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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2-53 (83)
《신기(辛奇)와의 재회》
한신은 한왕(漢王)보다 이틀을 앞서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잔도로는 갈 수 없어
진창(陳倉)으로 가는 지름길로 행군하였다. 진창으로 가는 지름길은 험준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양각산(兩脚山)은 골짜기가 너무도 깊어, 군사들이 쉽게 건널 수가 없었다.
선발대인 번쾌 부대가 길을 닦아 놓기는 했지만, 골짜기를 메워놓은 돌들이 물결에 휩쓸려 버려서,
천야만야한 절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군사들은 어쩔 수 없이 절벽과 절벽 사이에 밧줄을 걸쳐 놓고, 밧줄을 타고 기어서 건너갔다.
그리고 얼마를 더 가니, 한계탄(寒溪灘)이라는 여울이 나왔다. 얼마 전 한신이 대원수로
발탁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밤도망을 치다가 소하에게 붙잡혀 다시 돌아오게 되었던 바로
그 한계탄에 다시 오게 되었던 것이다.
한신은 한계탄을 보자 감개가 무량하여, 수하 장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날 밤 내가 이 여울을 건넜더라면, 승상에게 붙잡히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 버렸을 것이오."
그러자 장성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그날 밤 원수께서 여울을 건너지 못하게 되신 것은,
하늘이 한나라를 돕기 위해 그러셨을 것이옵니다.만약 그날 밤 원수께서 여울을 무사히
건너가셨더라면 저희들은 영원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파촉 땅에서 원한의 고혼이 되고
말았을 것이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실을 후세까지 영원히 알려주기 위해, 산 위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하십시다."
그리하여 장성들은 산 위에 <한나라 승상 소하가 한신을 맞아가기 위해 이곳에 이르렀다
(漢國丞相蕭何邀韓信至此 : 한국승상소하요한신지차) 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길은 갈수록 험하였다.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 버리고 칡넝쿨을 갈라치며 얼마를 더 가니,
아미령이라는 고개가 나온다.지난날 한신이 단신으로 한왕을 찾아오다가, 신기(辛奇)라는 사람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며 결의 형제(結義兄弟)를 맺은 일이 있었던 바로 그 아미령에 도착하게
된 것이었다.한신은 또다시 감개가 무량하여, 막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나는 한왕을 찾아 오다가, 이 아미령 고개 밑에 있는 <신기(辛奇)>라는 사람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며, 우리 두 사람은 결의 형제를 맺은 일이 있었소.
그때 우리는 재회를 철석같이 약속하고 헤어졌는데, 내가 여기에 왔으니,
그 사람을 꼭 찾아봐야 하겠소."그러자 대장 노관이 나서며 말한다.
"그 집이 어디쯤 있는지, 제가 찾아보고 오겠습니다."그런 얼마 후에 노관이 돌아오더니,
"신기라는 사람이 살고 있던 집은, 지난 여름 홍수에 몽땅 떠내려가 버려서 지금은 아무것도
없사옵니다."하고 보고하는 것이 아닌가 ?한신은 신기의 집이 <홍수에 떠내려 갔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뭐야 ? 홍수에 집이 떠내려 갔다면, 사람은 어떻게 되었다고 합디까 ?"
"집은 없어졌지만 사람만은 무사하여, 신기라는 사람은 지금은 태백령 고개위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알아봐야 하겠소."
한신은 4,5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태백령 꼭대기로 말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얼마를 달려 올라가고 있노라니까, 우거진 숲속에서 호랑이 한마리가 나는 듯이 도망을 쳐오는데,
그 뒤로 한 사람이 활을 겨누고 쫒아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신기가 아니던가 ?"앗 ! 당신은 신기대인(辛奇大人) 아니오 ?"
한신은 말을 급히 멈추며 큰소리로 외쳤다.신기도 한신을 이내 알아보고, 땅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한 장군을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무한히 기쁘옵니다."
한신은 말에서 뛰어내려, 신기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나는 지금 초나라를 치러 가는 길이오.
우리가 얼마전 약속한 대로, 신공도 나와 함께 전열(戰列)에 가담해 주시기를 바라오."
신기(辛奇)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한다."그러잖아도 초나라를 치기 위해 잔도를 보수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장군께서 머지않아 이곳을 지나시리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장군 곁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늙은 어머님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 오다가, 뜻밖에도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한편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무슨 말씀을 ! 어머님이 건강하시다니, 우선 어머님께 인사를 드려야 하겠소.
나와 함께 어머님을 뵈러 갑시다."그러자 신기는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장군님은 지금 천하의 중책을 맡고 계시는 대원수이시옵니다. 이처럼 귀한 어른을 어찌하여
누추한 저희 집에 모시겠습니까."한신은 그 말을 듣고, 정색을 하며 신기를 나무랐다.
"우리 두 사람은 형제지간인데, 신공은 지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내가 대원수가 아니라
대왕이 되었기로 어머님을 반드시 찾아뵈어야 하겠으니, 여러 말 말고 나를 당장 댁으로 인도해 주시오."
한신은 신기(辛奇)를 앞세우고 그의 집으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고개를 넘어 험한 산길을 5리쯤 달려가니,
산골짜기에 움막같은 초가가 서너 채 보였다.
신기는 그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집의 사립문을 밀고 들어서며,"여기가 저희 집이옵니다."
하는 것이었다.한신은 움막 같은 집 안으로 들어가, 신기의 어머니께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어머니께서 저를 알아보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수년 전에 어머님께 많은 신세를 지고 떠났던
한신이옵니다."80이 다 된 노파는 한신의 손을 정답게 움켜잡으며,
"오오, 내가 아무리 늙었기로 한 장군을 어찌 몰라보리오. 그러잖아도 한왕께서 항우를 친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한 장군이 내집을 다시 한번 찾아와 주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오."
노파는 그렇게 말을 하고, 이번에는 아들을 쳐다보며,
"기야 ! 너는 지난날 한 장군과 결의형제를 맺을 때, 만약 한 장군이 초나라로 쳐들어가게 되면,
너도 한 장군을 따라 싸움터로 나가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지 않느냐.
남아일언(男兒一言)은 중천금(重千金)이니라. 한 장군이 오셨으니, 이제는 너도 무장을 갖추고
한 장군을 따라나서야 할 게 아니냐 ?"하고 따지듯이 아들의 의사를 묻는다.
신기는 늙으신 어머니를 산속에 홀로 내버려두고 싸움터에 나갈 수가 없었던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다."한 장군을 따라나서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옵니다만 ....."
하며 어머니를 쳐다 보며 말꼬리를 얼버무려 버렸다.
그러자 노파는 아들의 심정을 재빨리 알아채고, 얼굴에 노기를 띠며 호되게 나무란다.
"너는 무슨 못난 소리를 하느냐. 짐작컨데 너는 늙은 에미 때문에 싸움터로 나가는 것을 주저하는
모양인데, 에미가 아무리 소중하기로 대장부끼리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또 네가 없기로 굶어 죽을 에미가 아니다. 여러말 말고 지금 당장 한 장군을 따라나서도록 하여라.
세상 만사에는 기회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신기는 어머니 앞에 머리를 깊이 숙였다.
"하오나, 늙으신 어머님을 이 깊은 산속에 홀로 계시게 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기에 ...."
신기가 거기까지 말하자, 노파는 별안간 벼락 같은 호통을 지른다.
"못난 소리 그만하거라. 에미의 심정을 그토록 몰라 준다면, 그게 어디 내자식이냐.
대장부의 약속을 지키라고 그토록 말을 했건만 ..."
신기는 그제서야 어머니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한신에게 머리를 수그리며 말한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저도 오늘부터 싸움터로 데리고 나가 주시옵소서. 저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옵니다."한신은 두 모자의 대화를 듣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느꼈다.
그렇다고 늙은 어머니를 내버려둔 채, 아들만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선후책(先後策)을 골똘히 강구해 보다가, 노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어머님께 부탁 말씀이 하나 있사옵니다."
"장군께서 나 같은 늙은이에게 무슨 부탁이 있다는 말씀이오 ?"
"어머님의 말씀대로, 아드님은 제가 싸움터로 데리고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대신 제가 승상부에 특별히 부탁해 놓을 테니, 어머니께서는 남정(南鄭)으로 옮겨 가셔서
지내도록 하시옵소서. 남정에만 가시면 승상부에서 살림살이 일체를 돌봐 드릴 것이옵니다."
노파는 그 말을 듣고 펄쩍 뛸 듯이 놀란다."장군은 당치도 않은 말씀을 하고 계시오.
내가 무슨 공로가 있다고, 나라의 살림살이로 돌봐 주시게 하신다는 말씀이오 ?"
"어머님께서 공로가 있어서 돌봐 드린다는 것이 아니옵고, 아드님은 우리가 꼭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드님을 데려가기 위해 어머님의 살림을 돌봐 드리려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노파는 고개를 젖는다."나는 아들을 팔아먹도록 못난 늙은이가 아니오.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내 아들이나 데려다가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게 해주시오."
"어머님의 심정은 저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제 입장으로서는 어머님을 홀로 내버려두고
아드님만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아드님도 뒷 일에 대한 걱정이 없어야만 전쟁터에서
마음놓고 싸울 것이니, 제 부탁을 꼭 들어주셔야 하겠습니다."
노파는 그제서야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인다."내 문제로 그렇게 걱정이 되신다면
내가 남정으로 옮겨 가기로 할 테니, 저 애만은 꼭 데리고 나가 주시오."
그리고 이번에는 아들에게 말한다."기야 ! 장군의 말씀대로 나는 남정으로 이사를 가기로 할 테니,
너는 이제부터 한 장군 밑에서 커다란 공을 세우도록 하거라.
너도 잘 알고 있다시피, 우리 가문은 뼈대가 있는 집안이다. 어떤 경우에도 조상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거듭 명심하거라."신기(辛奇)는 어머니께 큰절을 올리며 이렇게 하직을 고한다.
"불초 이제부터 출진하여, 어머님의 가르침에 부끄러움이 없는 자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신은 군정사(軍政司)를 불러 신기 어머니의 문제를 상세하게 지시한 뒤에, 신기와 함께
본영으로 돌아와 신기에게 군령을 내린다.
"선봉 대장 번쾌가 지금 대산관을 기습하려고, 태백령에 새로운 길을 만들며 전진중이오.
그러나 번쾌장군은 이곳 지리가 어두워 고생이 많을 테니, 그대가 지금 그리로 달려가 번쾌 장군을
도와주도록 하오.이틀 후면 대산관을 기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만약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거든,
내가 갈 때까지 전투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으라 하시오."신기(辛奇)가 군령을 받들고
번쾌에게 달려가자, 한신은 후속부대장 하후영을 불러 별도의 군령을 내린다.
"장군은 지금부터 군사를 이끌고 선봉 부대의 뒤를 바짝 따라서 출동하시오. 그리하여 번쾌의 부대가
대산관에 기습을 감행할 때에는 직접 가담하지 말고, 등뒤에 숨어서 대세만 관망하시오.
모르면 모르되 번쾌 장군은 혼자서도 대산관을 어렵지 않게 함락시킬 것이오.
대산관을 함락한 후에는 장한의 본거지인 폐구(廢丘)를 공략해야 하는데, 그때에는 장군이
선봉장이 되고, 번쾌는 후속 부대가 되도록 하시오."
하후영이 군령을 받고 출동하고 나자, 한신은 부관을 불러 물어 본다.
"대왕께서 지금 어디쯤 오고 계신지, 알아 보았느냐 ?"부관이 대답한다.
"연락병이 알려 온 바에 따르면, 대왕께서는 한계강(寒溪江)을 건너오고 계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알았다. 그러면 우리도 안심하고 전진하자."깊은 산속을 얼마쯤 전진하다 보니, 세 갈래 길이 나온다.
한신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곳에서 말을 멈추고 막료 장수들을 둘러보며 말한다.
"지난날 나는 파촉으로 들어오다가 길을 잃어서, 여기서 나무꾼에게 길을 물어 본 일이 있었소.
나무꾼은 친절하게도 길을 잘 가르쳐 주었소.그런데 초나라 군사들이 나를 추격해 오고 있던 상황이라,
나는 길을 다 묻고 나서는, 그가 초군 병사들에게 나의 행방을 알려줄 것을 염려하여,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그 사람을 그 자리에서 죽여 땅 속에 파묻어 버렸소.
지금 이곳에 다시 오게 되니, 그 사람의 원통한 넋을 풀어 주지 않고 그냥 지나갈 수가 없구려.
그 사람 시체를 땅 속에서 파내어 장사를 정중하게 지내 주고 묘비(墓碑)도 세워 주고 싶으니,
여러분은 나의 심정을 이해해 주기 바라오."한신의 간곡한 소원을 듣고, 장수들은 한결같이 감동하였다.
비록 부득이한 사정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는 했지만, 생명의 존엄하게 여기는 대원수의 의리감
(義理感)에 모두들 감동을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장수들이 솔선하여 나무꾼의 시체를 파내어 장사를 지내고 묘비를 세워 놓으니,
한신은 그 묘비에 다음과 같은 비문(碑文)을 손수 써 넣었다.
[파초 대원수 한신은 의사(義士) 초부(樵夫)의 영전에 삼가 아뢰옵니다. 귀공은 난세에 태어나
생활이 군색한 관계로 초부로서 생활을 꾸려 나가던 선량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귀공에게 길을 묻고 나서 초군에게 나의 행방이 알려질 것이 두려워 죄없는 귀공의 목숨을
해쳤으니, 이는 두고두고 나의 양심에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이에 장사를 정중히 지내 드리오니,
구천에 계신 귀공은 나의 경솔했던 죄과를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소서."]
이렇게 한신이 비문을 작성하자, 그것을 본 모든 장수들이 한결같이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2-5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