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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봄에 포틀랜드는 반쯤 익숙한 높이로 솟아올라, 1992년 이후 처음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에 오르는 도중에 피닉스 선즈와 유타 재즈를 힘으로 압도했다. 팀 던컨의 뛰어난 플레이와 션 엘리엇의 메모리얼 데이 기적으로 인해 포틀랜드가 자신감을 잃고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시리즈를 스윕당하면서 풍선은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포틀랜드는 재능과 뎁스를 갖췄지만, 거의 성숙하지 않았으며 충분한 신뢰도가 없었다.
여전히 포틀랜드는 떠오르는 젊은 팀이었다. 약간의 조미료가 들어가면 그들은 아마 할 수... 뭐지 그게? 오, 그래 맞았다. 포틀랜드 GM 밥 윗싯은 완전히 새로운 스테이크를 얻을 수 없을 때 바보들이 하는 어떤 것이 조미료라고 생각했다. 의제는 '곧 우승'이 아니라 '당장 우승'이었다. 다시 한번 트레이더 밥은 여름에 수선을 하기 위해 자신의 지하 실험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마법사의 돌과 비슷한 잭팟을 터뜨리게 된다. 포틀랜드의 비금속은 윗싯의 손에서 순금으로 변화되려 하고 있었다.
마법은 1999년 8월 2일, 가드들을 바꾸면서 시작했다. 우리가 진행중인 회고에서 이 시점까지는 아이재이아 'J.R.' 라이더에 대해 좋은 점만을 언급해왔다. 99년 플옵의 엄청난 플옵 승리들에 대한 라이더의 공헌을 경시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하자, 라이더는 엄청난 운동능력의 체격 속에 수많은 골칫거리를 안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세대 중에서는 최대의 괴짜일 것이며, 그 세대에는 데니스 로드맨이 포함되었다. 라이더는 20득점을 하지만 수비는 전혀 없었다. 경기에 투입되지 않으면, -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다 - 라이더는 공격시 오른쪽 구석으로 물러나서 움직이거나 공을 받는걸 거절했고, 누군가 라이더에게 패스할 정도로 어리석다면 바로 다시 공을 던져줬다. 최종결과는 라이더가 3경기 중에 한번은 포틀랜드를 승리로 이끌고, 두번째는 중립이 되고, 세번째는 팀을 패배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는 라이더의 코트밖 행실은 세지도 않은 것이다. 여성을 발로 차고, 침을 뱉고, 도박하고, 그리고 가장 유명하게도 고속도로변에서 사제 콜라캔 물파이프로 마약을 하다가 적발되는 등의 법규 위반이 있었다. 라이더가 all-NBA 급의 성적을 쌓았다면, 이러한 오점들은 미성숙 때문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라이더의 성적이 요동치면서, 라이더는 빠르게 지역의 악당이 되어갔다. 그러므로 8월 초의 트레이드에서 라이더와 동료 스코어러 짐 잭슨이 애틀랜타로 가고 30세의 스티브 스미스가 왔을 때, 포틀랜드의 많은 이들이 크게 기뻐했다.
스미스는 올림픽 대표팀 출신으로 올스타 단골이었으며(좋은 의미다 이번에는), 패스와 리바운드를 할 수 있는 평균 20득점의 스코어러였다. 더 젊었을 때 스미스는 다음의 인용문으로 유명해졌다. "다가오면 널 쓰러뜨릴 것이고, 물러서면 3점을 쏴버릴 것이다(Step up and I'll lay you, step back and I'll trey you)" 미시간 주립 출신의 6-8의 위대한 선수는 두가지 모두를 쉽게 할 수 있었다. 또한 리그에서 가장 견실한 시민 중에 하나였으며 대중과의 관계를 즐겼다. 포틀랜드는 경험이 필요했기에 라이더와 스미스의 2살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포틀랜드는 스미스와 데이먼 스타더마이어로 이루어진 괴물같은 백코트를 가졌다.
그러나 트레이더 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미스 트레이드와 같은 날에, 윗싯은 시애틀로부터 고속도로를 따라 데틀리프 슈렘프를 데려왔다. 소닉스의 전성기에 슈렘프는 가장 중요한 선수들 중 하나였고, 양쪽 포워드 모두를 소화했으며 다재다능하고 영리한 농구를 했다. 37세의 슈렘프는 오래전에 전성기를 지났지만, 여전히 평균 15득점 7리바운드를 기록하고 있었다. 포틀랜드의 뎁스는 훨씬 더 막대해졌다.
그러나 트레이더 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름 최대의 움직임은 10월 2일에 나왔다. 포틀랜드는 스테이시 오그몬, 월트 윌리엄스, 켈빈 케이토, 브라이언 쇼, 카를로스 로저스, 에드 그레이를 휴스턴으로 보내고 SF 스카티 피펜을 데려왔다. 그렇다. '그' 스카티 피펜이다. 2년전만 해도 피펜은 리그 top3 선수 중 하나로 여겨졌다. 이후 피펜은 휴스턴 로켓츠와 팀동료 찰스 바클리, 하킴 올라주원과 합류했다. 기대된 우승은 실현되지 않았고, 휴스턴은 피펜의 엄청난 연봉을 지급하는게 싫어졌다. 여기서 포틀랜드가 끼어들었다. 폴 앨런의 엄청난 돈이 그렇게 효과적으로 보인적은 없었다. 전국에 걸쳐 거의 모든 스포츠지의 앞면은 "포틀랜드가 7대1 트레이드로 피펜을 얻었다"로 도배되었다. 포틀랜드가 잃는 것에 신경을 쓴 선수들은 윌리엄스와 오그몬 뿐이었다. 휴스턴이 오그몬을 방출하고 2주 후에 포틀랜드가 오그몬과 재계약하자, 파이오니어 코트하우스 광장에 밥 윗싯의 동상을 세우자는 제안이 가능해졌고, 포틀랜드 사람들은 승인했을뿐 아니라 그것을 순금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우연히도 1999년 여름에는 Smash Mouth의 'All-Star'가 발매되었다. 전염성 강한 노래가 라디오 방송국들 사이로 울려퍼졌고, 도시 전체의 팬들은 포틀랜드의 로스터를 그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 PG :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그렉 앤소니
- SG : 스티브 스미스, 본지 웰스
- SF : 스카티 피펜, 스테이스 오그몬, 데틀리프 슈렘프
- PF : 라쉬드 월러스, 브라이언 그랜트
- C : 아비다스 사보니스, 저메인 오닐
시즌의 시작은 앞서의 군침만큼 환호를 받지는 않았다. 이것은 좋아질 터였다.
포틀랜드 팬들이 가진 모든 기대는 시즌 첫 달에 충족되었다. 포틀랜드는 시즌을 14승 3패로 시작했다. 패배는 충분히 근소했고, 우연으로 보일만큼 드물었다. 이것은 승리가 아니라 리그를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득점할 때 포틀랜드는 거의 자각하지 않는듯 했다. 적절한 위치에서 누가 공을 잡아도 득점을 했다. 재능으로는 팀의 중심 선수인 라쉬드 월러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균형잡히고 비이기적인 경기를 했다. 다른 모두도 그렇게 했다. 시즌에서 경기당 평균 13개의 슛을 던진 선수조차 없었다. 월러스가 최다 득점자로서 평균 16득점을 했을 뿐이다. 로테이션의 top5가 모두 두자리수 득점을 했다. 훨씬 더 인상적인건 수비였다. 피펜, 앤소니, 오그몬 같은 사람들은 수비를 위해 태어났다. 월러스 역시 여기서 다재다능했다. 사보니스와 그랜트는 사이즈를, 저메인 오닐은 높이와 hops를 더했다. 시즌 내내 연장전을 제외하고 상대팀에게 100점 이상을 6번만 허용한 수비가 최종 결과였다.(연장전까지 포함해도 8번밖에 안된다) 성적은 34승 11패로 부풀었고, 그후에 포틀랜드는 11연승을 질주했다. 45승 11패가 완전히 77-78시즌의 영역은 아니었으나 겨우 숫자 몇개 차이였다. 시즌 막판 사보니스의 부상으로 인해 최종 총 승수는 비교적 평범한 59승 23패에 머물렀지만, 그것은 여전히 리그와 팀 역사상 2번째로 좋은 성적이었다. 포틀랜드 팬들은 열광했고, 이번에는 플옵을 걱정하기보다는 완전히 기대하고 있었다.
포스트시즌의 첫 상대는 케빈 가넷, 테럴 브랜든, 그리고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였다. 리그에서 5번째 시즌을 마친 가넷은 더이상 고졸 천재라기보다 진짜 스타였다. 하지만 가넷은 포틀랜드가 자신의 팀에게 무엇을 나눠주게 될지에 대해 결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피펜은 시리즈 1차전에서 28득점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포틀랜드는 계속 성공가도를 달렸다. 미네소타는 트윈시티에서 94-87로 이겼을 때 딱 한번 90점을 넘기게 된다. 포틀랜드는 3승 1패로 마무리했고, 2년 연속으로 2라운드에서 유타 재즈와 마주쳤다.
전년도에 유타와의 싸움은 6경기의 승리를 간신히 해내기 위해 포틀랜드 스쿼드 전체의 심장을 요구했던 혈투였다. 2000년에는 전혀 반복되지 않았다. 스티브 스미스는 마르고 작은 제프 호나섹이 대부분 막았는데, 스미스는 매일밤 재즈를 쉽게 물리쳤다. 칼 말론은 득점하고 존 스탁턴은 패스했지만, 그래도 유타는 포틀랜드 라인업에 흠집을 낼 수 없었다. 백코트의 누출을 막을 수도 없었다. 미네소타는 시리즈에서 포틀랜드 상대로 딱 한번 간신히 90점을 넘겼다. 유타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포틀랜드의 평균 93.2득점은 유타의 82.2득점과 비교해서야 그렇게 인상적으로 보였다. 포틀랜드는 4승 1패로 시리즈를 가져갔다. 두번의 라운드에서 도합 2패였고, 포틀랜드는 다시 한번 컨퍼런스 파이널에 올랐다. 상대는... 또 누구겠는가?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였다.
우리는 포틀랜드가 1999-00 시즌에 리그에서 2번째로 좋은 성적이라고 얘기했다. 레이커스는 그해 67승으로 첫번째를 차지했다. 8승 차이에도 불구하고, 포틀랜드 팬들은 시리즈를 들어가면서 자신이 있었다. 레이커스는 시즌에 15패를 했다. 그중 2패는 포틀랜드에게 당했다. 샤크와 코비는 지금까지 큰 뉴스였지만, 레이커스는 둘중 어느 쪽을 갖고도 우승을 하지 못했었다. 레이커스는 컨퍼런스 파이널에 오직 한번 진줄했을 뿐이고, 97-98시즌에 유타에게 스윕당하면서 짧게 끝났다. 대결이 공식화되자, 포틀랜드 팬들이 흔히 소리낸 반응은 "좋아! 우리는 레이커스를 거치길 원하고, 그들이 가장 좋을 때 물리치길 원한다." 이것은 1991년의 쓰라린 패배에 대한 복수가 될 터였다. 이것은 완벽한 팀이 2명의 슈퍼스타를 누르고 나타나 세계를 놀라게 했던 76-77의 영광스러운 시대의 재현이 될 것이다. 포틀랜드의 시대였다.
불행히도 이걸 레이커스에게 알려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00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1차전은 샤크가 어쩔줄 몰라하는 포틀랜드 스쿼드를 완파하고 그들을 훌쩍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는 점에서 1997년 1라운드 1차전과 불안할 정도로 비슷했다. 샤크는 이번에는 46점 대신 41점만 넣었고 코비는 겨우 13점만 넣었지만 그 스팽킹(엉덩이를 찰싹 때리기)은 너무도 익숙했다. 포틀랜드는 109-94로 졌다. 그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핵어샥' 전술의 데뷔였다. 오닐은 자유투가 나쁜 것으로 악명 높았으며 다른 모든 곳에서 득점을 잘하는 걸로도 유명했다. 포틀랜드 감독 마이크 던리비는 노골적인 해결책을 찾아냈다 : 샤크가 림 15피트 이내에서 공을 잡을 때마다 파울하기. 포틀랜드는 1차전에서 큰 벽돌공(Big Bricklayer)을 자유투 라인으로 27번 보냈다. 샤크가 48%만 성공시켰기에(그로서는 엄청난 숫자다), 어느 정도 그 전략은 먹혀들었다. 그러나 27번 중에 48%를 성공하면 그래도 13점이 난다... 경기에서 샤크의 41득점 중 상당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또한 포틀랜드 빅맨진 전체에 걸쳐 엄청난 숫자의 파울을 안겼다. 이후 포틀랜드는 좀더 표적을 좁힌 형태로 그 수법을 쓰기로 결정하고, 자신들의 파울을 확실한 덩크 상황이나 4쿼터로 제한했다. 레이커스는 걱정하기보다 그 노력을 비웃었고, 그게 포틀랜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게임 플랜이라면 포틀랜드는 길을 잃어버렸음을 확실히 했다.
그렇지만 개선 행진 도중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내 수년 간의 학대 끝에 포틀랜드가 악당을 상대로 일어선 것이다. 2차전에서 포틀랜드는 라쉬드 월러스, 스티브 스미스, 스카티 피펜의 뛰어난 활약으로 레이커스를 바로 맹렬하게 강타했다. 로테이션에 있는 재능과 뎁스에도 불구하고, 포틀랜드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여전히 개인적인 공헌에 운을 걸고 있었다. 포틀랜드 성공의 비밀은 충격을 줄 친구들을 충분히 갖고 있어서 개별 선수들의 기복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으로 팀은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2차전에서는 그게 없었다. 주사위는 계속해서 7이 나왔다. 포틀랜드는 리바운드에서 레이커스를 압도했고, 레이커스의 야투율을 39%로 묶었으며, 13개의 자유투를 더 얻어냈다. 대학살이었다. 샤크로부터 벗어나 다른 선수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부를 분배하려는 레이커스의 뚜렷한 욕구가 포틀랜드를 도와줬다. 오닐은 그 경기에서 1차전의 25개와는 거리가 먼 16개의 슛만을 시도했다. 샤크는 림을 강타하고 백보드를 부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날 밤에 샤크는 비록 자유투 라인에서이기는 했지만 두가지를 모두 했으며, 17개의 자유투 시도 중에 5개만을 성공시켰다. 포틀랜드는 106-77로 승리하며 LA를 빠져나왔다... 1차전에 대한 그 이상의 보답이었다. 아마 이번에는 시리즈가 될 것이다.
포틀랜드로 돌아와 3차전에 임하면서는 희망과 긴장이 모두 높았다. 옛날에는 홈코트가 안심이 되었겠지만, 너무도 많았던 힘든 플옵 탈락들은 최근 몇년간 홈코트 패배로 가속이 붙었다. 흰색 유니폼 자체만으로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포틀랜드가 다음 2경기를 잡을 수 있다면, 3승 1패로 앞선채 LA로 돌아가게 된다. 그 가능성은 아슬아슬했다.
포틀랜드는 3차전에서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로테이션의 득점 기복. 주전 라인업 모두가 두자리수 득점을 하게 되고 월러스와 스타더마이어가 19득점으로 최다였다. 반면에 레이커스는 경기 내내 코비-샤크로 갔다. 그것은 한쪽에서는 "Sweet Home. Alabama"를 연주하고 다른 쪽에서는 "Freebird"를 연주하는 밴드들 간의 대결이었다... 고전 히트곡들 뿐이다. 포틀랜드는 첫 두 쿼터를 지배했고, 3쿼터 9분경에는 12점차로 리드했다. 그리고는 시즌 내내 계속된 걱정거리가 고개를 들었다. 개인적인 미스가 전염되고 누구도 어디로 되돌릴지를 모를 때, 균형잡힌 득점은 불확실한 득점이 되었다. 레이커스는 그런 문제가 전혀 없었으며, 자부심은 치워놓고 계속해서 샤크에게 공을 주었다. 커다란 친구는 경기에서 26득점을 하는 와중에 18점을 후반에 올렸다. 포틀랜드가 팀으로서 18득점을 하는데는 한쿼터가 훨씬 넘게 걸렸다. 마지막은 특히 결정적인 플레이와 흐름이 나타났고, 시리즈를 가르게 될 모든 것들의 축소판이 되었다. 포틀랜드가 2점 뒤졌고 겨우 1분 남짓 남은 상황에서, 스카티 피펜이 코비 브라이언트를 상대로 훌륭한 움직임을 보여줬고 돌파로 득점하면서 91-91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지는 플레이에서 피펜은 아마도 너무 많은 영역을 커버하려고 했기 때문인지, 코비 브라이언트를 더블팀하기 위해 코너에 있는 레이커스의 론 하퍼를 열어줬다. 하퍼에게 가는 레이커스의 패스는 쉬웠고, 하퍼는 점퍼를 성공시켜 레이커스를 93-91로 앞서게 했다. 그리고는 피펜이 패스를 하려다가 턴오버를 저질렀다. 레이커스는 득점하지 못했고, 아비다스 사보니스가 포틀랜드에서 마지막 공격권을 가졌다. 사보니스는 돌파했고 코비가 쳐낸듯 했지만, 휘슬은 불리지 않았고 기회도 없었다. 레이커스는 93-91로 승리하며 3차전을 나섰다. 포틀랜드는 입지를 되찾기 위해 싸워야 했다.
4차전은 훨씬 긴장감이 덜했다. 불행히도 그것은 포틀랜드가 다시 한번 경기를 상대에게 갖다 바쳤기 때문이었다. 노력은 나쁘지 않았다. 라쉬드 월러스는 34득점으로 멋진 스코어링 게임이었고, 스티브 스미스가 20득점으로 도왔다. 피펜은 11득점 10리바운드 5턴오버로 뒤죽박죽이었다. 스타더마이어는 중요한 요인이 아니엇고, 시리즈에서 점점 더 치명적인 약한 고리로 보였다. 포틀랜드는 점수를 올리기 위해 엄청난 양의 슛을 던졌지만, 경기에서 39%의 야투율에 그쳤다. 레이커스는 전혀 그러한 문제가 없었고, 샤크가 25득점을 퍼붓고, 글렌 라이스가 21득점, 코비와 하퍼가 각각 18득점을 올렸다. 포틀랜드는 103-91로 무너졌다. 이것은 재앙이었다. 포틀랜드를 3승 1패로 앞선채 떠난 것은 블레이저스가 아니라 레이커스였다. 이것은 1991년의 복수전이라기보다 쓰라림이라는 핫도그에 머스터드를 더해 반복하는 것에 가까웠다.
정말 묘하게도,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블로그(역주: Blazer's Edge)의 씨앗이 뿌려진게 이때였다. 그때는 내가 아직 블로깅을 하지 않고 있었다. 2000년에 그 매체에 대해서는 듣지도 못했다. 이때는 메시지 보드와 이메일 그룹의 시절이었다. 나는 이메일 리스트에서 팬들의 긴밀하게 얽힌 모임에 속해있었다... 그 시기에 모임은 당연히 의기소침해 있었다. 확실함 같은 낙관론은 아니었던 이상한 예지를 갖고. 나는 대담한 선언을 했다: "친구들, 이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갈거야. 포틀랜드는 너희들을 놀래킬거야. 이 시리즈는 끝나지 않았어." 오늘날 여러분은 모든 절망적인 상황에서 일상적으로 이러한 논평을 들을 것이다. 그 길을 믿지 않으면 부정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는 감정적인 무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분석을 했다. 우리는 현실을 얘기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현실은 나는 이 팀을 주시해왔고 2000년의 포틀랜드는 7차전까지 갈 수 있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5차전으로 들어가면서 예측에 대한 회의론이 높았다. 2시간 후에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포틀랜드는 피지컬한 공격, 강력한 수비, 22득점 6스틸 4블락을 한 피펜(탈구된 손가락으로 뛰었다. 역시)을 앞세워 96-88로 승리를 가져갔다. 포틀랜드는 여전히 샤크를 막을 수 없어서 코비를 4-13으로 몰아넣는데 만족했고, 샤크가 50점을 넣지 않는 이상 나머지 레이커스 선수들은 그 차이를 메울 수 없다고 판단했다. 포틀랜드는 스타더마이어를 제외하고 라인업을 오르내리는 전원이 공격에서 공헌했다. 벤치 깊숙히 있는 선수들조차 그날 밤에 열심이었다. 포틀랜드는 활기를 되찾은채로 코트를 떠났다. 레이커스는 불만을 안고 떠났으며, 오닐이 공을 충분히 잡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평하자 나머지 팀원들이 오닐의 등 뒤를 쏘아보면서 분열되었다.
포틀랜드에서 열린 6차전에서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코비가 경기를 지배했다. 득점의 지배권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려고 했기 때문인지, 코비는 24개의 슛을 던져 12개를 성공시켰으며, 경기에서 인상적인 33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샤크에게 2인자 역할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데이빗 보위에게 성가대와 조화를 이루라고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어 보였다. 불만스럽고 파울트러블에 시달린 샤크는 17개의 슛 중에 7개만 성공시켰고, 그 중 다수가 쫓기는 슛이었으며, 자유투라인에서는 10개 중에 3개밖에 넣지 못했다. 샤크는 그 경기에서 17득점에 그쳤다. 코비가 얼마나 많이 쏟아붓던지간에 포틀랜드는 코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윙은 포틀랜드가 상대할 수 있었다. 샤크는 포틀랜드를 공포에 떨게 했다. 스티브 스미스가 자력으로 26득점을 했으며, 그 중 많은 부분이 3쿼터에 놀라운 20-0 run으로 압도하는 동안 나왔다. 포틀랜드의 나머지 선수들은 레이커스의 나머지 선수들을 상대로 스미스와 코비의 7점 차이를 메울 수 있고도 남음이 있었다. 포틀랜드는 그날밤 내내 광분했던 관중들 앞에서 103-93으로 승리하며 헤쳐나왔다. 개인적으로는 월러스-피펜-스미스의 포틀랜드가 찬양받았던 영광의 순간이 드렉슬러와 월튼의 그것과 비견할만 했다. 블레이저매니아가 다시 지배했다.
2000년 6월 4일에 열린 7차전은 크게 보였다. Dave(역주: 원문의 글쓴이)로부터는 예측이 없었다. 승리는 거의 힘들어 보였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전세계가 지켜보고 기다렸으며, 모든 블레이저스 진영은 숨을 죽였다. 지금까지의 시리즈 추세를 정리해보자.
- 레이커스는 샤크로 갈때 번창하고, 다른 경우는 실패한다.
- 월러스와 스미스는 포틀랜드 공격의 핵심임을 입증했다.
- 피펜은 기복이 있고, 위대한 노력과 실수와 턴오버가 뒤섞여있다.
- 스타더마이어는 완전히 사라졌다.
- 포틀랜드는 엄청난 리드를 만들었다가 공격의 빈곤으로 다시 되돌려주는 습성이 있다.
- 샤크가 자유투를 넣으면, 레이커스는 훨씬 더 잘한다.
7차전의 첫 세 쿼터는 포틀랜드 팬들의 꿈이었다. 포틀랜드는 정면돌파했고, 시리즈에서 이제껏 보여주지 않았던 격렬함으로 샤크를 더블팀 트리플팀했다. 오닐은 불가피하게 공을 포기했고, 예상한대로 다른 누구에 의한 득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13-0으로 폭발한 후, 포틀랜드는 23-16으로 1쿼터를 가져갔고, 2쿼터에는 약간 물러나서 3점차로 전반을 마쳤다. 월러스와 스미스는 훌륭한 경기를 하고 있었다. 나머지 모두는 견뎌내고 있었다. 그후 포틀랜드는 3쿼터에 폭발해서, 3쿼터 종료 몇초만을 남겨두고 16점차의 리드를 만들었다. 그후로 가슴이 내려앉는 순간들의 전형을 만들게 되는 움직임으로, 레이커스의 브라이언 쇼가 3쿼터 마지막에 3점 버저비터를 성공시켜 71-58, 13점차로 좁혔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듯 했다. 포틀랜드가 4쿼터에 두자리수 점수차를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다면, 경기는 끝난 것이었다.
그리고는 내 친구들이여, 그때가 레이커스가 다시 샤크에게로 가기로 결정한 순간이었다. 오닐은 마지막 쿼터에서 9점을 넣었다. 쇼가 2개의 3점을 추가했다. 리드는 녹아없어지지 않았다. 액체가 증발한 것도 아니었다. 레이커스는 그저 핵무기를 썼고, 리드는 기화했다. 포틀랜드는 공황에 빠진듯 했고, 공을 지연시켰으며, 확신 대신 공포를 가지고 공격했고, 자신들의 유명한 공격 정체기 중에 하나가 정확히 잘못된 타이밍에 왔음을 발견했다. 월러스가 성공시키지 못했다. 스미스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나머지 포틀랜드 선수들은 그 경기 중에 요소가 아니었다. 점수차가 10점 밑으로 떨어지자, 포틀랜드 팬들은 속이 메스꺼운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1분 30초를 남기고 코비가 자유투 2개를 넣어 레이커스가 81-79로 앞설 때, 포틀랜드 팬들은 토해버렸다. 피펜이 공을 더듬거렸다. 스미스는 농락당했다. 사보니스는 파울아웃당했다. 월러스는 졸면서도 성공시킬 수 있는 슛을 놓쳤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잘못되었다. 포틀랜드는 마지막 쿼터에서 13점에 그쳤다. 레이커스는 31점을 기록했다. 7차전은 경기시간 48분 안에 꽉 들어찬 시리즈의 거의 모든 주제들을 포함했다. 결국 손가락을 흔드는 샤크와 그 동료들은 NBA 파이널에 올라 열세에 놓인 인디애나 스쿼드를 마주하게 되었다. 레이커스는 오닐 시대에 첫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포틀랜드 팬들은 두려움 속에 지켜보면서 '만약 이랬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2000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은 모든 잘못된 이유로 명작이 된다. 포틀랜드는 멸망에 내몰렸다가 강하게 반격했지만, 결국 절벽에서 추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폭발하는 것으로 끝났다. 모든 움직임, 모든 재능, 모든 예상이 있었음에도 충분치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드렉슬러 시대 파이널 실패의 모든 3년간 고통이 잔인하게도 12분 안에 압축된것 같았다. 완전히 새로운 세대의 팬들은 그 7차전 결말을 거치면서 악명높은 포틀랜드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시리즈의 상처는 이후 포틀랜드의 집단 의식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부분이 되었다.
충격적인 패배 이후에, 트레이더 밥은 그래도 다시 실험 가운을 걸치고 뭔가를 더 하기로 결심했다. 3시즌 연속으로 성공했었다. 왜 다시 시도하지 않겠는가?
이번만큼은 그것이 지나치게 된다. 대실험은 독으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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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ㅠ.ㅠ 스티브 스미스 얘기가 많이 나오지만 이 시리즈에 영향을 준 것은 본지웰스의 존재였죠. 막판에 본지웰스가 너무 잘해서 본지의 포스트업만 고집하다가 시망한 포틀
기록을 찾아보니 본지가 2년차임에도 이 시리즈에서 활약이 상당하더군요.
그러나 결국은 위기의 순간에 팀을 구원해줄 해결사가 마땅치 않았던게 재앙을 불러온듯 합니다.
이미 보셨겠지만, 고작 2년차가 코비를 상대로 공격과 수비를 다 매칭하면서도 평균 10점, 4리바운드,2도움을 기록했었죠. 3점 하나도 없이 포스트업만 가지고 비비는 모습은 195cm의 단신 슈가라는 점에서 찰스바클리를 연상시켰습니다. 하지만 기복웰스(17,19,3,3,5,20,7 이 시리즈 득점기록입니다)였다는 것. 던리비가 4쿼터에 지나치게 웰스를 공격옵션으로 이용한 것이 문제였죠.
당시 스티브 스미스도 워낙에 포스트업을 즐겨 써서, 포틀랜드는 무슨 가드들이 하루종일 포스트업한다고 생각했었죠ㅎㅎㅎㅎ
아 너무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꾸준히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유명한 Bryant to SHAQ!!!!은 아예 다시 언급하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군요 ^^;;
저는 반대로 3쿼터에 15점 뒤졌을때 토했습니다. 머리를 막 쥐어뜯고 울상이 되었었죠. 제가 NBA와 레이커스팬이 된 후로 처음 경험해본 엄청난 감정 기복이 있었던 시리즈였습니다.
이 시리즈가 2000년대 초반 리그의 패권을 좌우하게 될 줄은 당시는 상상도 못했죠.
리그 1,2위가 격돌한데다 3대1로 거의 끝난줄 알았던 시리즈가 7차전까지 갔고 7차전도 다 기울어가던 경기가 4쿼터에 대역전극이 펼쳐졌으니...
실로 역사를 가른 결정적 전투였으며, 이후 양팀의 행보는 극과 극이죠.
레이커스가 쓰리핏 포함 우승 5회 파이널 진출 7회를 이룩한 반면, 포틀랜드는 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거친 끝에 플옵에 복귀했지만 여전히 1라운드 통과 없음..
잘 봤습니다. 진짜 저 로스터는....처음 만들어졌을때 '아 피펜의 7번째 우승은 확정이구나...' 생각했었죠. 피펜-바클리-올라주원도 장난 아니었지만 그나마 나이가 많았는데, 이건...
네임밸류 면에서는 정말 대단했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
이 팀의 유일한 단점이 바로 막판 클러치 상황을 접수할 만한 'go to guy' 또는 '클로저'가 없었다는 것이죠. 스카티는 원래부터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고, 쉬드는 기복이 심했고... 00년 컨파 7차전의 패배도 바로 이 고-투-가이의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전성기 드렉슬러만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아있는 한 위대한 팀이었습니다.
역시 단기전인 플옵에서는 믿을만한 해결사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 점에서 00 포틀은 앞으로도 반면교사로 남을듯 합니다.
핍 때문에 포틀을 응원한 저로선 샤크는 진짜 악마였죠.
저 시절의 샤크는 정말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