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2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요한 10,1-10
예수님이 목자시라면 나는 양인가? 그럼 문지기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 등장하십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따라갑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헛갈릴 수 없습니다.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부르심은 마치 “마리아야!”라고 예수님께서 부르신 목소리와 같습니다.
이것으로 아이는 어머니의 세상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특징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어머니로 여기는 이들은 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면서 절대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목자는 한 명입니다.
어머니가 하나인 것처럼. 어머니가 여럿일 수 없듯, 아버지께 가는 길도 하나입니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된 어머니를 좇아가면 잘못된 아버지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착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뤄집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풀밭에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양들일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양들이라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른다면 우리는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양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유일한 목자와는 구별되는 일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문지기’입니다.
문지기는 양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께서 불러주시기를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제가 다른 신부님과 몇 명의 평신도분들과 함께 시작한 작은 공동체 모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미사하고 음식을
나누고 삶을 나눕니다.
가끔은 힘든 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가끔은 기쁘게 웃고 떠들기도 합니다.
이 공동체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공동체가 미사를 하고 나눔을 하기에 그 직무를 담당합니다.
미사와 나눔이 빠지면 이 공동체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사제로서 이 공동체의 울타리가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공동체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 아직 세례받지 않은 사람, 혹은 세례받았더라도 오랜 냉담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들은 다양합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불교를 믿던 한 자매가 명동성당에서 교리를 받고 있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자매는 이번 모임 때 30년 만에 고해성사했다고 말했습니다.
부활 전에 모임을 하고 헤어질 때 제가 “이번 부활 땐 꼭 미사 나가세요!”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하나의 명령처럼 들렸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무슨 큰 죄를 지었는지, 혹은 고해성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며 망설였는데 막상 고해성사하고 성체를 영해 보니 그동안의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사실 그 말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30년 만에 성체를 영한 그분은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문지기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름을 불러주실 때까지 양들을 지키는 역할입니다.
공동체가 유지되게 하는 역할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우는 역할은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불린 이는 새롭게 공동체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리나 거짓 목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참 목자에게는 문을 열어주기 위해 기다리는.
저도 교사회를 하다가 교사 피정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뒤돌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묶어 주는 공동체가 없었다면 그 부르심을 받는 게 가능했을까요? 우리에겐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엮어주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이미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부르심을 기다리는 양들이 아닌, 양 우리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22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10,1-10
거짓 목자를 경계합시다!
요즘 주변을 살펴보니 여기저기 거짓 목자, 즉 양들을 섬기고 구원하는 목자가 아닌 잡아먹는 삯꾼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대마귀들이요 악령들입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위장하고 등장해 어린 양떼를 현혹시킵니다.
그들에게 있어 양들을 섬김의 대상이나 사목의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먹잇감이요 욕구충족의 대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분위기는 비슷합니다.
거짓 목자들은 가짜 뉴스를 진짜인 양 목숨 걸고 퍼뜨리고 있습니다.
목자로서의 가장 기본인 인성이나 품위, 겸손의 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천박한 언행과 기이한 억지 논리로 양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베엘제불입니다.
선한 영과 악령을 구분하고자 노력하는 식별력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더 눈을 크게 떠야겠습니다.
거짓 목자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유의해야겠습니다.
홀로 식별이 어려울 때는, 엉뚱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톨릭교회 목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거짓 목자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주님 보시기에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은 거짓 목자, 사이비 지도자들의 위선과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군중은 영적 양식을 조금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고 방향성을 상실한 영적 빈곤의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언자의 경고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며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부적격 목자들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 안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품위 있고 예의 바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받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혹시라도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그런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착한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돈이나 명예, 인기나 허황된 꿈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이 오늘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 양들을 위해 틈만 나면 위로와 격려,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4주간 월요일 강론>
(2024. 4. 22. 월)(요한 10,1-10)
<참 목자이신 주님 말씀만 들어야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0,1-5).”
1) 이 말씀은, 당신만이 ‘참 목자’ 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면서, 동시에 ‘거짓 목자들’을 조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문으로 들어가다.’는 양들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문으로 들어오다.’인데, ‘문으로 들어오신 분’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진짜 메시아“를 뜻하고,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오는 자‘는 “하느님께서 보내시지 않은 가짜 목자와
가짜 예언자, 가짜 메시아”를 뜻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이고, 심지어 자기들을 속량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면서 파멸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들의 방탕한 행실을 본받아,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 탐욕에 빠져, 지어낸 말로 여러분을 속여 착취할 것입니다(2베드 2,1-3ㄱ).”
‘이단, 방탕한 행실, 탐욕, 착취’ 등은, 그자들이 바로 ‘거짓 예언자들이며 거짓 목자들’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요즘에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이비 종교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양이라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입니다.
<세례를 받은 뒤에도 자만하지 말고 성경과 교리를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는 “양이라면 앞장서 가는 목자의 뒤만 따라야 한다.”입니다.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거짓 예언자들, 거짓 목자들, 사이비 종교를 따르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자들의 선전을 듣지 말고, 그자들의 말에 현혹되지 마라.”입니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또는 아무 생각 없이 그자들의 말을 듣다보면,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말씀이 아닌 말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주님의 말씀이 아닌 말들은 듣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리가 들린다고 하더라도 안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여기서 ‘참아 주다.’ 라는 말은, 표현으로는 ‘방치하다.
내버려두다.’이지만, 뜻으로는 ‘들어주다.’입니다.
듣다보면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듣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7-10).”
1) 이 말씀은,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메시아 예수님만이 ‘구원의 문’이며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생명과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2) 예수님 말씀의 ‘문’이라는 말에서 ‘좁은 문’이 연상됩니다(마태 7,13-14).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더라도 그 길과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과 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길과 문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길과 문입니다.
바로 그것을 잘 식별해야 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더라도 사람들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구원의 진리는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