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로 승진하기
【류 근 홍】
글쎄다. 모두들 나이가 들어 집에서 할 일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저녁밥을 하기 싫거나, 또는 너무 집밥만 먹으니 식상들 한 건지?
저녁 중학교 동창 부부모임 번팅이다. 10팀중 7팀이나 참석했다. 번팅치고는 참석률이 70%이니 매우 우수하다. 그것도 부부가 함께 말이다. 백수(白手)들의 특성이 아닌가 싶다.
저녁 식사후 마나님들의 요청으로 커피숖에서 1시간여를 보냈다.
우리 친구들이 참 착하다. 지루한데도 그만 가자고 자기부인한테 먼저 말을 건네는 사람이 없다. 아니 하질 못하는 것이다. 휴대폰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모두가 나이는 먹고, 힘이 없는 티가 난다. 지난날 우리들의 젊은시절 모습에 견주니 허전한 헛웃음뿐이다. 그래 세월의 덕이다.
집까지 걸어서 30분정도인지라 집식구와 둘이 걷는다. 무심천 산책로가 생각보다 좋다. 매일 보는 무심천인지라 무관심했는데, 내 키보다도 큰 갈대사이로 산책하는 무심천이 정말 포근하고 정겹고 새롭다. 청주시민의 쉼터이자 건강보약인 무심천인데,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시하고 무심했나싶다. 갈대숲사이 잔바람이 간지럽다.
말없이 걸어가던 식구가 갑자기 불만성 투정반응이다. 묻기도 전에 답한다.
여자들 모두가 자기 손주 얘기만 하더란다. 두 명 말고는 다섯 친구들이 손주가 있으니, 그도 그럴만 하고 당연한 일임에도 좁은소견에 시샘과 화가 나고 불편했나보다. 이해한다.
딸아이가 시집간지 만 4년이 지났으니, 투정의 당연함에 탓을 하지는 못하겠다. 나 역시도 지난해부터 걱정이 4년의 세월무게보다도 더 무거웠으니 말이다.
혼자 떠드는 집사람과는 남인 듯 나 혼자 앞서간다. 옛날에 내가 보았던 전형적인 시골 노인부부들의 나들이 모습이다. 분명 풍경은 영화속의 한 장면이다. 아파트 정문옆 편의점에서 젊은 애엄마가 아기 손을 잡고 막 나온다.
애 엄마가 우리딸아이 또래인 듯해 보이니, 더 부럽고 귀엽고 보기가 좋다. 또 돌아보려는 순간 집식구가 거슬린다. 사실 집식구의 마음도 나와 같겠지마는...
집앞에 다다르니, 딸아이한테서 전화가 온다. 지금에 내 심정을 말하고 싶었지만, 아니다, 딸아이는 오죽하랴 싶다. 그저 부모 탓이고, 내 정성부족으로 돌리자.
5월 27일 딸아이가 저녁을 하잖다. 그날이 음력 4월 23일이니 내 생일이다. 밥값은 나더러 내라며 통보식 부탁을 하며 웃는다.
내 생일인줄을 알텐데 하는 생각에 서운함과 궁금함의 두마음이 겹친다.
그날 어머님도 모시고 내덕동의 유명 추어탕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딸아이 표정이 시무룩하고 무거워 보인다. 겁부터 앞서고 마치 내가 죄인으로 딸아이의 심판을 받는 기분이다. 딸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린다.
‘아빠, 지난번에 복대동 M 산부인과에서 임신확인을 받았어요. 그것도 일란성 쌍둥이래요.. ㅎ ㅎ ㅎ’순간 0.1초의 시간차도 없이 모두가 동시에‘뭐’한다.
생일선물치고는 정말 파격적이고, 상상초월의 대단한 만루홈런 선물이다. 순간 기쁨과 걱정이 마주친다. 저 체구에 쌍둥이라니 .. 아니다, 그것은 내 욕심일뿐, 신의 영역이고 축복이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무조건 감사할 뿐이다. 할머니가 손녀 딸아이를 살포시 안아주신다. 금방 대우가 달라진다. 내겐 감동의 황홀한 명장면이다. 내 눈물샘도 감정과 눈치는 있다. 어려서부터 몸이 너무 약해 항상 식구들의 애간장을 많이도 태웠는데 고맙고 장하구나.
그래 그동안의 전후사정을 듣고 나니 남모르는 딸네 부부의 노력에 미안하고 대견스럽다. 지금까지의 고생에 내 마음이 뭉클하며 싸하다. 오늘 내 생일은 아주 저만치 맨끝 뒷전이고, 갑자기 딸아이가 최고의 상전(上典)이다.
아, 그래 이제 나도 딸아이 결혼 5년만에 드디어 아버지에서 할아버지로 승진을 하는구나. 그것도 한꺼번에 2계급이나, 기쁘고 또 기쁘다 정말...
요즘 매일매일 딸과 아침에 카톡으로 노크하고, 오전은 문자대화, 오후에는 전화 통화를 한다. 아니 나는 딸보다는 외손주들과의 대화인 것이다.
젊은 노인네의 주책인줄 안다. 그래 나도 이제 외손주를 볼 노인네이다. 그것도 한 번에 두 명의 손주를 말이다. 요즘 매사가 즐겁고, 힘이 솟는다.
예전부터 나이들어 하는 자랑은 허물이나 흉이 아니란다. 나이들면 애가 된다더니, 그래 요즘 내가 천진난만 천방지축 좌충우돌이다. 그냥 나이든 젊은 사람의 멋으로 생각하자.
7월 13일에는 1,915미터인 지리산 천왕봉을 등정했다. 내가 어떻게 한거지?
젊어서도 하지 못한 일인데, 지리산 1,400미터에 위치한 법계사에 들려 감사와 축복의 기도를 드리고 혹시나 하는 우려속에 욕심을 내서 천왕봉으로 향했다. 정말 힘든 한발 한발이지만, 감사와 고마움과 축복에 취하다보니, 지리산 정상 천왕봉 나를 젊게 안아준다. 미래 할아버지의 의지와 용기로 모두를 이긴 기분이다. 아니 모두가 내 것인 기분이며, 이제는 모두를 다 할 수 있는 기분이다.
아침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임산부를 만났다. 자꾸 쳐다보며 궁금하다. 말을 건네보고도 싶은데, 혼자 머릿속에서 호기심의 숫자게임만 한다.
산모가 몇 살일까? 첫애인지? 지금 몇 개월이나 된건지?
화장끼 없는 얼굴이 무척 청초하며 예쁘다. 아니 갓난아이 얼굴이다.
어느덧 나는 나의 모든 생활이 임산부로 통하는 일상의 생활산모가 되어 버렸다.
그래, 약 3개월후 내가 할아버지로 정식 승진을 하는 그날까지는 지금에 아버지로서의 책무와 예비 할아버지의 연습에 최선을 다하자.
쌍둥이라니 어쩌면 모든 것을 두 배의 노력을 해야만 할 것 같구나. 왠지 나도 모르게 벌써부터 할아버지로서의 욕심이 점점더 커져만 간다.
그렇다면, 그렇게나 힘들게 다녀왔던, 지난 여름의 지리산 천왕봉을 한번 더 갔다 와야만 하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