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시기를 대야성을 백제가 빼앗는 642년으로 돌아가 봅시다.
가을 7월에 백제 왕 의자(義慈)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 40여 성을 쳐서 빼앗았다. 8월에 또 고구려와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도독 이찬 품석(品釋)과 사지(舍知) 죽죽(竹竹)·용석(龍石) 등이 죽었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에서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곧 왕을 찾아 뵙고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 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 왕 고장(高臧)[보장왕]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던지라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춘추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長蛇封豕]가 되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나라 임금이 대국의 군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그래서 신하인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와있는 내용으로, 기록그대로 해석해 본다면, 김춘추는 대야성 싸움이 얼마나 큰 충격인지 알수있습니다. 그는 대야성을 되찾아 자신의 딸의 복수를 하고자, 적국인 고구려에까지 가서 목숨을 잃을뻔한 위기까지 겪습니다. 최소한 그가 대야성에 싸움에 대한 애착과 백제에 대한 복수심이 매우 큰것을 알수 잇습니다.
8월에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品石)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은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서울[王都]에 전달하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의 주·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남겨 두어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은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백제는 윤충에게 1만명의 군사로 대야성을 치라고 명하였습니다. 병법에 이르길, 공격군은 수비군의 3배는 되어야 공격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라 왕족이 수비하는 신라의 대야성의 수비병력은 매우 적게 잡아도 2000~3000명정도로 추정되어 집니다. 더군다나, 백제군은 대야성을 공취한 1만명을 남겨 두어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1만명중 전사하거나 부상자들도 있을수도 있고, 해석 여하에 따라선 1만명중 일부를 남겨두었다고도 여길수 있으니 편하게 생각하여 1만명의 3/1수준인 3000명~4000 정도가 대야성을 수비한다고 추정해 봅시다.
그럼 시기를 논쟁의 핵심이 되는 648년으로 흘러가 봅시다.
유신은 압량주 군주(軍主)로 있었는데 중략... “이제 민심을 살펴보니 전쟁을 치룰 수 있습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 전쟁에 대한 보복을 합시다!” 왕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건드렸다가 위험을 당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소?”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전쟁의 승부는 대소에 달린 것이 아니고 인심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紂에게는 수많은 백성이 있었으나 마음과 덕이 떠나서 주(周)나라의 10명의 신하가 마음과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백성은 뜻을 같이하여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는데 저 백제는 두려워할 바가 못됩니다.” 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주의 군사를 선발 훈련시켜 적에게 나가게 하여 대량성(大梁城)[현재의 경남 합천]에 이르니 백제가 맞서 대항하였다. 거짓 패배하여 이기지 못하는 척하여 옥문곡(玉門谷)까지 후퇴하니 백제측에서 가볍게 보아 대군을 이끌고 왔으므로 복병이 그 앞뒤를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백제 장군 여덟 명을 사로잡고 목베거나 포로로 잡은 수가 1천 명[級]에 달하였다. 중략... 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 20만을 얻기를 청하고 와서 유신을 만나 말하기를 “사람이 살고 죽는 데에는 명이 있어 살아 돌아와 다시 공을 만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하니 유신이 답하였다.
“저는 국가의 위엄과 영령의 힘에 의지하여 두 번이나 백제와 크게 싸워 20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3만여 명을 목베거나 포로로 잡았고, 또 품석공과 그 부인의 뼈를 고향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하늘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무슨 힘이 되었겠습니까?”
자, 김유신 열전 어디에서도 대야성 함락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또한, 문제의 쟁점이 되는 대야성의 수비병력중 1000명정도만 전사하였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백제측의 수비병력이 4000명이라면 4/1정도의 병력만 잃은것입니다. 아니, 4000명이 아니라 3000명이라고 하더라도 3/1정도의 병력만 잃은것입니다.
8년(648) 봄 3월에 의직이 신라의 서쪽 변방의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4월에 옥문곡(玉門谷)으로
군사를 나아가게 하니 신라 장군 유신이 맞아 두번 싸워 크게
이겼다.
백제본기 내용과 김유신 열전의 내용을 종합해 볼때, 옥문곡 전투를 이끈 백제장군은 의직장군으로 추정됩니다. 대야성의 수비병력+ 요거성을 공취한 의직의 부대가 합류하여 김유신부대와 싸웠음을 알수 있습니다. 일전에도 소호금천씨님은 의직의 부대와 대야성의 수비병력이 합류하여 숫적으로 많은 병력이 모이게 되어 김유신의 병력을 만만하게 보았다가 패배하였다고 주장한 적이 있지요.
자, 그렇다면 정리해보죠. 최소한 요거성에서의 의직이 이끈 병력이 최소한 3000명이라고 치고, 윤충이 공취한 대야성의 수비병력 역시 3000명이라고 칩시다. 도합 6000명의 병력으로 김유신과 싸우다가 대야성 수비병력 1000명이 전사하였습니다. 겨우 6000명중 1000명을 죽인것만으로 대야성이 빈성이나 다름없으니 함락하였음이 당연하다고 보는 겁니까???
여러가지 정황상, 대야성의 수비병력은 1000명밖에 죽지 않았으므로, 대야성 함락이 당연시 하다는 주장은 전혀 옳지 않다고 사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