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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느헤미야12장27~47절
제목 : 이제 다시 시작
성벽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성벽을 봉헌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으로 지은 성벽은 하나님의 선한 도움의 손이 있어야만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성벽 봉헌식(27~30절)
1) 노래하는 자들을 불러 모음(27~29절)
(1)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옵니다(27절)
“[27]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
여기서 문제가 되는 바는, 본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성곽 봉헌식 행사가 언제 실시되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1) 성곽 공사가 준공된 직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Rudolph),
(2) 예루살렘으로의 인구 재정착 사업을 끝마친 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Fensham, Keil, Myers),
(3)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다녀온 직후인 B.C.432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Rawlinson) 등으로 견해가 엇갈립니다.
원래 봉헌식이라는 것은 집이든 성곽이든 준공 직후에 시행되는 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보편적 관습이었으나(스 6:14-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시급한 예루살렘 성의 방비 문제(7:4)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정한 기쁨으로 봉헌식을 실시하기는 어려웠으리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세 견해 중 (2)의 견해가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 6:15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혹은 내용상 당시에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의 징수 등의 목적으로 유다와 베냐민의 각 성읍에 거주하고 있었다는11:36의 내용과 바로 연결됩니다.
그들은 평소에는 자신들에게 배당된 성읍에서 살았지만, 자신들의 봉사 순서가 돌아오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예루살렘으로 와야만 했습니다(대하 23:2).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 이것은 성전 봉헌식 때 솔로몬이 사용했던 방식의 답습이다(대하 5:12,13).
'제금'(메칠타임)은 이 단어의 복수 형태가 잘 보여주듯이, 마치 솥뚜껑처럼 생긴 한 쌍의 금속을 부딪혀 소리 내는 악기로서 현대의 심벌즈와 유사합니다.
비파(네벨) - 요세푸스는 이 악기의 현(絃)이 열둘임을 중언하고 있습니다(Ant.VLL,xii,3).
수금(키누르) - 현이 셋밖에 없는 것으로 부터 열 둘 되는 것까지 다양했었습니다. 특별히 귀족들에 의해서 많이 사용된 고급 악기였던 관계로, 은 혹은 상아, 심지어는 금으로 장식되었다고 합니다. 앞의 비파 보다는 크기가 작았습니다.
(2) 이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요 들었습니다(28~29절)
“[28]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29]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웽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예루살렘 사방 들 - 여기의'들'(키카르)은 때때로 평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둘레에는 말 그대로의 '들'은 없다는 점에서. 본 문구는 다만 '예루살렘 일대의 주변'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입니다(Myers).
느도바 사람의 마을. - 베들레헴의 동남쪽 가까이 위치했던 작은 마을인 것 같습니다(Fensham,schults).
벧길갈. - 예루살렘 동북쪽 약 26km지점의 '길갈'과 동일 지역인 듯합니다.
게바. - 11:31 주석을 참조하라.
아스마웽 들. -예루살렘 북동쪽 약 8km지점 베냐민 지경(스 2:24)을 말합니다.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 '노래하는 자들'이 이같이 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 봉사에 쉽사리 참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Rawlinson).
아무튼 이 문구는 '노래하는 자들'이 앞 절과 본절의 전 반부 처럼 쉽사리 예루살렘에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2)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봉헌식를 위한 준비로 정결식을 치룹니다(30절)
“[3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성벽 봉헌식에 앞서 정 결례를 행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추는 내용입니다.
'정결하게 하고'의 뜻인 히브리어 '타헤르'는 구약 성경에서 94회 나오며 거의 의식적 혹은 윤리적 정결과 관련 하여 사용됩니다.
특히 부정했던 자를 다시 회복시켜 의식 절차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해주는 정결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가장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레 22:4-7).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 금식, 성적 욕구의 절제,속죄제를 드리는 것 등을 가리킵니다.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 일반 백성들은 옷의 세탁(출 19:10,14), 목욕 및 물을 뿌림(민 8:7;19:12) 등을 통해 정결하게 했을 것입니다.
성문과 성. - 이것들 또한 '정결하게'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는 성벽 재건 도중 성벽에 부정한 것들이 접촉되었거나 혹은 거기서 부정한 일들이 저질러졌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Myers, 신 23:14).
그것들을 정결하게 하는 방법은, 개인의 가옥을 정결하게 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우슬초로 새의 피를 거기에 뿌리는 방식이었음이 분명합니다(레 14:49-53).
2. 성벽 봉헌 행진(31~43절)
1) 성벽 밟기(31~39절)
(1) 행열의 맨 앞에는 성가대가 위치합니다(31절)
“[31]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 느헤미야의 이 같은 조처는 서쪽 성곽의 중앙부 곧 골짜기 문(2:13)에서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됩니다(Rawlinson). 이같이 볼 수 있는 까닭은, 느헤미야가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온 직후 성벽의 파괴 정도를 관찰하기 위한 경로를 바로이 '골짜기 문'부터 잡았기 때문입니다(Schultz).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 - 레위 사람들 중 아삽자손들을 가리킵니다(27-29절;11:17).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 이러한 독특한 의식적(儀式的) 행동은, 그 성벽이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과 인도에 따라서 재건되었음을 감사 및 고백하는데(27절)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Kidner,시 48:12-14).
물론 거기에는 예루살렘의 방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한다는 의미도 담겨있었을 것입니다.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 이 대열은 '골짜기 문'(2:13)에서 남쪽으로 향하여 약 450km 떨어져 있던 '분문'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서론의 '성벽모형도' 참조).
이대열의 인도자는 '학사 에스라'였고(36절). 선두에는 찬송하는 레위인들이 위치했습니다.
(2) 그들의 뒤를 따르는 자는 호세야와 유다 지도자의 절반입니다(32절)
“[32] 그들의 뒤를 따르는 자는 호세야와 유다 지도자의 절반이요 ”
호세야와 유다 지도자의 절반이요. - '호세야'가 '유다 방백'의 선두에 섰었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Schultz),
한편, 여기의 유다 지도자'는 반드시 유다 지파의 방백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지파를 막론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방백을 가리킬 것입니다.
(3)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33절)
“[33] 또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과 ”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 -이들을 지도자들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Schultz), 성벽 봉헌식에 있어 레위인과 제사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본문 전후의 문맥을 고려해볼 때 레위인 혹은 제사장의 명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입니다(Rawlinson).
(4) 유다와 베냐민과 스마야와 예레미야(34절)
“[34] 유다와 베냐민과 스마야와 예레미야이며 ”
유다와 베냐민 - 이것은 평민들의 집단을 가리킴이 분명합니다.
스마야와 예레미야 - 두 제사장 가문의 이름입니다(12,18절).
(5) 스가랴와 악기를 든 여덟 명의 레위인들이 따라갑니다(35~36절)
“[35] 또 제사장들의 자손 몇 사람이 나팔을 잡았으니 요나단의 아들 스마야의 손자 맛다냐의 증손 미가야의 현손 삭굴의 오대 손 아삽의 육대 손 스가랴와 [36] 그의 형제들인 스마야와 아사렐과 밀랄래와 길랄래와 마애와 느다넬과 유다와 하나니라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제사장들의 자손 몇 사람이 나팔을 잡았으니. - '나팔'은 레위 사람들에 의해서 간혹 사용되었을 뿐(대상 16:42), 주로 제사장들에 의해서 다뤄지던 악기였습니다.
이 악기는 특별한 종교적 행사 혹은 사건의 축하를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삼하 6:15;대하 7:6;29:26-28).
한편, '잡았으니'라는 번역은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그다음에 나오는 이름들이 '나팔'을 잡은 사람의 구체적 명단인 양 착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잡았고'라고 해야 보다 타당합니다.
물론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은, 원문상 본 문구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단어인
'스가랴' 사이에 '그리고'를 뜻하는 접속사 '와우'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긴 합니다.
하지만 본 문구 뒤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모두 레위 사람들이 분명한 이상,'잡았고'로 고쳐 번역함이 보다 자연스럽습니다(Rawlinson, Myers, Williamson).
맛다냐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레위 지파의 아삽 자손이었습니다(11:17).
아삽의 육 대 손 스가랴 -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찬송의 책임을 부여받았던 레위 사람이었습니다(대상 16:4-7;대하 5:12).
한편, '스가랴'는 느헤미야 시대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약 500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나므로, 여기의 '육 대 손'이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습니다.
차라리 '자손'으로 번역함이 무리가 없습니다.
그 형제 - 다음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앞절의 '스가랴'처럼 아삽 자손들이라는 사실을 시사해줍니다.
아사렐 - '하나님께서 도우심'의 뜻입니다.
밀랄래 - '말이 많은'의 의미입니다.
느다넬 -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의 뜻입니다.
하나니 - '은혜로움'의 뜻입니다.
다윗의 악기 - 레위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악기들, 곧 제금, 수금, 비파 등을 가리킵니다(27절;대상 15:16,19-21).
이처럼 '제금'. '수금', '비파'를 '다윗의 악기'라고 한 까닭은, 그 악기의 사용이 다윗에 의하여 레위 사람들에게 명령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대상 15:16).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 그 당시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에스라'라는 인물이 차지하던 비중을 잘 보여줍니다.
비록 그는 느헤미야와 같은 정치적 권세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 각성이 그의 종교적 역량에 힘입은 바가 컸음을 감안한다면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습니다(8:1-12).
(5) 다윗의 궁 윗 길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수문에 이르렀습니다(37절)
“[37] 샘문으로 전진하여 성벽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 길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
성벽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 성벽을 타고 행진하던 에스라 일행이 일단 성벽에서 내려왔음을 전제로 합니다.
사실 에스라의 일행은'샘문'이 가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성벽에서 일단 내려 왔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반대쪽의 성벽으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 이 '다윗 성의 층계'는 샘문을 통하여 성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되었었습니다.
바로 이 계단을 통하여 에스라의 일행은 성의 안쪽으로 들어갔음이 분명합니다(Schultz).
다윗의 궁 윗길. - 여기의 '길'(호마)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 '호마'는 '성벽'의 뜻이 있을 뿐입니다(출 14:22;신 3:5;렘 1:18).
동쪽으로 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 이것은 에스라의 일행이 샘문 북쪽의 성벽 끝을 출발하여 그 성벽을 따라 계속 진행했었음을 가리킵니다.
한편, 본문의 수문이 느헤미야 당시에 재건된 성벽의 바깥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이 문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왔습니다.
⓵ 느헤미야가 포로 이전시대의 수문과는 별도의 수문을 만들었으리라는 견해.
그러나 그러한 언급이 3장에 나오지 않으며 또 3:26의 수문과 본문의 수문이 동일한 지점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무난하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받아들이기 곤란합니다.
⓶ 에스라 일행이 새로 재건된 성벽을 벗어나 그 바깥쪽으로 돌았으리라는 견해.
하지만 에스라 일행은 특별한 경우만 성벽 안쪽으로 돈 것을 제외하면 줄곧 성벽 위로 돌았음에 분명합니다.
⓷ 본문의 '수문'을 3:26에서처럼 '수문과 마주대한 곳'으로 해석하는 견해. 여러 측면에서 (3)의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봅니다(Will-iamson).
(6) 두 번째 행렬은 느헤미야가 인도합니다(38절)
“[38] 감사 찬송하는 다른 무리는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과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벽 위로 가서 화덕 망대 윗 길로 성벽 넓은 곳에 이르고 ”
다른 무리는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 에스라에 의해 인도 되는(36절) 한 대열이 성을 따라 우측으로 돈 데 반해, 또 다른 한 대열은 좌측, 즉 북쪽으로 돈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백성의 절반과 더불어 그 뒤를 따라. - 비록 느헤미야가 그 대열의 인도자였지만, 그 대열의 선두에는 아삽 자손의 노래하는 자들이 위치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 같은 순서는 에스라에 의해 인도된 대열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화덕 망대 윗 길로 성벽 넓은 곳에 이르고. - 여기의 '풀무 망대 윗길'은 '다윗의 궁윗길'과 마찬가지로 '풀무 망대에 이르는 성벽'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37절 주석 참조).
한편, 이 '풀무 망대 윗길로'와 다음의 '성 넓은 곳에 이르고'사이에는 '경유하여'(메알)라는 단어가 삽입되어야 합니다.
'성벽 넓은 곳'에 대해서는 3:8주석을 참조하라.
(7)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멈춥니다(39절)
“[39] 에브라임 문 위로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멈추매 ”
에브라임 문 - 북쪽 성벽의 서쪽 부분에 있던 '하나넬 망대'(3:1)와 '함메아 망대'사이의 '문'입니다.
옛 문 - 3:6절 주석을 참조하라.
어문 - 3:3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양문 - 3:1 주석을 참조하라.
감옥 문 - 이것은 수문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어느지점에 위치했을 것입니다(Rawlinson).
2) 봉헌 예배(40~43절)
(1) 두 무리와 민장의 절반이 함께 하나님의 전에 섰습니다(40절)
“[40] 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가 하나님의 전에 섰고 또 나와 민장의 절반도 함께 하였고 ”
본절은 '감사 찬송하는 두 떼는 하나님의 전에 섰고 나를 포함한 민장(民長)의 반은 나와 함께 있었다'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성전에서의 봉헌식을 주관하던 성직 계급과 평신도들의 분리되는 모습이 생생히 비쳐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Fensham).
결국 에스라에 의해 인도된 무리들과 느헤미야에 의해 인도된 무리들은 각기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서 성전에서 서로 만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장 - 32절에서 언급되는 '방백'과 본질상 동일할 것입니다(Rawlinson).
(2) 그 뒤는 나팔을 든 일곱 제사장이 따릅니다(41절)
“[41] 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고”
본절부터 43절까지에서는 성벽 봉헌식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본절에 언급되는 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임이 분명하다(Rawlinson).
만일 이것이 가문의 이름이라면 제사장 가문 목록에 실려 있어야 했을 것이다(12-11절;10:2-8).
나팔를 잡았고 - 35절 주석을 참조하라.
(3) 맨 후미에는 예스라히야(지휘자)와 노래하는 여떫 명의 레위인이 위치한다(42절)
“[42] 또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으며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으며. - 원문에는 '함께 있으며'에 해당되는 말이 없습니다.
아무튼 '마아세야...에셀' 등도 41절의 제사장처럼 나팔을 불던 제사장이었음이 분명합니다(Fensham).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 이는 반드시 노래만 했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히 이 '찬송'하는 무리 속에는 악기를 잡은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36절). 따라서 이 봉헌식에는
⓵ 느헤미야가 인도하던 대열만이 참여하였고,
⓶ 그래서 악기를 사용하는 레위인들은 없고 다만 '노래하는 자들'만이 있었다는 롤린슨(Rawlinson)의 주장은 결코 타당치 못합니다.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 이 '예스라히야'는 '노래하는 자'와 '악기를 잡은 자'모두에 대한 지휘자였던 것 같습니다.
(4) 두 그룹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나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43절)
“ [43]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 여기서'제사'(제바힘)는 주로 감사의 화목제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출 24:5;29:28;레 3:3;7:20;민 6:17;왕상 8:63).
그때 백성들은 제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불살라서 바친 후(레 3:11). 그 나머지의 부분 중 일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레 7:29-34),그 잔여분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을 것입니다(신 12:17,18).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벽을 성공적으로 재건할 수 있도록 해주신 일(6:15,16)로 인하여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음을 가리킵니다.
부녀와 어린아이도 줄거워하였으므로. - 성경은 여자들이 슬퍼하며 애통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고 있으나(삿 11:40;렘 31:15;49:3;욜 1:8), 기뻐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절의 언급은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쁨이 너무나도 컸음을 더욱 확연히 보여줍니다(Rawlinson).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 백성들이 기뻐 환호하는 소리가 매우 커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백성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연상 할수 있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반면, 성전 지대가 놓여졌을 때도 백성들의 소리가 무척이나 컸었지만,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소리였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분별되지 못했었습니다(스
3:13).
3. 성전을 섬기는 레위 사람들(44~47절)
44절부터 47절까지에 언급된 사실은 봉헌식이 성대히 거행된 이후 나타났던 바람직한 결과였습니다.
1) 귀환 공동체는 먼저 사람들을 세워 성전의 보고를 관리하는 일을 맡깁니다(44절)
“[44]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때문이라 ”
그 날에 - 봉헌식이 있었던 직후의 어느 시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 헌물의 수령 및 관리를 담당할 사람을 임명한 것을 가리킵니다.
전에 느헤미야는 '곳간'을 담당하는 레위 사람과 입회인 자격의 제사장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10:38).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 '제사장들'은 처음 난 가축이나 과일 그리고 포도주와 기름 등을 백성들로부터 받았습니다(10:35-37).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으며(10:38) 그 십일조의 십분지 일은 제사장에게 다시 돌려졌었습니다(민 18:26).
거제물(擧祭物)과 처음 익은 것. - 10:35-47을 참조하라.
유다 사람이...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 이것은 백성들이 봉헌식을 통하여서 성직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귀중하고 필요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던 연고일 것입니다.
한편, '유다 사람'은 지파를 막론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곧 평민들을 가리킵니다.
2) 제의 종사자들은 모두 다윗과 솔로몬의 명령에 따라 성전의 임무와 정결 의식에 종사하였습니다(45절)
“[45]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명령을 따라 행하였으니 ”
본절에서는 희생 제사 등과 관련된 봉사를 하는 제사장 및 레위 사람, 그리고 노래하는 자 및 문지기 모두 그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는 말할 나위 없이 백성들이 성직자들을 물질로 뒷받침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 '섬기는 일'(미쉬메레트)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직무' 혹은 '직분'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이 성전 봉사와 관련하여 담당하던 제반사(諸般事)를 가리킵니다(민 3:7;대상 23:32;대하 7:6;겔44:8).
결례(潔禮)의 일 - '결례'(타하라)는 성전 봉사와 관련하여 자신들의 부정(不淨)을 정결케 하는 노력을 가리킵니다(Myers, 대하 30:19;겔 44:26).
자신 뿐 만 아니라 '성물'을 정결하게 하는 일도 포함될 것입니다(대상 23:28).
다윗과...솔로몬의 명을 따라. - 이것은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 뿐만 아니라 앞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문구입니다.
즉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봉사도 '다윗'과 '솔로몬'이 정한 규례대로 시행되어졌던 것입니다.
3)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도 노래하는 자의 지도자가 있었습니다(46절)
“[46]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지도자가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본절은 '노래하는 자들'이 '다윗'과 '솔로몬'의 규례대로 봉사했다는 45절 후반부의 언급을 보충하기 위한 의도에 따라 기록된 듯합니다.
본절 초두에 있는 '왜냐하면'의 뜻인 접속사 '키'는 본절이 45절 후반부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느헤미야는 '노래하는 자들'이 규례에 따라 봉사했다는 사실이 역사적 합법성에 근거한 것이므로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노래하는 자의 지도자 - '지도자'(라쉐이)은 복수입니다.
이것은 다윗 당시에 '아삽'을 포함한 세 사람의 '두목'이 있었다는 사실과 잘 합치 됩니다(대상 6:33,39,44;15:17).
그 나머지 둘은 '헤만'과 '에단'이었습니다.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 '찬송'과 '감사'는 신구약을 막론한 모든 성도들의 찬양에 담겨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주제일 것입니다.
4) 백성들이 성별하여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이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습니다(47절)
“[47] 스룹바벨 때와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주되 그들이 성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본절은 포로 귀환 시대에 성직자들이 특별히 존중되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스룹바벨 때와 느헤미야 때. - 이것은 곧 포로 귀환 시대 전(全)기간을 가리킵니다.
날마다 쓸 몫...그들이 성별한 것. -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즉, 이들은 '십일조'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일 뿐입니다.
노래하는 자들...문지기들...레위 사람들. - 구약 시대에 있어서 이들은 모두 레위지파의 후손, 즉 레위인들 이었으며, 그래서 모두 기업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주는 십일조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십일조 제도가 세워진 모세 시대 심지어는 사울 시대까지 레위인들 중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은 구별되지 않았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 레위 사람들이 백성들로부터 징수한 십일조 중 십분지 일을 '제사장'에게 준 것을 가리킵니다(10:38;민 18:26).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성전만 아니라 성벽의 주인이십니다(27절).
성전이 거룩한 것은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이며, 성벽이 견고한 것은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에게 공을 돌리거나 자축하지 않고 하나님께 봉헌합니다.
수고와 헌신을 몰라주고 잊혀도 서운해하지 맙시다.
내 지분은 땅이 아닌 하늘에 있고, 사람들은 잊어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흩어져서 근근이 삶을 꾸려가던 레위 사람들이 제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함께 찬양합니다(27~29절).
일상에서 잠잠히 ‘홀로 부를 노래’도 있고, 공동체로 모여 큰 소리로 화음을 이루어 ‘함께 부를 노래’도 있습니다.
나는 일상과 공동체를 오가며 하나님 앞에서 어떤 노래를 홀로 그리고 함께 부릅니까?
2) 성벽 봉헌을 위해 백성을 정결하게 합니다(30절).
사람이 정결해야 그들이 밟는 성벽도 정결하고 그들이 지키는 성문도 정결할 수 있습니다.
부정한 사람을 지키는 거룩한 성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3) 유다의 지도자들이 성벽에 오르고 찬양대를 앞세워 양 방향으로 행진합니다(31~43절).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리라”(4장 2,3절)며 조롱하던 산발랏과 도비야를 비웃듯, 유다 백성은 튼튼한 성벽 위를 찬송하며 행진합니다.
방주를 만들던 노아도, 십자가의 그리스도도 조롱을 참으며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지금 조롱을 받으며 걷는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 결국은 천국을 향하는 영광의 행진이 될 것입니다.
4) 노래하고 문을 지키는 레위 사람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줍니다(44~47절). 백성들은 밭의 소산의 십일조를 드리고, 레위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것에서 일부를 따로 떼어놓아 아론 자손에게 줍니다.
그러나 누가 누구에게 주었다고 해서 자신의 몫에서 떼어 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받은 것에는 이미 다른 사람을 위한 몫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신 것에는 내어 놓아야 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쓸 몫’, 즉 ‘일용할 양식’ 외에는 더 가지려는 욕심을 버립시다.
기도
공동체-저희 신앙의 길이 비록 험난하지만 천국을 향하는 길임을 믿고 기쁘게 행진하게 하소서.
열방-노르웨이에서 낙태 유발 약 처방을 거부하여 해고당한 기독교인 의사가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노르웨이 법정이 공정하고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