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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6일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루카 7,1-10
가톨릭이 살길은 최대한 많이 베푸는 일인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지배하던 민족을 사랑해서 회당까지 지어주고 자기 하인을 위해 그 민족의 한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치유를 청합니다.
그가 종교는 다를지라도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하신 이유를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하늘로 오르는 한 마리의 새라면, 믿음과 희망은 사랑이라는 몸통을 띄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랑이 위로 오르려는 의지가 있을수록 믿음과 희망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한탄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사랑의 의지를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뜻도 됩니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왕비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질투를 느낀 이들은 남편 루트비히를 설득하여 그녀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기는 하였지만, 어느 날 관료들과 함께 그녀가 옷에 무언가 숨기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로트비히는 국고를 탕진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엘리사벳에게 옷에 무엇을 숨기고
나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옷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는 한겨울이었음에도ㅈ장미가 한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은 이렇게 기적을 부르고 기적은 그 당사자와 주위에 있는 이들의 믿음을 증가시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성녀가 하루는 문둥병자를 궁궐에 들였습니다.
이것을 본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며느리가 궁궐을 병으로 물들게 만들려고 한다고 일러바쳤습니다.
루트비히는 또 어쩔 수 없이 침대를 뒤져야 했습니다.
아내 엘리사벳이 간병하는 침대를 열어젖히자
그 안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인간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루트비히도 이제 가난한 이들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이제 둘은 남의 눈치 안 보고 병원도 세우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과연 사랑에 대한 의지엔 언제나 희망과 믿음의 두 날개가 달립니다. 알렉시스 카렐은 혈관을 꿰매는 기술로 노벨 의학상을 받은 저명한 의사입니다.
그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통에 신앙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2년, 카렐 박사의 친구인 한 의사가 리옹에서 루르드로 가는 기차로 이송되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돕도록 그를 초대했습니다.
그는 우정과 아픈 사람을 돕는 일을 거부할 수 없어서 기차에 탑승합니다.
그는 기차에서 급성 결핵성 복막염과 큰 딱딱한 덩어리가 있는 상당한 복부 팽창을 앓고 있는
마리 바이를 만납니다.
마리 바이는 반쯤 의식이 있었지만, 카렐은 루르드에 도착한 후, 아니면 그 전에 그녀가 매우 빨리 죽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기차에 탄 다른 의사들도 이 진단에 동의했습니다.
기차가 루르드에 도착했을 때, 마리는 동굴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세 개의 물병이 그녀의 팽창한 복부에 쏟아졌습니다.
첫 번째 부은 후, 그녀는 뜨거운 통증을 느꼈습니다.
두 번째 부은 후, 통증이 완화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은 후,ㅈ그녀는 기분 좋은 감각을 경험했습니다.
그녀의 배가 평평해지기 시작했고,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캐럴은 마리(다른 의사들과 함께) 뒤에 서서, 그녀의 복부에 물이 부어지는 동안 메모를 적었습니다.
“엄청나게 팽창하고 딱딱한 복부가 평평해지기 시작했고, 30분 이내에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몸에서 분비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는 침대에 앉아 저녁을 먹고(토하지 않고),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다음 날 옷을 입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기차를 타고, 딱딱한 벤치에 앉아, 상쾌한 기분으로 리옹에 도착했습니다.
캐럴은 여전히 그녀의 심리적, 신체적 상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4개월 동안
정신과 의사와 의사의 모니터링을 요청했습니다. 병이 나은 후 마리는 자선 자매회에 입회하여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았고, 약 35년을 더 살아 1937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카렐 박사는 노벨 의학상 수상자임에도 종교와 과학이 상반되지 않고 보완한다고 말해 의학과 과학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아픈 사람을 돕겠다는 작은 봉사의 마음에서 다시 불붙여졌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려고 합시다.
믿음과 희망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사랑의 의지가 전부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6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복음: 루카 7,1-1
더 너그럽고 관대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신앙인이 아님에도 넉넉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이웃을 보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 뵐 때마다 밀려오는 큰 부끄러움에 가슴을 치게 됩니다.
반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늘 부담이요 민폐로 각인된 사람도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듣고, 규칙적인 성사 생활과 기도 안에 살아가는 저희 같은 사제나 수도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걸려옵니다.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뒷골이 당겨옵니다.
이걸 지금 받아야 해, 말아야 해, 망설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대상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늘 나를 돌아보고 또 돌아볼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 백인대장은 정통 신앙을 자랑하는 유다인들로부터 멸시받고 무시당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행동, 언어와 믿음은 얼마나 탁월한 것이었던지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습니다.
열두 사도들도 받지 못하던 칭찬을 그가 받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마음에 쏙 든 이유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그는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의 치유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물건처럼 매매가 되고 있던 노예의 치유를 청하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백인 대장의 따뜻하고 너그러운 품성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욱 예수님을 감탄하게 만든 것이 있었는데, 백인대장의 겸손한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를 위해 걸어가고 계실 때, 그는 친구들을 보내어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백인대장이 얼마나 말을 예쁘게 하는지?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뿐만 아니라 지극히 겸손한 태도까지 겸비했으니, 극찬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보아하니 백인 대장은 이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완벽한 그리스도교 신자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 죽어가는 자신의 노예를 반드시 치유시켜주실 능력을 지닌 분임을 확신한 강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세례받은 세월이 길다 해서 절대 신앙의 깊이가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제나 수도자의 옷이 결코 예수님의 칭찬을 불러오는 표시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청이 나를 위한 것보다는 고통받는 이웃을 위한 청이 되어야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의 건설 같은 큰 것이어야겠습니다.
더 너그럽고 관대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강론>
(2024. 9. 16. 월)(루카 7,1-10)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루카 7,2-3).”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루카 7,6-10).”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만물을 지배하시는 주님,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라는 백인대장의 말은,
“저는 주님께서 말씀만으로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의사들은 여러 가지 약을 사용하거나 의술을 사용해서 병을 치료하지만,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병이라는 것’에게 “병자에게서 떠나라.” 라고 명령만 하시면 됩니다.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라는 말은, “주님께서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병’이 그 명령에 복종하고 떠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 백인대장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곧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입니다.
2) 뒤의 8장에,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바람과 물결을 고요하게 만드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곧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놀라워하며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에게 명령하시고 또 그것들이 이분께 복종하는가?’(루카 8,24-25)”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과 같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순서만 보면,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이 앞에 있고, 제자들의 질문이 뒤에 있지만, 복음서에 있는 이야기들의 순서가 꼭 시간적인 순서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들과 표징들을 체험하면서 줄곧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이야기는 그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 찾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 같은 것입니다.>
3)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이런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이 백인대장이 처음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간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은 것은 그 백인대장이 최초입니다.>
그 백인대장은 어떻게 해서 그 믿음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그 과정을 모릅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과 계시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경우에는 말씀과 체험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그 신앙에 다가갔고,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 신앙에 완전히 도달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리고 요한 사도는 그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4)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자기가 믿고 있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서학이나 신학 지식 같은 없어도 상관없는데, 최소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분, 부활하신 다음에는 우리 안에, 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 지금 여기에 현존하시는 분,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들은 결코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옛날이야기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나의 목숨과 인생을 모두 바쳐서 완성해야 할 ‘나의 삶’이고, ‘나의 신앙’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바로 여기서, 나에게(우리에게) 여러 가지 경로로 말씀하시고, 우리가 바치는 기도를 주의 깊게 듣고 계십니다.
“늘 나만 바라보시는 분, 늘 나를 걱정하시는 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