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심(氷心) / 박양근
살아있다. 태곳적 하얀 큰물로 흐르다가 일순간에 냉동된 존재. 그것은 죽은 빙벽이 아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신의 눈에도 띄지 않게 움직인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동작으로 기며 움직이는 얼음 강. 오직 앞으로만 진군하는 외에 우회나 후퇴의 길을 찾지 않는 외골수의 무리. 눈과 손발이 없지만 온몸에 돋은 돌기 세포로 이루어진 파충류처럼 수천 미터 계곡을 조금씩 훑으며 내려온다. 제 방향 찾아 통째로 움직인다.
주변의 모든 것은 그 위엄찬 행진을 거역할 수 없다. 비명도 고함도 지를 수 없고 경탄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산허리를 깎아 거친 절벽을 만들지만 나무와 풀이 뿌리 내리는 것을 한 치도 허락하지 않는다. 꽃과 열매가 맺는 것도 좌시하지 않는다. 지나간 곳마다 오직 거친 바위와 돌자갈을 잔해로 남긴다. 침묵의 서행(徐行). 불가역의 완행(緩行). 누가 그것을 가로막을 건가. 페리토 모레노 빙하도 무적의 독재자이다.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국경을 맞댄 곳에 파타고니아 대륙이 있다. 파타고니아는 남미대륙의 척추인 안데스산맥이 끝나는 지역으로 영국 탐험가 에릭 시프턴이 '폭풍우의 대지'라 불렀던 곳이다. 거센 편서풍과 탁류를 이루는 강수량과 뾰족한 설산과 기묘한 피오르드와 만년 빙하로 짜인 이곳은 누구나 한번은 오고 싶어 한다. 황량함으로 더욱 신비롭고, 화려함으로 더욱 매력적이다.
바람이 주인인 파타고니아 대륙을 방문하는 것은 내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였다. 하루하고도 반나절 비행시간을 헌납한 끝에 마침내 올 2월 초 현실이 되었다. 캐나다 로키산맥에 자리한 뱀퍼에서 빙하를 처음 보았던 후 8년 만에 남미 여신이 자랑하는 하얀 발톱 같은 빙원에 몸을 얹은 것이다.
파타고니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빙하 대륙이다. 안데스산맥 곳곳의 계곡에는 크고 작은 50개 이상의 빙하가 끼어 있다. 말 그대로 결빙 상태로 수만 년을 버티고 있다. 수 킬로에 걸린 빙원은 감당하기 어려운 성격 자체이다.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려 않으려는 폐쇄적인 형상을 숨기지 않는다.
빙하는 지구를 받치고 있는 지각판을 연상시켜준다. 땅속에 숨은 지각판이 핏빛 용암 덩어리라면 빙하는 지상에 드러난 흰 얼음판이다. 빈틈없이 꽉 짜여 바람 한줄기 들어갈 수 없는 완벽한 결빙이 경악스럽다랄까. 페리토 모레노 빙하도 길이 35km, 폭이 5km, 높이가 평균 60m 얼음 성벽이다. 빙벽 일부가 호수에 떨어지면 하늘로 치솟은 대왕고래가 해수면과 부딪칠 때처럼 파열음을 낸다. 지구 온난화가 계속되어 빙하도 소멸된다니, 내 생전에 녹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사라지므로 남미 대륙 끝 파타고니아에 온 것이다.
빙하는 멀리서 보아서는 안 된다. 하얀 거산에 붙은 개미처럼 한 번은 올라와봐야 한다. 이젤을 차고, 장갑, 모자, 두터운 방한복으로 몸을 가리더라도 빙산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나도 오르기 시작했다. 가이드가 양쪽에서 보호해 주지만 상상 이상으로 불안정한 형태에 오금이 저린다. 매끄럽고 가파르고 경사지고 요철이 심하다. 하얗게 번쩍이는 표면이 요사스럽다. 숱한 방문객이 발을 디뎠음에도 흔적 하나 없는 단단한 표면이 불길하다. 방심하면 순식간에 깊이 모를 크레바스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한발 한발 딛는 사이에 출발지에서 꽤 떨어진 빙하 위에 올라섰다. 육지 산맥이 산 너머 다른 봉우리가 거듭하듯 빙하도 백색 구릉이 연이어 이어진다. 얼음 고원이다. 내가 올라온 것이 아니라 빙하가 엄전하게 나를 얹어주고 있다. 조그만 새 한 마리를 바위 틈새가 안고 있는 것처럼, 외딴집 하나 품고 있는 심산 산골 같은 빙하가 조그만 육신 하나 등에 얹고 무심히 잠을 잔다. 유인원 하나쯤은 티끌도 아니라며 미동도 않는다.
그게 아니다. 움직이지 않은 척 움직인다. 그러면서 고래 등에 얹힌 새우 한 마리에게 타이르듯 말한다, 내 움직임이 느껴지는가, 지금까지 노여움과 아픔으로 마음이 언 사람을 너의 등에 얹은 적이 있는가. 절망에 빠진 누군가를 위하여 몸을 빌려준 때가 있는가. 그냥 그런 사람도 가까이 다가가면 갖가지 곡면과 포물선과 무늬를 지니고 있단다.
비로소 빙하가 무엇인지 보인다. 동일한 모양과 선과 문양이 없다. 백색이 아니라 황토색, 연푸른빛, 청잣빛, 녹색, 검은 티도 박혀 있다. 섬뜩하리만큼 푸르고 오싹하리만큼 하얀 틈마다 다른 빛이 배어있다. 신과 악마가 여기서만은 함께 이루어낸 합작품. 그러고 보니 햇빛 채광과 구름층 두께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화이트 그랜드 캐년이다. 호주의 심장부에 자리한 우룰루 바위이다. 거대한 히말라야 설산이다. 결속된 물신(物神). 그것은 덩어리 개념을 초월하는 모든 분자들이 군락지이기도 하다.
무엇이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가. 설한풍이 빙하의 흐름을 늦추거나 빠르게 할까. 빛의 황제인 태양이 간간이 빙면을 녹인다고 하지만 도도하고 거만한 빙구(氷丘)를 움직이게 하지는 못한다.
조용히 몸을 누웠다. 장갑과 모자를 벗고 몸을 밀착시킨다. 빙하가 감춘 동맥과 정맥을 느껴진다. 빙하가 녹아 흐르는 곡수(曲水)의 소리가 들린다. 빛은 푸른빛. 맛은 담색. 남극이 지척인데 그쪽에서도 수만 년 참고 참은 상처가 녹고 있겠지.
빙하수가 내는 지극히 낮은 소리. 누군가를 얼게 하지 말라. 경거망동, 부화뇌동 말아라. 과묵근신하며 살아라. 무엇보다 사람의 가슴을 얼게 하지 말아라. 언 가슴은 만년이 지나도 녹지 않을 빙하이니라. 빙하는 수만 톤 크루즈 여객선도 침몰시킨다. *
첫댓글
-사람의 가슴을 얼게 하지 말아라
사람도 또다른 대륙이다.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