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사들
베란다의 꽃들이 온통 수런거리기 시작한다.
홍매화를 보자고 재작년에 묘목을 구해 화분에 심었는데 벌써 10일전에 첫 봉오리를 터뜨렸다. 양지바른 고층 아파트의 봄은 2월이 시작이다. 우리 집의 봄은 제주도 보다 일주일은 더 빠르다.
- 올 들어 첫 매화 소식은 제주 섬 서쪽 한림공원에서 시작됐다. 재암수석관 뒤쪽 수선화 정원의 매화나무 가지 끝에 톡 하고 백매화가 터졌다. 봄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올해 첫 매화였다. <2.6일자 문화일보> -
나는 홍매화를 원했는데 정작 꽃은 백매화로 피었다. 그러나 피워 준 것만도 고맙지, 백매화는 ‘남고(南古)’라 하지 않았던가.
매화는 아무에게나 향기를 주지 않는다.
그 아름다움은 향기가 아니라 참고 견디는 선비의 넋이라 했다.
이번 겨울처럼 혹독한 추위를 맨 먼저 깨고 나오는 절개를 보라.
그래서 매화는 사군자의 한 자리를 떳떳이 지키는 것 같다.
어쩌면 매화는 바로 옆에서 겨울동안에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꽃을 피우는 꽃기린을 질투했을지도 모른다.
꽃기린은 원어로는 Crown of thorns 로 가시왕관(면류관)이라 불리고 ‘고난을 깊히 간직하다’라는 종교적 꽃말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이 꽃도 한 식구가 된지 겨우 3년이 넘었는데, 여름이고 겨울이고 가리지 않고 사시사철 끊임없이 꽃을 피우니 참으로 기특하기도 하다.
매화 다음으로 꽃을 피우기를 바짝 서두르는 건 명자나무다.
명자는 보통 4월이 되어 꽃을 피우는데 여기서는 일주일 후면 꽃망울이 터질 것 같다.
명자는 작은 사과 같은 열매를 맺는데 열매에 사포닌과 B1 등 각종 비타민이 풍부하여 약용으로 쓰인다. 나는 당연히 선명하고 탄탄한 명자꽃을 보기위해 5~6년 전에 정남진 장흥시장에서 구입했다. 그러나 아파트 배란다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영 힘을 쓰지 못하다가 올해는 야무지게 꽃망울을 잉태하니 기쁘기 그지없다.
명자꽃은 작은 동백꽃 모양인데 은은하고 청초한 느낌 때문에 ‘아가씨나무’라고도 하며 보춘화, 산당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른 봄을 수놓는 대표적인 꽃으로 꽃나무의 여왕이라고도 한다는데 그런 호칭이 과찬은 아닐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사실 이들보다 더 일찍 꽃을 피운 건 흰 철쭉인데 - 사실 이게 철쭉이 맞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 아무튼 이 철쭉이 며칠 햇빛이 계속되자 아마 계절을 혼동하였나 보다. 몇 송이만 먼저 피어났다.
다른 가지에서는 아직 꽃망울이 너무 어려 달포 쯤 지나야 만개할 조짐인데 한 형제가 서로 다르듯 이렇게 한 나무에서도 가지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는 모양이다.
그 다음으로 화분 가득 만개할 꽃은 역시 진달래다.
나는 특히 진달래꽃을 좋아해서 몇 번을 화분에 심었다가 실패를 거듭했다. 지금 이 진달래는 깊은 산 바위틈에서 자라는 어린 1년생 묘목을 채취하여 근 20년간을 길렀는데 해마다 2월 중순이면 화분 가득히 꽃을 피운다.
다음 차례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동백이다. 작년 이맘땐 욕심 많게도 너무 많은 꽃을 피워 대부분의 가지들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심하게 쳐져 내리는 몸살을 앓다가 결국 1/3도 채 다 피우지 못하고 그 어린 꽃망울들을 다 떨어뜨리고 말았었다.
지난해의 몸살 때문인지 아니면 올 겨울의 혹독한 추위 때문인지 올해는 꽃송이의 숫자를 1/4로 줄였을 뿐 아니라 다른 해 같으면 이미 활짝 열렸을 시기인데도 올해는 아주 조심스러워 지금까지도 꽃망울들을 천천히 영글어 가고 있는 중이다. 숫자가 적고 천천히 키우는 만큼 꽃망울은 크고 튼실하다. 아마 올해는 아주 탐스럽고 건강한 동백꽃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느 꽃보다도 나를 가장 매혹하는 꽃은 도화이다. 도화라는 명칭은 사주에서는 ‘남녀색정의 신’이라고 한다. 그만큼 도화는 원색적인 유혹의 힘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숭아꽃이나 복사꽃으로 젊잖게 불러야 맞을지도 모르나 나는 복숭아꽃과 복사꽃, 그리고 도화(桃花)는 엄밀히 구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복숭아꽃은 종류가 너무 다양하여 하나의 명칭으로 뭉쳐버리기는 매우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아무튼 도화는 나의 눈을 뗄 수 없도록 가장 강하게 유혹 한다.
‘남녀색정의 신’이라는 그 꽃도 천천히 개화의 시기를 맞추고 있다.
나는 이렇게 개화를 준비하는 꽃나무만 골라 베란다에 일렬로 진열해 보았다.
철쭉, 명자, 진달래, 도화, 꽃기린, 매화, 동백 이렇게 나열하고 나니 김만중의 <구운몽>이 생각난다.
진나라 때 육관대사의 수제자인 성진이 수정궁을 다녀오는 길에 길을 막고 있는 팔선녀의 희롱에 부응한 벌로 인간세계로 태어나 실제로 팔선녀와 인연을 맺고 영화를 누리는 꿈을 꾸는 내용이다.
나는 이봄에 베란다에 나열된 칠 선녀와 함께 구운몽을 꾸어볼까 한다. 봄날 꿈속에서 칠 선녀와 차례차례 연을 맺어가는 이야기는 자못 달콤하고 황홀할 것이다.
그나저나 내일은 다시 올 들어 가장 혹독한 추위가 온다는데 나의 칠 선녀들이 끝까지 무사히 꿈을 피울수 있을까?
그게 걱정이다.
2013. 2. 7 란랑 / 손영열
첫댓글 향기로운글 잘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 드리고 새해엔 건강과 웃음 가득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란랑님! 幸福이 넘치는 설날 되세요,
자식자랑 팔불출이라죠?
그러나 나의 칠선녀는 혼자 보기엔 아까울 정도입니다.
나중에 칠선녀가 만개하면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바쁘심에도 회원들에게 일일이 신경을 쓰시는 모습이 또한 그림만큼이나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