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노령연금 수급대상자
박래여
기초노령연금 수급대상자가 되었다. 서류를 작성해 넣고 나오는데 기분이 묘했다. 이제부터 어김없이 노인의 길이구나. 노령연금은 부부 합산 매달 수입이 288만원이 안 될 때 받는단다. 국민연금 노령연금 부부 다 합쳐봤다. 백만 원 남짓이다. 농촌에서는 텃밭 가꿔서 반찬거리 줄이고 생필품 값과 공공요금 줄이면 굶지는 않겠지만 도시 서민은 힘들겠다. 나는 ‘매달 백만 원이면 먹고 산다.’ 큰소리친다.
처음 농촌에 시집와서 현실을 깨달았을 때는 살아낼 수 있을까. 갈등도 많았다. 남매가 생기면서 살아내야 할 자리란 것을 인정했다. 젊었으니까 돈벌이 나갈 생각도 해 봤다. 시부모도 농부도 막았다. 현실을 너무 몰랐다는 자각도 했다. 직장 생활 할 때는 몰랐던 가난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늘 아랫돌 빼서 윗돌 공구는 살림에 허기가 졌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다. 덕분에 틈만 나면 글도 썼다. 원고료 한 푼이 아쉬웠다. 또한 부지런한 남편의 정으로 살았다. 묘한 것은 사람은 타고난 복대로 산다는 거다.
지난 삼십 몇 년의 세월을 내 복을 믿고 살았다. 농부는 표현에 서툴다. 빈말도 하지 않는다. 바를 정자로 소문났다. 행동으로 보여준다. 표현에는 서툴러도 진심을 다해 아껴주는 농부를 떨치고 나갈 자신이 없었다. 여자 팔자 뒤웅박이라 하지 않던가. 내가 복이 있으면 살아가면서 살림이 퍼지겠지. 여자에게 남편의 사랑은 살아갈 힘이다. 티격태격하다가도 돌아서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가능하다.
그렇게 삼십 몇 년을 살고 있다. 기초노령연금 수급자가 되면서 뒤를 돌아볼 여유도 생긴다. 부부가 성질 맞대고 기 세울 일도 없어졌다. 어우렁더우렁 살다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승을 떠날 것이다. ‘한 생애 잘 살다 간다.’며 흡족하게 떠날 수 있다면 무얼 더 바라겠나. 환갑 지나면서 나는 바깥활동을 거의 접고 살기에 농부는 말벗이고 친구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라고 살았던 사람이라 아내를 힘들게 하는 부분도 있지만 스스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가끔 부부 마주보며 서로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당신 덕에 엇박자 안 내고 살았네.’하면 ‘나 만나 고생 많았소.’한다. 나도 한 성질 있다. 농부가 엇박자를 냈다면 나도 같이 엇박자 내고도 남을 여자다. 둘 다 외골수라 한 길만 본다. 어릴 때 할머님은 툭하면 ‘가시나가 고집이 저리 세서 어따 써 묵노?’하셨다. 그 고집대로 농촌총각 만나 시부모님 모시고 살겠다고 했을 때 친정엄마는 울었다.
친정 부모님을 울게 만든 죄가 커서 부부 싸움을 해도 하소연 할 곳이 없었다. 엄마에게 못 살겠다고 하소연 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니가 택한 길이다. 엉가들이 그렇게 반대해도 했던 결혼이다. 니가 책임져야지. 애들 불쌍히 만들지 마라. 여자 팔자는 니 하기 나름이다. 0서방이 심성은 여리고 착한 사람이다.’그랬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배운 아가 농촌에 들어가 살겠다고 했을 때 알아봤다. 살기 싫으면 나오너라.’ 엄마의 말보다 아버지의 한 마디가 뼈에 사무쳤었다. 나를 애지중지하셨던 아버지였다.
그렇게 농촌 삶에 징 박혀 살다보니 기초노령연금 수급자가 되었다. 어려운 고개도 많았다. 고갯길에 서서 갈등하다가도 슬그머니 내려섰었다. 나름 현명하게 잘 살아왔다는 생각도 한다. 내 덕이기 보다 나를 품어주고 변함없이 아껴주는 농부 덕임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에게 남은 나날도 지금처럼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