6 R, 4.5 A, 72.7% FG, 51% FT, 플레이오프 17 경기, 10.4 P, 22.5 R, 3.5 A, 55.2% FG, 50% FT
거의 매 시즌 플레이오프 성적이 정규시즌 보다 떨어집니다.
물론, 이건 대부분 선수에게서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지만
월트의 경우는 좀 정도가 심합니다.
커리어 평균득점이 정규시즌엔 30.1점, 플레이오프엔 22.5점 입니다.
뿐만 아니라 슛율과 자유투율 모두 54% -> 52.2%, 51.1% -> 46.5% 로 다소 하락이 있습니다.
반면에 리바운드는 22.9에서 24.5로 늘어났습니다. (출장시간당 리바운드를 봐도 플레이오프 기록이 더 높습니다)
평균 득점의 경우 슛 시도가 줄어들어 평균 득점이 줄어든 67 시즌 이후에 플레이오프 출장 경기수가 늘어난 영향도 있긴 한데
66 시즌까지 정규시즌 평균 39.6점, 플레이오프 32.9점
67 시즌 이후 정규시즌 평균 19.8점, 플레이오프 17.6점 으로
커리어 전체 기록을 봤을 때 보단 정도가 줄어들어도
플레이오프에서의 기록 하락은 분명히 있습니다.
비교를 위해 몇 몇 선수들을 보면,
압둘자바 정규시즌 24.1점, 55.9% FG, 플레이오프 24.3점, 53.3% FG
오닐 정규시즌 23.7점, 58.2% FG, 플레이오프 24.3점, 56.3% FG
올라주원 정규시즌 21.8점, 51.2% FG, 플레이오프 25.9점, 52.8% FG
로빈슨 정규시즌 21.1점 51.8% FG, 플레이오프 18.1점, 47.9% FG
모제스 말론 정규시즌 20.3점, 49.5% FG, 플레이오프 22.1점, 48.7% FG
러셀의 경우는 커리어 동안 기록에 큰 변화가 없고 매 시즌 플레이오프 출장 경기 수가 거의 일정하기 때문에
따로 시즌별 분석은 안하겠습니다.
러셀은 13시즌 뛰고 월트는 14시즌 뛰었는데 그 영향도 그리 크진 않습니다.
챔벌린의 첫 13 시즌만 고려해보면
정규시즌 31.5점, 플레이오프 24점 입니다.
67-72 시즌만 보면 정규시즌 21.1점, 플레이오프 18.9점 입니다.)
흠, 러셀의 기록은 올라갔고 월트의 기록은 정작 중요한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내려갔다.
월트는 팀의 첫번째 공격옵션이고 러셀은 네번째나 다섯번째 인데도 말이다.
물론 월트는 러셀보다 경기당 6점을 더 기록했다.
하지만 그 외 나머지 것들은 모두 비슷하고
러셀은 훨씬 뛰어난 수비수, 팀 동료, 농구 지식인에다 크런치 타임 선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겨졌다.
월트의 컨퍼런스 파이널과 NBA 결승에서의 팀 성적: 48승 44패
러셀의 컨퍼런스 파이널과 NBA 결승에서의 팀 성적: 90승 53패
월트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의 팀 성적: 4승 5패
러셀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의 팀 성적: 10승 무패
월트의 플레이오프 탈락 상황에서의 팀 성적: 10승 11패
러셀의 플레이오프 탈락 상황에서의 팀 성적: 16승 2패
그리고 마지막으로
월트: 2회 우승
러셀: 11회 우승 (게다가 러셀의 마지막 두 번 우승은 선수겸 감독으로서의 우승이었다)
통계적으로 보면 월트는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규시즌 선수였다.
난 그 사실은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그렇게 대단하진 않았다.
또한 셀틱스는 러셀의 득점이 필요 없었기 때문에 러셀은 자신의 에너지를
골밑을 지키고, 헬프 수비를 나가고, 리바운드를 잡고, 팀 동료들에게 좋은 슛 기회를 만들어주고, 속공 때 뛰어 나가는데 썼다.
러셀은 역사상 가장 지배적인 수비수가 되었고 (아무도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 영향력은 통계로 계산할 수가 없다.
(Terry Pluto의 Tall Tales라는 책에서 탐 하인슨은 러셀의 수비가 경기당 60-70점의 가치가 있다고 했다.
물론, 이 얘기를 한 사람이 하인슨이란걸 감안해야겠지만.)
러셀은 골밑의 넓은 지역을 삼켜버렸고, 모든 돌파하는 선수들을 다루며 블럭한 공의 소유권을 차지하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줬다.
월트는 극적인 영향을 발휘하기 위해 마치 배구 하듯이 슛을 블럭하는걸로 유명했던데 반해
러셀은 블럭한 공을 팀 동료에게 보내서 속공 기회를 만들곤 했다.
이게 공수에서 4점짜리 효과를 냈을 뿐만 아니라
아워벡의 셀틱스 팀은 이 4점 효과에 기반해 만들어진 팀이었다.
셀틱스는 이런 방식으로 득점을 했고, 이 덕분에 계속 승리할 수 있었다.
셀틱스에는 속공을 유발시킬 최고의 센터가 있었고 속공을 수행해낼 최고의 조연들이 있었다.
상대팀은 결국 러셀을 뚫는것을 포기하고 외곽슛만 던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때는 끔찍할 정도로 외곽 슛이 형편없던 시대였다
(이 때는 3점슛도 없었고, 점프슛이 제대로 자리잡기 전이었다.
50년대 전성기를 보낸 위대한 가드들의 커리어 슛율은
쿠지 37.5%, 샤먼 42.6%, 슬레이터 마틴 36%, Bob Davis 37%, Guy Rodgers 38%, Richie Guerin 42%, Dick McGuire 39% 였다.
Sam Jones, Jerry West, Hal Greer가 나타났을 때야 비로서 초기 SG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외곽슛 전문가는 70년대 중반에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골밑을 지키는 수비수는 이 때 당시 더욱 커다란 효과를 가졌었다)
더군다나 보스턴의 공격수들은 뒤에 러셀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수비시에 힘을 아낄 수 있었다.
이건 쿠지, 샤먼, 하인슨, 샘 존스 같은 공격 위주 선수들에게는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이 영향력을 통계적으로 집계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이건 불가능하다.
NBA는 1973 시즌부터나 블럭을 집계했으니 수비에서 러셀의 지배력을 수치적으로 입증하는건 불가능하다.
이건 마치 득점을 집계 안하면서 챔벌린의 공격시 지배력을 측정하려 하는거나 마찬가지다.
월트는 러셀과 비슷한 숫자 만큼 리바운드를 잡았고, 아마도 러셀 빼고는 그 누구보다도 많이 블럭을 했을거다.
하지만 월트의 수비력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러셀과 비교가 안된다.
첫째, 월트는 러셀 같은 타고난 점퍼가 아니었다.
월트는 몸무게가 훨씬 더 많이 나갔기 때문에 점프할 때 마다 발 자세를 잡고 무릎을 굽힌 후 점프해야 했다.
반면 러셀은 무릎을 굽히지 않고도 한 플레이에서 여러 번 연속으로 점프를 할 수 있었다.
(많은 상대 선수들은 월트의 점프 타이밍을 익혀 월트의 손에 안닿는 높이로 플로터를 던지곤 했다.
샘 존스는 이 슛을 던질 때 마다 "너무 늦었어" 라거나 "미안, 월트" 라며 월트를 놀리곤 했다.
한 번은 화가난 월트가 존스를 향해 뛰어들어 둘이 경기장 안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였고
존스가 사진기자용 의자를 집어들어 몸을 방어한 적이 있었다.)
둘째, 월트는 커리어 내내 한 번도 파울아웃되지 않는 기이한 기록을 이어나가는데 집착했고
그 때문에 네번째나 다섯번째 파울을 범한 다음 부터는 수비를 그만두고 팀에 해를 끼쳤다.
(이건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다.
존 하블리첵은 그의 자서전 Hondo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월트의 가장 괴상한 기행은 파울아웃되지 않으려 한거였다.
월트는 고등학교 때 부터 프로 까지 단 한 번도 파울아웃되지 않았고 이걸 계속 이어나가려 했다.
그가 네번째 파울을 하고 나면 갑자기 그의 경기 내용은 바뀌어 버렸다.
그 때문에 그의 팀은 수 많은 승리를 놓쳐야만 했다.")
월트는 승리보다 개인 기록에 더 신경썼다.
만일 60년대에도 블럭을 집계했다면 월트는 블럭 숫자에 집착해서
파울아웃되지 않는 기록 따위는 무시해버리고 의도치 않게 지배적인 수비수가 됐을거다.
그리고는 2개가 아니라 5개나 6개 반지를 얻게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엔 수비 통계를 집계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월트는 공격 기록을 쌓는데만 열중하며 멍청한 기록을 이어나가려 노력했다.
월트는 67 시즌에서야 비로서 그가 리바운드, 패스, 수비에 집중하면 팀이 더 나아질거라는걸 깨닫게 됐다.
월트는 그의 자서전 Wilt: Just like any other 7-foot black millionaire who lives next door 에서 그 깨달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67 시즌이 시작했을 때 난 30살이 됐고 한 사람으로서 더 성장하며
팀이 이기기 위해선 동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한다는게 깨닫게 됐다.
난 더 많이 패스하고 득점을 줄이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내외적으로 동료들에 대한 칭찬도 하기 시작했다.
난 이게 OJ 심슨의 USC나 빌 월튼의 UCLA 팀의 성공 원동력이란걸 깨달았다.
Joe Namath의 Jets도 마찬가지다.
OJ, 빌, 조는 항상 동료들을 칭찬한다.
그들은 중요한 어시스트나 수비 플레이를 한 선수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했다가
그 선수나 언론에게 이에 대해 얘기하곤 한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떠들어대고 동료들을 무시해서 그들을 실망시키는 대신 이렇게 동료들을 칭찬해주면
그들은 다음 경기에선 더욱 열심히 뛰게 된다.
난 이걸 1966 년에 이걸 깨닫게 됐고 이건 내 기록에 반영돼 나타났다.
내가 40점을 넣는 대신, 우린 팀은 균형있는 득점을 하게 됐다.
Hal Greer는 평균 22.1점을 기록했고, Chet은 19.3점, Billy는 18.5점, Luke Jackson과 Wali Jones도 두자리수 득점을 기록하게 됐다.
바로 이런게 보스턴이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이다."
월트가 이타주의를 받아들이고 첫번째 우승을 한 후
(전형적인 월트 방식으로) 월트는 승리에 흥미를 잃고 어시스트 숫자에 집착하게 됐다.
갑자기 월트는 자신의 쉬운 슛 기회를 지나치는 대신 팀 동료들의 슛 기회를 만들어주기 시작했고
경기 중에 계속 기록을 확인하며 어시스트 기록이 안돼있으면 기록원에게 화를 냈다.
또 자기가 패스해준 슛을 놓치면 팀 동료들을 비난했고
68 시즌에 리그에서 총 어시스트 숫자 1위를 한 것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기뻐했다
(월트는 이 기록을 그 어떤 것 보다도 더 자랑했다.
Bill Libby가 1977년에 출간한 월트의 전기 Goliath 을 보자.
" 여러번 월트는 슛감이 좋은 동료에게 가서 그에게만 패스를 해주겠다고 얘기했다.
다른 선수들은 자기의 패스를 낭비하고 있고 이런 식으로는 어시스트 1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또한 이 책에는 이런 얘기도 있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숫자의 선수들이나 기자들이
월트가 여자와 함께 있는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역주: 빌 시먼스는 월트가 자기가 게이인걸 감추기 위해 2만 명이나 되는 여자와 잔거라고 자랑한거라는 음모론을 펴곤 합니다))
월트는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데 실패하고 지나치게 이타적인 플레이를 하는 나쁜 버릇을 기르게 됐다.
그래서는 보스턴과의 플레이오프 7차전 후반에 동료들이 그의 주위에서 허둥대고 있는데도 슛을 두 개만 시도하기도 했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68시즌 식서스는 3-1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7차전에 홈에서 졌다.
그러나 월트는 그의 책에서
"할은 슛 25개 중 8개 밖에 성공시키지 못했고, 월리는 22개 중 8개, 마티는 10개 중 2개, Chet은 22개 중 8개 밖에 성공시키지 못했다.
이 네 명이 우리 팀의 대부분의 슛을 던졌지만 슛 시도 중 1/3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런데도 내가 비난을 들어야 했다."
라며 동료들을 비난했다.
월튼, 나마스, 심슨으로 부터의 교훈은 다 사라졌다.
러셀, 챔벌린, 통계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월트의 팀은 그의 공격력에 촛점을 맞췄고, 러셀의 팀은 그의 수비력에 촛점을 맞췄다.
월트는 동료들과 공존했을 뿐이고 러셀은 동료들을 더욱 성장시켜줬다.
월트는 이타적인 플레이를 하고 괜찮은 동료인 척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러셀의 존재는 그의 이타적인 행동과 팀 플레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
결국, 러셀의 팀은 11번 우승했고 월트의 팀은 2번 우승했다.
이게 의미를 가지는 유일한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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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부분에선 오히려 윌트의 얘기가 더욱 재밌네요. 내용의 호불호 여부를 떠나 저에게는 너무나 새롭고 재밌는 내용입니다. 덕분에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머즐님.^^
정규시즌과 플옵의 평득 비교는 좀 불합리한 면이 있네요. 체임벌린이 괴물스런 득점을 하던 60년대 초중반의 플옵 경기수에 비해서 득점 욕심을 버린 이후의 플옵 경기수가 훨씬 많은데, 단순하게 평균 득점만 가지고 비교를 하면 체임벌린에게 너무 불리하죠. 전반적으로 플옵에서 득점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위에 제시된 숫자는 과도하게 체임벌린을 평가절하 시키는군요.
그래서 제가 그 점에 대해서는 따로 썼는데
그런 면을 감안한다 해도 다른 레전드급 센터들에 비해
플레이오프 성적이 많이 하락한건 사실입니다
아무리 봐도 시먼즈는 체임벌린에 대해 분명히 편견과 악의를 가지고 있네요. 코비에 대해서 별소리 다하고 다닐때부터 원래 이런 사람이란걸 알긴 했지만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2만명설이 게이임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라니ㅡ.ㅡ 체임벌린이 여자와 함께 있는걸 보지 못한 기자가 많다구요? 당연히 같이 있는걸 본 기자보다는 안본 기자가 더 많겠죠. 체임벌린은 데이트 상대로 백인여성을 선호했는데 당시 미국의 사회 분위기상 흑인남성이 백인여성과 대놓고 데이트하고 다니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엘에이 같은 몇몇 지방을 제외하고 말이죠. 자연스레 체임벌린은 공개적인 데이트를 꺼렸죠. 많은 친구들이 체임벌린이 얼마나 많
은 여성들과 사귀었는지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와이로 휴가를 같이 갔던 한 친구가 회상하기를 "그는 거기서 하루에 두명꼴로 다른 여성들과 잠자리에 들곤 했다. 숫자상으로 계산하면 2만명설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라고 한 얘기도 있고... 시먼즈 이 사람이 글을 재밌게 쓰는건 분명하지만 자기가 싫어하는 선수는 정말 철저하게 까내리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쭉 읽긴 했지만 솔직히 감독들에게 윌트와 러셀중에 한명을 뽑으라고 하면 10명중 9명은 윌트를 뽑지 않을까요? 제가 보는 시각입장에선 동료를 잘만난것도 복이죠. 농구는 혼자서 잘하는거보다 2~3명이 잘하는게 헐씬 보탬이 되니깐요. 윌트와 러셀이 팀을 바꿧다면.... 솔직히 개인적인 생각에선 비교가 안됫을꺼 같아서요. 물론 맨탈적인 면에선 러셀이 헐씬 좋아요.
과연 그럴까요? 무려 11번을 우승한 러셀입니다. 아무리 팀동료복이 좋아도 저 정도의 업적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윌트가 개인능력은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윌트가 갔으면 11번이나 우승했을수도 있고 못했을수도 있습니다. 아니 윌트가 총 14시즌을 뛰었으니 러셀과 비교도 안되게 잘하려면 신인때부터 은퇴때까지 모두 우승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그렇다하더라도 비교는 되네요. 이 글이 지나치게 윌트를 깎아내린 흔적은 분명히 보이지만 그렇다고 11회의 우승의 업적을 너무 비하하시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글쎄요 .당시 감독들이라면 10에 9명은 러셀을 택할듯.요즘은 모르겠네요.
팀 칼라와 전술, 선수들 구성도에 따라 감독들의 선호도도 바뀌겠죠?
체임벌린, 모제스 말론, 샤킬 오닐처럼 MDE로서 골밑을 초토화시키는 빅맨이 취향에 맞을 수도 있겠고, 빌 러셀, 빌 월튼, 팀 덩컨처럼 공격력을 갖추되 수비와 패싱력, 스크린 서는 기술 등으로 팀원들 전체의 기량을 끌어올리는 스타일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전자쪽 선수들도 매우 좋아하지만, 저보고 팀을 꾸리라고 하면 후자쪽 선수들 중심으로 팀을 짤 것 같습니다.
체임벌린도 커리어 후반기엔 후자쪽이었죠.
러셀이 감독하고 윌트를 뽑으면 어떨까요?
실제로 71-72 시즌을 앞두고 빌 러셀과 보스턴 왕조를 이끌었던 명가드 출신의 빌 샤만 씨가 레이커스의 감독이 되자, 체임벌린은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빌 러셀과 똑같은 스타일의 농구를 펼치며 팀을 33연승과 우승으로 이끌었죠.
체임벌린이 러셀 스타일의 농구를 할 줄 몰라서 안 한 것이 아니고, 본인의 재능과 능력이 너무도 엄청 나서 그런 제한된(?) 롤을 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는 한 예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than 아닐까요?
then 입니다
러셀, (그 다음이) 윌트 ... 라는 뜻이죠.
아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