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7. 주일 큐티
에스라 2:59 ~ 70
혼합주의에 대한 경계, 그리고 힘 자라는 대로
관찰 :
1) 조상이 뚜렷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기록
- 59절 ~ 60절.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밝힐 수 없었더라 그들은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모두 육백오십이 명이요” => 이 때 포로귀환에 동참하여 돌아온 이들 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섞여서 살았지만 실제 혈통상으로는 이방인이거나, 실제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자신들의 혈통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모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 61절.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의 한 사람을 아내로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을 따른 자라” => 제사장으로 알고 있던 이들 중에서도 그 근본이 분명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르실래는 압살롬의 반란 때에 다윗을 도왔던 사람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이는 그 바르실래의 사위로 바르실래 가문에 들어가 그 후사를 이은 사람입니다. 그의 진실한 혈통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들 조차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 무너져서 퇴락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들의 수고는 귀하고 복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혈통을 분명히 알 수 없는 이들에 대해서 구제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 62절.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 그 구제책을 제시할 때 일단은 이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을 순전하게 하고자 애쓰고 있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이 일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 63절. “방백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 이미 예수아라는 대제사장이 그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림과 둠밈”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사용했던 일종의 제비뽑기와 같은 도구였습니다. 스룹바벨은 그것을 되찾아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답을 얻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바르실래 자손 등의 혈통적 정통성을 하나님께 여쭙고 그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전에 “지성물을 먹지 말라”한 것은 제사장의 직무는 담당하면서 단순히 제물에 대한 분배만 제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사장 직무 전체에서 제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애쓰는 신앙의 본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포로에서 나온 이들을 개나 소나 다 성전에서 수종들고, 제사장시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지도자들의 결단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단을 이들은 따랐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이 후로 “우림과 둠밈”의 존재가 다시 거론되지 않은 것을 보면, 혈통상 분명하지 않은 자들을 구제하고자 했던 이런 시도는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1차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재물에 대한 총정리
- 64절 ~ 67절.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그 외에 남종과 여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 말이 칠백삼십육이요 노새가 이백사십오요 낙타가 사백삼십오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이었더라” => 은혜로 돌아온 이들에게 나름 상당한 물질적인 축복이 있었습니다. 온 회중의 숫자는 42,360명. 남종 + 여종 = 7337. 노래하는 남녀가 200. 말 736. 노새 245. 낙타 435. 나귀 6720.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만에 돌아오는 자들로서는,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노예처럼 끌려 갔던 이들이 70년 만에 돌아오는 것인데, 이렇게 풍성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물질적인 은혜가 임한 것임을 알 수 있는 수치입니다. 하나님은 포로에서 귀환한 이들이 유다로 돌아가서 살 수 있는 필요를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바벨론에서의 70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수치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전을 세우고자 하는 노력들
- 68절.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 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리되” =>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이들은 포로에서 귀환한 모든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 일부가 이 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 중에 자신에게 주어진 물질적인 풍요를 그냥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입을 씻은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 중심으로 드려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 69절. “힘 자라는 대로 공사하는 금고에 들이니 금이 육만 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백 벌이었더라” => 자신이 할 수 있는 정성을 최대한 하나님께 드린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금이 육만 천 다릭은 현재의 무게로 환산하면 512.4kg입니다. 현재 가치로 대략 환산해보면 약 653억 원(금 1g = 127,446원)정도 됩니다. 화폐의 가치는 시대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몇몇의 족장들이 하기에는 만만한 금액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당시 제사장의 옷은 매우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런 옷이 백 벌(느헤미야에서는 67벌로 나오는데, 에스라는 대략의 수치를, 느헤미야는 정확한 수치를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이나 드렸다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성전 제사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표현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 70절.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라” => 성전 예배를 위해서 수종드는 자들은 예루살렘과 기타 성읍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로 돌아온 이들이 모두 예루살렘에만 모여서 산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업을 가지고 실제 삶의 정황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과 실제가 반영되는 곳이지 꿈과 환상의 영역이 아닌 것입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이들은 유다로 돌아와서 각자의 땅으로 돌아가 그 땅을 경작하고, 가축을 치면서 삶을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가르침 :
1) 조상과 가문의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밝히지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신앙을 따라서 문명화되었던 페르시아의 수산궁을 버리고 퇴락한 예루살렘으로 떠나온 자들이었습니다. 비록 조상에 대한 분명한 족보는 알 수 없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결단을 내렸던 자들인 것입니다.
2) 포로 귀환 공동체에서는 부정한 방법으로 제사장이 된 자들에 대한 기록과 그들에 대한 조치를 분명하게 행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그냥, 잘, 열심히 있으니까, 바벨론에서 자신의 것들을 포기하기까지 하고 예루살렘으로 왔으니까, 예루살렘에서 제사장 직분을 그냥 줍시다~. 뭐, 이렇게 허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룹바벨 총독과 예수아 대제사장은 말씀을 기준과 근거로 해서 이들이 제사장 직분을 받을 수 없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의 직무를 정지시켰습니다. 그러나 혹시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것을 통해 제사장으로의 직분을 복직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두었습니다. 이것 역시 말씀대로 하는 행위입니다. 모든 판단과 행동의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려는 당대의 신앙 노선과 믿음의 행위입니다. 오직 말씀(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그리고 오직 은혜(sola gratia)입니다.
3)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기쁘게 헌신한 자들은 모두가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마음이 감동이 되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고자 예물을 기쁘게 드린 “어떤 족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힘자라는 대로” 헌물을 했습니다. 에스라는 이들이 자신의 “힘자라는 대로”, “기쁘게” 드렸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쁨의 예물을 힘을 다해 드리지 않는 자들의 비아냥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도리어 이들 몇몇 족장들은 하나님을 향한 정성을 다한 헌물로 인하여 이들이 얻을 세상적 유익은 없었습니다. “어떤 족장들”이라고 해서, 이름도 기록이 없으니 그들이 이것으로 당시의 사람들이나 후손들에게 자랑할 거리도 없었습니다. 그저 진실로 “기뻐서” 하나님께 자원함으로 드린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당시의 가난한 자신들의 백성들이나 바벨론에서 고생하는 친척들에게 그 재물을 쓰지 않고 성전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 예물에 대해 손가락질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힘이 자라는 대로” “기쁘게”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기쁨이 되는 행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에스라서에서는 그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기념책에는 남아서 영원히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적용 :
1)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는 이것 저것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하는 혼합주의적인 접근을 허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2) 이 시대는 “힘이 자라는 대로” 그렇게 하나님께 헌신하고 헌물을 하는 것을 눈치 봐야 하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는가 보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자세가 “기쁘게” 나아가는 자세가 견지된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지려 하는 자세가 아닌 겸손한 자세라면, 하나님을 위해 얼마를 헌금하고, 얼마나 많이 봉사하고 섬기던지 그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나 역시 이렇게 약간 삐딱한 상태로 생각하는 것을 통해 본문을 보는 것을 보면,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과 그 세상의 사람들을 너무 많이 의식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완전히 배재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나의 자세가 보다 더 하나님 중심으로 돌려져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나의 진심으로 나아가는 것과 그에 대한 후회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본문 당시의 사람들은 진실로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은혜로 나아가는 본을 보여주는데, 나의 모습은 여전히 부족하고 멀기만 합니다. 더 큰 믿음, 더 깊은 말씀, 더 큰 은혜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