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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의 해저유물이 남해안에서 거의 안나오는 이유!
가토 기요마사와 이순신이 전투를 벌인 지역이
요하 근처인 장산군도 일대일 가능성이 많으며
특히 장문포 전투와 고금도 해군기지 이전에 대한 추정지역이 장산군도일 가능성이 많다.
또한 북경 일대가 순천부로 불리운 지역으로 보아 백의종군하고 난 이후,
삼도수군절도사 자리를 차지한 이후
해군을 재건한 지역 중에 유력한 추정지역이다.
순천, 광양, 곡성, 구례지역은 어디인가!
북경에서 단동까지...
황하에서 압록까지...
발해만과 요동만의 연안이 해군 재건설을 하는 가장 유력한 지역이다.
부산이라는 지명은
산동성 동래현 지방과 양자강 항주 근처도 부산으로 불리운 적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도는 서안(장안)과 북경
그리고 무한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개성과 평양
그리고 한성의 영역인 것이다.
실제 임진왜란에서 싸운 이순신의 바다는
양자강 일대와 산동성 일대
그리고 요녕성 일대,
한반도 남해안 잔적 소탕작전 등으로 방대한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중일기에서 절강에서 강소까지 바다를 지켰다고 나온 것이다.
자세한 정위론과 전체 전쟁상황은 차후에 자세히 언급을 드린다.
조선수군이 전멸했다는 거제도 칠천량 바다를 뒤져 보아도
임진왜란 당시에 침몰한 어떤 배의 흔적조차 안나온다.
그 이전에 침몰한 배는 많이 나와도
확율적으로 많을 것 같은 임진왜란 유적은 거의 안나온다.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주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변방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강한 자금을 동원해 남해안을 뒤져도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양자강이나 황하강 그리고 요하의 바다를 뒤져보면
많은 임진왜란 유물이 나올 것이며 거북선도 나올 것이다.
백두산정계비의 진실 -
압록강과 두만강은 요하(난하)와 아무르강을 말한다.
아래 지도에 나온 것은 지리와 강 이름을 표시한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다.
첫째는 조선 초 세종 때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동북방에 6진을 설치하는데
그 설치지역이 한반도 두만강 안이 아니라
서북으로는 바이칼호에서 동북으로는 사할린까지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청나라와 영토분쟁이 일어나서
경계를 확정지은 것으로 유명한 백두산정계비의 영역이 만주 일대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압록강과 두만(토문)강,
그리고 백두산은 조작된 지명이며 원 지명은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요하의 서쪽상류 시라무렌강에서 거란제국을 세우다.
요하라는 강 이름이 형성되는 계기는 거란족의 부흥지이기 때문이다.
요하(遼河) 상류이며 서요하의 끝인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거주하였는데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다음 황제를 칭하고 거란을 건국하였으며,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947년 국호를 요(遼)로 개칭한 것에서 유래한다.
시라무렌강 상류는 바이칼호와 몽고고원 아래에 있으며 내몽고자치주에 해당된다.
압록강은 요하이며 난하가 요하라고 한다.
<삼국유사>와 <중국 요사지리지>에서 "요하를 일명 압록이라 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서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며,
지금의 난하가 '요수(요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동과 요서의 기준은 어디인가!
거란족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요(堯)라고 하였으며,
여진족이 나라를 세우고 금(金)이라 하였다.
이는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가!
단군조선 이후
대부여와 고구려까지 5부족 유목연맹체를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역사의 뿌리는 같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요나라의 이름을 따서 국호를 요라고 한 것이다.
요(堯)는 성이 이기(伊耆), 이름은 방훈(放勛), 호는 도당씨(陶唐氏)이며,
제요(帝堯)라고도 하고 당요(唐堯)라고도 한다.
그래서 서이족의 당(唐)이라는 나라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유목족은 대대로 부족연맹에 의하여 나라를 세우고
동서양 스탭지역을 활동기반으로 하였으며,
실크로드를 상업기반으로 하면서 제국을 다스렸던 것이다.
요라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7회력인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일요일에 들어가는 요도 같은 유래인 것이다.
또한 중요하다는 말도 중앙의 요라는 뜻이며,
모든 사물의 중심이자 상징을 요라고 한 것이 이것이며,
국호와 왕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란족도 같은 유목족 뿌리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도 5부족 연맹체에서 비롯되었으며
고주몽 계열의 계루부를 중심으로 연합하였다.
역사를 따라 추적해보면 계루부가 거란족이 되었으며
그 연원은 그리스 유목족까지 연결이 된다.(글안->거란->코란->카라->가야)
* 여기서 그리스 유목족은 현 서구백인이 아니라
서역으로 진출한 배달족을 말한다.
유럽어의 뿌리는 한글이다.
요라는 것은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운 중심지역이기도 하며
황제국의 중심을 요라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준에 따라, 시대에 따라 각각 달라지는 것이다.
요나라는 황제국이기 때문에 황제국이 중심이 되어
그 중심에서 동쪽을 요동이라 하고 서쪽을 요서라 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시대에는
유프라테스와 티크리스강을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것이며(환인제국),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것이며(배달국),
황하의 중심 장안에서 요서와 요동을 나누는 것이다(단군조선).
시대 변천과 함께 각기 달라지는 것이며
제후국에서는 방향이 바뀌어 나타나기도 한다.
요동과 요서라는 개념도 황제국이 사용하는 일반 명사가 된다.
특히 수도를 칭하는 평양(平陽)이나 안(安)도 요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며
한수(漢水)나 압록수(鴨綠水)도 같은 개념이 된다.
압록강은 어디를 말하는가!
압록강의 어원은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 빛과 같다(…水色如鴨頭…)고 하여
압록강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리머리 모양을 닮은 강이라고도 하며
오리의 음을 따서 오리-> 아리-> 아리수-> 우리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리는 알과 같은 말이며
알은 <안 - 한 - 우리 - 울 - 훈>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한수 = 압록강 = 한강 = 아리수와 같다.
민족의 중심강이 아리수의 파생영역으로 발전되어 여러 이름으로 변형, 발전된다.
중심강이기 때문에 황하강으로 부르기도 하며
문명의 중심이기 때문에 불-> 파이어-> 페르-> 비류로 발전되어 비류슈 = 패수로 발전된 것이다.
크게 보면 여러 강의 어원은 비슷한 매커니즘의 영역인 것이다.
크게 본다면 아리수나 압록수는
아랄해의 지류인 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이 압록수이자 아리수이자 한강이며,
요하의 여러 지류도 압록수이자 아리수이자 한강이 된다.
그리고 황하도 같은 개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민족의 흥망성쇠와 이동, 영토의 확장과 축소에 따라 달리 불리워지며
자국과 경쟁국의 역사적 명분에 따라 왜곡되기고 하고 변형되기도 한다.
때문에 획일적인 적용과 해석이 곤란하며
그 당시 상황에 맞는 적용이 필요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9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세 개의 큰 물이 있는데
하나는 백두산(白頭山) 아래의 마죽동(馬竹洞)에서 나와
혜산진(惠山鎭)과 인차외(仁遮外)를 거쳐
최천이동(崔天已洞)의 물과 합류하여 군계(郡界)로 들어오고,
또 하나는 길성현(吉城縣) 북쪽 장백산(長白山) 서북보(西北堡)에서 나와
운총보(雲寵堡)를 거쳐 허천강(虛川江)과 합하여
강기(江岐)에 이르러 군계로 들어오며,
또 하나는 함흥부(咸興府)의 황초령(黃草嶺)ㆍ부전령(赴戰嶺)과
평안도 강계부(江界府)의 오만령(五萬嶺) 등의 물이 어면강(魚面江)과 합하여 군계로 들어온다.
세 개의 물이 합류하여 압록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삼수(三水)라고 이른다'하고,
혹은 말하기를,
“군(郡)이 어면강ㆍ압록강ㆍ삼수동수(三水洞水)의 세 가닥 사이에 있기 때문에 삼수라 했다.”한다.
삼수 또는 삼수동수라는 지명이 있는 곳이
아무르강 삼강평야와 요녕성의 요하 하류지방 두 군데가 있다.
그 중에 요하가 압록강인 이유는 요하의 지형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는 내용과 같다.
그리고 현 압록강은 전혀 내용이 틀리다.
요하 하류에 싼장커우[三江口] 부근에서,
창바이[長白]산맥에서 발원한 동 랴오허강을 합쳐 랴오허강이 된 뒤,
그대로 남하하다가 훈허강[渾河]을 합치고 나서
잉커우[營口]에서 보하이해[渤海]로 흘러든다.
그리고 혼하는 원래는 랴오허강[遼河]의 지류였으나,
1958년 와이랴오허강[外遼河]을 가로막은 뒤부터 독립수계가 되었다.
칭위안만주자치현[淸原滿族自治縣] 동쪽 군마링[滾馬嶺]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푸순[撫順] • 선양[沈陽] • 랴오중[遼中] 등을 지나
하이청시[海城市] 싼차강[三酒河] 부근에서 타이쯔강[太子河]과 합류한다.
《한서(漢書)》의 <조선전(朝鮮傳)>과 <지리지(地理志)>에
패수(浿水) • 염난수(鹽難水) • 마자수(馬水) 등의 이름으로 나온다.
압록강의 한 지류에 소금강을 뜻하는 염난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금기가 있는 강이 포함되어야 하는데
소금기가 있는 강은 요하의 서쪽지류 상류인 시라무렌강에 소금강이 존재한다.
지금도 그곳은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소금기를 머금은 지역이며
내륙에 많은 소금이 산출되는 장소가 실존한다.
또한 염난수라고 일컬어지는 강은 아랄해 일대의 아무다리아강이며
아랄해가 염수이며 서쪽으로 흐른다.
<한서지리지>에는 “마자수는 서쪽으로 흘려 염택에 들어간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염택은 소금연못이므로 아랄해를 지칭한다.
압록은 두 곳을 말한다.
또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에 들어가서,
서남쪽으로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라고 자세히 기술하였는데
서안평이 바로 서투르크 평원인 파미르 고원을 넘어 존재하는 아랄해 일대평원을 말한다.
참고로 현 요하지명의 역사기록에 중첩이 일어나는 것은
압록강을 지칭하는 것을 한 곳에 모아 적용시키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것이 나타나는 것은 민족의 이동과 함께 비슷한 자연환경에 같은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두만강은 어디를 말하는가!
두만강(豆滿江)은 콩이 가득하다는 말이다.
콩은 태극이며, 생명이며, 시초를 말한다.
아무르의 <아>도 아사에서 나온 말이며, 새로움이며,
알파벳의 A도 감탄사의 의미도 있지만 생명현상의 명사를 의미한다.
만은 마르로 연음이 되며 마르-> 무르로 연음이 된다.
그러므로 아무르를 한자로 옮기면 두만강이 되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0권>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鴨綠江),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松花江)과 혼동강(混同江),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하강(蘇下江)과 속평강(速平江),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豆滿江)이다.”
또 “여진 말로 만(萬)을 두만(豆滿)이라고 하는데,
여러 갈래의 물이 여기로 합류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라고 기술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여러 갈래의 물이 하나로 합류되는 것이 두만강이므로 현 압록강이 아닌 것이다.
또한 남으로 압록강이 흐르고
이 압록강이 요하(하북성 난하)라면
북으로 흐르는 것은 송회강과 여러 지류에 해당된다.
이 지류가 다시 동으로 흐르고 하나로 뭉쳐 바다로 흘러간다고 하였다.
바로 아무르강을 말하는 것이다.
두만강은 만주강을 말하며 만주 일대를 가득히 채우는 강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흑룡강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동단국 - 조선족 - 고구려의 상징색이 흑색이기 때문에 붙은 명칭인 것이지
현 두만강의 짧은 강이 아니다.
이순신이 여진족과 싸운 두만강 하류의 녹둔도 전투지역은 어디인가!
녹둔도는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서 방영되어 유명해진 전투지명이다.
여진족인 야인의 습격을 막기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녹둔도를 사수한다는 내용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게 기록되었다.
1587년(선조 20) 여진족의 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당해,
당시 책임자였던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그 책임을 지고 해임된 바 있다.
두만강이 현 한반도 두만강이 아니고 아무르강이라면
두만강 하류에 있는 녹둔도도 아무르강 하류로 가야한다.
이 뿐만 아니라 녹둔도는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과 싸운 섬이며
이 섬 이름을 따서 녹둔도 전투라고 한다.
역사기록을 보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여기에 공주를 거쳐 동류해 25리에 이르면 사차마도에 도달하고
여기서 강물이 나누어져 5리 쯤에서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하고있다.
세조 원년(1455년) 8월에는 이전까지
사차침도, 사차마도라 하던 것이 녹둔도 또는 녹도로 명명된다.
현 두만강 하류에 삼각주로 된 지명이 녹둔도라고 한다.
두만강 하구에 있는 둘레가 8km인 타원형의 자그마한 땅이다.
직사각형으로 환산하면 가로, 세로 2km에 해당한다.
과연 그곳이 녹둔도인가!
얼마가 그곳이 중요하길래 여진족이 목숨을 걸고 침범하였으며,
얼마나 중요하길래 그 안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설치했을까!
그 땅 속에서 금이라도 나오는 비밀이 있는 것인가!
아무르강을 두만강으로 옮기다 보니,
아무르강 하구에 있는 사할린 섬을 억지로 끼워 맟추다 보니,
그만 코미디를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인 양 우기는 식민사학이나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일반인이나 마찬가지다.
녹둔도가 두만강 하류의 작은 섬이 아니라 아무르강 하류의 사할린 섬이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정황으로 보면 절대 녹둔도가 될 수 없다.
여진족은 유라시아 일대를 주름잡은 유목족이며,
훗날 금나라를 세우고 나중에 청나라로 발전하여 중국대륙을 장악한,
몽고제국 이래로 가장 강력한 유목집단이다.
여진족은 몽고초원과 만주 일대를 주름잡은 유목족이다.
그런 민족이 가장 작은 척박한 한반도 함경도를 노리고, 두만강을 노리겠는가!
만주일대는 화북평야로
한반도보다 몇배 넓은 농경지와 토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 만주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그래서 절대로 한반도를 넘지 않으며 넘을 필요성을 못느낀다.
그것도 고작 작은 땅인 두만강 하류 작은 땅을 노린단 말인가!
여진족이 그렇게 바보집단인가!
드넒은 화북평야와 송화강과 아무르강,
그리고 흑룡강의 농경지와 목축지를 버리고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는 한반도로 가서
그것도 아주 작은 섬 녹둔도를 노린단 말인가!
녹둔도는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한번만 읽어 보아도 안다.
세종실록지리지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을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조선 세종 때 6진(鎭)을 개척한 이래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섬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들이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은 상주가 금지되었고, 춘경추수기에 한해서만 출입이 허가되었다.
여기서 녹둔도가 두만강 내의 섬이라면
성을 쌓고 군대가 상주하고
그리고 농사를 지을 땅 면적이 나오는가!
그것도 직경 2km 안에 모든 것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사할린 섬이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녹둔도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역대 왕들은 자주 언급을 한다.
<세조는 함길도 도절제사인 양정과 도사 강효문에게
조산구자(造山口子) 녹둔도 농민이 들에서 일할 때
야인들이 배를 타고 침입, 약탈할 것이 우려되므로
진장(鎭將)과 만호들에게 엄중히 방비하라는 밀유(密諭)를 내리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중종 9년(1514년)에는 봄철 농사를 지을 때면
조산보의 군민이 녹둔도로 들어감으로 본보가 빌 정도라고 하고있다>라고 되어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할린이 왜 녹둔도(鹿屯島)인가!
녹둔도는 한글로 풀어보면 <사슴 + 언덕 + 섬>이다.
과연 사할린이 사슴언덕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사할린 내에 홀름스크는 사할린 남서안의 항구도시로 인구는 약 5만 2,000명이다.
러시아어로 '언덕'을 의미하는 이 마을의 뒤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즉 홀름이 언덕이라는 말이다.
홀름-> 할림-> 할린이니 같은 음운계열이다.
그리고 스크는 섬을 의미하니
홀름(할림-> 할린 - 언덕) + 스크(섴-> 섬 - 도)이니 언덕섬(둔도-屯島)가 된다.
그러므로 사할린의 할린은 언덕인 것이다.
그렇다면 샤(사슴) + 할린(언덕)이 된다면 샤가 사슴이라는 말인가!
샤할린은 영어로 Sakhalin(Sak + hill + lin)으로 표현되며
사슴이나 양, 소고기를 뜻하는 영문은 다음과 같다.
sheep(숫양) Stag(숫사슴) Caribou(순록) Steak(쇠고기)로 발음된다.
일본어로 보면 鹿しか(시카)로 발음된다.
즉 한글은 사슴이며,
일본은 시카이며,
영어는 샤가 공통으로 발음된다.
그러므로 샤는 사슴을 말한다.
샤할린은 사슴언덕이 되며 녹둔이 된다.
사할린은 완벽한 녹둔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할린은 목축으로 소와 사슴을 기르고 있기 때문에 사슴섬으로 부른 것이다.
녹둔도라는 이름을 지을 때에는
반그시 사물의 특성을 보고 지은 것인데
현 두만강 녹둔도는 전혀 특징이 없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녹둔도는 사할린 섬이다.
우리의 6진 최전방 연해주와 사할린은 반드시 찾아야 할 땅이다.
이순신의 젊은시절 숨결이 묻어 있으며 우리 조상이 개척한 땅이다.
지금 사할린은 유전지대로 탈바꿈되어 황금의 땅이 되었다.
특히 사할린의 북쪽은 천연가스가 풍부하며,
1999년 7월부터는 원유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러시아의 보고로 통하는 지역이다.
간단한 도표 제일 첫 그림에 사할린이 소개되어 있다.
사할린은 육지와 8km 정도로 떨어져 있으며
겨울철에는 바다가 얼어 걸어서 사할린까지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여진족이 겨울철에 말을 타고 섬에 침공이 가능하며
평상시에는 배로 침공이 가능했다.
사할린과 연결된 콤소모몰스크와 하바로프스키가 6진 중에 하나인 경흥인 것이다.
그 곳에 조산만호가 존재한다.
사할린이 녹둔도라는 것도 필자가 최초로 주장한다.
사물의 형상을 따라 이름을 짓기 때문에
함경도 녹둔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억지로 아무르강을 두만강으로 영토를 축소하다 보니
두만강 유역을 뒤져 만들어낸 코미디 자작극인 것이다.
누가 이런 자작극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우리는 알아야한다.
아래 그림은 간도지방을 세밀하게 그린 지도이다.
요하와 송화강을 결합한 지역을 표시한 것이다.
노란색 지도는 1895년 전후로 하는 조선과 청의 국경지도다.
요하 근처를 절충지로 하여 송화강 지역을 양분한 지도다.
그리고 푸른색 지도는 일본이 정밀측량한 백두산 유역의 세부 지도이다.
백두산 위쪽으로 표시된 강이 토문강으로 나온다.
우리는 중국으로부터 간도 반환운동과 함께
러시아로부터 연해주와 사할린 반환운동을 해야한다.
아직 국제법상 법적 청구가 가능한 시점이다.
이순신이 지켜낸 녹둔도가 사할린이며
우리는 녹둔도 회복운동을 해야한다!
김종서의 6진 중 한 지역인 바이칼호 남쪽에 회령진을 설치하다.
조선 세종 때에 4군과 6진을 개척했다고 알고있다.
6진은 조선 세종 때 동북방면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에 대비하여
종성(鍾城) • 온성(穩城) • 회령(會寧) • 경원(慶源) • 경흥(慶興) • 부령(富寧)의
여섯 진을 설치한 것을 말한다.
6진을 운영하는 가운데 변동사항이 있는데,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겨 종성군으로 하고
알목하에 회령진을 신설하는 조치를 내린다.
회령진이 신설된 것은 여진족 내분으로 후퇴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목하라는 지명이 놀랍게도
징기스칸(成吉思汗)의 손자 쿠빌라이칸(원 세조)이
카라코롬(和林) 북쪽 알목하 상류에서 나라(원 = 몽고)를 일으킨 곳이다.
이 곳을 회령으로 부르는 것은
헤를렌강(몽고수도 울란바토르 동쪽)이 흐르기 때문에 헤를렌을 음사한 것이 회령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강은 해란강으로 부른다.
선구자의 노래가사 중에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라고 나온다.
구한 말 이전부터 해란강(헤를렌)은 유목족의 중요한 강이기 때문이다.
바이칼호에서 동남쪽으로 만주를 가다보면 반드시 건너야 할 강이기 때문이다.
이곳이 바로 회령인 것이다.
6진 중 경흥은 연해주이며
회령은 헤를렌강 일대를 말한다.
그러므로 만주전체가 함경도 땅이자 동북부 간방조선의 영역이다.
문명의 난생신화와 흑계룡!
백두산은 민족이동과 함께 중요한 신앙과 정신적인 상징의 대상이다.
항시 정북에 위치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힌두쿠시 산과 칸탱크리 산을 백두산으로 삼았다(배달국).
신강성에서는 천산산맥의 천산을 백두산으로 삼았고(단군조선),
서안(장안)에 수도를 삼을 때에는 삼서성에 있는 태백산을(고구려, 고려),
북경에 수도를 삼았을 때에는 의무려산을(근세조선),
만주에서는 길림성에 있는 북산(베이산)을,
몽고동부에서는 초이발산을 백두산으로 삼았다.
즉 하나의 산이 아닌 민족의 중심지역 북쪽을 백두산으로 삼은 것이다.
만주와 몽고를 나누는 축은 강으로 보면 헤를렌강이며
이 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갈린다.
그리고 동과 서를 기준으로 나누면 대흥 안령산맥이다.
몽고고원에서 대흥 안령 산맥을 지나면 만주평원으로 뚝 떨어지는 공간이 나온다.
대흥 안령산맥의 북쪽 끝에서 소흥 안령산맥이 뻗어 장백산맥으로 이어진다.
장백산맥은 현 한반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축으로 지나가는 산맥이다.
이 산맥이 있어서 한반도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대흥 안령산맥과 장백산맥의 중간에 위치한 곳이 마치 알을 품은 것처럼 타원형의 평원이다.
이 지역 중심의 작은 산악을 중심산으로 삼았으며 백두산으로 인식한 것이다.
후일 한반도로 내려와 1900년 이후에 새로운 상징으로 백두산을 중심산으로 삼은 것이다.
이성계가 태어난 지명이며 근세조선의 세력기반이 되는 지방이다.
그러나 이 지방은 청원 만족자치구지역이며 청나라가 태생한 곳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그리고 길림성 길림과 장춘 사이에 있는 북산이
천하제일의 명산이라 지칭되며 여러 만주족 유적이 있다.
그러나 만주족이 아닌 조선족의 유적이다
(만주족이나 조선족이나 다 우리 동이족을 가리킨 말이다).
유목연합이기 때문에 같은 뿌리를 기반으로 출발을 하기 때문이다.
만주는 또 다른 난생지역의 계룡지역인 것이다.
그 상징을 흑룡으로 보는 것이며 고구려의 상징이자 단군조선의 후신으로 본다.
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만주는 신만주이며
원만주는 신강성 만주이다.
둘다 지형이 계란형이다.
그래서 계룡산이라 한 것이지 어떤 특정한 산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상형주의 원칙이 적용된다.
구만주(신강성)는 황계룡,
신만주(간도)는 흑계룡이다.
이성계의 고향과 함흥차사의 비밀
이성계가 태어난 고향은 함경도 영흥(永興) 출생이다.
영흥과 길주를 합하여 영길도라고 하였으니
영흥은 길림성에서 그리 멀지않는 요충지에서 태어났다고 보면 된다.
영흥은 요양이나 심양 일대로 추정되기 때문에
요녕성이 영흥지방이며 길림성이 길주지방이 된다.
고려 말 공민왕 시기에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활동한 지역이다.
이 시기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회복이 되었기 때문에
동북방의 쌍성총관부는 요녕성과 길림성 일대가 된다.
이성계도 이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이다.
고려 말에 요녕성, 길림성 일대의 상황을 보면
이성계가 예맥족 / 만주족 / 조선족의 활동무대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1234년 금나라가 몽고에 멸망하자 여진족은 만주지방에서 부족단위로 할거하였고,
만주 일대에서 세력의 이합집산이 일어났다.
금나라에서 몽고로, 몽고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세력순환의 격동 속 이성계의 가계 내력이다.
이 시기에 아버지 이자춘은 쌍성총관부 천호 자격으로 고려조정에 내조하러 왔다.
여진족과 몽고족의 틈바구니에 있는 만주에 기반을 둔 이성계 집안이 지방호족으로 등장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청 태조의 발상지는 청 태조의 선조인 이성계의 발상지이다.
후일 임진왜란 당시에
청나라에서 조선에게 먼저 왜의 공격에 격분하여 먼저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쥐새끼 같은 왜를 몰아내 부모님의 나라에 원수를 갚겠다고 나온다>.
조선은 우리 부모님의 나라라고 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성이 <애각신라>라는 사실이다.
신라의 후예를 지칭한 것이다.
청나라 이전에 금 - 후금을 세운 여진족도 김씨 후손을 내세운 것이다.
태조 이성계 이후에 왕자의 난이 있은 후 이성계는 함흥으로 세력기반을 옮겼다.
우리가 알고있는 함흥차사는 바로 만주에 세력기반을 둔 만주족의 근거지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구축한 것이지 자기 고향에 휴양삼아 기거한 것이 아니다.
이성계의 초상화는 푸른색 곤룡포를 사용한다.
다른 왕은 붉은색이나 노란색 곤룡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의외인데
후일 청나라의 상징은 푸른색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핏줄이자 가계인 것이다.
같은 뿌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청색의 곤룡포와 청나라의 국호,
그리고 만주는 하나로 연결된다.
몽고에서는 <따르따르>족라고 하며
우리 문헌에는 <조선조선>족이라 부르는데, <조선>이 <따르>인 것이다.
조선이 황제국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여진족도 이성계 가계를 정통맥으로 삼았으나
나라를 세우고 황제국으로 부상하자
후기 계승자인,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를 정통맥으로 삼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조선조 발상지가 청조 발상지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에서도 연동되며
이성계 가계의 유목족 내력을 숨기게 된다.
새로운 가계인 전주 이씨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이 있다보니
유목족의 가계역사에 대해 미화작업을 함과 동시에
여진족과의 연계된 부분은 조작하게 된다.
대대로 활동해온 만주족의 무대가
어느 날 갑자기 여진족의 무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 된다.
백두산 정계비에 일어난 사건은 이성계 고향을 차지하기 위한 정통성 싸움인 것이다.
만주에서 존재한 청나라 유적은
조선족의 유적을 바꿔치기 한 것이며
실제 청나라가 일어난 지역은
만주가 아닌 신강성 지역에 기반을 두고 동진을 한 것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지나족(서이족)에 동화되었으며,
실제 만주어를 사용하는 일부 민족이 남아있는 지방이
신강성 일대에 약간 남아있으며 만주에는 거의 없다.
이것은 바로 만주에서 청나라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청나라가 중국을 침공하고
그 빈 공간을 한반도 세력이 차지하여 간도를 개발했다는 논리는 허구일 뿐이며
청나라를 세운 후금이 자기 민족의 발상지를 소홀히 할 리는 없다.
청나라 건국지와 수도는 절대 요녕성을 중심으로 하는 심양이 아니다.
신강성이나 내몽고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이다.
대륙조선이 망하여 한반도로 피난하는 과정
중앙대륙 신시배달국 - 단군조선 - 중앙 대륙삼국 - 동양 대륙고려 - 동방 대륙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황제국의 위상과 역사는 사그라들고 동북방 변방에 우리는 존재한다.
이제 옛 화려한 영광과 역사를 찾아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미래이자 숙명이다.
조선의 몰락은 서양과 동양의 패권에서 희생양으로 전락한 것이다.
동방의 강자 조선은 다시 일어서야 하며
서양 문명을 이기고 새로운 동양문명을 창조해야 한다.
그 웅혼하고 장대한 시작은 한류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이제 옛 것을 회복하는 다물운동이 벌어져야 한다.
잃어버린 역사와 정신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것이 우리의 밝은 미래인 것이다.
서북방의 위협
조선초기 4군과 6진을 기반으로 광대한 황제국을 자랑하나 4군은 이내 곧 무너지게 되며
4군을 통해 유목족이 유입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6진은 임진왜란 전후까지 강하게 버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0년 동안 북방에서는 유목족의 이합집산이 일어나면서
여진족은 해서(海西) ·건주(建州) · 야인(野人)의 3부로 나누어진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워 신강성 일대와 내몽고에서 발흥하기 시작한다.
임진왜란 이후에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위협하게 된다.
서남방의 배신
명나라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어부지리 효과를 보고
양자강 이남과 상류지방에 머무는 활동영역을 더욱 넓혀
양자강 하류지방까지 확대하는 계기가 된다.
전통적으로 동이족과 서이족은 형제관계를 통한 친선, 교류의 나라였으며
중국을 양분하는 거대세력이었다.
그러나 그 주도권을 서이족인 지나족에게
한번도 빼앗기지 않은, 황제국의 위상을 대대로 지켜왔다.
황하강 일대를 중심으로 중국 동해안을 중심으로 동양 역사의 주도적 역할을 해온 것이다.
서이족은 남서방이나 서방 또는 남지나해를 기반으로 하는 변방의 열국에 지나지 않았다.
동남방의 위협
왜는 해양세력을 말한다.
왜(倭)는 외(外)이며, 바깥을 의미하며, 여인국을 의미한다.
광동성과 복건성, 동남아 일대를 대상으로 해적질을 하는 도적 떼이며,
왜구라는 별칭으로 존재하였으며,
일본과 또 다른 분류를 하고있다.
일본이 왜가 아니며
단지 대륙왜의 근거지를 일본왜의 근거지로 바꾼 것 이외는 없다.
왜는 조선국의 제후국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지방 체계로 보면 도 관찰사의 지위이며 지방호족의 왕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와 이상한 조약이 체결되는데
일본이 점유한 탐라를 주고 조선이 점유한 대마도를 맞교환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탐라가 제주이고 대마도가 쓰시마 섬이 아니다.
탐라는 대만이고 쓰시마는 일본열도인 것이다.
즉 대륙왜가 일본왜로 쫓겨 들어갔지만
왜는 일본열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열도는 해양도 소속이며 부속도서일 뿐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열도는 교역이 거의 없는 변방이었으며
왜구들이 해외 포르투칼 세력과 해양세력의 연합을 통해 대륙조선을 정벌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열도를 완전 할양받은 일본은
덕천가강에 의해 에도막부 [江戶幕府(강호막부)]가 열린다.
강호라 불리운 것은 양자강 일대를 형성한 대륙왜 세력이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붕괴시키고
천황 친정형태의 통일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서 다시 조선을 침공한 것이다.
두 번의 침공으로 조선은 완전 패망으로 전락하게 된다.
동북방의 피신
동북방인 간도와 한반도로 피신하는 과정은 서서히 여러 차례의 과정을 통해 전개된다.
1차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많은 유민이 대륙을 떠나 간도로 진입하게 되며,
2차로 청나라가 오르도스 지방인 서안북부 내몽고 지방을 점령하게 되고
북경을 위협하자 한반도로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대동법과 사회제도가 크게 비뀌게 된다.
또한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많은 지리서가 출간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정치적 분열은 당파싸움이다.
당파는 단순히 정치적 견해가 틀린 것에 따른 국론분열이 아니다.
지방호족간의 이견과 이합집산인 것이다.
임진왜란을 통해 동인과 서인이 나누어지고
다시 동인 남인과 북인이 나누어지는데,
남인과 북인이 나누어지는 계기가 분조(分朝)활동이다.
그 시작은 광해군 때에 분조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 토지결수가 1/10로 줄어들게 된다.
급격한 세입감소는 지방호족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지
전쟁을 통한 인구감소나 농사 지을 인구감소가 아니라
중앙조선 황제국에서 이탈하는 지방호족이 늘어남과 동시에
새로운 지방으로 이전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대륙조선은 동방조선국(중국 동해안)과
북방조선(만주국과 한반도)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후 본토조선이 멸망한 시기는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려우나
명성황후 시해를 기점으로 추산된다.
그 때까지 황후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은 황제국의 전통을 이었다는 뜻이다.
조선개국 500년에 한양시대가 끝나다!
북경과 서안을 기반으로 하는 한양시대가 끝나는 시기는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려우나
1895년 10월8일(양력) 명성 황후 시해(을미사변)를 기점으로 열리는 시기로 본다.
대륙조선이 망하자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많은 조선인이
한국으로 배를 통해, 육지를 통해 건너오게 되거나
지나족에 동화되거나 대량학살이 된다.
관동대학살, 남경대학살, 중국 해남성 조선인 학살, 사할린 대학살,
그리고 만주지방에 거주하는 많은 조선인을 이역만리 땅으로 이주시킨다.
자세히 조사되지 않았지만 뿔뿔히 흩어지는 비극의 역사가 된 것이다.
수많은 임시정부가 - 상해 임시정부, 중경 임시정부,
북경 임시정부, 만주 독립국 - 들어선 것이 그 실예이다.
가장 극심한 타격이 된 이유는
일본의 대륙진출과 정복지역이 정확히 대륙조선과 만주,
한반도조선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동남아제국을 침공한 것은
해양도 백제의 영역이며 해양조선의 영역이다.
중국동부와 만주 그리고 한반도를 침공한 것은 대륙조선과 만주조선의 영역이다.
* 1919년 임시정부가 조성된 당시에 대한민국은 이미 건국되었다.
즉, 원래 대한민국도 중국본토에서 건국된 대국이었다(1919. 04. 11)
- 2006년 현재 대한민국 건국 87년.
중국에서는 서울을 한성이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경성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그냥 서울이라고 부른다.
왜 이렇게 다르게 부르는 것인가!
중국의 전신이 명나라와 청나라이므로 조선에 대하여 잘 안다.
한양과 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륙에서 망한 조선인이 건설한 수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성이라고 부른다.
한성 중에 황제가 사는 곳이 한양인 것이다.
한민족은 동대문을 낙양으로 서대문을 서안(장안)으로 알고있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 동대문, 서대문을 일본인이 강제로 부르게 해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의 동대문과 서대문으로 부르는 것은 일본인일 뿐..
우리는 그냥 서대문을 서문으로 불렀다고 한다.
덕수궁 대안문이 일제시대 대한문으로 바뀌었다.
서울 한 복판에 일어난 사실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어떤 학자의 주장과 근거가 나와 얼마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물며 이런 상황인데
임진왜란 이후에 벌어지는, 엄청난 대륙조선의 수난사를 왜곡하는 것은 아주 쉬운 것이다
게다가 35년동안 일제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또한 근대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비로소 일본에 의해 본격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건립 당시 이름인 대안문(大安門)에서 1906년
지금의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뀐 것을 둘러싸고 여러 억측이 있었다.
왜 대안문이라고 했는가! 북경은 천안문이다.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安)을 쓰는 것은
황제국에서만 쓰기 때문에 못쓰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대한(大漢)과 대한(大韓)중에 大漢을 쓴 것인가!
그것은 한나라의 피지배 민족임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이거나
우리가 원래 한자를 쓰는 동방문명 주도국이라는 의미인데 확실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안북 - 안남 - 안동 - 안서를 쓰는 것은
대대로 환인제국 안파견의 정통맥이자 천손민족이기 때문이다.
북경에 천안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한민족이 세운 건물과 글인 것이다.
* 북경의 천안문이 곧 근세조선의 대안문이다.
일본에서는 왜 경성이라고 부른 것인가!
옛날부터 경성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대로 부른 것이다.
경성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조선은 3경 5부제도를 유지해왔다.
즉 복수의 수도를 두고 그 수도를 지키는 주변 도시를 세우는 것이다.
한성을 둔다면 3개의 한성이 있고
그 중에 임금이 계시는 곳은 한양이며
나머지는 한성이 된다.
그것이 3경제도나 수도제도다.
그리고 그 수도를 중심으로 전후좌우 포진된 도시가 경성인 것이다.
경을 지키는 성이 경성이며 양을 지키는 성이 한성인 것이다.
경성이라고 하는 것은 3개의 성을 지키는 하나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왜 서울이라고 했는가!
새로운 울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터전기반이기 때문이다.
즉 변방의 한반도 주도세력이 이주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그 이전도 조선인이 살았지만,
주도세력이 대량으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해방을 전후로 하여 엄청나게 서울로 들어온 것이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서울은 강북 일부를 제외하고 허허벌판이었으며
논과 밭이 가득한 한적한 도시였을 뿐이다.
조선 500년을 이어온 수도가 아닌, 그저 경성이었다.
현 경복궁에 완벽한 왕궁이 있는데 무슨 소리이며,
조선 개국시기부터 건설한 대들보 상량기록과 흔적이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수 있다.
고려 말 임시로 강화도 천도가 되는 계기가 경성에 왕궁이 들어선 내력이다.
즉 강화도가 한반도인 것이다.
고려 역사에서 강화도 섬은 한반도이며
대륙에서는 한반도를 섬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간도도 사이섬(間島)이라 하여 대륙에서는 섬으로 본다.
동쪽 바다에, 작은 섬 황하강(한강) 하류에 작은 섬이 강화도인 것이다.
강화도가 천혜의 피난지인 것은 여러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첫째 한반도는 대륙과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완전 분리된 지역이다.
그리고 그 위는 장백산맥으로 험난하게 장막이 쳐진 상황이다.
그리고 한반도 북부는 산이 많기 때문에 대륙을 통한 침공은 대단히 힘들다.
한반도의 산은 대단히 특이해서 작은 산이 뽀쪽하게 여러겹 존재하여 대륙의 산과 다르다.
대륙의 산은 크고 웅장하지만 말이나 마차로 넘기쉬운 구도를 가진다.
그러나 한반도의 산은 불가능한 구조가 된다.
그리고 경성(서울) 주변에 농사지을 땅이 역사기록에 나온 내용과 부합한다.
역사기록에 보면 강화도 내에 여러 왕궁을 짓고 여러 절터를 세웠다고 나온다.
현 강화도 내에서는 불가능한 구조를 보인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제작한 팔만대장경이 유일하게 남은 것은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인 것이다.
한반도는 황하강 하류에 존재하는 작은 섬에 불과하며,
날씨 맑은 산동반도에서, 산 위에서 보면 한반도가 작은 섬처럼 보인다.
한반도는 대대로 대륙조선국의 피난지이며,
유배지이고, 휴양지이며, 변방으로 그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삼국과 고려와 조선의 역사 위에 유적도 그대로 연동된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허상의 반도사관이자 식민사관의 실체이다.
현 한반도 지명은 1차적으로 대륙조선에서 건너와
반도조선에 그대로 포개지게 되었으며,
2차적으로 일제시대 의도된 목적으로 다시 포개지게 되었다.
중국본토는
명나라 이후, 청나라 이후, 중국정부 이후 여러차례 지명이 바뀌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은
기원 후 5세기 전후로 하는 중원의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세력의 한반도 유입이 그것이다.
또한 독자적으로 인도에서 일본과 한반도로 직접 들어온 세력도 존재한다.
중국에서는 대륙에 존재한 동이족의 흔적을 지우고 조작하는 혁명에서 비롯된 누적된 결과이며
, 일본에서는 식민지 교육을 통한 영구지배 목적으로 조작한 것이다.
또한 대륙조선을 뺀 만주와 간도지방의 땅도 러시아에게 연해주와 사할린을 빠앗기고,
청나라에게 일방적으로 만주철도 부설권을 얻기위해 간도협약을 맺은 것이다.
또한 조선 말은 그 당시 말세와 같기 때문에 많은 도참사상이 유행하였다.
특히 남조선 사상이다.
중국본토에 남은 조선사람은 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학살의 대상이 되거나, 강제이주가 되거나
지나족에 동화되는, 소위 멸문이 된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산맥이 끊어진 섬에 들어가라는 말도 있었으며
십승지를 찾으라는 말도 있었다.
비록 해방 이후에 남북전쟁의 아픔이 있었지만
한민족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피난지이자 생존지가 한반도가 되었으며,
그것도 남쪽이 되었다.
이제 위대한 황제국 후손으로 다시 새롭게 일어서야 한다.
다시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시간대가 다가오고 있으며
위대한 동양문명과 한국의 문명이 열리고있다.
중원의 대륙조선 한양운이 500년으로 끝났으며,
간도조선운이 1895년 이후 88년만인 1983년에 새롭게 시작한 것이다.
서울 한양이 끝난 것이 아닌, 대륙조선 한양운이 끝난 것이다.
1984년이 새로운 갑자년이며 하원갑자 마지막 바퀴를 돌고있다.
특히 국제법상 100년이 되는 시한을 넘겨서는 안된다.
일단 국제법을 통해 소송을 걸어놓고 보아야한다.
간도협약 만료시기가 2009년이니 이제부터 준비해야 한다.
차기 정부가 아닌 현 정부에서 문제제기를 통해 차기정부로 해결을 넘겨야한다.
영토회복 대세와 프로젝트
일단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소송을 걸어놓아야 한다.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된다.
역사회복에서, 국제명분에서 승리해야 한다.
국제적으로 불법점유한 영토에 대한, 엄청난 부도덕의 낙인을 찍어야한다.
언젠가는 스스로 포기를 하든지 국제적 환경이 우호적으로 바뀐다.
중국 자체도 민족단위로 되면서 자체 분열된다.
중국의 통일시대는 끝난 것이다.
청나라가 근세조선을 정벌한 루트 그대로 신강성에서 재현된다.
위구르 독립투쟁에서,
내몽고와 몽고통일 투쟁에서,
티베트의 독립에서,
동북삼성의 민족운동에서 들불처럼 번질 것이다.
러시아는 한국을 경제협력 파트너로 생각해서 장기적 안목에서 포기할 수 있다.
그렇게 나온다면 중국에도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중국 자체의 각 소수민족 변화와
미 * 중의 힘겨루기에서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다.
동아시아 거대한 중앙에 유목제국의 위대한 연맹체를 만들어야 한다.
단군조선이 건국한 카스피 해에서 바이칼까지 중앙제국을 만들어야 한다.
카자흐와 우즈베키스탄, 몽고와 만주를 아우르는 단군조선을 건설하자!
간도문제는 북한의 권한이 아니다.
사할린도 마찬가지이며 통일이 되기 전에도 충분히 가능하다.
통일 이후에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 우리의 현실이다.
역사 부흥운동으로 국내적 관심충만과 국제적 우호가 일단 선결과제다
이병도가 죽기전에 단군은 신화가 아닌 우리의 국조다 ..라고 고백한
86년 10월 9일 조선일보 보도
간도지역 위치
심.요지역 -(1667-1845 봉금실시) 변책을 설치 한족출입 엄금
서간도 지역 - 1881 봉금 해제.1700년 부터 조선인 부락이 형성됨
북간도 지역 -1881년부터 봉금해제 .1872년 동변도개방후 재중동포 부락형성
동간도 지역 - 1920년 로마황제 간도지구를 한국령으로
연해주 지역 - 1860년 북경조약으로 불법으로 연해주를 러시아에 넘겨줌.
안중근 의사가 폭탄던진 하얼삔이 간도에 속함.
첫댓글 정은 있는데
반이 없으니
..
조금 심심하군.
너돼지들 씨를 말려야
합이 나올까나..
본문이 식민사학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리 생각하면 간도는 영원히 중국땅이라는 말이겠네요?
간도협약 검색해 보세요.
장개석총통(蔣介石總統)마저도 초대 문교부 장관인 안호상 박사에게 역사무지에 대하여
“당신들의 선조는 대륙의 주인이었는데 그것도 모르오,
그러니 나라를 빼앗겼지”라고 핀잔을 주었을 정도..
우리는 고대 대 강역(大江域)으로 동서가2만 리요, 남북이 5만 리에 이르렀다고 했다
인구도 1억8000만인 때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三聖記의 記錄).
중국의 양심적인 학자는 ‘중국역사는 5%도 안 된다’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
이 말을 한 위안텅 페이(袁虅飛)는 지금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다.
좀 자제하시면 어떨까 싶어요.
역사 기초가 안되니 역사소설을 씁니다.
함경도는 함흥과 경성의 앞머리 글자를 따 함경도입니다.
경상도=상주+경주, 전라도=전주+나주,,,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동북삼성에 함흥과 경성이라는 지명을 찾아 압록강 일대로 지명이
교치가 되었다는 실증을 하세요.
막연한 추측의 역사는 서구 사쿠라 역사나 식민사학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요?
사이비 역사 정말 징글징글합니다.
본문 북관대첩비에서 tv방영때 지도를 보여주며
함경도 위치를 설명한 장면을
다시 한번 읽어 보세요
함경도 경상도 지명은 저도 님처럼 알고 있지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본문 한반도 함경도가 아니라 요동반도가 맞는것 같네요
이병도가 위치를 왜곡했는지 모름
예를들면 평사리 최참판댁이 있는 지역의 이름이 악양면인데,
중국의 낙양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유래를 설명했더만요
그 동네 부락이름도 중국 낙양의 마을이름과 같다고 하더군요.
고소성도 그렇고 악양루도 그렇고.
이건 식민사학이 아니죠
우리땅을 되찾자는 말이죠
간도가 100년전에는 우리땅이자나요...요동성이 간도에 속하지요
그래서 2009년 유엔에 영토문제를 제소
@우전 본문 난중일기에 절강에서 강소까지 바다를 지켰다고 나온다고 하는데,
이걸보면 이순신이 중국땅에서 왜놈들과 싸운게 맞는거 같은데요.
https://youtu.be/8SKGWlDAFKg
임진왜란은 중국 강남에서 일어났다? 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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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화강 유역은 주나라때까지 동이족역시이고, 산동반도는 당나라가 건국되고 200년까지 조선의 자치구였죠. 백제는 요서와 산둥반도와 상해까지 지배를 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죠.
저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재의 만주지방은 조선인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배민족이 피지배민족에 의해서 언어와 문화가 사라진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현재 만주에는 조선족과 조선어가 남아 있어도 만주어는 완전히 사라졌죠,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일제시대 조선족이 만주에 많은 모양이더군요.
91세인 모친 말씀이 일제시대 공출을 당해 살기 힘들어 만주로 많이 갔다고 하더군요.
만주 살다가 다니려 온 사람들이 만주는 빈 농토가 천지라서,
개간하면 마음대로 농사를 지을수 있다고 하더래요.
그리고 옛날부터 살던 조선사람들도 많더라고 하더군요.
탈라스 전투-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파미르고원을 넘나들던 고선지 장군이 과연 당나라 장군이였일까? 고선지 장군이 고구려유민이 아닌 고구려사라면?? 파피루스와 양피지만 쓰던 서방에 제지술를 전파해 유럽의 르네상스를 부흥시킨 공로. .로마와 고구려 개마무사의 전쟁? 로마와 훈족의 전쟁으로 바뀐게 아닐까? 같은시대에 있던 로마는 수,당을 물리친 고구려에 대해 과연 몰랐을까? 이 계기로 아랍은 우리와 더욱 더 큰 교역을 하지 않았을까? 과연 조선은 문물을 닫은 암흑의 무역국가였고 서방은 과연 하멜기행기로 조선을 알았나?
고선지 장군을 재조명하면 우리의 영토와 우리역사의 진실도 조금 찾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문물을 닫은 조선은 미지의 영토였을까요? 하멜 표류기로 비로소 조선을 알았을까요? 하멜 표류기 전엔 서방은 진짜 조선, 그전 고려 ,삼국시대도 아랍과 교역을 했는데 아랍 옆 서방은 진정 몰랐을까 의문이 듭니다. 강단사학은 하멜 표류기 때문에 조선이 드러났다곤 하는데 넌센스 아닌가요?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우고 그때 도자기의 지위는 우리와 중국만이 생산하는 넘사벽 지금의 반도체급이였습니다. 일본을 거쳐 독일,프랑스,영국에 도자기 산업이 부흥하죠 <- 이점을 보면 일본과 독일,프랑스.영국은 모종의 관계인듯 보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최첨단 기술을 넘겨주는 바보나라는 없지요
@홈키파 조선말 쳐들어왔던 국가들은 위 국가들도 포함되죠..미국 포함해서 그만큼 보물급 첨단기술이 더 없나 찾아보려던것 아닌가싶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고선지 장군을 연구하면 고구려 영토와 영역을 알수 있겠지요..
1925년 이병도와 신석호가 왜곡한 역사를 90년간 배우고 있어
우리들은 세뇌가 됐다고 봅니다.
조선왕조 실록도 원본이 맞는지 종이를 연대측정해바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필사본은 원본을 복사한건지 조작된것을 복사해서 연구해서 발표하는지 조사해보면 알겠지요..
맞아요..
삼국시대도 사리센 아랍과 무역을 했다고 나오지요..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해서 상륙해서 살다 돌아가서
조선을 유럽에 알렸다는건 왜곡인것 같네요.
@우전 임진왜란도 1560년경 천주교로 분리되고 얼마후,
교황청에서 사비에르 신부를 일본에 파견해서 천주교로 세뇌후 조총.대포로 무장시켜,
조선을 처들어 왔다고 하지요..명나라까지 침력목표
불멸의 이순신에 보면,
배나 장수들 옷.깃발에 십자가가 보이지요.
1.2차 대전도 교황청이 배후
히틀러가 교황청과 조약을 체결하는 사진도 있지요..
몰락한 나플레옹이 다시 일어나는것도 교황청이 밀어주었다고 함.
히틀러와 교황청 조약체결
@우전 로마를 멸망시킨 훈족의 아틸라왕이
고구려 후손이라고 하더군요
이태리 베네치아 지명도
아틸라왕과 관련이 있다고 나옴
제가 올린 훈족글 참조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강역이 넓었던 국가는 단군조선 고구려였지요
대륙조선민족이였죠
그후 흥망성쇄가 거듭되면서 그 지역 그 일대데서 여러 나라와 부족으로 갈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국가들이 생기기도 하였고
하지만 이성계의 조선은 대륙국가는 아니였던듯
이성계에 의한 조선의 성립과정을 보면 다 알듯이 그는 고려에 귀화한 호족세력출신으로 장군이되였었고 무주공산이였던 단군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고려의 북벌전투에서 회군하여 고려조정을 치고 스스로 왕이 되였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고 하고
스스로 명나라와의 관계를 부자관계라고 하면서 사대하였고
그가 무슨 황제였고 그가 세운 조선이 무슨 대륙국가인지
일단 간도가 (한반도 1.5배) 조선땅인걸 보면 완전한 대륙국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국대륙을 일부 차지하고 있었다고 바야지요.
단군조선은 대륙국이 맞지만
이씨조선은 데룩국이 아니죠
대륙국이였던 단군조선의 고토회복을 고구려가 그 강역을 많이 장악하였고 그 후 고려도 그 단군과 고구려의 대륙고토를 회복하는 꿈을 이루려고 원나라가 멸망하고 저들의 본토 몽골로 돌아가서 무주공산이 된 그 지역,고구려의 옛고토를 회복할려고 원병을 보냈으나 이성계일파들이 회군하여 텅빈 개경에 쳐들어가 조정을 무너뜨리고 결국 조선을 건국
대륙의 고토를 회복할 천재일우의 기회, 우리민족이 다시 대륙국가로 되는 기회를 그의 일파들이 걷어차 버린것이지요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지명의 위치인것 같아요.
본문에도 나왔지만..함경도가 현재 위치 함경도가 아닌 만주지역 요동지역을 함경도라고 했네요.
그러니 우린 현재 지명에 세뇌되서 함경도라고 하면
전부 현재 함경도.압록강의 위치를 생각하지요.
그러나 본문에 나온것처럼 압록강은 사할린의 함경도 압록강을 말한다고 하지요.
임란때 이순신이 녹둔도 전투한곳이 함경도에 잇다고 나오니까,
우린 북한 함경도 근처에 잇는걸로 알고 있지요...
실제는 사할린이 함경도 녹둔도라고 하네요..
지명위치부터 바로잡는게 진정한 역사 바로세우기가 되겠네요
그리고 왜곡된 사실을 바로 잡아야,
녹둔도 전투 하면 함경도 사할린 전투라고 기억
이성계와 정도전을 비롯한 이조 조정은 그러한 과정도 다 중국 명나라에 잘 보이고 아부하는 기회로 삼고
자손국으로 자처하면서 사대주의 정책을 실시하였죠
민족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성계와 그 일파들은 후손만대의 대역죄인인 셈이지요
후손만대의 최대의 죄악을 범한 이성계가 무슨 황제
언제 이성계가 황제로 된 적이 있다고 황제라하는지
세자책봉도 중국의 승낙을 받아야 하는 주제에
역사는 기록한줄에 씌여 있는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리고 역사서 마다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각자 다르게 서술된것도 있고 왜곡된것도 있습니다
역사의 실체는 기록과 다르게 흘러온것도 많습니다
빨리 바로 잡아야 할건데,
문교부나 대통은 역사 바로세우기에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명박근혜 처벌 하는건 역사 바로세우기도 아니고 비리척결 하는거겠지요.
진정한 적폐는 밝혀지는대로 다음해 역사 교과서는 수정해서 기록해서 가르치는것..
그리고 이병도와 신석호 제자들..3세 제자들을 학계에서 퇴출 시켜야 되겠지요.
이성계와 그 일파들이 조선건국을 미화 자찬하였지만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 부속국이였고 명나라의 변방국이 되였습니다
역사서도 중요하지만
역사의 결과물과 유물 유적들이 더 중요하지요
대륙조선의 꿈은 지금도 이뤄지지 않고있죠
대륙민족은 단군조선과 그를 회복한 고구려시기에 있었죠
고구려는 대륙국가였고 수,당의 침략에 맞서 꿋꿋이 한반도 삼국을 지켜졌으나
신라의 당나라침략전쟁에 협력함으로 하여 결국 멸망하였고 대륙민족으로 살던 우리민족은 반도국민이 되였죠
신라의 통치배들도 후손만대의 대죄악을 저지른것이죠
그들 스스로 당나라의 고구려침략에 협공함므로써
우리민족의 대륙국가의 삶은 결국 끝났죠
일단 100년전 조선땅인 간도 찾는게 우선인것 같습니다.
그럼 연해주도 우리땅이 되겠지요..
일본이 조어도 영토문제로 중국과 다투듯이
간도가 조선땅인데 우리를 제외하고 중국에게 넘겼어니 충분한 근거가 되겠지요.
본문을 그거로 하면 사할린도 함경도에 속한 우리땅이었네요.
다만 경제 통일이 되야 남북이 힘을합쳐 찾기가 쉽겠지요
강단사학이 얼마나 웃기냐믄 고려말 문익점이 첨단 엑스레이 장치를 지닌 원나라 철통세관을 피하고자 목화씨를 붓통에 숨겨 밀수해서 퍼트렸다는 거짓말을 믿는다는것 삼국시대에 목화재배 기록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미개한 우리민족은 문익점이 퍼트린 면화로 겨울을 따스히 보냈다는 눈물겨운 스토리를 지어냅니다 ᆞㅋ 이것으로 보아 일본은 우리보다 600년전 목화를재배한 선진국이구려 ᆢ 문익점 면작 기념관도 지어주고 ㅋ
현재 교과서에도 그렇게 배우고 있을겁니다.
세뇌교육 70년 ..큰일이지요.
근본 원인은 1925년 조선사 편수회때 이병도가 20년간 왜곡한 역사를
해방후 서울대 총장.60년대 문교부 장관까지 하면서,
지금까지 90년간 교과서에 기록해서 배우고 있지요..
또 한사람 신석호 제자도 마찬가지..
현재는 2명의 직계제자로 부터 배운 3세 제자들이,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사학계를 주름잡지요..
한마디로 유전자 변형인간들..
아님 왜놈이 해방후 한국인으로 개명을 했는지 모르지요.
문제는 그 제자와 3세 제자들도 똑같이 세뇌를 당해,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것이 가장 큰문제고,
정부가 고칠려고 신경을 안쓴다는것이 더 큰 문제겠지요.
인간만이 인간으로만 윤회를 하고 나머지는 윤회가 없습니다.
자 사람들의 반응은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할겁니다.
논리가 나오고 지식이 되고 상식으로 고착화 됩니다.
육도윤회, 상식이죠.
영혼은 오직 인간 육신과만 도킹됩니다.
게으른 자에게 경종을 울리려고
이 놈아 게으르면 다음 생에 소로 태어난다. 이렇게 한 것이지
절대 인간은 동물로 태어나는 윤회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의 영혼을 성장시키고 또 태어나 성장시키고...
인간은 상식에 반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따라서 나의 부족함(상대를 이해시키는)을 절감하고
더욱 노력을 해야 할것입니다.
@홍익인간재세이화 세뇌는 무서운거지요..
북한에만 세뇌교육이 있는게 아니고 남한에도 70년간 세뇌교육을 받았지요.
우와~~두말이 필요없는 내용입니다. 대륙조선설의 경전으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을 듯 합니다.
이 내용만 갖고도 식민사학들은 제대로 답변조차도 하기 어려울 겁니다. 인터넷이 대중화되니 숨어있던 역사 정보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걸 꿰는 운동입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물이라고 한답니다. 이제 깍고 다듬으면 멋진 보검이 등장할 겁니다. 민족정신을 누르고 있는 일제의 망령인 개구라 소설을 전부 쓸어버릴 겁니다. 반드시 결정적인 계기도 등장할 겁니다.
네...국운이 도래해서 국민들이 깨어나는 중이라고 봅니다.
10년이내에 친일청산이 될거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