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었다.
텅 빈 공원, 벤치 끄트머리에 한 노인이 앉아있엇다.
군회색 윗도리에 회색바지, 많이 닳은 듯한 황토색 구두를 신은
그의 머리 위에서 새것 같은 체크무늬 모자가
온통 은발인 머리카락을 덮어주고 있었다.
노인은 시선은 공원 안이 아니라 밖을 향해 있었고,
그런 당신을 훔쳐보는 내 눈길 따위는 모른 채
그저 미동도 없이 허름한 양복을 걸친 등을
무방비 상태로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게 토요일은 '가족과 함께 하는 주말'이 아니었던 걸까,
내가 눈길을 거둘 떄까지 노인은 그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런 그의 등이 너무 초라해 보여
햇빛에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눈이 시려 왔다.
노인들은 소리내어 말하려 들지 않는다.
마치 바위처럼 굳어 버린 듯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고, 기다리며
목구멍 안에서 맴맴 돌듯 사람을 부른다.
그 노인 역시 누군가 공원 안으로 들어와
그가 앉은 벤치의 옆자리에 앉아
말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내 아버지도 숱이 적어지고, 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을 가리려 종종 모자를 쓰시지만,
모자로는 전부 감춰지질 않는다.
그들의 나이가, 그 하얀 머리카락이 결코 서러운 것이 되어선 안 된다.
더 이상은 '감추기'위해 모자를 쓰지 않기를,
하얗게 바래지는 모든 것에는 그것만으로도
고개 숙여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니까.
내 머리에도 새하얗게 눈이 내릴 때쯤
내 등이 초라하지 않게 따뜻하게 안아줄 한 사람쯤 있어주길,
소리내어 부르지 않아도 내 옆에 다가와 앉아주길 바래.
어느덧 칠순 고개 넘기고나면 시간의 흐름은 급류를 탄다.
일주일이 하루같다고 할까,
아무런 하는일도 없이,
문안 전화도 뜸뜸이 걸려 오다가
어느 날부터 인가 뚝 끊기고 만다.
이럴 때 내가 영락없는 노인임을 깨닫게된다.
노인이 되어봐야 노인 세계를 확연히 볼수 있다고 할까....
노인들의 삶도 가지가지이다
노선(老仙)이 있는가하면, 노학(老鶴)이 있고
노동(老童)이 있는가하면, 노옹(老翁)이 있고
노광(老狂)이 있는가하면, 노고(老孤)도 있고
노궁(老窮)이 있는가하면, 노추(老醜)도 있다.
노선(老仙)
늙어 가면서 신선처럼 사는사람 이다.
이들은 사랑도 미움도 놓아 버렸다.
성냄도 탐욕도 벗어 버렸다.
선도 악도 털어 버렸다.
삶에 아무런 걸림이 없다.
건너야할 피안도 없고
올라야할 천당도 없고
빠져버릴 지옥도 없다.
무심히 자연따라 돌아갈 뿐 이다.
노학(老鶴)
늙어서 학처럼 사는 것이다.
이들은 심신이 건강하고 여유가 있어
나라 안팎을 수시로 돌아 다니며
산천경계를 유람한다.
그러면서도 검소하여 천박하질 않다.
많은 벗들과 어울려 노닐며 베풀 줄 안다.
그래서 친구들로 부터 아낌을 받는다.
틈나는 대로 갈고 닦아 학술논문이며
문예 작품들을 펴내기도한다.
노동(老童)
늙어서 동심으로 돌아가
청소년 처럼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학의 평생 교육원이나 학원,
아니면 서원이나 노인 대학에 적을 걸어두고
못다한 공부를 한다.
시경 주역등 한문이며 서예며 정치 경제
상식이며 컴퓨터를 열심히 배운다.
수시로 여성 학우들과 어울려 여행도하고
노래며 춤도추고 즐거운 여생을 보낸다.
노옹(老翁)
문자 그대로 늙은이로 사는 사람이다.
집에서 손주들이나 봐주고
텅 빈집이나 지켜준다.
어쩌다 동네 노인정에 나가서
노인들과 화투나 치고 장기를 두기도 한다.
형편만 되면 따로 나와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늘 머리 속에 맴돈다.
노광(老狂)
미친사람처럼 사는 노인이다.
함량 미달에 능력은 부족하고
주변에 존경도 못받는 처지에
감투 욕심은 많아서 온갖 장을 도맡아 한다.
돈이 생기는 곳이라면 체면 불구하고
파리처럼 달라 붙는다.
권력의 끄나풀 이라도 잡아 보려고
늙은 몸을 이끌고
끊임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노고(老孤)
늙어가면서 아내를 잃고
외로운 삶을 보내는사람이다.
이십대의 아내는 애완동물들같이 마냥 귀엽기만 하다.
삼십대의 아내는 기호식품같다고 할까.
사십대의 아내는 어느덧 없어서는 안될 가재가 돼버렸다.
오십대가 되면 아내는 가보의 자리를 차지한다.
육십대의 아내는 지방 문화재 라고나 할까
그런데 칠십대가 되면 아내는 국보의 위치에 올라 존중을 받게된다.
그런 귀하고도 귀한 보물을 잃었으니
외롭고 쓸쓸할수 밖에....
노궁(老窮)
늙어서 수중에 돈 한푼 없는 사람이다.
아침 한술 뜨고 나면 집을 나와야 한다.
갈 곳이라면 공원 광장 뿐이다.
점심은 무료 급식소 에서 해결한다.
석양이 되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들어간다.
며느리 눈치 슬슬보며 밥술 좀 떠 넣고
골방에 들어가 한숨잔다.
사는게 괴롭다.
노추(老醜)
늙어서 추한 모습으로 사는 사람이다.
어쩌다 불치의 병을 얻어
다른 사람 도움 없이는 한시도 살수없는
못 죽어 생존하는 가련한 노인이다.
인생은 자기가 스스로 써온 시나리오에 따라
자신이 연출하는 자작극 이라할까.
나는 여태껏 어떤 내용의 각본을 창작해 왔을까.
이젠 고쳐 쓸수가없다.
희극이 되든 비극이 되든 아니면 해피 앤딩이건
미소 지으며 각본 대로 열심히 연출 할수밖에....
당신은 어떤 늙은이에 해당 합니까?
첫댓글 어찌 그리 내 모습과 같아 보일가 글월도 그렇고, 밑의 삶은 해당 되는것도 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