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조선에서 발생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조선정부의 청군개입 요청은 일본에게 침략동기를 제공했다. 순식간에 남부지방 전역을 휩쓴 농민군의 기세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청나라에 차병(借兵)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6월 8~9일 청군 2,400여 명이 아산만(牙山灣)에 상륙하여 12일부터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조선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톈진 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청군의 조선출동 통고를 받자마자 곧 조선에 침입했다. 그들은 일본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아래 해군과 육군의 대부대를 파병했고, 이어 인천-서울 간의 정치적·군사적 요충을 장악했다.
7월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8월초에 일본군은 아산·공주(公州)·성환(成歡)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에 공격을 가하여 승리하고, 계속 북상하여 9월에는 평양에서 청군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청군은 9월 16일 밤 평양을 포기하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평양전투의 승리를 전기로 하여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고, 갑오정권(甲午政權)의 개혁적 성격도 희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9월 17일 황해해전(黃海海戰)에서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주력을 격파한 일본군은,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하고 11월 6일 진저우 성[錦州城]을 점령했다. 부패한 청군 지도부의 무책임한 대처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11월 22일 뤼순[旅順]이 점령되었다. 일본군은 뤼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신의주
압록강
청일전쟁으로 얻은 막대한 배상금 3억6천만냥, 과중한 세금수탈로 만들어진 군사비, 청일전쟁 전리품격인 식민지 타이완으로부터 얻은 막대한 이윤, 전쟁으로 축재한 자본가의 이윤 등을 바탕으로 전쟁 후 일본자본주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반면 조선은 갑오농민전쟁으로 표출되었던 변혁의지가 일본군에 의해 무력으로 압살당함으로써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었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으로 되어갔다. 또한 열강의 중국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일본 제국주의시대의 막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