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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5: 30 보내신 이의 뜻대로 - 요 5: 32 증언하시는 이
요 5: 30 보내신 이의 뜻대로 -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이 말씀은 19절의 내용을 결론적으로 재설 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행사, 곧,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신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변증하신 말씀이다.
1]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주의 행사가 정당한 이유는, 그가 자행하시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듣는 대로)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심판한다"는 말(*)이 여기서는 그의 재림시의 종말론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복음을 통하여 살릴 자를 살리시는 주권행위를 가리킨다(3: 18).
2]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하나님의 뜻
* 고후 7: 10-11 –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 살전 4: 3-8 –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 살전 5: 18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벧전 3: 16-17 –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3]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한복음에서는 똑같은 신약의 종말론적인 현상을 요한복음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요한복음 5장 24-30절까지는 지금 현재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구원의 축복은 죽은 자들이 지금 사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과 종말에 있을 완성된 구원과는 어떻게 차이가 있느냐?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신학을 얻게 된다. 우리는 보통 죽음을 무덤에 가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잘 이해를 못한다. 성경적인 언어들을 잘 이해를 못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고 죄인이 죽었다.
이렇게 말한다면 죽은 것은 무덤에 간다는 말인데 죄인이 죽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래서 지어낸 자들이 육신적으로는 살았으나 영적으로는 죽었다라고 설명을 한다. 이것은 좋은 설명이 아니다.
나무가 생명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뿌리가 뽑히면 나무는 산거냐? 죽은거냐? 살았고 죽었다. 이 나무에 간직되어있는 수분이나 양분이 지탱한 만큼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무는 죽음 병에 걸린 상태 죽음이 이미 시작된 나무이다.
우리 삶의 근원인 종교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뽑혀서 더 이상 수분이나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곧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 뽑히는 순간부터 이 나무는 죽음 아래 있다. 죽음 병에 걸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나무는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음 아래 죽음의 권세 아래 있다. 죽었다고 할 수 있다. 나무속에서 역사하는 죽음은 증상들로 나타난다. 잎이 마르고 가지가 마른다. 이것이 죽음의 증상들이다. 나무가 완전히 말라비틀어지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뿌리가 뽑힐 때의 죽음의 시작의 확인이다. 이것이 좋은 그림이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자꾸 자기 주장을 하려고 스스로를 닫아 버리면 우리의 존재의 근원인 창조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버리고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원을 축복받아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 지혜 사랑 능력과 영혼에 힘입어 살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스스로 하나님께로 분리해 버리면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피조물적인 제한에 갇힌다.
그래서 자기 자원 조그마한 생명 지혜 사랑이 있는 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리되어 더 이상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 아래 있는 것이다. 죽음 병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감기 들면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우리 모두 고난들이 관계 속에서 오는 고난이나 병고, 결핍에서 오는 고난이나 가난, 지혜 없음은 결핍에서 온다.
그것은 무한한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셔서 하나님을 알도록 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로고스이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해서 하나님을 알도록 한다.
“안다”는 말은 연합한다.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부부가 서로 안다는 의미이다. 연합하면( union)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와 연합하면 창조주의 무한함 부요함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생명이고 영생이다. 그것이 벌써 일어난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믿는 자는 연합하여 생명력을 공급받는다. 24절의 죽은 자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죄인들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여 믿게 될 때 연합할 때 생명력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동시에 예수는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무덤에 묻힌 자들이 이 세상의 끝에 예수의 재림 때에 무덤에 묻힌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고 완성된 생명에 이르게 된다. 지금 현재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체험을 하게 되지만 동시에 우리가 객관적인 종말론의 속박된 자들로서 다 죽게 되어 있다. 무덤에 가게 되어 있다.
무덤에 가는 자들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벌써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한 자들과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하나는 그렇지 않은 자들의 두 종류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부활 생명을 맛본 자들도 무덤에 가게 되어있다. 이 세대가 객관적인 종말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되어있다. 최후의 심판 때에 심판의 부활, 생명의 부활이 있을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나 다 죽게 되어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장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들은 생명의 부활로 일어난다. 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선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체험하는 부활이 그 때 확인이 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한 심판이 그때 확인이 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태도로서 발생되는 갈림이 재 확인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 그때는 더 이상 무덤에 가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의 다른 점이다. 또 하나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러면 실제적으로 죽음 객관적인 종말전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의 장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울의 설명을 빌리면 고후 5장, 빌 1장 같은데 보면 그것이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종말의 생명 영생보다는 좀 더 농도가 짙은 좀 더 축복된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 상태가 어떤 상태냐? 그 이상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지금 여기서 누리는 영생보다 더 좋은 것 축복된 것이다. 바울은 빌 1장에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무엇이라 하느냐? 자기가 딜렘마에 빠져있다. 자기가 돌보는 교회를 생각해 보면 고난의 삶이지만 이 세상에 오래 살아서 일해야 하겠는데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죽는 것이다. 왜? 그것이 주께로 좀 더 가까이 가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선택의 선호는 죽어서 주께로 더 가까이 가는 것이나 교회를 위해서 더 살아야겠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무덤에 가는 자는 지금 여기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부요함 생명력, 축복, 구원보다 더 체험하는 것이다. 종말의 부활의 상태는 아니더라도 지금 누리는 새 생명보다 더 복된 생명의 상태를 갖게 된다.
31절부터는 예수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앞에서 안식을 주는 자고 아버지의 전권대사라고 증언했다. 유대법에 의하면 자기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증언하면 법정에서 아무 효과가 없다. 신명기에 보면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효과가 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 혼자 자기에 대해서 증언하였다. 그래서 31절부터 중요한 증언이 있다.
요 5: 31 나를 위하여 -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
이 말씀은 유대인들을 표준하여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증언하신다면, 그들은 멋모르고 그것을 잘 받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예수님의 자증(自證)은 오히려 당연하다.
8: 14에 말하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은 누구든지 자율적(自律的)으로는 그에게 대하여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들도 성령을 받아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증거도 저렇게 그리스도께서 성립시킨 것이니만큼, 그리스도의 자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스키페르스(R. Schippers)는, 성경에 있는 "증거"란 말은 법정 술어의 의미가 있는 말이라고 한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여 요한복음의 특색을 나타내어 보여준다.
곧, "요한복음은 하늘과 세상,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대립의 기세를 보여준다. 이 대립의 기세는 소송의 광경으로 결정적으로 나타낸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미망(迷妄)에 빠져 스스로 재판장인 체하나, 실상은 하나님의 재판정에 있어서는 피고(被告)였던 사실이 드러난다"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pp. 159-160)
2]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 생명을 주는 일과 심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하듯이 자기도 안식일에 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에 대한 증거가 무엇인가?
자기가 자기에 대해 증언하는 그 증거는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예수는 아니다. 나에 대한 증인이 나 혼자만이 아니고 많다. 그래서 신명기로부터 한 사람의 증언에 의해서는 증거가 성립될 수 없고 두 사람 이상이 증언을 해야 법정에서 증거가 성립된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만 증언하는 증거는 무효라는 랍비들의 법 해석에 대항해서 예수는 그렇지 않다. 증언이 많다. 그래서 31절부터 증언에 대해서 기록한다. 생명을 주는 일과 심판을 하는 일은 하나님의 대권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종말론적인 사건을 말한다.
요 5: 32 증언하시는 이 -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증언은 이 세상의 어던 증언 보다 더 확실하다.
1]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계시다고 한 말씀은, 크리소스톰(Chrysostom)이나 대다수의 헬라 주석가들의 의견과 반대로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과 라틴 주석가들에 의하면, 아버지의 증언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학자 뷕셀(F. Buchsel)은, 이것이 세례 요한의 증언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스키페르스(Schippers)도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증언을 가리키지 않고 세례 요한의 증언를 의미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곧, "예수님께서 자기의 증거와 남의 증거를 관설하는 이 문맥에서,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염두에 둔 말이라고 하기에는 도무지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p. 162).
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세계를 주실 것이며, 종말에 대 심판이 일어날 것이고, 종말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고 심판을 줄 것인데 예수가 지금 하나님 대신에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주장을 어떻게 나타내느냐?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로 나타내신다. 이 뒤에는 어떠한 것이 숨어 있느냐면 유대인들의 랍비들 간의 논쟁이 숨어 있다.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쉬셨다고 창 2장에 써 있는데 하나님께서 쉬셨느냐?
유대인들이 경험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안 쉬는 것 같다. “안식일 날에도 애를 낳는다”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다. “노인이 죽는다” 그것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적인 관찰에서 안식일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운행한다. 그래서 계속해서 세상으로 생명이 태어나고 생명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계속된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쉬지 않는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지 않는 이유는 안식일의 근본 의미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본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완성된 아름다운 창조 세계에 대한 salavation이 안식일의 의미다. 더 이상 할 일이 없고 그것을 즐기는 일만했다. 이것이 안식일의 원래의 의미였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말을 듣고 사탄이 세상의 왕이 되고 아담은 사탄의 종이 되고 죄가 세상에 침투하였고, 죽음과 고난이 침투했고, 하나님의 저주가 들어와 세상이 망가졌다.
세상은 더 이상 아름다운 창조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할 일이 생겼다. 구원할 일이 생겼다. 망가진 세상을 고칠 일이 생겼다. 이 구원이 완성될 때가 종말이다. 그 때 구원이 완성이 되어 더 이상 죽음 이나 저주의 고장이 없는 완전한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고 그때 진정한 의미로 안식이 있다.
인식일은 종말에 있을 새 창조를 가르쳐 준다. 모세 율법에서 4계명(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첫째 태초의 완전한 창조에 대한 기념이며, 둘째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과 더불어 있을 새 창조에 대한 소망과 기원에 대한 표시로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안식일에도 구원의 역사를 행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5: 17에서 일하신다. 구원의 역사를 계속해서 운행하신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질병에 있는 어린아이와 38년 된 자를 고치심으로 무엇을 표시(sign)해 주는가? 하나님께서 이 고장 난 세계를 고치는 것을 나타내며 예수가 그 하나님의 권한 일을 대행하는 분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예수가 진정한 안식일을 있게 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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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인생을 걸고, 움직일 시기는 지금 뿐입니다,
과거는 잊으세요, 결국은 현실이 가장 소중하고, 미래는 꿈이 랍니다.
오늘 하루도 좋은 마음으로 좋은 꿈 그리시길 기원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