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을 연출한 기관총
1893년 짐바브웨(Zimbabwe)에서 원주민(原住民)의 항거(抗拒)가 벌어졌는데 4정의 맥심 기관총(機關銃)을 보유(保有)한 50여명의 경비대(警備隊)가 4천여 명의 원주민의 공격(攻擊)을 막아내었습니다.
정규전(定規戰)이었던 1905년 러일전쟁 당시에 진지(陣地)에 거치(据置)된 1정의 러시아군 맥심 기관총에 의해서 돌격(突擊)하는 일본군 1개 대대(大隊)가 도륙(屠戮)되기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학살(虐殺)이었고 그것은 제1차 대전의 비극(悲劇)을 예고(豫告)하는 전주곡(前奏曲)이었습니다.
↑샹가니 전투에서 맥심 기관총은 압도적인 원주민을 도륙했습니다 원주민 항거를 진압하는데 맥심 기관총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습니다
동시기(同時期)에 맥심 기관총의 효용성(效用性)을 깨달은 여러 나라들은 라이선스(免許, license) 제작(製作)에 들어갔는데 그 중 가장 앞장섰던 나라가 독일(獨逸)이었습니다.
MG08 스팬다우(Spandau)라 명명(命名)된 독일형 맥심 기관총은 높낮이 조절(調節)이 가능한 썰매모양의 거치대(据置臺)등을 장착(裝着)하는 식으로 일부 개조(改造)가 이루어졌지만 기본 사양(基本仕樣)은 동일(同一)하였습니다.
그 결과 1914년 제1차 대전 발발 당시에 독일은 총 10만정의 맥심 기관총을 장비(裝備)한 최대 보유국(最大保有國)이었습니다.
↑독일제 맥심 기관총인 MG08 스팬다우
또 하나의 군사대국(軍事大國)인 러시아(Russia)도 같은 방식으로 맥심 기관총을 라이선스 생산하였습니다.
러시아용은 별도(別到)의 제식탄(制式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약실(藥室)이 개조(改造)되었고 이런 저런 개조로 가장 무거웠던 맥심 기관총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PM 1905입니다.
제1차 대전 당시에는 이를 좀 더 개량(改良)한 PM 1910이 대량 사용(大量使用)되었는데 이후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군(北韓軍)에 공급(供給)되어 우리와 악연(惡緣)이 있습니다.
↑러시아제 맥심 기관총인 PM M1910은 우리와 악연이 있습니다
맥심의 모국(母國)이기도 했던 영국도 애용(愛用)하였지만 제1차 대전 직전에 보병대대(步兵大隊) 대당 2정만 배치(排置)하였던 점을 고려(考慮)한다면 경쟁국(競爭國)에 비해 홀대(忽待)를 받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영국군이 제식화(制式化)한 모델은 맥심 기관총의 가장 큰 단점(短點)인 무게를 반(半) 정도로 대폭 줄인 빅커스(Vickers)입니다.
현대식(現代式) 기관총과 비교(比較)한다면 이 또한 무거운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여타 국가의 맥심 기관총과 비교한다면 훨씬 다루기 용이(容易)하였습니다.
↑영국제 맥심 기관총인 빅커스
1914년 인류(人類)는 지금까지 경험(經驗)해 보지 못한 지옥(地獄)을 현실(現實)에 만들어 내었습니다.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西部戰線↑)의 희생(犧牲)이 그토록 컸던 점은 무기(武器)의 발달(發達)에 비해 전쟁(戰爭)을 지휘(指揮)하는 이들의 생각이 너무 고루(固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나폴레옹 시대(時代)의 공격 제일 사고(攻擊第一思考)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여 명령(命令)을 받고 적진(敵陣)을 향해 뛰쳐나간 병사(兵士)들이 상대편 참호(相對便塹壕)에서 날아오는 총탄(銃彈)에 속수무책(束手無策) 당하는 것이 전선(戰線)의 일상(日想)이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 솜 전투의 가장 유명한 사진 Going over the top
↑제1차 대전 당시 맥심 기관총을 사용하는 투르크군. 이처럼 맥심은 모두가 사용한 기관총이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기갑장비(機甲裝備)를 이용(利用)하여 참호선(塹壕線)을 돌파(突破)하는 작전을 펼치겠지만 당시만 해도 포격(砲擊) 후 보병(步兵)이 돌격하는 방식(方式) 외에 마땅히 구사(構思)할 전술(戰術)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포탄(砲彈)의 비를 퍼부어도 상대를 완전히 제거(除去)하지 못하였고 이렇게 살아남은 방어자(防禦者)들은 포연(砲煙)을 헤치고 돌격하는 공격자(攻擊者)가 사거리(射距離)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름이 조금씩 다를 뿐인 맥심 기관총에 의해서 병사(兵士)들은 하염없이 숨져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