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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실망스러운 47승에 이은 축 처진 1라운드 패배로 마감한 1993-94 시즌 이후, 포틀랜드는 중대한 변화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있었다. 놀랍게도 1994년 여름은 예년에 비해 선수 이동이 거의 없었다. 1라운드에서 G 애론 맥키를 지명한 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코트 위 움직임이 되었다. 로드 스트릭랜드, 테리 포터, 클라이드 드렉슬러, 하비 그랜트, 제롬 커시, 벅 윌리엄스, 클리프 로빈슨, 크리스 더들리의 라인업을 갖춘 포틀랜드는 어떤 경우에도 준비가 되어있는듯 했다.
그러나 94년 오프시즌은 양복입은 친구들 중에서 책임자의 완전한 교체가 있었다. 파이널 시대의 감독 릭 아델만은 경질당했다. 아델만은 신구의 재능을 통합하거나 높아진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승수를 올리지 못했다. 아델만의 대체자는 시튼홀 대학의 엄격한 감독, P.J. 칼리시모였다. 단호하고 엄격한 농구에 충실한 친구인 칼리시모는 선수 친화적이고 차분하며 느긋한 아델만과는 완전히 반대의 이미지였다.
또한 포틀랜드는 중요한 성공을 거뒀다. 시애틀에서 잘 나가던 경영진이던 밥 윗싯을 낚아챈 것이다. 윗싯은 곧 파이널에서 마이클 조던의 패권에 도전장을 던지게 될 게리 페이튼-숀 켐프의 소닉스를 쌓아올린 것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윗싯의 평판은 천재와 최고의 판매원이 하나로 합쳐져있다는 것이었다. 마음껏 쓸 수 있는 구단주 폴 앨런의 엄청난 자금이 있기에, 포틀랜드의 새 GM에게 가능성은 무한해보였다.
우리가 이 연재물에서 폴 앨런의 이름을 꺼낸게 이번이 처음인건 우연이 아니다. 예전의 마이크로소프트 공상가는 1988년에 팀을 구입했지만, 지금까지는 개입을 삼가해왔다. 88년부터 92년까지 인기의 초점은 드렉슬러와 그 동료들에게 맞춰져있었다. 92년 파이널 이후 트레이드와 도박이 잦아지면서 관심은 GM 죠프 페트리에게로 가끔씩 옮겨갔다. 윗싯을 고용한건 일반 대중들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눈에 띄게 앨런 본인의 책임이라고 여겼던 첫번째 움직임이었다... 포틀랜드에서 앨런의 명성/악평의 시작이었다. 포틀랜드 팬들은 앨런의 시애틀 커넥션(역자 주 : 폴 앨런은 시애틀 출신이며 시애틀에 여러개의 프로팀을 소유하고 있습니다)과 재정상태의 전망이 딜을 굳혔으며, 팬들이 사랑하는 구단으로 리그 최고의 GM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데려왔다고 생각했다. 포틀랜드는 환호했다.
위에 언급했듯이, 윗싯의 처음 몇달은 조용했다. 칼리시모는 그렇지 않았다. 불타는 빨강머리의 스타일은 아델만 시절의 베테랑들과 바로 충돌했으며 파이널 팀의 코어들과는 특히 심했다. 세상에 왜 경험많고 승리자인 선수들이 어쨌든 점점 출전시간을 빼앗기고 있는데 엄격하고 대학생 같은 사고방식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칼리시모의 무뚝뚝한 태도, 엄격한 계획, 코칭 습관(그 중에는 사실상 경기가 끝났는데도 선수들에게 파울작전을 지시한 것도 있다)은 경험많은 선수들과 멀어지게 했다. 포틀랜드는 시즌 첫 석달간 5할을 거의 넘기지 못했다.
94-95 시즌의 포틀랜드에게 좋은 소식은 크리스 더들리의 복귀였다. 더들리는 이제 수비와 리바운드를 해줄 센터로서 약속을 실천했고, 82경기 전경기를 선발출장했다. 사실 여름에 더들리의 미래는 불확실했다. 작년의 부상 때문이 아니라 계약 상태 때문이었다. 여러분이 기억하고 있다면, 포틀랜드는 93년 여름에 시장가치보다 낮은 금액으로 더들리와 계약했다. 밝혀졌듯이 더들리는 첫해의 옵트아웃 조항 - 더들리가 기쁘게 받아들인 조항... - 때문에 저가의 계약에 기꺼이 사인했다. 포틀랜드는 즉각 그 4배에 달하는 새로운 계약을 더들리에게 오퍼했고, 그 계약으로 더들리의 연봉은 하킴 올라주원보다 많고 시카고의 조던 바로 아래가 되었다. 리그 사무국은 집단으로 졸도했다. 하지만 사무국은 망설였고, 소급적용해서 사각지대를 없애지 못하는 바람에 더들리는 포틀랜드 소속으로 남았다. 그래도 1년 옵트아웃 조항은 즉각 금지되었다. 이제 경기에서 가장 고액을 받는 선수들 중 하나가 된 더들리는 행복하게 평균 5,5득점 9.3리바운드로 공헌했다.
클리프 로빈슨도 여전히 행복했고, 36분 기준으로 18개의 슛을 쏴서 평균 21득점을 했다. 스트릭랜드는 새로운 감독 덕분에 스피드를 찾았고, 19득점 9어시스트로 보답했다. 개인 성적은 하강하고 있었지만 벅 윌리엄스도 비슷한 신임투표를 확보했고, 더들리 곁에서 82경기 전경기를 선발출장하면서 평균 30분 가까이 뛰었다. 제임스 '할리우드' 로빈슨 또한 승진했고, 71경기에서 평균 22분 가까이 뛰었다.
불만파는 친숙한 이름들로 이루어졌다. 제롬 커시는 더들리보다 더 많이 받으면서도, 평균 18분을 뛰면서 시들시들하고 게다가 부상과 씨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테리 포터 역시 부상 행렬에 동참했다. 포터는 이 시즌에 35경기 밖에 못 뛰게 되고, 어쨌든 스트릭랜드에게 묻히면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사람은 드렉슬러 본인이었다. 부상으로 인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활강하는 능력은 잃었지만, 괜찮은 3점과 자유투로 평균 22득점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렉슬러는 칼리시모, 패배, 본인과 옛 책임자에 대한 충실함의 눈에 띄는 결여(계약의 부재와 아델만의 해임), 자신의 커리어가 포틀랜드에서는 설 곳이 없다는 느낌에 분노했다. 시즌 중반쯤에 드렉슬러는 자신의 불만을 공론화했고, 분명히 팀에서 허가하지 않은 라디오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체제의 단점과 포틀랜드에서의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1995년 2월 8일, 드렉슬러는 116-103으로 승리한 시카고 불스와의 홈경기에서 15득점 7어시스트 5리바운드를 했다. 그것이 드렉슬러가 포틀랜드 유니폼을 입고 뛴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올스타전 휴식기가 이어졌고, 14일에 활동이 재개되자 뉴스가 전파를 타고 터져나왔다.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트레이시 머레이와 더불어 휴스턴 로켓츠로 트레이드되고, PF 오티스 소프, 외국인 유망주 마르셀로 니콜라, 1995년 1라운드픽(이후 랜돌프 칠드레스 지명)이 포틀랜드로 왔다. 12년의 세월, 2번의 NBA 파이널 진출, 그리고 셀 수 없는 화려한 덩크와 경기를 지켜낸 득점을 올린 밤들을 뒤로 하고,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더 이상 포틀랜드 소속이 아니게 되었다. 발렌타인 데이는 포틀랜드 팬들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드렉슬러 트레이드의 막중함은 승패를 훨씬 뛰어넘는다. 드렉슬러 이전에 구단은 1977년 한번의 맹렬한 돌진으로만 알려졌다. 그것은 1년 후에 허물어졌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월튼 시절의 우승은 신기루가 되어갔다. 팬들의 한 세대는 그 우승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직접 본적도 없이 그 우승에 바탕을 둔 팀을 따라 성장했다. 드렉슬러는 그 모든 것을 바꿨다. 드렉슬러는 다음 세대의 포틀랜드 팬들에게는 단결하는 힘이자 기존 세대의 팬들에게는 새로운 강령이 되었다. 드렉슬러의 플레이 스타일은 전격적이었고, 성적은 압도적이었으며, 드렉슬러의 인도하에 포틀랜드의 총 승수는 성층권이었다. 가장 최근으로 보면, 1995년에도 드렉슬러는 여전히 90~92의 황금기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상징했다. 포틀랜드 팬들은 포터-드렉슬러-커시-윌리엄스의 스쿼드가 우승하는걸 너무도 간절히 보고 싶어했다. 드렉슬러가 떠나자 그 꿈은 영원히 죽었다...존 레논이 총에 맞자 비틀즈 팬들이 재결합을 요구한 것과 같은 효과였다(분명히 덜 폭력적이고 덜 비극적이긴 했지만). 그 후 어떤 위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포틀랜드 경영진은 트레이드 실행을 가지고는 거의 비난받지 않았다. 나가고 싶어했던건 드렉슬러였다. 어떤 면으로는 드렉슬러가 고향인 휴스턴에서 우승할 수 있게 해줘서 드렉슬러에게 좋은 일을 한 셈이다. 물론 숨은 의미는 우승이 포틀랜드를 찾아오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까지 예상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새로운 체제는 충격적인 딜에서 크게는 합격했다.
오티스 소프는 우승팀에서 온 양질의 선수였지만, 소프의 도착을 둘러싼 분명한 문제는 소프가 어디에 어울릴 것인가였다. 포틀랜드는 이미 더들리(시즌 초반에 소프와 주먹싸움을 벌였다)와 윌리엄스가 빅맨 자리에 있었고, 클리프 로빈슨이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포틀랜드가 정말 필요로 했던 것은 그들이 방금 트레이드 해버린 사람들 중 하나인 득점형 가드로 빅맨들의 수비적 성향을 보완해줘야 했다. 로빈슨, 커시, 하비 그랜트 사이에서 SF는 난장판이었다. 이제 PF 역시 난장판이었다. 그 동안에 스트릭랜드와 제임스 로빈슨은 유일하게 생존가능한 가드로서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 팀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 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포틀랜드는 남은 시즌을 19승 18패로 마쳤고, 1라운드에서 우세한 피닉스 선즈에게 스윕당했다.
예전 파이널의 불에서 주된 불꽃을 꺼버린 윗싯과 그 동료들은 1995년 여름에 남아있는 불씨들을 밟아 없앴다. 토론토 랩터스가 확장 드래프트에서 제롬 커시를 데려가도록 내버려두고, 이후에 바로 테리 포터를 방출했다. 영광에 대한 꿈은 이미 죽었지만, 이는 팬들이 삼키기에 쓴 약들이었다. 포틀랜드가 지금껏 알았던 가장 유명한 선수들 2명이 댓가없이 팀을 떠났다. 움직임들은 재정적으로 그리고 아마 케미스트리면에서도 합리적이었지만, 여전히 아팠다. 랜돌프 칠드레스, 게리 트렌트, 돈토니오 윙필드 같은 이름들은 고통을 줄이는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 결과 1995-96 시즌을 맞이하는 분위기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들은 충격, 방황, 그리고 아마도 약간의 무감각이었다... 한가지 작은 일을 제외하고 말이다.. 한 이름이 회자되었고 희망은 솟아올랐다. 어떤 큰 도움이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또는 포틀랜드 팬들은 그렇기를 바랬다.
1986년 - 파이널 진출 훨씬 전 - 으로 돌아가보면 당시 최근에 고용된 벅키 벅월터의 요청에 의해, 포틀랜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한 방법으로 1라운드픽을 썼다. 86년 24번픽으로 포틀랜드는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이후 소련팀에서 뛰던 센터인 아비다스 사보니스를 지명했다. 1라운드픽으로 외국인 선수를 지명하는 것은 당시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오늘날의 국제적인 스카우팅 시스템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외국인 선수를 직접 본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NBA 경영진은 극소수였다. 탐정처럼 GM들은 입소문과 영상에서 정보를 종합해야 했다. 대부분의 외국인 선수들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대학선수들을 스카웃하는 것에 비해 노력을 들일 가치가 없었다.
외국인 선수를 지명하는 일이 흔치 않았다면, 미국에서 전혀 뛰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지명하는 일은 순전히 바보짓이었다. 냉전이 지배하던 세계에서 사보니스는 철의 장막 뒤에 갇혀있었다. 설령 사보니스가 진심으로 NBA에서 뛰고 싶어한다 해도, 소련이 절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재정난 때문에 소련이 지금까지 본 최고의 선수를 잃는 것은 소련의 농구 프로그램과 자부심, 그리고 국제적 지위에 타격이 될 터였다.
리그 주변에서는 벅월터와 포틀랜드를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밝혀지듯이 그 당시의 수많은 일들처럼, 포틀랜드는 선지자였고 언젠가 국제적인 스카우팅과 드래프트가 필수가 되는 리그를 앞서있었다.
가장 시끄럽게 비웃는 사람조차도 사보니스를 선수로서 비웃을 수는 없었다. 선명하지 않은 영상이 곧 포틀랜드 주변에서 주목받았고, 전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리바운드하고 등 뒤로 드리블하고 PG처럼 속공을 이끄는 7푸터가 여기 있었다. 사보니스는 뱀의 민첩함과 북극곰의 사이즈를 가졌다. 덩크하는건 힘들이지 않았다. 점퍼는 깨끗했고, 패스는 자연스러웠다. 1988년 올림픽에서 사보니스가 데이비드 로빈슨을 완전히 격파해버리자, 세계가 열광하기 시작했고 사보니스 경계령이 발동되었다.
사보니스가 지명되고부터 포틀랜드에서 NBA 데뷔를 하기까지는 9년이 걸리게 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이후 양쪽 무릎이 비슷하게 망가졌다. 늦든 그렇지 않든, 사보니스의 도착은 단시간에 드렉슬러, 커시, 포터를 잃는 통렬한 타격을 받은 후 포틀랜드 팬들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바로 그 원기회복제였다. 95-96 시즌 개막전을 둘러싼 신바람은 뚜렷했다. 사보니스가 몸을 풀러 걸어나오자 모두들 숨을 죽였다. 첫 인상은? 이 친구는 컸다. CBS 캐스터 브렌트 무스버거는 빌 월튼에게 '마운틴 맨'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적이 있다. 그 부분은 잊어버리자. 이 친구는 그냥 산(Mountain)이었다. 사보니스는 올라주원보다 더 컸다. 사보니스는 데이비드 로빈슨 2명을 합쳐놓은 크기였다. 사보니스는 정말 분명히 거대했다.
두번째 인상은? "몸풀기니까 저렇게 천천히 움직이는 걸거야, 그렇지?"
그 시점에 이르러 전설은 너무 커져서 어떤 관중들은 바로 그날 밤 농구 버전의 황홀경을 보게 될거라고 예상했다. 모든 사보니스 신도들은 농구의 천국으로 승천하고 다른 모두는 뒤에 남아 나머지 리그를 보게 되는 것이었다. 후에 밝혀지듯이 그 느린 움직임은 사보니스 고유의 특징이었다. 사보니스는 항상 반대쪽 진영에 도달하는 마지막 선수였다. 포틀랜드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사보니스의 출전시간을 적정하게 유지했다. 사보니스는 신체적으로는 리그 전체는 물론 한 경기를 접수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천가지의 세부사항을 갖춘 사보니스의 완벽한 경기는 이제는 교육된 포틀랜드 팬들을 확실히 사로잡았다. 사보니스는 거대한 손을 가지고 한손으로 리바운드를 빨아들였고, 가끔은 양손으로 공을 잡는 자세로 돌아가지 않고 아울렛 패스를 날렸다. 사보니스의 슛은 아름다웠고, 그의 사이즈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사보니스의 하프코트 패싱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사보니스의 시야와 신장은 토스를 할 때 거의 막을 수 없게 만들었다. 사보니스는 일상적으로 포스트에서 등뒤로 엔트리 패스를 뿌려 레이업들로 연결시켰다. 사보니스가 스크린을 서면, 수비수가 위나 아래로 빠져나가는게 문제가 아니고 그 모든 거리를 커버하기 위해 기차를 탈지 택시를 탈지가 문제였다. 몽상가들은 곧바로 90-92 시절로 돌아가서, 더 젊고 기동력있는 사보니스가 그때의 팀에 무엇을 줄 수 있었을지를 상상했다. 소련이 사보니스를 보내주기 전에 육체로부터 일체의 농구 성분을 짜냈다고 해도, 그 쇠약해진 육체는 빌 월튼이 전체 커리어에서 달성했던 것보다 더 좋은 분당 성적을 여전히 내고 있었다. 사보니스의 전성기는 선전된 것보다 더 화려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사보니스는 95-96 시즌에 유일하게 진정으로 밝은 면이었다. 이 팀은 아직 클리프 로빈슨과 로드 스트릭랜드의 팀이었다. 이제 'Uncle Cliffy' 모드인 로빈슨은 평균 21득점을 했지만, 외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경기당 6개의 3점을 쏘았다. 로빈슨은 자신의 상당한 수비적 기술들을 결코 꾸준하게 사용하지 않았다. 스트릭랜드는 19득점 10어시스트로 훨훨 날았지만, 수비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스탯에도 불구하고, 그들로는 충분치 않았다. 하비 그랜트는 계속해서 실망시켰고, 제임스 로빈슨은 슬럼프였으며, 벅 윌리엄스는 끝났다. 루키 게리 트렌트가 PF에서 포스트 득점과 피지컬한 플레이로 갈채를 받았다. 2년차인 애론 맥키는 수비에서 매우 좋아보였다. 그게 다였다.
2시즌 연속으로 포틀랜드는 5할 본능을 벗어날 수 없었고, 시즌 내내 연패에 연승으로 소금을 쳐서 44승 38패의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불가피한 1라운드 탈락으로 가는 도중에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포틀랜드는 유타 재즈와 만났고, 이제 존 스탁턴과 칼 말론은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이론상 이것은 스쿼시 시합이었다. 예상된대로 유타는 홈에서 첫 2경기를 가져갔지만, 포틀랜드는 연장전 끝에 3차전을 잡았고 4차전 역시 간신히 잡아내어 유타에서의 5차전까지 끌고 갔다. 이제 포틀랜드 팬들은 다시 신을 내고 있었다. 이 팀이 맹공을 퍼붓고 있는건가? 블레이저스는 성적이 보여준 것보다 더 나은걸까? 1996년 5월 5일, 홈타운의 영웅들이 솔트레이크시티로 걸어들어가자 모두의 눈이 고정되었다. 포틀랜드가 그날 102-64로 무너지면서 그 눈들은 전례없는 대학살의 증인이 된다. 공포가 드러나면서 코멘트는 "포틀랜드가 언제 치고 나갈 것인가?"에서 "치고 나가!"로 변했다. 한번의 끔찍한 경기로 포틀랜드는 1992년 이래 가장 희망적인 포스트시즌 성적으로부터 간신히 도망쳐나왔다. Brave Sir Robin처럼 블레이저스는 장미의 도시와 휴가로 도망쳤고, 아직 또다른 재편성을 필요로 했다.
다행히도 포틀랜드는 프런트에 이상적인 재편성자를 갖고 있었다. 96년 오프시즌이 시작하자, 밥 윗싯은 자신의 거의 연례적인 재편성의 첫 순서가 될 아주 많은 카드로 리그 전체를 휘젓기 시작했다.
우선 윗싯은 스트릭랜드와 하비 그랜트를 워싱턴 불리츠로 보내고 사고뭉치여도 재능은 있는 2년차 F 라쉬드 월러스를 데려왔다. 월러스는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선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도구를 가졌지만 또한 다혈질이었다. 로스터에 F 주완 하워드와 크리스 웨버가 있기 때문에 워싱턴은 그 재능이나 두통거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다음에는 같은 날에 꼭 닮은 백코트의 움직임이 있었다. 6월 23일, 윗싯은 스트릭랜드를 대체하기 위해 베테랑 PG 케니 앤더슨과 계약했고, 그 후 제임스 로빈슨과 드래프트픽 1장을 미네소타로 보내고 슬램덩크 우승자이자 득점형 가드인 아이재이아 'J.R' 라이더를 데려왔다. 라이더의 운동능력은 통상적인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라이더의 이두박근은 웬만한 남자의 허벅지 크기였다. 라이더는 드렉슬러만큼 높이 뛰어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이더의 행실은 드렉슬러와 거의 상반되었다 : 프로답지 못함, 신뢰할 수 없음, 가끔은 떳떳하지 못함. 앤더슨과 라이더가 모인 것은 변덕스럽지만 흥미로운 듀오를 만들었다.
1996년 드래프트 17번픽으로 포틀랜드는 저메인 오닐이라는 깡마른 고졸 포워드에게 모험을 걸었다. tartar처럼 날 것이면서 매트리스처럼 탄력있는 오닐은 기획형 선수였다. 그러나 당시에 고졸 선수들이 인기였고, 전년도에는 케빈 가넷이 지명됐으며 바로 이 드래프트에서는 오닐보다 4번 앞에서 코비 브라이언트가 지명되었다.
갑작스러운 영입의 폭풍으로 로빈슨과 스트릭랜드가 버티던 작년의 얇고 혹사당한 라인업은 개조되었다. 포틀랜드는 이제 앤더슨, 라이더, 로빈슨, 사보니스, 더들리, 트렌트를 자랑했다... 대량으로 득점할 수 있는 2명의 가드 주위에 빅맨들의 진짜 창고가 있었다. 이 친구들 중에 몇몇이 의심스러운 성격이라면, 좋다, 아마 포틀랜드는 오클랜드 레이더스의 다음 버전이 되어 다른 모두에게 나쁜 놈이 되고 리그에게 댓가를 지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렉슬러 시절 '자체적으로 육성한 재능'의 주문를 주입받은 포틀랜드 팬들은 이만큼 많은 변화나 이만큼 많은 수상한 친구들에 익숙치 않았다. 하지만 일단 느긋해지고 숨을 가다듬은 후에는, 좀 더 시험해보려는 마음이 들었다.
이 재능의 유입에도 불구하고, 포틀랜드는 96-97 시즌을 익숙한 모습으로 시작했다. 승리와 패배를 똑같이 멋대로 이어붙였다. 포틀랜드의 득점은 6명의 선수가 평균 두자리수 득점을 하면서 최근 몇년간보다 훨씬 더 균형이 잡혔다. 그러나 포틀랜드는 결코 하나의 스타와 게임 플랜 하에 정신을 차리거나 단결할 수 없었다. 1월 중순에 윗싯은 맥키와 2명의 벤치워머를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로 보내고 즉시 수비를 떠받쳐줄 스테이시 오그몬을 데려왔다. 하지만 그 역시 마법의 움직임은 아니었다.
포틀랜드가 홈에서 뉴욕 닉스에게 가슴아픈 연장전 패배를 당하고 29승 28패의 성적을 달랜게 2월 26일이었다. 그 후 어둠 한가운데서 스파크가 튀어올랐고, 포틀랜드는 유타, 피닉스, 시애틀전 승리를 포함해서 11연승을 질주했다. 연승 도중에 말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연승이 끝날때쯤 팬들은 이팀이 위대한 플옵 진격을 위해 정점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추측했다. 포틀랜드는 폭발 이후 9승 4패로 시즌을 마쳤고, 49승 33패로 칼리시모 부임 후 지금까지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더욱 좋게도 플옵 상대는 레이커스였다. 레이커스는 이제 새로 털어온 센터-래퍼 샤킬 오닐의 팀이었다. 포틀랜드가 레이커스의 콧대를 꺾을 수 있다면 멋진 승리가 될 것이다! 이 새로 탄생한 팀에게 얼마나 좋은 출발인가!
포틀랜드는 시리즈로 빅멘들을 초대했다. 레이커스에서는 샤크가 엘든 켐벨에게 작은 도움을 받았다. 포틀랜드 팬들은 숨을 죽였다. 아아, 샤크는 1차전에서 46득점을 했고, 캠벨은 20득점을 추가했다. 그 듀오는 정말 절대 느슨해지지 않았고, 레이커스가 3승 1패로 포틀랜드를 쓸어버리는데 중심을 장악했다.
실망스러웠지만 블레이저스 진영은 차분하게 포틀랜드의 패배를 받아들였다. 지난 시즌과 비교하면 이번 시즌 후의 전망은 밝아보였다. 이 팀은 젊고 유망하고 예측 불가능이었다. 몇년간의 양념을 거친 후 이 팀이 얼마나 멀리까지 갈지 누가 알겠는가?
몇년은 밥 윗싯의 시간의 틀에 없다는 것을 아는 포틀랜드 팬들은 거의 없었다. 몇분이 윗싯의 사고방식에 더 가가까웠다. 훨씬 더 많은 움직임이 진행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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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몽상가들은 곧바로 90-92 시절로 돌아가서, 더 젊고 기동력있는 사보니스가 그때의 팀에 무엇을 줄 수 있었을지를 상상했다.'
그 당시 그 몽상가들 중 하나였던 사람이 저입니다. 사보니스가 저 시절에 있었다면 블레이저스가 최소한 우승 2회는 했었을 거라고 봅니다.
포틀랜드 역사에서 거부하기 힘든 if 중에 하나네요. 정말 포틀랜드가 빅맨 운이 없다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ㅡㅜ
잘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제 포틀랜드의 올스타 군단화의 전조가 시작될려고 하네요 다음편도 염치없지만 기대하겠습니다
슬슬 '트레이더 밥'이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매번 말씀 못드려 죄송합니다^^
"1986년 5월 5일, 홈타운의 영웅들이 솔트레이크시티로 걸어들어가자 모두의 눈이 고정되었다. " <-이문장에서 86년이 아니라 96년인거죠?
오타인데 미처 못잡아냈네요;; 바로 잡아주셔서 감사드리고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럭셔리 포틀랜드가 다가오고 있네요ㅋ
이제 점점 더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