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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민수기 21,4ㄴ-9 요한 3,13-17
십자가의 거울 효과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상징적 비유가 오늘 독서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모세를 따르다가 불평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뱀을 보내어 물어
죽이게 하셨습니다.
뱀이 곧 불평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 물려 살려달라고 청하자, 하느님은 모세에게 장대에 구리뱀을 매달도록 하시고 그것을 보는 이마다 치유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뱀에 물린 이들을 위해 매단 짐승은 뱀이었습니다.
만약 다른 동물이 매달렸다면 어땠을까요?
전갈을 매달았으면 어떨까요? 양이나 소를 매달면 어떨까요? 그것이 분명 죗값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원인은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고 자기가 지은 죄만을 씻으려 할 것입니다.
죄의 원인이 씻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뱀이 죽지 않으면 죄를 지어도 죄인 줄도 모릅니다.
뱀이 모든 죄를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뱀이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죄는 죄를 짓게 만드는 자기가 뱀임을 볼 때 비로소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뱀이 되기를 원치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어느 신문에서 전과자들의 간담회를 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절도 전과자들은 자신의 경험담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때 멈칫하게 하거나 절도를 포기하고 나오게 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한 명의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주인이 코를 골고 자면 도둑질하기에 아주 편합니다.
코 고는 소리에 맞추어 한 발짝씩 떼어 놓으면 행진곡에 맞추어 입장하듯이 들킬 염려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이 너무 고요하면 그냥 포기하고 나오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난 도둑질하러 들어갔을 때, 그 집 현관에 놓여있는 신발들이 가지런하면 긴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흐트러져 있으면 내 집같이 마음 놓고 들어갑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거든요.”
어떤 전과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도둑질하다가 뛰쳐나온 적이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칼을 빼 들었죠. 근데 그 괴한도 칼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괴한이 저라는 것을. 그날은 도둑질 할 수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거울’입니다.
카지노에는 거울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죄에 빠져있을 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자아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본 모습이 드러나게 만드는 거울입니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순결했던 주인공은 ‘창녀’라고 써진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해 그 글자를 지웁니다.
하지만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악해지기로 했을 때는 거울을 당당히 바라봅니다.
자기의 모습이 뱀이어도 상관없다고 할 때 죄는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거울을 비추어주심으로 자아의 참모습을 보여주시며 기회를 주십니다.
저희 어머니도 고아로 남의 집에서 일만 죽도록 하고 매도 죽도록 맞으며 자라서 다 죽이고
자신도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불평하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때 바다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촌으로 가시는 것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나병 환자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냐?”
예수님은 당신이 안 해줘서가 아니라 자아가 불평 자체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다시 살 힘을 얻으셨습니다. 모든 죄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보지 못하면
죄는 영원히 계속됩니다.
십자가를 보며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지은 죄들을 보속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속하는 것입니다.
내 죗값은 두 배나 네 배로 갚아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죗값이 아니라 ‘나’를 보속하셨습니다.
나가 곧 죄이고 나가 죽기 전까지는 죄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없애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내가 죽는다면 비로소 자동적으로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가 뱀의 모습으로 우리 자아의 거울이 되어주셔야 했을까요?
다른 사람이면 안 됐을까요?
안 됩니다. 뱀만 죽이면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만 자아가 죽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초기에 사목할 때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가출 청소년들을 데려다 키웠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이었고 전과자들이었습니다. 처음엔 박 목사를 칼로 찌르려고 했는데 “조금 있다 찌르고 내 말 좀 들어봐라!”라며 복음을 전해 거둬들인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너무 없어, 라면 하나를 끓여 7~8명이 나누어 먹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배고픔을 못 이겨 도둑질하였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이유는 그들이 도둑질하고 온 돈을 십일조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발각이 되었을 때는 목사님이 직접 가서 아이들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싹싹 빌었습니다.
어떤 때는 술에 취한 주인에게 매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목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때뿐이었고 배고프면 또 도둑질하러 갔습니다.
그날도 주인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나오는데 아이들은 심각하지 않은 듯 자기들끼리 웃고
농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안 되겠다 싶어 박 목사는 교회에서 한 아이를 세워놓고 쇠파이프 막대기로 힘껏 때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막대기를 들려주며 “너희들이 나를 10대씩 때려라.
대신 9대 때렸다가 마지막 1대라도 살살 때리면 다시 때리게 할 테니 힘껏 때려라.” 라고 말했습니다.
두 아이에게 20대를 맞았는데 박 목사는 너무 아파서 마음속으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너무 아파요. 더 못 맞겠어요.”
박 목사는 세 번째 아이가 죄송하다며 때린 매에 허리 밑 꼬리뼈를 맞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매를 맞았고 그렇게 80대를 맞았습니다.
박 목사는 그 일로 거의 한 달 동안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허리가 안 좋아 항상 뜨거운 팩을 붙이고 다녀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되지 않던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더는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박 목사가 아이들에게 “왜 나를 때리고 나서 너희들이 변화되었느냐?”라고 물으니, “세상이 다 가짜인 줄 알았는데 매를 맞고 뒹구는 목사님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자기들 때문에 허리가 부러진 한 목사를 본 것입니다.
자기가 맞아야 할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목사님에게서 본 것입니다.
박 목사를 통해 자기 자아만 본 것이 아니라 그 목사가 자신들과 하나가 되며 자신들도 그 목사만큼이나 대단한 존재였음을 본 것입니다.
만약 박 목사가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이 사랑하는 강아지를 죽이라고 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죄는 볼 수 있지만, 죄가 가리고 있는 그들의 본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그냥 강아지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죽인다면 어떨까요?
‘내가 그리스도인데 지금 뱀과 뭐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죄에서 해방해 주기 위해서는 그 거울 뒷면에 “넌 본래 그렇게 살 존재가 아니었어!”라는 말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울을 보며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원리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내 죄를 대신해서 보속하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 봐야 또 죄를 짓습니다.
존엄한 존재였다가 처참하게 깨진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 뱀이 나의 하느님과 같은 존귀한 모습을 잃어버리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던 이유입니다.
나는 본래 하느님의 자녀였는데 내 안의 뱀이 나를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버렸음을.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복음: 요한 3,13-17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깊이 새겨져 있는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십자가라는 화두로 묵상을 해봅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없는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꿈꾸지만, 우리네 인간 현실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너나할 것 없이 각자 등에는 저마다의 십자가 하나씩 짊어지고 때로 헐떡이며, 때로 용기를 내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기쁨과 슬픔, 고통과 행복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돌아보니 행복과 불행이 끝도 없이 교차해온 나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영광과 승리로 가득했던 출애굽은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즉시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척박한 사막과 기약 없는 대규모 공동체 생활, 배고픔과 갈증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
보십시오. 우리네 지상 인생 여정은 그 누구든 어쩔 수 없습니다.
결핍과 고통 투성이입니다.
근원적 갈증과 배고픔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너그러운 마음이요, 고개를 들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대함입니다.
가끔 기가 막힌 이웃을 만납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꼬인 인생이 다 있는지?
저런 상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분들 앞에 뭐라 위로의 말을 드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면, 주님께 매달리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뭔가 상황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삶은 여전히 거기서 거긴 분들 앞에 그저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만을 바라시는 분이요 우리를 축복하는 하느님이라 믿었는데,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요, 십자가 투성이인 우리네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게는 하나의 큰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답을 가르쳐 주시더군요. 우리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만사형통, 승승장구,
지속적인 현세 축복을 외치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의 지상에서의 삶 전체를 통해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추종의 대상인 예수님부터 고난의 인간, 배척당하는 인간, 십자가 죽음을 넘어서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운명을 타고 나셨음을 스스로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운명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처럼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때로 배척을 받고, 때로 죽음과도 같은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부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교는 고통과 십자가 없는 부활을 절대로 외쳐서는 안 됩니다.
희생과 시련은 거부하고 달콤함과 안락함만을 보장하는 교회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고통과 십자가를 소중히 여기며 고통과 십자가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지속적으로 찾아 나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왕이면 져야 할 십자가라면 기꺼이, 관대하게 지고 갈 때 생기는 한 가지 특별한 현상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십자가가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이요 은총이요 축복으로 변화되는 느낌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강론>
(2024. 9. 14. 토)(요한 3,13-17)
<십자가 앞에서 첫 번째로 할 일은 ‘회개’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3-17).”
1)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고통과 죽음만 보지만, 신앙인들은 십자가에서 부활, 생명, 구원을 봅니다.
믿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고,
‘하느님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된 종교입니다.
부활신앙이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앙이고, 신앙의 핵심이고, 신앙의 목적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떤 장애인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 준 다음에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0-12).”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고,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중간 경유지일 뿐입니다.
마지막 목적지는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도 없습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십자가라는 물건을 경배하는 날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경배하고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2) 하느님의 구원 방식에 대해서, 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방법에 대해서, “왜 ‘십자가를 통해서’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4-15.17-18).”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8-10).”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또 십자가는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그 ‘죽음’이라는 것을 정복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 죽음을 물리치셨다.” 라고 흔히 표현하는데, 실제로는 ‘부활로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4-15.18ㄱ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양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일입니다.
<빼앗긴 일이 아니라, 내준 일입니다.>
이 말씀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라는 말씀에 바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4)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이 곧 진정한 ‘십자가 현양’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