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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희(50)씨는 바로 그 촉감의 문자를 목소리로 들려주는 사람이다. 그는 바쁜 직장일과 가사에도 불구하고 2002년부터 지금까지 4년째 서울 암사동 한국점자도서관에 거의 매일 출근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소리도서’ 자원봉사활동을 위해서다.
‘소리도서’란 전문 성우 또는 자원봉사자들이 시 소설 수필 문제집 신문 등의 내용을 읽고 카세트테이프나 CD에 녹음한 뒤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에게 무료로 배포하는 일종의 ‘소리로 듣는 책’이다. 시각장애인들이 점자(點字)책을 읽기위해선 고도의 훈련과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지만 소리도서는 듣는 것이 곧 읽는 것과 같기 때문에 훨씬 편리한 장점이 있다.
2002년 봄. 이근희씨는 우연히 TV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소리도서 만들기’ 자원봉사자 모집광고를 본 후 눈이 번쩍 뜨였다.
그날 이씨는 두 가지 가슴 떨리는 체험을 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수많은 시각장애인들이 헤아릴 수 없는 소외와 불평등 그리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 하나였다.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들 장애인의 이야기에 저는 눈이 먼 채로 살아왔기 때문이었죠. 더 놀라웠던 것은 시각장애인들의 엄청난 독서량이었습니다. 그들이 점자책이나 소리도서로 읽고 있는 책은 동·서양의 고전에서부터 신문, 교과서, 문제집 등 헤아릴 수 없이 다양했어요.”
그날 이씨는 손쉽게 책을 읽을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아름답고 의미 있는 책을 만들어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금껏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소리도서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 왔다. 이근희씨의 이런 열정이 통해서였을까. 이씨는 한국점자도서관에서 ‘설리번 선생님’으로 통한다. 맹농아자로서 1904년 하버드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헬런 켈러를 있게 한 그 설리번 선생님을 본 따 붙인 별명이다.
“한권의 소리도서를 만들고 나면 무어라 말하기 힘든 감정의 소용돌이에 가슴이 찡합니다. 시각장애인들과도 함께 읽고 함께 느끼며 영혼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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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각장애인들이 때때로 느끼는 숱한 고통과 번민이 한권의 소리불서로 치유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매번 녹음에 임하고 있다.
이씨가 4년 동안 제작한 소리도서는 줄잡아 100권이 넘는다. <오페라의 유령> <팡세> <공인중개사 문제집> 등등. 하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은 <해탈의 즐거움> <인연을 비껴가지 말라> <가보고 싶은 곳 머무르고 싶은 곳> 등을 비롯한 불교 관련 서적이다.
천주교나 개신교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책과 소리도서, 전자도서 등을 만들어 보급하는데 열을 올리지만 불교계는 아직 그렇지 못해 늘 아쉽다는 이씨.
“불자 시각장애인들을 위해서 불교서적이나 경전을 소리도서로 만들어 부처님 말씀을 소리로 전하고 싶습니다.”
이씨는 이런 꿈을 이루기 위해 조계종에 수차례 건의해봤지만 매번 허사였다.
이씨를 포함해 동서 3명 모두 불자라는 공통의 키워드를 가진 셋째 며느리인 이근희씨는 서울 불광사에 다니고 큰 동서는 부천 관음사, 둘째와 막내 동서는 서울 능인선원의 열혈 불자로 통한다. 이 중 둘째 며느리인 이향규(51)씨는 이씨의 설득과 소개로 올해 초부터 한국점자도서관에서 소리도서 만들기에 동참하고 있다.
이향규씨는 “이 일을 하기 전에는 장애인을 보면 괜히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앞서 피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그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차별하는 생각을 바꾸게 됐다”며 웃음 짓는다. 이근희씨 또한 “자원봉사와 금전적 지원도 좋지만 장애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그들을 보는 따뜻한 눈”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이근희씨의 소리도서 자원봉사가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한 집안의 아내, 엄마,며느리 그리고 한 사업체의 핵심 멤버로서의 1인4역을 하며 자원봉사를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때론 목감기에 걸려 편도선이 부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얼음 팩을 목에 대고 구연동화를 마무리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4년간 꾸준히 이씨를 지켜 본 육근해(45) 한국점자도서관장은 “대부분 자원봉사자들은 짧게는 1주일 길어야 6개월 하는 게 보통인데 이 선생님처럼 4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는 사람은 드물다”며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이 선생님의 말과 행동에서는 늘 진한 감동과 향기가 묻어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덧붙여 육관장은 “표준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소리도서 제작에 동참할 수 있으며 자원봉사자가 편한 시간대에 점자도서관을 방문해 소리도서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자원봉사에 비해 쉽게 할 수 있다”며 일반인들의 많은 참여를 호소한다.
이씨는 ‘이제는 정부에서 점자도서관 및 소리도서 등을 만들고 운영해야 할 때’라고 힘주어 말한다. 정부가 운영하는 도서관을 만들면 시각장애인이 더 양질의 문화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문화적 서비스가 너무 열악합니다.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책자도 만들고는 있지만 예산이 부족해 어려움이 많습니다. 점자책은 일반 책에 비해 10배의 제작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정부 지원으로 소리도서를 만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싼 값에 혜택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전문화된 서비스를 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계속 공부를 하고 있는 이씨. 제대로 된 소리도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굳은 의지 표현이기도하다. “1970년대에는 허허벌판에라도 점자도서관을 짓고 그곳에 점자책을 쌓는 일 자체가 목표였지만 이제는 달라져야죠. 그 도서관에 무엇을 채워 넣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보급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당신이 들고 있는 등불을 좀 더 높이 쳐들어 주십시오. 몸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의 앞길을 밝히기 위하여.’(헬런 켈러)
이근희씨가 소리도서를 녹음하는 녹음실 벽면에 붙어 있는 헬런 켈러의 명언처럼 오늘도 그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희망의 등불과 행복의 소리’를 밝히고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